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봉건제도란 용어는 중국의 고대사에서 군현제도에 대응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주로 서양의 feudalism의 역어(譯語)로서 사용되고 있다.
학문상 통일된 개념이 없어 학자에 따라 제각기 상이한 봉건제도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나, 다음과 같이 3가지 개념으로 대별할 수 있다.
〈법제사적 개념〉 봉주(封主)와 봉신(封臣) 간의 주종서약(主從誓約)이라는 신분관계와 거기 대응하는 봉토(封土)의 수수라는 물권(物權)관계와 불가분의 결합체제를 말한다. 서유럽에서는 대략 8, 9세기에서 13세기까지 해당한다.
〈사회경제사적 개념〉 노예제의 붕괴 후에 성립되어 자본주의에 앞서서 존재하였던 영주(領主)와 농노(農奴) 사이의 지배·예속관계가 기조를 이룬 생산체제를 말한다. 이 생산체제에서 영주와 농노는 토지를 매개로 봉건지대를 수취 ·수납하였다. 봉건지대는 부역지대에서 생산물지대 또는 화폐지대로 바뀌어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어 갔으나, 여전히 영주의 경제외적인 지배와 공동체의 규제가 농민을 극심하게 속박하였는데, 서유럽에서는 6, 7세기에서 18세기 시민혁명 때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사회유형으로서의 개념〉 국왕 또는 황제를 정점으로 계서제(階序制)를 이루고, 신분제의 견지, 외적 권위의 강조 또는 전통의 고수라는 형태로 개인역량의 발휘와 내면적 권위의 존중 등이 억압된 사회를 말한다. 봉건사회가 세계사적으로 어떤 뜻을 지니느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씨족제의 붕괴과정에 있는 사회가 보편적인 국가이념과 종교를 이용하여 새로운 정치형성을 도모해 나갈 때에 생긴 역사적 조건의 우연한 산물로 보고 있으며, 필연적인 한 단계라고는 하지 않는다. 관료 ·군대가 없고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 있어서는 주종관계라고 하는 인적 결합의 강화에 의한 통일이야말로 국가 통치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1. 개념형성
봉건제의 개념은 일반적으로는 프랑스에서 앙시앵 레짐(구제도) 하의 상황에서 생긴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봉건제(f暴odalit暴)’라는 용어 자체는 봉(封)을 뜻하는 라틴어fevum, feodum의 형용사형인 feodalis에서 유래한다. 이 말이 프랑스어 속에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초기에 이르러서인데, 처음에는 어원에 충실하게 봉의 법적 자격이나 봉에 부수되는 고유의 부담(負擔)을 뜻하는 법률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봉건제라는 말이 ‘하나의 문명 상태’를 나타낸 역사용어로서 최초로 사용된 것은 불랭빌리에 백작의 《프랑스 구정체의 역사》(1727)에서이다. 그는 샤를 루아소 등의 절대주의 이론가에 대항하여 귀족의 봉건적 제권리를 옹호하려는 의도에서, 주권(主權)의 세분화야말로 게르만인의 침입 후 출현한 봉건정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었다고 논하였다. 불랭빌리에의 저서의 영향을 받은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48)에서 프랑크왕권의 성립과 그 해체의 과정 속에서 확립된 봉건법은 역사적 산물로서, ‘세계에서 한 번 이상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주장하고, 또 봉건정체에서는 주권이 대소 무수의 봉(封), 즉 영주지배권으로 분할되어 있어서 아나르시(anarchie:무정부상태)에의 경향을 가진 ‘봉(封)의 법(法)’이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볼테르는 정복 위에 구축된 봉건제는 특수한 유럽적인 역사현상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도, 《여러 국민의 습속 ·정신론》(56)에서 그 역시, 카롤링거 왕조 붕괴에 이은 10, 11세기에 프랑스나 독일 및 이탈리아에서는 정치권력이 성채를 거점으로 한 ‘무수한 소폭군(小暴君)’에 의해 분할 소유되어, 원수(元首)도 경찰도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아나르시가 지배하는 ‘완전한 봉건정체’가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립적 영주지배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중세의 묵은 지배구조가 이미 소멸되어 단순한 역사적 추억으로 되어 있던 절대왕정시대에, 절대주의의 이상인 통일적 ·주권적 국가의 반전상(反轉像)으로서 주권의 세분화를 표지(標識)로 하는 봉건제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봉건제라는 말을 일반화하고, 혁명 전후의 상황으로 해서 새로운 봉건제의 개념이 정형화되어 갔다. 89년 8월 11일의 포고는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완전히 폐기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된 ‘봉건제’의 내용은 ‘봉건적 제권리’의 잔존물, 정확하게 말하면 토지영주제(土地領主制)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토지영주제야말로 봉건사회를 지탱하던 진정한 토대였다는 시각에서 귀족에 의한 농민의 정치적 ·사회적 지배기구로서의 봉건제 개념이 성립하게 되었다.
대체로 상술한 바와 같은 경과에 의해서 오늘날 관용되고 있는 3가지 봉건제의 개념의 원형이 성립되었었다. 그리고 그 후 19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의 사회학 ·문화사, 영국의 국민경제학, 독일의 중세국가논쟁을 통하여 봉건제의 개념은 다채로운 전개와 교류를 계속해 나갔다.
2. 사회구조
봉건사회에서 정치사회구조의 기축을 이루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봉(封), 즉 가신제(家臣制)였다. 한 개 또는 몇 개의 성채를 소유하는 성주(城主)는 성주지배권의 영주인 동시에 스스로 봉주로서 몇 사람의 기사(騎士)들로 구성된 봉신단(封臣團)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성주층도 각각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이 봉신(封臣)이 되어서, 대제후의 봉신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들 대제후 위에는 또한 국왕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기사를 최하층에 두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적인 계층서열이 형성되어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러나 봉건제는 그것 자체가 항상 아나르시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건사회가 하나의 정치질서로서 존속되어 나가기 위해서는 봉건제 외에 그 기초나 토대가 되는 비봉건적인 요소, 구체적으로는 각 층의 봉주가 자기의 봉신단에 대해 봉건법상의 의무의 충실한 이행을 강제하기에 족한 만큼의 봉주로서의 권위와 그 권위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직접적 ·가산적(家産的) 지배영역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현실의 봉건사회는 더욱이 부분적으로만의 봉건사회로서, 그 내부구조는 봉건제와 가산제(家産制)라는 이원적 원리에 의해서 편성되어 있었다. 먼저 대제후 지배권에 대해 살펴보면, ① 대제후의 직접적 지배하에서, 대관(代官)이라는 직명을 가진 관리가 관리하던 직할성주 지배권, ② 대제후의 봉신인 성주층의 지배하에 있는 수봉(授封)성주 지배권의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왕국 전체에 대해 살펴보면, 국왕의 지배권의 대상은 ① 국왕의 직할성주 지배권, ② 국왕의 직속신하인 성주층의 수봉성주 지배권, ③ 대제후 지배권의 셋으로 나누었는데, 그 중 ①과 ②가 결합되어 국왕직속의 대제후 지배권을 형성하였다.
그 위에 다시 봉건제와 가산제라는 이원적 조직원리는 성주 지배권의 내부구조에도 관철되어서, 직할 ·수봉 성주 지배권은 ① 대관과 성주의 직접적 지배영지, ② 그들의 봉신인 기사층(騎士層)의 영지 등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①은 한 개 내지 몇 개의 촌락규모를 가지는 많은 관할구로 나누어져, 각 구마다 대관과 성주의 권한을 대행하는 관리가 배치되었다. ②는 봉토 외에 일반적으로 기사 자신의 조상전래의 자유지(自由地)가 포함되었는데, 그 전체 규모는 대략 촌락 하나의 규모에 상당하였다.
기사층은 토지에 밀착된 생활을 하였던 촌락의 향사(鄕士)인데, 법적으로 귀족신분의 말단을 차지하였으나 사회적으로는 촌락 관리의 처지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기사와 촌락의 관리 사이에는 관리의 기사화나 기사의 관리화와 같은 신분 ·권력관계의 상호 교류가 자주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일한 교류관계가 성주와 대관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던 점으로 보아 봉건제와 가산제를 엄격하게 고정적 ·대립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며,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
3. 발전과정
3.1 유럽
서유럽을 중심으로 봉건제도의 발전과정을 보면, 그 법제사적 의미에서나 부역중심의 고전장원(古典莊園)의 성립 및 가톨릭적 통일문화권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유럽에서의 봉건제도는 대략 8,9세기의 카롤링거왕조의 프랑크 왕국에서 성립했다. 10세기~13세기가 그 전성기였으며, 13세기 이후 도시의 발달에 의한 화폐경제의 보급 ·지대형태의 변화 등에 의해서 점차 지배형태가 변화하였고, 국가제도의 변질을 초래하여 영역지배를 중심으로 한 왕권 또는 영방(領邦) 군주권이 강화됨으로써 인적 결합(人的結合) 관계의 요소가 더욱더 희박해져 붕괴하고 말았다.
봉건제도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공동의 모체에서 출발했는데도 프랑크 왕국의 해체 후 각국이 독자의 발전을 시작하자 지역에 따른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특색 있는 봉건체제를 나타냈다. 사회경제의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지만, 국가체제의 면에서는 달랐다.
① 독일:독일에서는 종족공국(種族公國)의 자생적 통합현상이 나타나서 그 통합 위에 형성된 신성로마제국은 처음부터 연방적 봉건국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오토 1세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의 교회정책, 즉 여러 공국(公國) 제후들의 분립적 세력에 대한 중화적(中和的) 세력으로서 교회의 세속적 세력을 배양하는 정책을 강행하였던 이유였다. 말하자면 독일에서 법(法)의 근원은 황제 또는 그의 관리에 의한 위로부터의 관직적(官職的) 명령 외에 촌락단체 ·가우(Gau) ·훈데르트샤프트(Hundertschaft) ·종족공국의 순서로 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자생적 지배권이 있었으며, 대소(大小) 귀족의 영지에도 위로부터 받은 봉토 외에 조상전래의 자유세습지가 많았으므로, 법의 이원주의가 일관하여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법제사적 의미의 봉건제는 독일에서는 예상 외로 관철되지 못하였다.
② 프랑스:독일의 경우와는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로마제국 말기로부터의 전통도 있어 영주와 민중과의 사이에는 부족적인 연결이 없었으며, 귀족의 대부분은 프랑크 왕실과의 관계에 의해서 발생했었다. 따라서 독일에서와 같은 자생적인 힘의 작용은 대단치 않았고, 노르만족의 침입에 대처할 수 있는 실력자에 의한 통일의 필요성이 크게 요구되었기 때문에 군웅할거의 봉건적 분열의 현실 속에서 실력에 의한 왕권 신장이 달성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0, 11세기의 프랑스는 분권적 봉건제의 대표적 형태를 취하여 ‘나의 봉신의 봉신은 나의 봉신이 아니다’라는 주종관계의 전형적 원칙이 수립되었고, ‘봉토 아닌 것이 없다’는 상황을 나타내었다. 프랑스 왕실은 12세기 말 이후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도시의 경제력과 결탁하여 정기금(定期金)을 가신(家臣)에게 수봉(授封)함으로써 봉건왕정의 실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③ 이탈리아:이탈리아에서는 남부의 고전고대 ·사라센 ·노르만적 제요소, 북부의 로마 ·랑고바르드 ·프랑크적 제요소 및 교회국가의 전통 등으로 인해 모자이크와도 같은 복잡성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비잔틴 제국의 영향하에 있던 제도시가 먼저 발달했기 때문에 봉건체제도 남부와 북부로 크게 분류된다. 남부에서는 노르만의 집권적 지배하에 봉건제후의 통치가 도시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였으며, 북부에서는 봉건제후나 가신군(家臣群)의 시민화와 도시에 의한 주변농촌의 정복으로 도시국가의 할거를 초래하고, 아울러 농민이 조기에 소작관계로 전화하여 전반적으로 일찍이 봉건체제를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④ 영국:앵글로 색슨 시대에 이미 봉건제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는 제제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봉건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1066년의 노르만인의 정복에 의해서이다. 즉 영국봉건제는 정복민족에 의해서 대륙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점이 처음부터 결정적인 특색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봉건법상의 예는 86년 솔즈베리의 서약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보유하고 다소의 세력이 있는 모든 사람이 윌리엄 1세에게 충성을 선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직속신하이거나 가신이거나를 막론하고 국왕과 일반민과의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 우선해서 일반적 신종(臣從)의 관계가 유지되었는데, 프랑스와는 정반대로 영국이 집권적 봉건제의 대표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두산세계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