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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천장 꾸밈새와 같은 형태의 말각조정(귀접이식) 천장인 이스파한 자미아사원의 마름모꼴 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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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재발견’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건 답사 길에서 내내 고민하는 것은 우리 역사나 문화와의 상관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멀리 이란도 예외는 아니다. 어찌 보면 먼만큼 더 절박하고 의미가 크다. ‘이란의 진주’라는 이스파한에서도 그 몇 가지를 들춰냈다.
8월 10일(수요일) 찾은 도심의 이맘 광장은 원래 폴로 경기장이었다. 현장에는 지금도 경기장 남북 양쪽에 골대로 쓰던 대리석 기둥이 각각 두 개씩 남아있다. 밑둥 둘레는 약 2m, 높이는 2m 30cm쯤 되며, 골대 사이 거리는 10m 가량이다. 폴로는 페르시아어로 ‘초건’이라 한다. ‘공’이란 뜻이다. 원래 북방 유목민들이 말 타고 즐기던 경기다. 3~4세기께 사산조 시대부터 유행했으며, 비잔틴 시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다. 근세 영국의 경우 인도에 간 자국 군인들을 통해 알려졌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인기있는 경기로 각광 받고 있다.
아르메니아 박물관 입구 동상 우뚝
‘17세기 금속활자 인쇄기 발명’에 전율
‘세계 최초 고려에서 전파’ 입증 단서
문명교류사 속 한국 발견 뿌듯
동방의 중국 등 한자문명권에서는 격구(擊毬)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당나라 현종이 타구(打毬), 즉 격구를 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당 이전에 전해진 것으로 짐작된다. 한반도에는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무신들의 무예 놀이가 되면서 점차 퍼졌다. 고려 초 의종(1146~1170)은 격구의 명수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도 즐겼다고 한다. 후대 세종 또한 관람을 즐겼을 뿐 아니라, 보급용으로 격구장 30곳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즈음 격구를 격려하는 회례악(會禮樂)이란 타구악과 타구춤까지 생겼다.
그러나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 중기 이후 양반 사회에서는 점차 사라지고, 민간 놀이로만 계승되었다. 말을 타고 공을 막대기로 쳐 구문 밖에 내보내는 마상경기와 걸어다니며 공을 구멍 안에 넣는 보행경기로 갈라진 것이다. 〈경국대전〉을 보면, 경기장 길이는 400보, 골대 사이 거리는 5보로 원조인 이스파한의 경기장 규모(길이 510m)보다 작다. 경기 방법은 선수들이 중간 출마표에서 격구봉을 들고 대기하다 기녀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구장 한복판에 공을 던지면 경기를 시작한다. 이란의 폴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경기, 악무의 결합이니 문화접변의 좋은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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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얀데강 남쪽 줄파 지구의 아르메니아 교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반크성당의 내부에는 ‘최후의 심판’, ‘바벨탑’, ‘예수의 탄생’ 등 화려한 성화로 가득 차 있었는데 사진 촬영을 통제해 자세히 찍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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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맘 광장의 자미아사원 앞에 있는 폴로 경기장의 대리석 골대 기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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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후, 자얀데강 남쪽 줄파 지구를 찾았다. 아르메니아인 수만명이 사는 이곳에는 13개의 아르메니아교회(정교)가 있다. 가장 큰 반크성당에 들렀다. 17세기 초 사파비왕조의 아바스 1세는 재주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여기에 유치하고, 그들의 고향(현 아제르바이잔 국경지대) 이름을 따 ‘줄파’라고 불렀다. 성당은 이슬람교 사원을 개조한 돔형 건물로 꼭대기에 자그마한 십자가가 꽂혀 있고 오른쪽에 종각이 있었다. 17세기 중엽 지은 성당 안은 ‘최후의 심판’을 비롯해 바벨탑, 예수의 탄생, 동방박사 방문, 12제자상 등의 성화로 가득하다. 황금색 모자이크 성화들은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교회를 둘러보고 울타리 안에 있는 아르메니아 박물관으로 갔다. 무심코 입구 계단을 오르다 오른쪽에 웬 동상이 세워져 있어 누구의 것인지 안내원에게 물었다. 이란의 구텐베르크인 가차투르 바르다페트(1590~1646)의 동상이라고 했다.
이란의 구텐베르크?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우리나 독일 구텐베르크말고 또 한 명의 활자 발명자가 있단 말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우선 입구 오른편에 전시된 가차투르의 인쇄기 앞으로 다가갔다. 묵직한 철제 인쇄기였다. 그 곁 유리상자 속에는 몇 가지 금속활자가 진열되어 있다. 진열장 설명문에는 “신형 줄파 인쇄기에 사용된 금속활자(서력 1646년)”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 금속활자 인쇄술이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에 전해졌을 개연성을 주장하면서 고증에 늘 부심해 오던 터라 이런 발견은 실로 고무적인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박물관에는 관련 자료가 없고, 촬영도 금지되었다. 관장을 찾아가 학술연구에 필요하니 사진이라도 찍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30대 후반의 관장은 한참 듣더니 그의 입회 아래 인쇄기는 한 장만 찍을 수 있으나, 활자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나마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고 귀중한 한 컷을 찍었다. 소개 글이나 책자 등을 요구하니, 한 권밖에 없다면서 〈아르메니아의 첫 인쇄기에 관한 책〉이란 소책자를 보여주었다. 역시 그의 면전에서 전체를 촬영했다.
가차투르가 만든 이 금속활자 인쇄기 현물을 월척 같은 보배로 여기는 것은 우리가 발명한 금속활자의 서방 전파 경로를 찾는 데 일말의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과 금속활자본을 지닌 나라다. 지금도 세계 최초의 ‘발명’으로 잘못 알려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주조는 고려 최초의 금속활자보다 200여년, 첫 인쇄본인 〈42행 성서〉는 흥덕사의 〈직지〉보다도 78년 뒤에 나왔다.
지난해 10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람회를 계기로 우리와 독일 학자들은 “새로운 발견, 활자로드를 찾아서”란 제하의 국제학술모임을 열었다. 서로 처음 모여 금속활자 인쇄와 전파에 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한 자리였다. 전람회 주빈국으로서 의미있는 모임이었으나, 국내에는 기사 한 줄 전해진 바 없었다. 당시 국내 학자들은 두 나라의 금속활자 인쇄가 문명교류사적 배경에서 여러 중간 고리를 포함한 실크로드 통로를 거쳐 연관되었을 개연성이 짙다고 설파하면서, 이 통로를 ‘활자의 길’(활자로드)이라 이름 지었다.
그 길은 대략 남·북 두 갈래로 추정했다. 남로는 한국에서 중국을 지나 중앙아시아, 이란을 거쳐 유럽과 독일에 이르는 오아시스 육로, 북로는 한국에서 몽골을 지나 남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과 독일에 이르는 초원로에 해당한다고 본 것인데, 일정한 공감대가 이뤄졌다. 당시 모임에서 구텐베르크 박물관의 에바 하네부트 벤츠 관장에게 이스파한 아르메니아교회 박물관에 소장된 금속활자 인쇄기를 이야기했다. 관장은 금시초문이라며 당장 가보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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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크성당 안의 아르메니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가차투르의 철제 인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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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박물관에는 기독교 전파나 아르메니아인 조난사에 관한 흥미있는 유물들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다이아몬드 펜으로 성경 구절을 새겨 넣은 머리카락과 세계에서 가장 작은 14쪽의 0.7g짜리 성경책이다. 현미경 아니면 볼 수 없는 희귀품들로 아르메니아인들의 섬세한 손재주를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 문화와 연관된 보물찾기는 다음날 이스파한에서 가장 오래된 자미아사원에 들렀을 때도 이어졌다. 11세기부터 세 왕조대에 걸쳐 증개축한 대형 건축물로 여러 형태의 천장 꾸밈새가 특이하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천장 꾸밈새와 같은 마름꼴 천장이 눈에 띄었다. ‘말각조정’(抹角藻井) 혹은 ‘귀접이식 천장’이라고도 하는 이 천장은 만들 때 벽면 상단의 네 모서리에서 판석을 밀어넣어 맞붙여 덮으면 천장의 열린 면적이 반씩 줄어들게 되며 정점에서 판로 덮개를 해 마무리 짓는다. 이 사원에서는 주로 셀주크시대(11세기)의 천장에서 많이 보이는데, 모양새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일부는 공기와 햇빛이 통하게 하느라 마지막 부분을 막지 않은 것도 있다.
귀접이식 천장 건축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나 그리스에서 유행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고구려까지 동전했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군이나 중국 신장 일대 민가와 사원건물에서도 이런 천장 형식은 종종 발견되며 강서대묘를 비롯한 고구려벽화에서 도드라지게 보인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이 기법을 적극 도입한 나라는 고구려뿐이며 중국도 있지만 극히 형식적이다. 백제나 신라, 일본에서는 흔적을 볼 수 없다.
일행은 이스파한 답사에서 폴로와 금속활자 인쇄기, 천장 기법 등을 통해 한반도~이란의 문명교류상을 다시금 확인했다. ‘세계 속 한국’을 찾으러 떠난 답사 길에서 얻은 또하나의 값진 열매였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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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 입구에 있는 가차투르 바르다페트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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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속 가톨릭 불구 탁월한 무역상술로 ‘생존’
사파비왕조와 아르메니아인
이스파한의 명물 반크성당은 서구 가톨릭과 친연 관계인 아르메니아 정교회 예배당이다. 무엇보다 예배당 건립 시기가 사파비왕조 아바스 1세의 치세기인 17세기 초란 점이 이채롭다. 당시 이란 전역에서 다른 종파를 몰아내며 시아파 국가의 터전을 다졌던 아바스 1세가 정작 도읍에 이슬람과 적대관계인 북방 기독교도들을 끌어들여 성당까지 지어준 까닭은 무엇일까.
아바스 1세의 선심은 순전히 경제적 잇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방 카프카스고원에 살았던 아르메니아인들 가운데는 장사 기술에 능한 상인집단이 많았다. 생소하지만 그들은 중세기 이후 소그드인이나 사르트인에 필적하는 실크로드 국제무역의 귀재들이었다.
상업중시 정책을 폈던 아바스 1세는 사파비왕조를 중흥시키고 이스파한을 세계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국제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과 물류 유통망의 확대를 갈망했다. 비단, 카펫으로 대표되는 자국산 특산물을 서구 기독교 세계에 팔고 중개 교역을 진척시키기 위해 서방과 전통적으로 친분관계였던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무역 대리인 삼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스파한 교외에 유대인 게토 같은 별도의 아르메니아인 거주구역을 만들고, 상인조합까지 구성하도록 한 데는 이런 계산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다른 종파를 탄압한 아바스1세였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기독신앙은 철저히 보장했다.
17~18세기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거래규모는 영국의 대상인을 능가할 정도로 당대 중동의 동서방 교역에서 핵심적인 위상을 누렸다. 위험부담이 큰 중앙아시아, 소아시아 교역 활동에 능숙했던 그들은 자본 대부업이나 환어음 거래도 할 정도로 선진적인 거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16세기 유럽에 아랍의 음료 커피를 보급시킨 주역이 아르메니아 상인이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아르메니아는 실크로드 교통의 남북축이 교차하는 요지에 있어 예부터 강대국의 틈 사이에 끼여 숱한 이산의 비극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런 역경이 세계 곳곳을 넘나들며 국제 상인으로서 진취적 기질을 닦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슬람 사회에서 줄곧 냉대받았고, 터키인들한테 20세기초 대규모 학살 피해를 당한 아르메니아의 민족사는 유대인 수난사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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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