Ⅰ. 서론(序論)
인간이 언제부터 화장을 시작했는지 그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자신을 보호할 목적이나 주술적 또는 신분과 계급의 표현수단으로 치장을 해 왔다는 기록을 보면, 화장의 기원이 인류의 역사와 더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동시에 아름다워지려는 심리적 욕망이 인간 본성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화장은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미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가치체계를 함께 고려함으로써 그에 반영된 정신적 기반과 미의식을 유추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화장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나라 전통화장의 시대별 경향과 종류를 알아보고자 한다. 연구의 범위는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개화기(開化基)까지 대상으로 하며, 이론적(理論的) 이해(理解)를 바탕으로 현존(現存)하는 유물(遺物)과 문헌(文獻)을 통해 우리 나라 전통 화장 문화의 전반적 이해와 더불어 이에 반영된 정신적 기반과 미의식(美意識)을 규명하고 현대 화장 문화의 방식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Ⅱ. 화장(化粧)의 이론적(理論的) 고찰(考察)
아름다움에는 객관적 절대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 주관의 보편적 일반 법칙이 따른다. 이에 미(美)에는 상대적•계층적•시대성•주관성이 서로 혼용되어 있다. 피부의 외관이나 색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에게 있어서 특유의 사회적 욕구라고 간주되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인간은 피부에 색을 칠하기도 하고 문신을 넣기도 하고 형태를 바꾸기도 한다.
화장이란 선천적 자신의 용모를 그 시대, 그 문화권 내에서 어떤 필요에 따라 선별•선호•선택된 미(美)의 개념에 부합하도록 수정, 보안해서 꾸미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화장품은 그러한 작업에 쓰이는 물품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화장을 백과사전에서 보면 '여러 가지 화장품을 기교적, 예술적으로 사용함으로서 피부를 미화시키고 용모를 다듬어서 매력을 돋구어 주기 위하여 행하는 미용술(美容術)이다' 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화장(化粧)'이란 외래어로 개화 이후부터 쓰여진 말이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장식(粧飾), 단장(丹粧), 야용(冶容)이고, 화장품이란 말도 장식품, 장렴, 장구였다. 물론 의미도 약간씩 달랐다. 야용은 얼굴 화장만을 가리키며, 단장은 몸단장까지 할 경우를 이름하며 일반적인 화장일 경우엔 장식이라 했다. 성장(盛裝)이란 여기에다 옷차림까지 화사하게 차려 입었을 때의 표현이다.
그밖에 농도에 따라 담장(淡粧)과 농장(濃粧)이 있었고, 여염집 여성들의 화장과 기생•무녀 등의 직업적인 의식화장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화장이나 화장품은 일본인들의 조어(造語)로서 개화기 이후 보편화된 용어는 단장(丹粧)이었다. 이것으로 화장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단장이 우리 고유의 화장 개념이었으며 단장은 다시 분단장(粉丹粧)과 칠보단장(七寶丹粧)으로 구분되어 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전통 화장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 넓은 의미의 화장으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며,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던 다양한 화장 용어를 의미에 따라 알맞게 사용해야 하지만 편의상 '화장, 화장품'이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Ⅲ. 화장(化粧)의 사적(史的) 고찰(考察)
1. 상고시대(上古時代)
우리 나라 화장의 사(史)는 단군신화에서 그 원시 화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인간으로 환생하려는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고 동굴에서 백일 동안 기원하라고 한 것은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이 '흰 사람'(알타이 계통의 최초 인간이 흰 사람이라는 신화가 있다)이었으므로 흰 피부로 변신하기 위한 주술이 아닌가 해석된다. 쑥과 마늘이 뛰어난 미백 미용 재료임을 생각할 때 일찍부터 한족이 이 용도를 알아냈던 것 같다. 한편, 북방에 거주했던 고대 읍루인들이 겨울에 몸에 돼지기름을 바른 것은 동상예방 등 피부의 연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며 채협총에서 출토된 채협칠협에서 나타나 있는 인물상을 살펴보면 마디가 정돈되어 있고 이마를 넓히기 위해 머리털을 뽑은 흔적이 있고. 눈썹은 굵고 진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어떤 종류의 미의식이 작용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용모를 가꾸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중국의 기록 위지(魏志)에 원시 화장이라고 볼 수 있는 문신(文身)이 마한과 진한의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기록과 조선명윤록(朝鮮明倫錄)에도 '문신의 발단은 원래 원시 화장이었으며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변천해 왔다'는 기록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문신은 원래 마(魔)로부터 몸을 보전하기 위한 제마(除魔) 효과의 의미가 컸다. 이러한 문신은 한국인 최초의 정형화(定型化)된 화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낙랑 고분에서 분(粉)이 출토되고 선사시대의 패총에서는 가공한 조개껍데기, 짐승의 어금니, 미석들이 발견 됐는데 원시 장신구(裝身具)로서 목걸이, 팔지, 가락지, 빗, 비녀, 거울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 시대 장식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나라 전통 화장 문화사를 고찰할 때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본다.
2. 삼국시대(三國時代)
삼국시대는 상고시대(上古時代)의 화장문화를 기반으로 외부로부터 유입된 한문화(漢文化)를 효과적으로 수용함으로서 화장문화를 융화 발전시킨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구하사(久下司)의 「화장(化粧)」에 '연지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추고천황(推古天皇) 18년(610) 9월 고구려의 승(僧) 담징이 그 종자를 가지고 왔다고 한 기록으로 고구려에서는 일본에 연지를 전파할 정도로 이미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수산리(修山理) 고분(古墳) 벽화(壁畵)의 귀부인상(貴婦人相)에도 뺨과 입술이 연지로 단장되어 있고 눈썹모양은 눈 길이 정도로 가늘면서 약간 둥근 형태를 하고 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무녀(巫女)와 악공(樂工)이 이마에 붉은 칠을 하였다는 곤지 풍습이 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한(漢)의 장건이 서성(西城)에서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종자를 가져 왔다하여 연지란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마호(馬鎬: 五代)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에 주가 홍람화(紅藍花)의 즙을 엉기게 하여 연지를 만들었는데 그 꽃이 연국(嚥國)에서 나는 것이어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연지 제조법으로서는 7월경 개화한 꽃잎이 붉어지자마자 새벽에 따서 절구에 찧고 베로 짜서 그늘진 곳에서 서서히 말려 가루를 내어 보관했다가 조금씩 개어 발랐다고 전하며, 또는 「날계란 두 개를 한 껍질 속에 넣고 저은 후 주사(朱砂) 두돈, 명반(明礬) 두돈을 몽글게 갈아 사향(麝香)을 조금 넣어 골고루 섞은 후 계란 껍질을 잘라서 약이 들어 있는 부분에 자른 껍질을 덮고 솜으로 단단히 싸 생초 주머니에 넣어 제즙(齊汁) 앉힌 솥 안의 솥뚜껑 위에 매달아 반나절을 끓이다가 꺼내 식힌 다음 빈 껍질은 버리고 엉겨있는 알맹이를 빼어서 몽글게 다시 빻으면 새빨갛게 되어 그것으로 연지 대신 부인들 뺨 위에 다 바르면 피부에 곱게 먹었다고 하면서 보기에도 밝고 윤기 있어 아주 좋았다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연지는 양 볼에 둥그렇게 발랐으며 중국 당나라 18대 희종, 소종에 이르러 입술에도 바르기 시작 당말(唐末)에는 이 풍속이 발달하여 그 명칭이 16가지나 되었다. 이러한 당(唐)의 입술 연지 풍습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통일신라시대이며 고려에 이르러 잠시 위축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다시 부활하였다. 「성호사설」의 연지조(嚥脂條)의 기록에 연지가 피부 연화제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추운 지방일수록 추위로부터 피부를 보호키 위해 연지를 많이 발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상•하류 여인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화장했었다고 추측된다.
백제와 신라의 화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 기록은 거의 없으나 중국 문헌 「수서(隋書)」에 백제 여인들의 화장을 「부인은 분대(粉黛)를 하지 않고 머리를 변발 하여 뒤로 늘어뜨린다고 했으며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 부녀의 화장을 분대하지 않고 미발(美髮)을 머리에 두르고 주채(珠綵)로서 장식하였다.」고 했다. 이것으로 백제나 신라의 화장문화가 크게 일반화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나 백제인의 화장은 일본이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 기술과 화장법을 배워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진보된 화장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이 추측된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게 문화를 발전시켰으면서도 화장면에서는 앞섰다. 귀천에 관계없이 여인들이 향낭을 차고 귓불을 뚫어 귀걸이를 달고 다녔을 뿐 아니라,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어 이마와 뺨, 입술에 바르고 백분 외에 산단(백합꽃의 붉은 수술)으로 색분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692년에 한 스님이 일본에서 연분을 만들어 주고 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7C경에 이미 연분을 발명했다는 것은 신라의 화장품 제조기술과 화장법이 일본보다 훨씬 앞섰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세계 화장품사에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史)」에 김유신의 누이 문희가 엷은 화장을 했다는 기록이나, 중국기록에 신라 여성은 화장이나 눈썹 그리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평면화장에 그쳤던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신라에서는 "아름다운 육체에는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 때문에 화랑 같은 남성들도 여성 못지 않게 화장을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의 화장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대체로 엷은 화장을 했으며 청정•청결이 강조되었다.
3.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 태조(太祖)는 신라의 정치제도와 문화전통을 계승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국교도 계속 불교로 받아들임으로서 화장문화 또한 전대(前代)의 발달된 문화가 그대로 이어졌다. 국초부터 중국의 기녀(妓女)제도를 본받아 교방(交坊)을 두는 등 기녀를 제도화시킴으로서 외형상 사치해졌다.
「고려사(高麗史) 절요(節要)」에 따르면 "부인(婦人)들이 몸치장에 있어 얼굴에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분만 바르고 연지를 쓰지 않으며 버들잎 같은 눈썹을 그렸다"고 하였다. 바로 전대(前代)까지 크게 유행했던 연지 바르는 풍속이 고려에 이르러 퇴색된 대신 방향 풍속이 크게 유행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의 귀부인들이 요대(腰帶)에 채조(采條)로 금(金)달고 금향낭을 찼는데 많은 것을 귀하게 여겼다"고 한 「고려도경」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기녀의 기본 화장은 백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는 분대였다. 이러한 차이는 고려시대의 화장이 기생의 분대화장과 여염집 부인들의 옅은 화장으로 이원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여인의 눈썹 화장에 있어 재래의 화장술로는 눈썹에 그리는 물감으로 검다 못하여 푸른 아청이나 진한 자줏빛의 대, 갈(褐) 등으로 눈썹을 그리되 그 모양으로 초생달과 같은 초생미, 꾀꼬리의 아미, 당미 등으로 다루는 그녀 나름의 생김새에 맞추거나 기호에 따라서 그렸다고 한다.
이밖에도 여성들의 화장 도구 자체가 고려 이전의 것보다 훨씬 발달된 상태이다. 이는 화장 수준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화장술과 화장품의 발달이 도구에까지 이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는 금, 은, 청동 등 금속제 외에 청자로 대량 제조된 화려하고 견고한 화장품 그릇이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화장합인 청자상자모합(靑瓷象瓷母盒) 은 신라의 토기 화장합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청자•백자 등의 용기는 어떤 재질의 용기보다 안전도에서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지분(脂粉)이라는 말과 분대라는 말이 쓰였는데 이것은 본래 연지와 백분, 백분과 눈썹 먹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 당시 화장품의 대종을 이루었으며 화장품을 총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화장의 의미를 대신하였다. 또한 고려말쯤 되어서는 「성호사설」에서는 "후세 부인들은 모두 얼굴에는 붉은 연지를 찍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낀다"라고 하여 기녀뿐만 아니라 부녀자까지도 널리 연지를 바르고 있음을 한심스러워 하고 있다. 즉 연지는 단주(丹柱)와 같은 기능을 하였던 것인데 후에는 화장할 때마다 연지를 발랐던 것이다. 서울에 있는 무녀와 관비를 남장으로 가장하여 배우화 하여 남장이라 부르면서 노래를 가르친 것으로 보아 남장에 따른 기녀 화장법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면약(面藥)을 사용하여 피부관리에 힘썼다. 「고려도경」에 송대(宋代) 정사(正使), 부사(副使), 도해관(都해관) 의 자리에 은제(銀製)의 면약고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면약은 덜어서 사용하기 용이한 액상의 안면용 화장품이었다.
모발관리면 에서 살펴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원했던 모발의 상태는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로 숱이 많아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발상태로 가꾸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보여준다. 「규합총서」에 「흑발장윤법(黑髮長潤法)」이라는 염모(染毛)가 행해졌다. "기름 두 되에 무르익은 오디(뽕나무 열매) 한 되를 병에 함께 넣어, 볕이 안 드는 첨하에 담아 두었다가 석 달만에 바르면 검게 칠한 듯하고 푸른 깻잎과 호도 껍질을 한데 달여 머리를 감으면 길고 검어진다 했으며 「증정현토산림경제」에서 천궁, 액리, 산호각 한 냥, 만평차, 영능, 향부자 각 단 돈을 명주로 만든 자루에 넣어 부순 후, 이것을 청량유에다 21일 동안 담구었다가 기름을 내서 하루에 3번 머리가 나지 않는 부위에 문지르면 머리털이 난다고 보았으며 또 술에다 담근 천초 양제를 머리 빠진 부위에 문질러도 머리가 나온다"로 했다. 이 밖에 민간에는 머리카락이 윤기 나고 빠지지 않는다고 하여 단오와 유두에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는 세시 풍속이 있었으며 머리카락이 용처럼 길어진다고 하여 정월 첫 용날인 상진일(上辰日)에 머리를 감았다. 이와 같은 모발관리는 모발에 대한 우리민족의 애착심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왕조 시대는 유교 원리가 생활의 규범이 되면서 아름다움도 외형미보다 행실미가 더 강조되었다. 조선시대의 남성들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여인상이 달랐는데, 소실이나 기생은 옥같이 흰 살결, 가는 눈썹, 복숭아 빛 뺨, 앵두 같은 입술, 구름을 연상케 하는 머리, 가는 허리를 소유한 팔등신 미인을 으뜸으로 여겼으며, 며느리나 아내로는 건강하고 성격이 원만하며 성실한 여인상을 원하였다. 따라서 깨끗한 얼굴이 부덕(婦德)의 상징으로 칭송 받고 반면에 화장은 부덕(不德)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기생과 궁녀, 소실 등 특수층만이 그 신분을 나타내는 의식화장을 행해 여염집 여인들의 화장과 구별되어 관습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장품 제조가 위축되거나 소홀하였던 것은 아니다.
안정복(1712-1791)이 번역한 소설 「여용국전(女容國傳)」에 여성의 화장을 국가 정치에 비유하여 권장하고 있으며, 등장하는 화장품과 화장도구가 20종(경대, 거울, 연지, 곤지, 분, 향, 면분, 밀기름, 비녀, 참기름, 모시실, 족집게, 얼레빗, 참빗, 양칫대, 비누, 세숫물, 휘건, 수건 등) 이나 된다. 「동계록(東溪록)」에 숙종 연간에 화장품 행상인 매분희(賣粉姬)가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조선시대의 화장품 생산판매는 상당한 규모화가 이루어졌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더욱이 일시적이기는 하나 궁중에 보색서(보색서)라는 화장품 전담 관청이 설치된 적도 있고, 또 임진왜란 직후 선조때 일본에서 발매된 '아침이슬'이라는 화장수 광고 문안에 '조선의 최신 제법으로 제조한…'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 우리 나라 화장품 기술은 매우 높았던 것 같다. 사대부가의 가정백과라 할 수 있는 「규합총서」에는 여러 가지 두발형태, 열 가지의 눈썹 그리는 법, 갖가지 입술연지 바르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기생이나 유녀가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색적이며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는 것이 눈썹이므로 눈썹의 형태를 매우 중요시 여겨 눈썹 화장에 신중했다는 사실은 아주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밖에도 피부를 희게 가꾸기 위해 물에 갠 분을 얼굴에 발랐다가 물로 씻어내는 분 세수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즐겨했다. 그러나 조선 여인들의 화장이 그 시대 남성들의 미적 요구에 부응한다는 의미가 강한 반면 양반 계층일수록 노동할 기회가 없으므로 희고 윤택한 피부는 고귀한 신분의 징표요 자랑거리였다. 남성화장은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상징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졌다. 화장수에 대한 기록으로는 「규합총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미안수(=화장수)는 얼굴, 목, 팔, 손등에 발라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동시 뒤이은 화장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액체상태의 화장품을 말한다. 분(粉) 바르기 전에 밑 화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미안수만 바르고 화장을 끝내는 예가 많았다. 미안수는 제조가 용이하여 자가 제조했으며 대체로 식물의 장과류에서 채집한 즙이다. 대표적으로 음력8월 보름쯤 박줄기나 수세미 덩굴(또는 오이, 수박, 토마토 즙을 화장수로 사용)을 지상 두치쯤에서 절단하여 뿌리 쪽 덩굴을 빈 병에 꽂아두면 수일동안 뿌리에서 뽑아 올린 물이 병에 차는데 이를 미안수라 하였으며, 이를 바르면 피부가 윤택해질 뿐만 아니라 손이 트는 데나 그것을 예방하는데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안수를 만드는 것 자체가 화장을 부덕(不德)시했던 풍속에 위배됨으로 법도 있는 가문에서는 수세미를 심지 않는 것이 가풍 이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계절에 따라 봄에는 창포 잎을 끓는 물에 우려내어서 피부에 윤기를 주었고, 여름에는 복숭아 잎을 끓는 물에 우려내어서 사용하면 귀신 쫓는 주력이 복숭아에 있다고 믿었으며 각종 전염병을 예방한다고 했다. 가을에는 오말유 잎을 우려 사용하면 지친 얼굴이나 여드름에 좋다고 하여 응달에 말린 무 잎을 삶아낸 물은 몸을 따뜻하게 하여 신경통에 좋다고 보았다. 겨울에는 유자 씨를 절구에 찧어 달인 물은 얼굴이 트지 않고 피부건조를 예방하며 당귀의 줄기와 잎을 말려서 가루로 만든 후 주머니에 담고 그것을 뜨거운 물에 띄워 놓고 세수하면 방향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이상에서 우리 나라 전통 화장수는 반드시 미용효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치료효과도 겸했다. 머릿기름은 머릿결을 아름답게 가꾸는 기름으로 두발유, 정발유라고도 하며,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사용하였다. 머릿기름의 재료로는 동백, 아주까리, 수유씨 기름이 보편적으로 쓰였는데 이는 바른 뒤 끈끈하지 않고 냄새가 약하며, 머릿결을 부드럽고 윤기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백기름은 접착성이 강하고 윤택하며 건조하지 않아 최근까지 이용되었으며, 수유 씨로 만든 머릿기름은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壁邪)의 기능을 가졌다. 이밖에도 들깨로 만든 임자유(荏子油), 목화씨, 살구 씨, 순무 씨, 배추 씨, 붉은 차조기 씨 기름과 호도의 푸른 껍질 등은 검고 윤택한 모발로 가꾸는데 사용되었으며, 밀납에 기름을 섞은 밀기름은 접착성이 강하여 살적 머리를 부착하는데 사용하였다.
조선조의 미용장(美容場)중 가장 효과적 이였던 것은 인삼과 인삼 잎을 달여 넣은 인삼탕으로 피부가 매끈하고 윤기가 흘렀다고 한다. 다음으로 효과적 이였던 것은 껍질 벗겨진 마늘을 목면 주머니에 담아 목욕물을 넣고 초를 약간 탄 마늘탕이었다. 이것은 피부를 윤기 있게 할뿐만 아니라 여드름을 치료하고 동상을 예방한다는 의료효과를 겸하고 있었다. 계절 따라 등장하는 식물이 효과적인 미용탕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나 계절을 초월하여 보편화된 미용탕은 난탕(蘭湯)이 있었다. 이는 목욕물에 난초를 달여 넣은 것으로 특히 몸에 은은한 향내를 나게 하는데 효과적 이였고, 당시의 세정료였던 조두(조두)의 날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자주 난탕에 목욕을 하는 것이 풍속처럼 되어 있었다.
모발관리로서 머리 감기는 한달에 한번씩 행해졌다. 이는 장발(長髮)인데다 수발(修髮)이 까다로워 한번 머리를 감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처마에 흐르는 빗물까지 받아 사용해야만 했던 당시로서 물의 소모량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도 여인들의 머리가 항상 정갈하게 보였던 것은 아침마다 머리를 빗기에 앞서 머리털에 기름을 바른 빗살이 촘촘한 참 빗으로 비듬과 먼지를 훑어 내렸기 때문이다. 이때의 머리는 밤에 감는 것이 풍속으로 되었다. 이는 아침에 상투를 틀거나 쪽을 지어 다른 사람 앞에 단정한 모습으로 나설 수 있기 때문이며, 이는 부분욕이라는 일상적인 단면에 그치지 않고 속설(俗說)과 관련된 명절 적인 관습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곧 단오날에는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부녀자들은 창포 뿌리로 비녀를 만들어 그 끝에 연지를 발라 꽂음으로서 액을 물리친다는 속신과, 유두(流頭: 음 6월 15일) 날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부터 동쪽에 있는 계곡이나 시내의 동류수(同流水)에 머리를 감는 풍속이 있다. 이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리 불길한 것을 씻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5. 개화기(開化期)
조선왕조와 서구의 이같은 화장문화를 비교해 볼 때 조선시대의 화장품 공업은 수공업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 외국의 화장품 제조기술을 배워들여야 한다는 입장으로 뒤바뀌었다. 이것은 비단 화장품 공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산업전반에 걸쳐 산업화의 싹이 돋아나는 시기에 일본의 상업자본이 조선왕조 후기 사회에 상륙하여 자생적 발전력을 짓밟은 데다 민족 자본의 성장을 완전 전멸시키려 했었던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나라 화장품이 최초로 기업화된 것은 1916년 박승직(현 두산그룹 회장 박용곤의 할아버지)이 만든 '박가분(朴家粉'이었다. 1922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문에 '화장계의 패왕', 경성 생산품 품평회 심사장 공학박사의 심사장 상을 수(受)한 박가분은 항상 바르시면(발르시면) 주근깨(죽은깨)와 여드름이 없어지오, 얼굴에 잡티가 없어져서 매우 고와집니다…박가분은 경향 각지 내외국인 신용 있는 포목점과 잡화 상점에서 판매하옵네다'라 하면서 박가분의 제조 및 발매처를 경성 연지동 270번지라고 밝혔다.
1922년 국산 화장품 제조 허가 제1호로 출범한 이 백분은 방물장수들에 의해 하루 5만 갑이나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박가분은 두께 8밀리미터 정도의 보루상자에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동그라미 속에 '박(朴)'이란 글자를 넣은 상표를 붙여 대량으로 생산하여 팔았다고 하니 우리 나라에서 화장품 제조를 기업화 한 최초의 제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 방식이 재래식이었고, 백분은 납 부작용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당시 외래품 선호바람이 있어 1937년 박가분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Ⅳ. 화장품(化粧品)의 유래(由來)와 원료(原料)
이러한 옛날의 화장품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으며, 또 어떠한 원료로 제조되었는지 살펴보자.
1. 쌀•보리가 주원료인 분백분
원시적인 분의 형태로서 오랫동안 사용된 백분은 분꽃의 열매를 곱게 빻은 것이나, 그전에는 칡가루•백토•황토•적토•고령토 등을 흙이나 돌가루(활석)를 가공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粉)의 글자가 '쌀(미:米)'의 '가루(분:分)'였음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쌀과 서속의 가루를 3대2로 배합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천연의 분은 부착력이 낮은 결점을 가지고 있어 이를 보안하기 위해 납 성분이 가미되었다. 연분은 반에 식초 기운을 씌워 만들었다. 즉 밑없는 말 통에 대고지로 밑을 얽어매고 얇은 납 조각을 넣은 뒤 진흙으로 만든다. 솥뚜껑을 뒤집어 식초를 넣고 그 납통을 얹은 후 보름 이상 숯불을 땐다. 이렇게 하면 납조각이 작아지면서 곁에 하얀 가루가 돋아나는데 이 하얀 가루인 납꽃을 물이나 기름에 잘 개면 부착력이 뛰어난 분이 된다. 하지만 이처럼 납성분이 함유된 분은 부착력이 우수한 반면, 납독 즉 화장품에 의한 부작용인 화장독을 유발했다.
그 이전의 사람들은 분발 색분인 산단(山丹)이라는 것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산단은 꽃이 붉은 백합의 꽃술을 따서 말려 누에고치 집에 묻혀 여인들이 볼에 토닥거리던 것을 말하는데, 지금의 화운데이션•콤팩트•크림 메이크업 등 모두가 이 백분 에서 진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 밑화장에 사용했던 꿀 찌꺼기
읍루인들이 피부에 부드러움을 주기 위해 돼지기름을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요즘의 크림과 흡사한 예는 드물다. 다만 팥 또는 녹두를 더운물에 비빈 거품으로 얼굴을 씻었으며, 꿀 찌꺼기(밀납)를 밑화장에 사용했고, 또 이를 얼굴에 골고루 펴서 영양을 흡수시킨 뒤 떼어내기도 했다. 또 복숭아꽃을 찧어 발라서 여드름을 치료하였으며, 콩•팥•면화•능수자의 꽃을 함께 섞어 바르거나 계란 노른자와 살구 씨를 으깨어 기미를 예방하기도 하였다.
3. 화장품 원료 제조에 쓰인 기름류
여러 가지 동물과 식물의 기름이 예로부터 화장품이나 그 원료로 사용되었는데 수유•동백•아주까리 기름은 그 자체가 바로 머릿기름이었으며, 참깨•살구 씨•목화씨•쌀•보리의 기름은 여러 화장품 원료의 용해 및 제조에 쓰였다. 예를 들면 연지•눈썹 먹을 기름에 개어 사용했으며 얼굴 마사지용 기름은 따로 있었다 한다. 하지만 예로부터 머릿결을 검고 윤기 나게 가꾸는데 주력했으므로, 거의가 머릿기름이었다. 이 기름들은 햇빛이나 온도 변화에 민감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토기 및 도자기류의 기름병이 기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4. 그을음으로 만든 눈썹
먹 눈썹은 그리기에 따라 얼굴이 판이하게 달라지므로 오랜 옛날부터 화장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시어머니의 눈총이 무서운 며느리가 부엌에서 버드나무가지 재로 눈썹을 그렸다고 한다. 굴참나무•너도밤나무의 목탄도 사용했고, 심에서 나오는 유연(油煙: 기름 연기)을 받아 평자 씨 기름을 개어서도 썼다. 그리고 목화의 자색 꽃을 태운 재를 유연에 묻혀 참기름에 이기기도 하고, 보리깜부기를 솔잎 태운 유연과 함께 개어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소위 요즘의 아이펜슬이다. 눈썹 먹(眉黑)을 처음에는 조금 붉은 기가 있는 검푸른 흙을 사용하다가 차츰 송연먹, 즉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숯먹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반죽먹이라고도 불렀다. 달개비 꽃잎을 태운 먹을 호마유로 갠 후 유연•홍(紅)•금가루를 넣고 솔로 눈썹을 그렸다. 먹을 만들 때에는 여름과 겨울철을 피하는 것이 좋다. 더울 때는 썩기 때문에 냄새가 나고 추울 때는 말리기가 어려우며, 바람 부는 날에 말리면 부스러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먹은 순수한 그을음을 흠뻑 찧은 다음에 아주 가는 체로 쳐서 아교풀로 개어 반죽하여 물푸레 나무껍질 속에 담근다. 그것을 계란 노른자를 뺀 흰자와 따로 갈은 주홍과 사향을 가늘게 쳐 함께 섞어 쇠절구에 넣고 질지 않고 보송보송하게 충분히 찧으면 된다.
5. 홍화즙을 말려서 만든 연지연지가 고안되기는 기원전 1150년경인 중궁 은나라 주왕 때라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5∼6세기경의 고분인 수산리 벽화와 쌍영총 벽화에 연지를 칠한 여인상이 그려져 있으므로 천4백여년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일본에 연지를 처음 전한 사람이 고구려 승 담징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화장은 화류계 여자나 하며 야한 화장은 정숙한 여자가 할 짓이 못된다는 전통적인 관념에 지배당했던 옛 여인네들도 입술연지만은 애용하였다. 그것은 입술 색깔이 푸른 여자는 음녀라는 이유에서였다. 본래 연지는 볼이나 이마에 칠한 것이자 루즈처럼 입술에 칠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술이 창백하면 시집을 못 간다는 관념 때문에 옛 처녀들은 은밀히 연지를 구해 입술에 칠하는 습속이 퍼지게 되었다. 특히 연지의 붉은 색을 잡귀가 꺼린다하여 소녀들의 이마와 입술, 뺨에 널리 이용되었다. 연지는 홍람화의 화즙이나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로 짙은 홍색의 광택이 있는 광물인 주사로 만들었는데, 주사로 연지를 만드는 기술은 연금술의 일부로 중국에서 모방해 가기도 하였다. 꽃연지를 만드는 원료인 홍화의 잎이나 줄기는 쇠지 않을 때 나물을 무쳐 먹거나 열매로 기름을 짜서 약용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연지 꽃은 얼굴을 예쁘게 한다는 속전 때문이다. 오뉴월에 피는 홍화의 꽃을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이슬이 마르기 전에 따 말린 다음, 물에 재었다가 베주머니에 넣어 약 짜듯이 짜서 즙을 낸다. 이 화즙을 체로 쳐서 응달에서 말려 고약처럼 굳힌다. 이것을 홍떡이라 부르며, 이 홍떡을 가루 내어 덜 붉은 노란 가루를 가려낸 다음 생나무 재나 짚을 태운 재로 홍색소를 분리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연지의 과장을 되풀이할수록 상품(上品)이 되며 두벌홍•세벌홍 등 질적인 차이가 생겨난다. 그런데 이처럼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얻어진 홍화 가루는 1만여 평의 밭에서 고작 70∼80킬로그램 정도 생산가능하며 연작이 불가능하여 값이 매우 비쌌다. 그런데 개화기에는 창(娼)과 기(妓)를 구별하는 표식으로 백분만 칠하면 창이요 꽃연지까지 칠하면 기로 알았다고 한다. 지금은 염료를 유분(油分)에 용해•분산 시켜 스틱 형태로 제조한 립스틱을 많은 여성들이 애용하고 있다.
6. 미운 딸 시집갈 때 주던 사향
원시 종교의식에서 사용하여 최고의 화장품으로 불리는 향료는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대중화되어 상•하류 남녀 구별 없이 널이 애용되었다. 향은 일반 가정에서 제사 때 망령을 부르는 매개물로도 사용되었으며, 화장료는 물론 성욕촉진제로서 방사(房事)에도 꽤 오래 이용되었다. 시체를 썩지 않게 하거나 청결하게 하는 방부용으로도 쓰였으며 장신구나 가구, 분•비누의 날 비린내를 가시기 위해서도 향료의 보급이 촉진되었다. 신라시대 여인들은 중국에서 고가로 사들인 향을 주머니에 넣고 패용 하였으나 당시의 향료는 대부분이 가루나 덩어리였다. 향료를 향기 짙은 꽃잎이나 줄기를 말려 분말로 만들어 그대로 사용하거나 도자기에 기름과 함께 재어 두었다가 손끝에 찍어 사용하였다. 이밖에 향료를 동물•광물에서도 추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사향을 최상으로 여겼다. 사향은 반추 동물인 사향노루 수컷의 복부에 있는 선(腺) 분비물로, 그 달걀 만한 크기의 향주머니 속에 평균 30∼60 그램 정도의 향료가 들어 있다고 한다. 이 향주머니를 절개하면 내부에 암갈색의 가루가 들어 있는데, 이 향주머니를 잘게 썰어 유지에 녹임으로서 향지(香脂)를 만들고 이 향지가 바로 향장료의 원료가 되는 것이다. 사향을 '침실의 비향'이라고 부르듯이 성욕을 흥분시키는 조정효과가 뛰어나다. 그래서 미운 딸이 시집갈 때면 소박을 면하게 하기 위해 사향낭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또 '싸고 싼 사향도 냄새가 난다'는 말과 같이 지속성이 대단히 강하다. 예 조상들은 향을 특히 신성하게 여겨 서약할 때나 독서를 할 때도 상용하는 등 화장에만 국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Ⅴ. 결론(結論)
화장이란 선천적인 자신의 용모를 화장품과 미용술로서 수정 보안해서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다. 또한 화장은 아름다움을 추구해서 자신의 용모를 돋보이고, 노화를 방지하려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장의 역사는 인류의 정착생활과 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화장술도 함께 진보되어 왔다고 할 것이다. 화장의 역사는 수발(修髮)의 역사와 때를 같이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이나 역사시대의 기록은 고대 여인(女人)의 부지런하고 아름다웠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인(女人)들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고대에는 모권제도가 있어 사회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시기도 있었으나 부권제도로 바뀌면서 지위는 낮아졌고 이조 오백년은 유교라는 굴레로 철저한 남존여비의 설음을 받기도 하였으나 언제나 여인(女人)들은 부지런하고 아름다웠다. 선사시대의 여인(女人)은 몸을 꾸미던 흔적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 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시대 고분벽화가 가장 구체적으로 그 시대 여인(女人)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유물은 역시 많지 않았다. 여기에 비(比)하면 신라시대의 고분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화려하였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하였다. 어느 고분에서나 출토되는 금제 귀걸이, 목걸이, 비취구옥 등으로 당시의 여인(女人)들이 화사하게 몸을 꾸몄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71년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의 유물은 백제 여인(女人)의 생활에 관한 새로운 지견을 가져다주었다.
고려시대에는 여인(女人)관계 유물이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전대에 비하면 다양해지고 있다. 고려청자의 분합이나 기름병 그 중에서도 동경과 청자 화장도구들은 전대에 없었던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같은 풍속화가의 작품을 통하여 여인(女人)들의 몸가짐과 마음씨를 짐작할 수 있게 되고 장도를 지니고 다니던 역대 여인들에게서 의연한 자세와 위엄을 느끼게 한다.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같은 여류화가를 통하여 곱고 아름다운 심정을 대할 수 있게도 된다.
어느 민족이든 성격과 생활양식에 의하여 짙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편으로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 변모 동화되기도 한다. 그러한 가운데 화장은 하나의 자연적 산물이 되어 갔다. 우리 나라 전통 피부,•모발,•화장문화는 개화기 이후 '신식화장품'의 수입과 더불어 그 의미를 차츰 상실해 왔으나, 현대에 와서 전통 화장품 원료를 현대 화장품에 응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에 한국 여성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부각시켜 미의 정형(定型)이 제시되어져야 하고 문화적•지리학적 환경에 맞는 한국 여성의 얼굴 유형에 맞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화장술과 향장료의 보급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1. 한국화장문화사 / 전완길(1987)
2. 한국과 서양의 화장문화사 / 청구문화사(2000)
3. 화장술의 역사 / 시공사(1998)
4. 미용미학과 미용문화사 /청구문화사(2001)
5. 우리 옛 여인들의 멋과 지혜 / 이성미 (2002)
6. 한국여성의 화장문화에 관한 연구 / 여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