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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의 주거지>
박경찬 반상수 김동현 박정섭 김봉성
Ⅰ. 개 관
주거지란 고대 인류가 살던 모든 형태의 살림유적이라고 하며, 말 뜻대로하면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인류의 살림유적은 모두 집터라고 할 수 있으나 고고학에서는 특히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짓고 살던 집의 허물어진 터를 말하며 때로는 고대, 중세의 집터도 그 범주에 속한다.
우리나라 주거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주거지이다. 이 시대 주거지의 대부분은 자연동굴을 이용하여 사람이 살았던 동굴주거지이며, 그 밖에는 아직 확실한 예가 보고된 바 없다.
확실한 주거지는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부터이며,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의 주거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주거지의 대부분은 땅 위에서 적당한 모습과 크기로 상당한 깊이까지 파내려가서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고 그 속에 기둥을 세워 화덕이나 그 밖의 필요한 시설을 만들고 지붕을 덮은 수혈주거의 터이다.
Ⅱ. 움집의 분류
일반적으로 움집, 즉 수혈주거라 함은 집바닥을 지하에 둔 집을 말하며 지표상에서 적당한 넓이와 모양을 가진 구덩이를 파내어 필요한 시설을 하고 , 그 상부에 지붕을 덮은 것을 말한다. 이처럼 땅을 파내고 짓는 움집은 원래 추운 지방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구석기시대 이래 이용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움집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인 선사시대의 주거 형태를 가리키나 여기에서는 정확히 구별하여 움집이라 함은 지붕이 땅에 닿아 외부에서보면 벽이 전혀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키고 반움집이라 함은 지하의 벽외에 지상으로 올라오는 벽이 따로 있는 주거를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지금부터 집자리의 평면형태, 추정되는 지붕 형태,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이 세워졌던 기둥 구멍의 배치상태, 움-반움의 구분에 따라 움집을 분류하기로 하겠다.
1)원형평면
㉠ 원추무주움집;움을 판 다음 움 어깨선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서까래의 다른 한쪽 끝이 움 중앙부에서 모이게하여 묶으면 지붕 골격이 형성된다. 따라서 집이 폐기된 다음에는 움어깨선 주변에 서까래가 걸쳐있던 흔적이 남게 될 것이다.
㉡ 원추1주움집; 원추무주형에서 움 안 중앙에 기둥을 1개 세워 상부에 모인 서까래들을 받쳐주면 더욱 튼튼한 골격이 된다.
㉢ 원추4주움집; 보다 더 견고한 집을 짓기 위해서 움 중앙에 4개의 기둥을 사각형이 되도록 세우고 그 기둥위에는 4개의 들보를 4각형이 되도록 얹어 움어깨선과 이 들보를 연결하는 서까래를 걸치면 된다.
2)타원형평면
타원형 움의 규모가 작다면 평면형태만 다를뿐 원형 움집의 경우와 똑같은 방법으로 지붕을 만들게 되므로 세 가지 유형이 생긴다.
㉠ 타원추무주움집
㉡ 타원추1주움집
㉢ 타원추4주움집
그러나 규모가 커지면 다른 방법으로 지어야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타원추양사1렬움집
3)정방형평면
평면이 정방형일 경우 원형 움집의 경우와 같이 서까래를 중앙으로 모이게하여 지붕을 사각형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간편한 방법인데 그지붕을 지탱하는 방법역시 원형 움집의 경우와 같아서 움집의 경우 세가지와 반움집의 경우 두가지가 있다.
움집
㉠ 사각추무주움집
㉡ 사각추 1주움집
㉢ 사각추 4주움집
반움집
㉠ 사각추1주 반움집
㉡ 사각맞배2렬 반움집
4)장방형평면
평면이 장방형일 경우에는 추형 지부이 되기 어렵고 경사진 맞배지붕이 되는데 지붕을 지탱해주는 방법에는 방법에 따라 움집에서 세가지, 반움집에서는 네가지로 나누어 볼 수있다.
움집
㉠ 장방맞배 1렬움집
㉡ 장방맞배 3렬움집
㉢ 장방맞배 2열움집
반움집
㉠ 장방맞배 1렬반움집
㉡ 장방맞배 3렬반움집
㉢ 장방맞배 2렬반움집
㉣ 장방단면경사반움집
Ⅲ. 상대편년
형식분류의 기준으로 삼았던 움집의 구조는 세부적인 지역간의 차이와 용도상의 차이를 접어두면 건축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므로 구조에 따라 분류한 각 형식사이에는 시간적 선후 관계가 내재되어 있을 것이고 그러한 선후관계에 의해 상대편년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 평면형태의 차이점이다. 공간의 성격이 다른 것은 결국 그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다르다는 점과 상통하는 것으로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생활양식도 다양한 방향으로 변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거주하는 생활공간 역시 다양한 성격의 공간으로 변해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평면형태간의 선후관계는 원형이 가장 이른 시기이고 타원형, 정방형으로 이어지면 장방형이 늦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지붕의 형태의 차이점이다. 서까래를 중앙으로 모이게 하여 묶어주기만 하면 되는 추형이 가장 원시적인 지붕형태라고 할 수 있고 , 양쪽으로 경사진 맞배지붕은 추형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나중에 생긴 지붕형태라고 할수 있으며 우진각지붕은 맞배지붕이 변한 것이므로 더욱 늦은 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지붕을 지탱하는 내부구조의 차이점이다. 여기에는 기둥이 전혀 없는 무주형으로부터 1개의 1주형, 4개의 4주형, 여러개의 기둥이 열을 이룬 1열형, 2열형, 3열형이 있다. 이중 서까래끼리 서로 지탱함으로써 따로 내부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은 무주형이 그 지붕형태와 더불어 가장 원시적인 주조일 것이고 단 1개의 기둥으로 지붕을 받쳐주는 1주형이 무주형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이다. 4주형은 기둥사이를 들보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더욱 발전된 것이라고 하겠다. 기둥들이 열을 이룬 1,2,3열형은 용마루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무주,1주, 4주보다 훨씬 진보된 구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단순한 1열형이 가장 선행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2열형에 있어서는 기술상의 문제로 3열형보다는 발전된 기술을 필요로하기 때문에 1열형 다음3열형이고 2열형이다.
이상 움집 분류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을 각각 세분하여 보았다. 이들 하나하나 모든 차이점을 따지면 변화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에 거시적인 안목에서 전체적인 변화의 흐름을 파악 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움집과 반움집사이의 선후관계이며, 둘째 추형지붕과 맞배지붕간의 선후관계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 요소로 여겨지는 움집과 반움집의 차이와 지붕형태의 차이를 우선으로 하고 지붕을 받쳐주는 구조의 차이와 평면형태의 차이는 세부적인 변천을 살피는 데 이용하여 각형식간의 상대편년을 시도해 보면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즉 원,타원,정방형의 평면형태는 공존하면서 각각 추형의 지붕을 가진체 1주형을 거쳐 4주형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고 그 다음 단계에는 타원형평면에서 양면경사 지붕의 1열형이 발생한다. 이와 함께 장방형평면의 맞배 1열형이 등장하고 이어 3열형으로 발전한다. 마지막 단계로서 벽이 지상으로 올라온 반움집이 발생하게된다.
Ⅲ. 구석기시대의 주거지
구석기시대의 주거는 동굴주거 이외에 큰 바위틈 또는 바위그늘의 자연물을 이용한 것과 인공적으로 돌을 쌓아 만든 돌담그늘등의 주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동굴주거지 이외에는 아직 밝혀인 바 없다. 다만 공주 석장리유적에서 낮은 돌담과 기둥구멍 및 몇몇 돌덩어리가 발견되어 주거지라는 보고가 있었고, 웅기 굴포리 유적에서는 같은 층 위에 자연 냇돌 두세개씩 놓여 있는 것을 천막식 주거의 천막 가장자리를 눌렀던 돌이라고 보고된 바 있다
Ⅳ.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
1. 유적의 입지
대부분이 큰 하천의 연안(沿岸)또는 해안(海岸)에 가까운 저습지(低濕地)를 바라보는 모래구릉(砂丘) 또는 작은 구릉지의 경사면에 주거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만 토성리 유적만은 상당히 높은 토성 내부에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 유적도 바로 강 가에 자리잡았음은 다른 유적들과 공통되었다.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수혈주거지의 모습들은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을 크게 나누어 볼때 수혈의 평면형태가 원형 또는 원형적이며 화덕이 수혈 안 중앙에 만들어진 것과 , 수혈 평면이 정방형 또는 장방형이며, 화덕이 수혈 안 한 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만들어진 경우의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었다.
여기서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알아보도록 하겠다.
2. 전기 주거지의 특징
㉠ 수혈의 특징
수혈주거지의 수혈 평면형태는 원형 또는 모가 둥근 정방형 즉 원형적인 것이 대부분이며 드물게 타원형으로 된 것이 있으며, 수혈의 규모는 원형 수혈의 경우 직경이 4∼6m의 것이 많고, 모가 둥근 방형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하다. 수혈의 깊이는 아주 깊은 것은 1.5m나 되는 것(서포항 23호주거지)도 있으나 대부분이 60∼70cm정도이다. 수혈이 2중으로 만들어진 주거지도 발견되는 데, 즉 바깥 수혈은 좀 큰 장방형 수혈이며, 그 중앙에 일반적인 크기의 원형 수혈이 만들어져서 그 중앙에 화덕이 있는 특수한 형태의 주거지이다. 수혈바닥의 마감 처리는 수혈주거가 패총의 패각층이나 모래구릉의 모래층에 만들어 졌던 것이 많았기 때문에 나타난 형상인듯 하나 거의가 진흙 또는 진흙에 조개껍질이나 자갈을 섞은 흙을 깔고 굳게 다졌으며, 굳게 다진 위에서 불을 피워 더욱 굳게 만든 주거지도 적지 않았다.
㉡ 내부 시설
수혈주거 내부에는 취사(炊事)와 채난(採暖)을 위하여 주거생활에 필수적인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화덕(爐)이 있었고, 얼마간의 주거지는 곡물이나 작은 생활도구를 격납하기 위한 저장(貯藏)시설이 있었다. 또 이 시기의 주거지 가운데에는 주거 내에 출입하기 위한 출입시설이 유구(遺構)로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화덕은 거의가 수혈 중앙에 만들어 졌으며, 그 평면 모습은 원형 또는 타원형이며, 더러는 장방형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화덕의 규모는 직경 60∼90cm정도의 것이 많으며, 수혈 바닥을 얼마간 파고 그 가장자리에 길쭉한 돌을 돌려놓은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드물게 가장자리에 돌린 돌에다가 진흙을 발라놓은 경우(서포항 23호 주거지)도 있고, 진흙으로 둑같이 만들어 돌린 경우(궁산 5호주거지)도 있었으며, 전혀 그러한 시설을 하지 않고 수혈 바닥을 우묵하게 판 것(서포항 17호, 19호 주거지)도 있었다. 화덕이 주거지 중앙의 두 곳에 만들어 졌던 것(오산리 A2호와 A3호주거지)도 있는데 이는 매우 진보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주거 안으로 출입하기 위한 시설로서의 유구가 남아있던 주거지는 발견된 주거지의 약 반 수에서 확인되었다. 출입시설의 형식은 계단식과 경사로(傾斜路)식의 두 가지가 있었다. 계단식 출입시설의 경우는 수혈의 한쪽 벽에 붙어서 안쪽으로 한단 또는 두단의 발디딤 시설을 만든 것이고, 경사로식은 수혈 밖으로 반원형으로 돌출하여 비스듬히 경사지어 올라가서 지표에 도달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드물게 수혈 밖으로 돌출하여 단을 지어 계단식으로 만든 출입시설을 갖는 주거지(암사동 6호 주거지)도 있었다. 수혈 속에서 출입시설이 만들어진 위치는 동남쪽에서 서남쪽 사이에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그 출입구가 낮의 채광(採光)시설의 역할도 했었다. 수혈의 출입시설이 유구로서 남아 있지 않은 주거지에 있어서도 원래의 주거에는 당연히 주거에의 출입을 위한 출입국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수혈의 깊이가 얕아서 그러한 시설이 없어도 쉽게 출입할 수 있었거나 좀 큰 돌 또는 나무토막 같은 것을 발디딤으로 삼고 출입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수혈 깊이가 상당히 깊은 주거의 경우에는 가늘은 통나무를 사용하여 간단한 사다리식의 계단을 만들어서 사용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러한 출입시설은 주거가 폐허되면 일찍 부식되거나 이동하여 유구로 남기 어려운 것이다. 저장공은 수혈 바닥에 큰 투기항아리 밑을 수평으로 떼어낸 것을 거꾸로 묻어, 항아리 밑 잘린 부분이 수혈 바닥에서 얼마간 솟아나오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항아리는 구경이 50∼60cm 정도이고 밑을 떼어낸 나머지 부분의 높이도 50cm내외나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장공이 한 주거지에서 가장 많이 설치되고 있었던 것은 5개나 되었고(지탑리 1호주거지), 3개 설치되었던 것(지탑리 2호, 궁산 5호주거지)도 있었으며 1개뿐인 것도 있었다. 주거지에 저장공이 1개 만 있는 경우에는 꼭 화덕에 접하여 설치되어 있었고 2개 이상의 저장공이 있는 경우에도 그 가운데 1개는 꼭 화덕 곁에 만들어졌다. 이 화덕 곁의 저장공에는 곡물이나 취사용의 작은 도구들을 격납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그 밖의 자리에 설치된 저장공에는 고기잡이나 사냥 등의 옥외작업에 사용되는 도구들 가운데 소형의 도구들이 격납되고 있었다. 저장공이 없는 주거나 저장공이 적은 주거의 경우에도 주거생활을 영위하는데는 그 나름대로의 저장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큰 항아리를 수혈 안 적당한 곳에 세워놓아 곡물이나 소형도구들을 격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수혈 바닥에 기둥구멍 같이 깊지 않은 얕은 구멍들이 많이 나타난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구멍들은 밑이 둥글거나 뾰족한 항아리를 안전하게 세우기 위한 구멍들일 것이다(궁산 3호, 5호주거지). 그 밖에도 저장시설로는 주거와 분리되어 별도 움집으로 만들어진 경우(오산리 1호주거지)와 수혈에 붙어서 바깥으로 돌출한 감실형(龕室形) 저장시설(암사동 3호주거지)가 있다.
㉢ 기둥 배치
발견된 주거지의 대부분은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을 세우기 위한 기둥구멍이 수혈 내부에 뚫려있었다. 극히 드물게 수혈 바닥에 기둥을 세우기 위한 구멍이 파여지지 않고 수혈 바닥에 직접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지탑리 1호, 서포항19호, 오산리A3호, A7호주거지 등)와 원시적인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납작한 판석이나 깨어진 냇돌을 기둥 뿌리에 받쳐서 기둥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거지(오산리A4호, A9호주거지)가 있었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기둥구멍이 있는 주거지였다.
다만 암사동 A호, B호주거지는 기둥구멍을 찾지 못했으나 다른 주거지들에 기둥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주거지의 기둥구멍은 모래층에 흘러나가 흐트러져서 찾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기둥구멍은 대부분 수직으로 뚫린 구멍이었으나 더러는 경사지에 뚫린 구멍도 있었다(지탑리 3호, 궁산 1호, 2호주거지). 특히 궁산 1호주거지는 수혈의 벽 가를 돌아가면서 수혈 중앙을 향하여 경사진 구멍이 배치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구멍 상태에 따라 여기에 세워진 집은 수혈 바닥에 원추형(圓錐形)지붕을 설치한 집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집으로는 지붕에 내린 빗물이 모두 수혈 내부에 모이기 때문에 도저히 주거로서의 기능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수혈 벽 밑의 경사진 기둥구멍은 안쪽에 수직으로 세워진 기둥을 보강하기 위하여 경사지게 받치는 받침목(支柱)의 뿌리가 묻힌 구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수혈에서는 기둥구멍이 6∼10개 정도였으며 그것은 수혈 벽에서 얼마간 안으로 들어선 곳에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다. 기둥구멍의 크기는 대개의 경우 직경 10∼20cm이며 구멍이 깊이는 15cm이상이었다.
기둥을 수혈 벽에서 얼마간 떨어진 안쪽으로 둥글게 배치한 주거의 복원적인 모습은 기둥 위에 기둥을 서로 연결하는 도리(道里)를 걸고, 수혈 밖 지표에서 이 도리에 걸쳐 위로 뻗는 서까래를 걸고, 이들 서까래와 서까래사이를 가늘은 나무가지등으로 옆으로 엮으면서 산자로 삼고, 그 위에 새나 긴 풀 등으로 지붕을 잇게 함으로써 지표 위에 외관이 원추형인 집이 만들어진다. 또 이 집의 출입구는 바깥으로 작은 벽체를 좌 우 두 곳에서 돌출시켜 벽체 위에 작은 지붕을 달아서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서포항 3호, 17호주거지)
수혈 바닥에 유난히 크고 작은 구멍들이 많이 드러나는 주거지가 있는데 이들 구멍가운데 깊이가 5∼10cm 미만의 구멍들은 밑이 둥글거나 뾰족한 토기들을 안전하게 세워놓기 위한 구멍들이라고 생각되고 있다.(서포항 27호, 궁산 3호, 5호주거지)
3. 후기 주거지의 특징
㉠ 수혈의 형태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수혈주거지의 평면 모습은 지역적인 특징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경유적에서 타원형에 가까운 것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비교적 뚜렷한 정방형 또는 장방형 수혈이었다. 그 규모는 일변이 5m내외의 것이 많았으며 7m를 넘는 것도 드물게 있었다. 수혈의 깊이는 대부분이 40∼60cm 정도이며 역시 드물게 1m를 넘는 것도 있었으나 30cm 내외의 극히 얕은 수혈도 적지 않았다. 말하자면 전기에 속하는 수혈에 비하여 깊이가 얕은 수혈이 많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이하게 수혈이 2중으로 만들어진 주거지가 전기에 속하는 수혈 주거지에도 있었으나(암사동 6호주거지)이 시기 주거지 가운데도 한 주거지가 보고되고 있다.(남경 31호 주거지)수혈 바닥의 마감 처리는 전기의 경우와 같이 진흙을 깔고 다졌으며 더러는 그 위에 불을 파워 굳혔던 것도 있다. 그러나 바닥 마감을 특별한 방법을 택하지 않고 수혈이 만들어진 원토층 그대로 주거 바닥으로 삼는 것이 좀 많이 보인다.
㉡ 수혈 내부시설
수혈 내부에는 역시 주거생활에 필수적 시설인 화덕이 만들어진다. 화덕이 설치되는 위치는 얼마간은 수혈의 중앙에 만들어진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중앙에서 약간 한쪽으로 치우친 위치에 설치된다. 화덕의 평면형태는 거의가 원형이었으며 타원형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드물게 있고, 뚜렷한 장방형의 평면을 갖는 화덕은 보이지 않았다. 화덕의 규모는 직경 50∼60cm의 것이 많으며 수혈 바닥을 10cm정도 파고 만들었다.
화덕의 가장자리에는 역시 전기 주거지의 경우와 같이 돌을 돌려놓은 것이 많았으나 가장자리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것도 적지 않았다. 전기 주거지에는 한 주거지 안에 두곳의 화덕을 갖는 것(오산리A2호, A3호 주거지)이 있었으나 후기에 속하는 주거지 가운데는 뚜렷하게 두곳에 화덕을 설치한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혈주거지에 출입을 위한 시설이 유구로 남은 것 가운데 수혈의 한 벽면 중앙에서 밖으로 길게 돌출한 경사로를 갖는 것(토성리 8호 주거지)이 있고 장방형 수혈의 단면 벽면 전체가 경사지어 올라가서 지표에 도달하게 된 것(금탄리 11호 주거지) 및 벽면 일부가 끊어져 수혈 밖으로 돌출된 경사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남경12호주거지) 등이 보고되어 있으나, 그 밖의 대부분의 주거지는 출입시설이 유구로는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정방형 수혈의 세 벽 밑에는 기둥구멍이 배치되었으나 남은 한 벽 밑에 기둥구멍이 없는 사실을 들어 그 부분이 출입구였을 것이라고 추측된 것(서포항 16호 주거지)이 있었다. 그러나 수혈에 출입시설이 남아있지 않은 주거지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집의 출입구는 화덕에서 가장 먼 위치에 있는 벽면에 설치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전기 주거지인 서포항 3호, 지탑리 1호, 2호 및 후기에 속하는 남경 12호주거지 등에 의하여 짐작되는 것이다.
전기주거지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던 큰 항아리 밑을 따내고 수혈 바닥에 거꾸로 묻은 저장공이 이 시기 주거지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큰 항아리 밑 부분 약 10cm가량을 수혈 바닥에 묻어 저장공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금탄리 5호, 10호 주거지)가 있다. 이것은 수혈 바닥에 얕은 구멍을 파고 거기에 큰 항아리를 안전하게 세워놓고 저장공으로 사용한 경우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전기의 항아리를 거꾸로 묻은 고정식(固定式)저장공과 항아리를 세워놓은 가동식(可動式)저장공과의 중간적인 성격을 갖는 격납시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격납시설중 소형의 것으로는 밑바닥이 납작한 크고 작은 그릇을 수혈 안 적당한 곳에 놓고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많은 분량을 격납하기 위해서는 주거와는 별도로 독립된 시설을 여러 집이 공동으로 만들어서 사용했을 것이다. 이 시기 주거지 속에는 화덕 근처에 비교적 크고 윗면이 납작한 돌이 놓여 있는 것을 더러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것은 전기에 포함시킨 서포항 8호 주거지에서도 있었으나 후기 주거지 가운데서는 더욱 많이 나타나고 있다(서포항 7호, 16호, 22호, 호곡동 9호, 남경 31호 주거지 등). 이 돌들은 석기나 그 밖의 어떤 작업에 사용되는 작업대였을 것이다.
㉢ 기둥 배치
이 시기에 속하는 수혈주거지 바닥에 기둥구멍이 없는 것 즉, 수혈 바닥에 기둥을 직접 세웠거나 원시적인 초석을 놓아 그 위에 기둥을 세웠을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가 전기에 속하는 주거지들에 비하여 매우 많아3졌다. 또 바닥에 기둥구멍이 있는 경우에도 그 구멍들이 모두 수직으로 파진 구멍이며 전기에 속하는 주거지들에 비하여 매우 많아 졌다. 또 바닥에 기둥구멍이 있는 경우에도 그 구멍들이 모두 수직으로 파인 구멍이며 전기에 속하는 주거지에서 간혹 볼 수 있었던 주거지 중앙을 향하여 경사지게 파인 구멍은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수직으로 세워진 기둥에 보강용 버팀목을 걸고 지붕을 지탱하게 하는 일이 없어진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만큼 가구(架構)기술이 발전된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수혈 바닥에 기둥 구멍이 드러난 경우에 있어서도, 전기에 속하는 주거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구멍의 배치 형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수혈 안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둥글게 기둥구멍이 배치된 전기 주거지와는 달리 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수혈의 벽(장방형 수혈의 경우에는 긴 벽)에 평행하여 기둥구멍이 줄을 지어 배치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배치된 양상은 다양하여 및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즉 수혈 벽가에 붙어서 작은 기둥구멍들이 비교적 짧은 간격을 두고 배치된 경우(서포항 16호, 용연리 1호, 2호, 금탄리 11호 주거지)와 수혈 안쪽에 기둥구멍이 두 줄로 배치된 것(호곡동 2호 주거지), 또는 세줄로 배치된 것(서포항 7호, 22호 호곡동 3호 주거지), 그리고 네 줄로 배치된 것(호곡동 9호 주거지)등 여러 가지 형태였다.
이와 같은 기둥구멍의 배치 양상은 주거를 만드는 가구 방법이 전기 주거지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지붕 정상(頂上)이 집 중앙 한 곳에 있어 거기서 서까래가 마치 우산 뼈 모양으로 방사상(方射狀)으로 가구되는 원시적인 기법을 벗어나 기둥과 도리 이외에 보, 대공, 마루도리가 가구되며 지붕 모양도 맞배지붕이나 우진각지붕이 되는 매우 발전된 가구 기법을 사용하여 집을 만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사실은 비록 집을 짓는 목재(木材)들이 전혀 가공(加工)되지 않은 원목(原木)을 사용하고, 목재들을 잇고 짜 올리는데는 원시적인 기법 즉 새끼나 넝쿨로 얽어매는 방법으로 만들기는 하나 지붕 가구의 원리는 삼국시대에 성행된 나무를 깎고 다듬어서 이음새를 만들고 촉이나 홈을 만들어서 건축부재(建築部材)를 짜 올려 지붕을 기와로 잇는 매우 발달된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 기둥의 열(列)이 세 줄 또는 다섯 줄 등 홀수 열일 때는 수혈의 중축선(中軸線)에 기둥 열이 서게 되며 그 기둥들이 마루도리를 직접 지탱하는 구조로 가구(架構)되기도 할 것이나 기둥 열이 두 줄 또는 네줄 등 짝수의 주열일 경우에는 수혈 중축선에는 기둥이 서지 않고 중앙부에 세워진 두 줄의 기둥 위에 보를 걸고 보 중앙에 대공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치게 하는 옥개(屋蓋) 가구법이 사용된다. 지붕 가구 기법의 발전 이외에도 가늘은 기둥을 수혈 벽 바로 안쪽에 촘촘히 세워지는 것은 흙으로 된 수혈의 벽 표면을 기둥을 지주(支柱)로 삼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가늘은 나무를 사용하여 골재(骨材)로 삼고 긴 풀이나 새 등으로 덮었을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것은 주거공간 내부의 마감방법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혈 벽가의 기둥으로 전기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수혈 벽에 따라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나무와 풀들로 엮어진 벽체가 생기게 되며 따라서 전기 주거에서는 지붕 하중(荷重)의 대부분을 서까래가 받았던 것이 이 가구에서는 벽가의 기둥이 받치게 되며 결과적으로 지붕 치마 끝이 땅에서 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시기의 주거 가운데서도 지붕 처마가 땅에서 얼마간 떨어진 것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4. 전기와 후기 주거지의 비교
※화덕 근처나 수혈 한쪽 모서리에 극히 드물게 볼 수 있던 윗면이 편탄한 작업대로 사용된 큰 돌이 후기 주거지에서는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게 된 점도 역시 전기와 후기 주거지의 차이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Ⅴ.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
1.청동기 시대의 집터
청동기 시대의 집터는 거의 대부분 강언저리나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에 있으며, 드물게 보령 교성리처럼 산꼭대기에 있는 경우도 있다. 신석기 시대보다는 크고, 비교적 많은 집들이 한 곳에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마을은 바람을 막아주는 작은 산을 뒤에 두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있어, 살림에 필요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 오늘날의 자연적인 마을과 아주 비슷하다. 그리고 가끔씩은 금굴이나 상시유적처럼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이용하여 살림을 꾸리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집은 주로 움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움의 깊이는 신석기시대보다 훨씬 얕고 일부에서는 반지상가옥으로 발전하였다. 집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네모꼴(方形)이나 긴 네모꼴(長方形)인데, 크기가 네모꼴은 한 변의 길이가 5m쯤 되며, 긴 네모꼴은 5×7m 정도이다. 파주 옥산리 집터(크기 3.7×15.7m)는 청동기시대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큰 편에 속한다. 이렇게 큰 집은 대가족이 공동으로 살던 집이거나, 살림에 필요한 연모를 만들던 제작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산 휴암리, 청원 내수리, 부여 송국리, 광주 송암동, 거창 대야리 등의 유적에서는 드물게 둥근꼴의 움집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런 둥근꼴의 움집은 집 안 가운데 쪽을 긴 타원형으로 조금 판 다음 2개의 기둥을 세웠으며, 화덕자리는 없고 저장구덩이가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집터에서는 기둥을 세우기 위하여 팠던 기둥구멍과 화덕자리, 물길, 저장구덩이가 발견되고 있다. 기둥구멍은 집터의 가운데 쪽에 있는 것을 중심으로 집의 어깨선 안팎을 돌아가면서 만들어 놓았는데, 승주 곡천유적에서는 기둥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버팀나무의 구멍자리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집터 안의 화덕자리는 강자갈로 만들거나, 흙으로 둑을 쌓거나, 맨땅을 조금 움푹하게 파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둥근꼴의 집터에서와 같이 화덕자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 집의 바닥은 맨땅을 그대로 다지기도 하고, 찰흙을 4∼5cm 두께
로 깐 다음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것도 있는데, 바닥에는 짚이나 풀을 엮어서 깔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평양 남경유적에서는 갈대를 엮어서 깔았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청동기시대의 움집은 벽체와 지붕이 나누어져, 벽체가 밖에서 보이도록 되어있다. 이렇게 되자 용마루와 도리 등 서까래를 걸 수 있는 천정시설이 필요하며, 천정과 벽이 높아져 집의 구조가 복잡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때의 사람들은 신석기시대의 집보다 집 안을 밝게 하였으며, 활용할 수 있는 면적도 훨씬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집의 또 다른 특징은 한 곳에 10여 채에서 100여 채 이상의 집들이 모여 취락을 이루는 것인데, 송국리 흔암리 휴암리 금탄리 석탄리 범의구석 유적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석탄리 유적에서는 약 10만㎡의 범위에서 100여 채가 넘는 집터가 발굴되었고, 범의구석 유적에서는 약1,200㎡에 몇 겹으로 서로 겹친 50여 채의 집터가 발견되어, 큰 마을을 이루면서 한 곳에 모여 지속적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검단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환호를 포함한 100여기의 조거지가 조사되었다.
2.청동기시대 주거지의 특징
(1)집터의 짜임새
1)평면형태
발굴된 집터의 평면형태는 원형, 방형, 타원형,장방형, 부정형등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집터의 평면 중 장방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원형과 타원형은 세죽리 18 호를 제외하면, 북부, 남부지방에서 분포하고 있음을 알수있어 이 지역에서의 특징으로 해석된다. 특히 송국리 집터중에서 원형이 반수이상 차지하고 있음이 주목되는데 장방형의 집터는 원형 집터와 시기적으로 차이가 없는점, 화덕자리가 없고 움의 깊이도 얕으면서 뚜렷한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는점, 불에 탄 쌀과 볍씨 자국 토기가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사람이 살았던 집보다는 독립된 저장고 시설로 보고 있다.
2)움의 깊이
청동기시대 움깊이를 보면 평균 53cm로 나타나있는데 반해 신석기시대는 평균82.3cm으로 움깊이가 청동기시대에 비해 30cm정도 낮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움깊이가 10cm미만이것을 보면 사실상 움이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어 지상가옥으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지역별 평균 움깊이를 보면 동북지방이 71.8cm 서북지방이 44.6cm, 중부지방이 46cm 남부지방이 49.6cm가 나타나고 있어 타 지역에 비해 동북지방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을 알수있는데 이는 추운 겨울철에 기온 유지를 위한 것으로 해석되며 집터가 갖는 특징인 것 같다.
3)기둥
청동기시대의 기둥시설의 특징은 주춧돌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기둥이 땅속에 묻히지 않아 기둥의 부식을 막아주고, 기둥이 내려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에 무거운 지붕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항구성을 지니고 , 기둥이 줄어들어 공간을 보다 넓게 확보해 줄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주춧돌은 다듬은 흔적이 없고 기둥을 세우기에 적당한 자연돌을 그냥 사용했는 데 북부지역에서만 발견되어 이 지역에서 건축기술이 발달된 것을 알 수 있고 또 어느정도 바닥위에 직접 기둥을 세운후 집을 지었다. 바닥시설은 진흙을 깔거나 , 다지거나, 불에 구워 딱딱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서 단단히 했다. 움집과 반움집의 구분이 지붕 서까래가 지표에 묻힌 여부인 것을 보면 기둥배열이 장축이 벽에서 붙은 경우는 반움집으로 볼수있으며 벽에서 떨어진 경우는 벽가의 기둥위의 서까래가 지표에 묻힌 움집으로 볼 수 있다. 기둥구멍의 배열은 벽 가에 있는 것, 벽가에 있으면서 중앙에 중심기둥1개 , 중앙에 기둥구멍이 1~5줄인 것이 있다. 특히 범의구석이나 오동 집터에서는 거의 모두가 4줄의 기둥구멍을 갖고 있는 점으로 보아 동북지역에서 갖는 건축상의 특징이며 가장 발달된 건축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송국리 원형 집터에서 나온 형태인 집터 중앙에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양 끝에 기둥구멍을 1개씩 판 형태는 해미의 방형, 타원형의 집터, 송암동의 타원형 집터에서 발견되는데 이런 형태는 현재 마한의 영역 안에서 발견된 집터라 보고 있는데 이 지방이 갖는 독특한 문화 형태인 것으로 해석된다.
4)면적
청동기시대에는 집터가 대형화되고 평지 지형에서는 집터가 많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히 알수 없으나 대체로 골고루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2)집터 내부시설
1) 화덕자리
불의 용도는 첫째 음식물 요리, 둘째 열을 이용한 난방, 셋째 조명시설, 넷째 연모제작, 다섯째로는 식량획득 수단이 이었는데 이 글에서는 주로 음식물 요리와 난방시설이라는 면에서 살펴보겠다. 한 집터에서 화덕자리가 2개이상 있는 곳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집터가 커짐에 따라 불을 많이 사용했을 것과 화덕자리 시설이 다양하게 나오는 것을 통해 화덕자리의 용도가 분화된 점을 그 이유로 들수있겠다. 대부분의 화덕자리가 집터 중앙에 있지 않고 한 곳에 치우쳐서 나와 그만큼 활용할 수 있는 집터 공간이 상대적으로 넓어졌음을 나타내준다. 즉 생활 양상이 다양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북지역에서 화덕자리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이곳의 기후가 겨울에는 추었기 때문에 불을 많이 필요로 했던 것으로 해석되며, 중부지역과 남부지역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지 않은 곳에서는 더운 여름철에는 음식물 요리에 반드시 불을 필요로 하므로 야외에 화덕자리를 설치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야외 화덕자리는 추운 겨울철에 불 없이 지내기가 어려웠을 것을 생각하면 여름철의 집터일 가능성도 전연 배제할 수 없다. 화덕시설을 보면 돌돌린 형태, 바닥파고 돌 돌린 형태, 바닥파고 돌 깔은 형태, 맨바닥에 직접 불을 피운 형태가 나오고 있으며 바닥만을 판 형태가 전지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형태로 나타난다.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간단한 시설을 한 형태, 즉 바닥만 판 형태와 맨 바닥에 직접 불을 피운 것이 많이 나오고 있다.
2)출입문
출입시설로는 계단시설고 돌출경사시설이 사용되었거나 움의 깊이가 얕아서 움을 파서 만든 시설이 없이 간단한 시설을 하거나 얕은 움을 이용해서 직접 출입하는 경우와 나무로 사다리를 만들어 출입했던 경우로 생각할수 있다. 집터에서 출입문을 보면 긴쪽의 중앙에 만든 것은 적고 짧은 쪽과 모서리 부근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3)저장고
저장시설로는 저장구멍, 움벽을 파서 벽장을 만든 벽장움등이 있다. 청동기시대에 출토된 곡류를 보면 쌀,보리, 조조, 수수, 기장, 콩 등이 있는데 이 시기는 농경이 급진전하여 잡곡농사뿐만이 아니라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발달하여 수확된 곡식을 저장하는 시설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발굴된 저장시설인 저장구멍이나 벽장움이 적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규모가 큰 단독건물인 창고와 같은 저장고를 만들었음을 알수있게 한다. 크기가 10cm로 작고 화덕자리가 없는 것은 사람이 살았던 집보다는 창고와 같은 저장고로 여겨진다.
3.松菊里式 土器期의 주거형태
이 단계의 주거형태로서는 장방형,방형 및 원형이 존재하지만 松菊里 住居型의 특징은 주거지의 수혈 내부에 타원형의 작업공을 갖는 것 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송국리식 토기가 출토되는 모든 주거지의 평면형에 초점을 맞추어 송국리 단계 住居類型의 분류를 해 보고자 한다.
우선, 장방형과 원형을 각각 Ⅰ형과 Ⅱ형으로 크게 나누고, 내부의 특징적인 작업공의 배치상태에 의해서 다시 a∼g로 세분하였다.
a형: 수혈 내부에 어떠한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지만 송국리식토기가 공반되는 주거형
b형: 중앙부에 타원형의 작업공이 있고, 그 내부 양단에 주공이 배치된 주거형태
c형: 타원형의 작업공과 그 외부 양단에 주공을 갖춘 형태
d형: b형과 같으면서 작업공의 주위에 4개의 주공이 배치된 형태
e형: c형과 같으면서 작업공의 주위에 4개의 주공이 배치된 형태
f형: 내부 중앙에 타원형의 수혈만이 존재하는 형태
g형: f형과 같으면서 작업공의 주위에 4개의 주공이 배치된 형태
그러나 실제로 Ⅰc, Ⅰd, Ⅰe, Ⅰg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10 종류로 나누어 진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송국리계 주거 유형은 각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중부지역의 경우, 송국리유적(국립중앙박물관, 1979,1986,1987)은 재래계주거유형에 송국리식 토기가 나타나는 Ⅰa형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Ⅱb형으로 약 30%를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1기 뿐이지만 Ⅱd형의 존재도 확인되고 있다. 한편
休岩里의 경우(국립중앙박물관,1990)는 Ⅰb형이 64%를 점해 송국리와는 대조적이지만 Ⅱd형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송국리 유적과 함께 이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중부지역에 속하는 청원 內秀里유적(조유전, 홍성빈, 1985)은 1기만이 조사되었지만 Ⅱb형에 속한다.
西南部지역의 경우(전남대 박물관편, 1989,1990; 최성락, 1986)는 약간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은 Ⅰa형으로 46.5%를 점유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Ⅰb, Ⅰf, Ⅱb, Ⅱf가 9.3%로 이어져 다양한 유형의 출현이 인정된다. 東南部 지역(동의대학교 박물관,1988,1989)의 경우는 Ⅱc형, Ⅰa형, Ⅱb형이 각각 35%, 29%, 18%를 점하고 있어 중부 및 서남부지역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해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서남부지역과 동남부지역의 이와 같은 전개의 차이는 주거집단의 주체 및 이동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리라 짐작된다. 즉, 동남부지역에서는 중부지역색이 강한 Ⅱb형이 Ⅱc형으로 변화되고 있고, 다시 이 Ⅱc형은 일본지역으로 파급되는 양상을 띠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직선적인 집단의 이동현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남부지역의 경우는 여전히 재지적인 주거유형의 틀 안에서 송국리토기문화 만을 수용하고 있어 송국리계 집단의 능동적이고 자체적인 변화가 인정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동남부지역이 중부지역 송국리계집단의 직접적인 이동에 의해 재지계가 수용 펴입되거나 혹은 이동하는 양상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서남부지역은 재지계집단이 송국리문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동남부 지역의 특징은 북부구주에서 나타나는 송국리 주거형이 모두 Ⅱc형 이후 단계에 속하고 있는 점(중간연지,1989)을 보더라도 어느정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껴진다.
송국리계주거유형의 변천과정을 종합하면, 기존의 주거유형인 Ⅰa형에 송국리식토기의 채용이 나타나고, 다음으로 Ⅱb형이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Ⅱb형은 동남부지역으로 확산함에 있어서 Ⅱc형으로 변화하고, 이단계가 되어 비로소 북부구주에로 이동했다고 판단된다. (이홍종,1993) 물론 Ⅱb형 단계 혹은 그 이전 단계에 서남부지역에로의 이동도 상정되지만 동남부지역처럼 재지계에 대해 능동적이지 못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Ⅵ. 삼한 시대의 주거지 (와질 토기 시대)
와질토기는 지금까지 존속해 왔던 우리나라 무문토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들 집단이 영위했던 주거문화 또한 등장 단계부터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등장초기의 와질토기 주거유형은 원형계통이다.(한강유역의 미사리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미사리 선사 유적 발굴 조사단, 1994) 우리나라에서 원형계통의 주거유형은 송국리 주거 유형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곧 소멸하고 줄곧 方形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와질토기 주거유형의 특징으로는 일반화된 부뚜막의 축조를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주거문화는 남한 전역에 급속도로 확산된다. 그러나 각 지역별로 이 문화를 받아들이는 차이점이 나타나고 그에 따라서 주거지의 형태도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남한 지역에서 조사된 와질토기를 반출하는 주거지는 150여기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주거지는 기존의 무문토기와 와질토기가 공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주거지는 중도식 주거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와질토기의 영향에 의해 재지계주거지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고, 와질토기계의 주거지에서는 기존의 무문토기와는 완연히 구분되는 와질토기만을 등장 단계부터 제작사용하였다. 그 결과 이 집단의 주거지는 무문토기계의 주거형과 동시기에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문토기의 제작 사용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 대상으로 삼은 와질토기계의 주거형이란 무문토기가 전혀 출토되지 않고 순수 와질토기만이 공반되는 주거지를 가리킨다.
이 계통의 주거지는 중부지역, 동남부지역, 서남부지역 등 남한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서남부 지역의 경우는 1987년에 실시된 주암댐 수몰지구 조사에서 100여기 이상이 보고되었다. 그에 비해 중부(미사리 선사유적 발굴조사단, 1994) 및 동남부 지역(동의대학교 박물관, 1988, 1989;심봉근 , 1981;이은창, 1987)의 조사예는 극히 미미한 편이지만, 각 주거형의 분류 및 지역상의 파악은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와질토기를 반출하는 주거지는 크게 (타)원형(Ⅰ형), 출입구부원형(Ⅱ형), (장)방형(Ⅲ형)의 세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타)원형은 다시 주공의 배치가 주거지 내부의 것(Ⅰa)과 외부의 것(Ⅰb)으로, (장)방형계통은 장방형(Ⅲa)과 방형(Ⅲb)으로 세분된다.
Ⅰ형은 직경 5∼6m의 타원형 수혈을 파고 내부 혹은 외부에 주공을 설치한 형태로 수혈의 깊이는 40∼50cm정도이다. 이러한 주거형의 등장은 와질토기가 처음 유입된 한강유역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나, 동남부, 서남부지역에 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어 와질토기문호의 전국적인 확산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Ⅱ형은 한강유역의 미사리033호, 040호 주거지만이 알려져 있을뿐으로 한강유역의 지역색이 강한 주거형으로 보인다. Ⅲ형은 한강유역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 주로 서남부 지역의 지역색을 반영하고 있는 주거유형이다.
서남부지역의 주암댐 수몰지구내 와질토기계 주거지 중, 원형계의 제 Ⅰ형이 차지하는 비율을 5% 미만으로 재지적인 (장)방형계의 Ⅲ형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반면 동남부 지역은 부원동의 A지구 2호 , 3호 주거지에서 Ⅲ형이 존재할 뿐, 중부지역과 같은 Ⅰ형이 주류를 점하고 있다.이러한 오질토기계 주거유형의 지역색은 중부 및 동남부지역이 새로운 문화의 유입에 민감하게 동화되거나 이동현상이 나타나는 반면, 서남부지역은 기존의 문화체계 내에서 새로운 문화의 충격을 수용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주거유형의 변천은 한강유역의 Ⅰa형과 Ⅰb형에서 찾을 수 있는데 두 유형의 시기적인 차이는 어느정도 인정되지만 토기의 변천상으로 보아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단지 남부지역의 70%가 Ⅰb형인 점을 감안한다면 한강유역의 초기 단계에는 Ⅰa형에서 Ⅰa·Ⅰb형이 공존하다가 남부지역에로 확산되면서 Ⅰb형이 선행하는 양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남부지역의 Ⅲ형은 경질토기를 포함하는 주거지가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아 Ⅰ형보다는 늦은 시기, 즉 Ⅰ형의 영향에 의해서 와질토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재지계 주거지형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Ⅶ.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주거지 형태는 움집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부연하자면 구석기 시대의 경우 동굴이나 큰 바위틈에서 생활하거나 천막식 주거지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며 신석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해안가 언덕이나 강가의 대지위에 지름 4-6m되는 원형이나 네모꼴의 구덩이를 50-60Cm정도 파서 바닥을 만들고, 바닥에 화덕 등 필요한 내부시설을 한 뒤 지붕을 덮은 것으로 별도의 벽체 시설이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은 집이 주류를 이룬다.
청동기 시대의 경우 앞선 신석기에 비해 수혈의 넓이가 크지고 깊이가 얕아 지는 현상을 보이며 형태는 방형과 장방형이 주조을 이루나 송국리의 경우 원형이 보여 관심을 끌기도 한다. 또한 집단을 이루어 취락을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이 속에서 창고가 창고 시설이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특징으로는 화덕의 자리가 이전의 시기와는 달리 움 중앙에서 벗어나 있어 공간의 이용을 넓히고 있다.
삼한의 경우 주거지 자체의 영역이 해안이나 강가에서 내륙으로 더욱 진출하여 생활의 터전이 넓어졌을 것이라 추정되며 방형의 움에 부뚜막이 축조 되었다.
이상의 시대적 특징을 각설하면 전반적으로 움의 대형화와 구조의 발달로 움이 지상 구조물의 형태로 발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거지 연구의 경우 고대인들의 삶과 직접적 연관을 맺고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고분에 비해 발굴의 성과가 미비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전반적인 생활상을 밝히기에는 아직 무리한 점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앞으로 주거지 연구에 있어서 개선 되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 참고 문헌 ]
「우리의 선사 문화 (1)」 이 융도, 지식산업사, 1994
「움집의 분류와 변천」 한국 고고학보 17, 18. 임영진, 1985
「마을의 고고학」 제 18회 한국 고고학대회,
「한국 수혈주거지」 고고학 제 3집, 1974
「우리 나라 원시집자리에 관한 연구」 김 용남, 김 용간, 황 기덕, 사회과학출판사, 1975
「한국사론 13」 최 몽룡 , 국사편찬위원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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