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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제작 맡은 대장도감 소재지 밝힐 유력 증거 발견
선원사는 해인사 옮길 때의 경유지인 듯
세계기록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의 제작 장소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인천 강화군이 아니라 경남 남해군이었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 자료가 나왔다.
불교서지학자인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대장경 각 권 끝의 간행 기록(간기·刊記)을 모두 조사한 결과, 대장경을 제작한 장소로 기록된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分司) 대장도감'이 모두 동일한 장소인 남해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25일 밝혔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불교사)는 "대장경 제작을 맡았던 대장도감이 남해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라며 "우리 학계가 그동안 기초조사 없이 안일하게 대장경을 연구해 왔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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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만대장경 중 계묘년(1243년)에 만들어진 경판 ‘십주비파사론’ 권5의 간행 기록 부분. 파내고 새로 끼워넣은 부분에 ‘분사 대장도감’이란 글자가 있다(왼쪽 빨간 점선). 이 경판을 인쇄한 것(가운데)을 계묘년의 다른 간행 기록(오른쪽)과 비교하면 원래 ‘대장도감’이라고 된 부분을 ‘분사 대장도감’으로 수정했음을 알 수 있다(빨간선).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대장도감’은 경남 남해의 ‘분사 대장도감’과 같은 장소라는 의미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제공
특히 대장경 중 '종경록(宗鏡錄)' 권 27에 '정미세(1247년) 고려국 분사 남해 대장도감 개판'이란 간행 기록이 있는 것이 박 원장에 의해 발견돼, 남해 제작설이 힘을 얻게 됐다. 그러자 "강화 선원사에 대장도감이 있었고, 남해에 따로 '분사 대장도감'이 있었을 것"이라는 '강화·남해 공동 제작설'이 나왔다.
하지만 전체 대장경에 대한 실증 조사 결과 새로운 증거가 밝혀지게 됐다.
간행 기록에 ‘분사 대장도감’이라고 된 것은 모두 500권인데, 이 중에서 473권의 목판은 일부를 파내고 ‘분사 대장도감’이란 글자를 다시 새겨 끼워넣은 것이었다. 고려청자에서 쓰던 상감(象嵌)기법이었다. 이 글자를 넣은 부분엔 무엇이 있었을까? 계묘년(1243년)에 작성된 간행 기록 두 가지를 비교한 결과, 원래 ‘대장도감’이란 네 글자가 새겨졌던 부분에 ‘분사 대장도감’이란 여섯 글자가 빽빽하게 대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대장도감’과 남해의 ‘분사 대장도감’은 동일한 장소였다는 것이 된다. 대장도감 간행 목판과 분사 대장도감 간행 목판이 똑같은 경전에서 뒤섞여 있고, 같은 사람이 두 곳에서 새긴 것도 발견돼 왔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 셈이다. 박 원장은 “1243년 이후 제작에 참여한 정안의 공로를 강조하기 위해 ‘대장도감’을 ‘분사 대장도감’이란 이름으로 새로 불렀고, 이 때문에 대장경을 만든 직후 해당 시기의 목판에서 ‘대장도감’ 부분을 ‘분사 대장도감’으로 고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 남해에서 대장경을 제작했을까? 박 원장은 ▲당시 육지는 몽고의 기마병이 휩쓸던 때라 섬에서 대장경을 판각해야 했고 ▲남해도는 지리산 나무를 물길을 따라 보내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화 선원사는 대장경 제작이 끝난 뒤 강화성 서문 밖 판당으로 옮겼다가 조선 초 해인사로 다시 옮길 때 거쳤던 경유지라는 것이다. 박 원장은 27일 남해군에서 열리는 세미나에서 이 내용을 발표하며 대장경 간행 목록을 처음으로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