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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에게 베푸신 긍휼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3장 21-30절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며, 학교에 다니면서 학우와의 관계, 직장에서는 동료와 상사와의 관계 등, 그야말로 인간의 존재 방식은 관계를 통해서이다. 즉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며 사회를 떠나서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에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이 신뢰를 깨뜨리는 것은 배신이다. 배신은 인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슬픔이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그 아픔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 오지 않는다고 하셨다(요 10:26). 그렇다면 예수님의 양들은 어떠했는가? 마가복음 14:27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다.
오늘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관련된 주제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 괴로워하셨다. 요한복음 13:21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괴로움은 단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괴로움이 아니며, 가룟 유다를 위한 괴로움이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냉대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와의 관계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목회적 관심과 사랑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겠다.
1.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게 될 것을 미리 아셨다(요 6:70-71).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뻔히 아시면서 그를 열두 제자 중에 포함시키셨고, 그를 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삼년 동안 함께 지낼 수 있게 하신 것은 그에게 최선의 것을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일회용으로 사용하신 후 버리셨는가? 누가복음 22:22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라고 하셨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 창세전에 이미 작정된 것이었다면 가룟 유다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운명론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라고 지시하신 적이 없으셨고, 가룟 유다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에 의해 강압된 자유의지가 아니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 가룟 유다의 자유로운 선택을 허용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판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경우에 있어서 선하시고 의로우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이야기에서 야곱의 아들들의 마음을 충동질 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이스라엘을 흉년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의 실수를 허용하셨을 뿐이다. 요셉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으며, 다음과 같은 말로 형들을 위로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요셉을 판 것은 그의 형들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요셉이 팔릴 수 없었겠지만 요셉이 팔리는 것을 허용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다른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 큰 뜻을 알고 있는 요셉은 자신을 판 형제들을 사랑과 용서로 품어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허용하셨고 가룟 유다의 배신은 작정된 것이었지만, 이 죄책은 전적으로 가룟 유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더 나아가서 가룟 유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최선으로 그를 대우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신 분이시다(눅 6:35).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게 될 것을 미리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함한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의하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에 있어서 언제나 가룟 유다를 제외시키지 않으셨다. 마지막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셨고 가룟 유다도 그 가운데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셨다. 그 때 예수님의 사랑받는 한 제자(요한)는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었다(요 13:23). 유대인의 풍습에 의하면 만찬석상에서 떡을 떼어주는 행위는 그 떡을 받아먹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떡을 다른 제자가 아닌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것 역시 가룟 유다가 나가기 전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셨지만 가룟 유다의 몸은 여전히 더러웠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 13:10). 이 말은 가룟 유다를 가리켜 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를 씻기지 않고 내버려두셔서 그가 더러움 가운데 버려진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지 않으시면 그들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된다고 했을 때,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요 13:9) 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발만 씻어줬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온전히 깨끗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가룟 유다에게는 감사의 제목 외에는 불평할만한 요소가 전혀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랑은 최선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아넘기는 시점에 이르러서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 22:48)라고 하셨던 말씀에는 가룟 유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짙은 긍휼이 묻어있었다. 가룟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았으며, 이러한 일편단심은 배신한 가룟 유다로 하여금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데 이르게까지 했다. 예수님의 사랑이 클수록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죄책감은 그만큼 골이 깊어진 것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큰 사랑과 반비례되는 큰 죄책감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일 가룟 유다가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돌이켰더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기꺼이 받아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조차 자신을 찌른 자들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룟 유다는 자살을 택하였다. 이 선택 역시 그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가룟 유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에서 제외되었던 것은 예수님의 손이 짧아서가 아니다.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로 새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그 때에도 가룟 유다는 함께 있었다. 새 언약을 세우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말씀하셨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눅 22:21).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 역시 새 언약에 속하여 구원 받기를 원하셨으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자살을 택함으로 이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임을 드러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에서 탈락되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겨진 것은 결코 사랑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교회 안에는 양과 염소가 섞여 있다. 양들 가운데서 염소를 가려내서 멀리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양이든지 염소이든지 다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로마서 12:18에 의하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고 말씀하고 있다.
2.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셨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인내이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 1:4)고 했다. 이러한 인내는 인간관계에서 용서와 신뢰로 드러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고 하셨다. 가룟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인내는 용서와 신뢰로 표현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여 팔아넘길 것을 아셨지만(요 6:70-71). 항상 곁에 두셨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들 중에서 돈궤를 맡은 자였는데(요 12:6, 13:29), 이 말인즉 그가 제자들 가운데서 회계의 역할을 감당했음을 보여준다. 돈 계산이라면 어쩌면 세리로 있었던 마태가 더 적격이었을 것인데, 가룟 유다가 그것을 맡았던 것은 그가 그만큼 신뢰의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비록 요한복음 12:6에서 가룟 유다가 돈 문제에서 부정직했음을 언급하고 있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가 신뢰의 대상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를 알고 계셨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게 될 것도 이미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돈궤를 맡고 있는 것에 대해 허용하셨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리신 것이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 대해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4-6) 라고 위선적인 발언을 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그를 무안하게 하지 않으시고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셨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8) 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에 대해 책망하셨던 반면에 가룟 유다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돌이킬 수 있다고 신뢰해주시고 그에 대해 인내하며 기다리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들 앞에서 가룟 유다에게 무안을 주는 언행을 일체 하지 않으셨다. 그가 그런 대상이 되기에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배신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향해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요 13:26)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가룟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신뢰의 행위를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메시지와 연결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잠시 어리둥절했을 수도 있다. 떡을 떼어주는 신뢰의 제스처가 자신을 배신할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 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질책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을 배신하여 팔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최선의 사랑을 보이시고 끝까지 인내하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어둠에 속하였으므로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유다를 떠나보내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나가셔서 기도하신다. 심히 괴로워하시면서 엎드려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라고 기도하신다. 혹자가 볼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괴로워하실 것이라면 왜 가룟 유다를 그냥 보내셨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선택에 대해 침묵하셨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이 쓴 잔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 전혀 서운함이 없으셨던 것은 그의 배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계속 기도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18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이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라고 하는 시편 41:9의 예언에 대한 성취임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떡을 나눠 먹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겼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 침묵하셨고 그를 끝까지 사랑과 신뢰로 대우해주셨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이미지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다윗 왕 역시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까지 배신을 당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사랑은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역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부당한 대우를 할 수 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너무 커서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로 하여금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게 했다. 예수님의 사랑은 가룟 유다의 머리에 올려진 숯불이었다(롬 12:20 참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바로 이것이다. 이 사랑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치유한다. 우리의 몫은 원수를 정죄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몫은 무엇인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