統營別路 斷想
(1)
중간 기착지 부산에서 트리플 데이트
내가 탑승한 제주발 부산행 항공편은 에어부산(Air-Busan)이다.
저가 항공의 매력뿐만 아니라 소형 항공기의 이점도 있다.
탑승자가 적으므로 타고 내리는데 신속하고 편하니까.
또한 방문지에서는 그 지역과 관계된 시설과 제품을 애용하는 것이
나그네의 에티켓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자기 지역민 우대의 이기적 운영으로 외지인들의 반감을 유발하고
있는 제주항공 같은 경우 말고는.
제주 ~ 통영 길의 중간 기착지인 부산에서 일박했다.
제주공항을 3월13일 오전에 떠났음에도 부산시내의 트리플(triple)
데이트에 밤을 새다 싶이 하느라.
서울 떠나 부산생활에 아직 익숙해 지지도 않았는데 돌연한 부인의
병 수발에 노심초사중인 L과 투병중인 그의 부인을 우선 위무했다.
온천장 회동 약속 막간에 '부산山사람' 님(http://cafe.daum.net/
kumkang8191)의 후대에 응해야만 했다.
금남호남정맥 장안산 조금 전에서(밀목재~ 영취산) 해후한 분인데
인연을 중시하는 독실한 불자다.
그는 다망한 자기 사업도 제쳐두고 서면까지 와서 내게 극진했다.
山사람님(금남호남정맥)
온천장의 회동이란 200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낙동정맥이 선물한
인연인데 해를 거듭할 수록 동아줄이 돼가고 있다.
근년들어 해마다 1월 제3주말의 한라산길 귀로에 온천장의 게르만
호프집에서 상봉하는데 이번 만남은 특별보너스인 셈이다.
부산 금정산 산객들의 아지트인 게르만호프는 주인 S가 안티(anti)
술체질인데도 20년 넘게 성업중이란다.
전적으로 S의 사해동포적 이해와 부드러운 매너의 힘일 것이다.
새벽 2시를 훌쩍 넘기는 영업시간 연장의 기록 갱신은 내가 도맡아
하고 있다나.
부산에서 보내는 밤도 제주도의 연장인가.
S가 안내해 준 찜질방 이름이 공교롭게도 백록담랜드다.
작취미성(昨醉未醒)으로 열차를 놓치고 KTX를 타야만 했던 기억이
생생하는 동안에는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통영행 아침 버스에 제대로 올랐다는 말의 우회다.
통영 미스터리
부산 ~ 통영길 육로도 격세지감이 들도록 편하고 빨라졌다.
예전에는 거개가 빠르고 편한 선편을 이용했는데 육로의 편이성과
신속성에 밀려 이용자가 격감한 탓인가.
타산이 맞지 않은지 이즈음엔 선편은 아예 없어진 듯.
3시간쯤 걸리는 완행버스가 마산, 배둔, 고성을 거치는 동안 차창을
통해 낙남정맥을 짚어보게 했으며 낯설지 않은 산과 길이 반가웠다.
통영 신시가지의 시외버스터미널(光道面 竹林里)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쯤.
경도에서 990리, 해남대로에서 분기하는 삼례역(參禮驛)발 520리길
통영별로(統營別路) 걷기를 역순으로 시작하려는 시점이다.
한데, 고산자는 왜 이 길을 '별로'라고 구분했을까.
해남대로(삼례)에서 별도로 분기했기 때문에?
'충청수영로' 역시 해남대로(평택)에서 분기했음에도 '별로'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닌 듯 하다.
오히려 경도에서 시작하는 '수원로'를 별로라 했으니 특별한 기준도
없이 소위 "엿장수 맘대로" 하듯 한 것인가.
통영의 새 관문이 된 신시가지(광도면 죽림리) 종합버스터미널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줄인 말이며 삼도수군
통제사의 통제영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란다.
또한, 선조37년(1604년)에 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두룡포(頭龍
浦:통영의 옛이름)로 옮기면서 통영이라 개명하였다는 것.
그러나, 지명의 유래야 그렇다 해도 개명시기는 사실과 전혀 다르게
전해오고 있다.
통영은 세계4대해전중 으뜸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산대첩을 이룬 곳
인데도 조선500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한산대첩의 장계(壯啓)를 받아본 선조(宣祖)가 내린 치하의 교서(敎
書)에도 한산도만 있을 뿐 통영은 없다.
(당시의 한산도, 두룡포는 모두 거제현에 속해 있었다)
고성과 거제, 남해 등을 전전하며 홀대받다가 1900년(광무4년) 고성
군에서 겨우 빠져나와 독립할 때도 통영군이 아니고 진남군이었다.
이처럼 통영이라는 이름은 철저하게 외면당하다가 아이러니(irony)
하게도 일제에 의해 햇볕을 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비로소 '통영군'으로
개명(改名)되었으니까.
그랬는데도, 고산자 김정호는 그보다 한참 이전인 1800년대 중반에
이미 '통영별로'라는 명칭을 썼다.
왜 그랬을까.
비록, 충무공 순국 6년 후의 일이라 하지만 3도수군의 본영이 있는
지역인데도 이토록 홀대받다니?
이처럼 괄시받고 있는 이름 없는 통영이 왜 대로(大路: 統營別路)의
한 축이 되었을까?
설마, 나전칠기(螺鈿漆器)가 그 이유는 아니겠지.
통영이 나전칠기 기술의 본산이 된 것은 통제사 이경준 덕이란다.
그가 12공방에 상.하 칠방을 두어 발전시킴으로써 나전칠기 기술이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지만 대로의 조건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런가 하면, 한산도 해역이 자기네에게는 치욕의 바다이며 거들떠
보기조차 싫은 지역일텐데도 일제는 군(郡)으로 승격시켰을 뿐더러
해저터널까지 만들었다.
가히 통영의 미스터리(mystery)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통영읍은 1955년(광복 10년후)에 시로 승격할 때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따서 충무시라 하고 통영군과 분리됐다.
분리 40년 만인 1995년에는 충무시와 통영군이 재통합해 도농 복합
형태의 통영시가 되었다.
아련하고 아린 추억의 통영
300리 한려수도 뱃길 따라 여수~부산간의 해상여행은 자주 했다.
그 중 하나가 1972년 여름에 한 8일간의 장거리 해안여행이다.
G형과 내가 전남 여수의 만성리해수욕장에서 시작한 여정은 부산시
해운대 백사장에서 마감했다.
<. . . . .충무항(당시의 통영읍은 충무시로 승격)에서 승선한 여객들
중 3명의 여고생과 알음을 트게 되었다.
당시에도 숫기가 없는 나는 엄두도 못 냈는데 넉살 좋고 유들유들한
G형이 말길을 터놓은 덕이다.
의젓하게 순항하던 여객선도 낙동강하류와의 합류지점인 다대포 앞
바다의 거센 파도에는 한 없이 무력했다.
하얀 깨끼 모시치마 저고리의 우아했던 한 부인의 모습을 보기조차
민망하게 만들어버린 파도.
주말 마다 귀가(통영)했다가 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가곤 한다는 이
학생들로 하여금 미증유의 공포와 절규를 토해내게 한 바다.
이런 바다의 성정을 모르기에 오히려 태연했던 나는 바다가 시치미
뚝 떼는 시점에서 이 여학생들에게 한 청을 했다.
"김치를 먹게 해줄 수 있겠느냐"고.
지참한 먹거리가 아직 여유있음에도 가장 핵심인 김치가 동났으니
김치대장인 내가 나설 수 밖에.
쾌히 응락하면서도 광활한 백사장에서의 도킹이 문제라는 그녀들.
선견지명이 있었던가.
5색 무지개천막을 찾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인이 준 이 시용(試用)천막은 출시전이었으므로 유일해서 어렵지
않게 찾아온 이 학생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주소 성명을 받았다.
그러나 아뿔싸.
고마운 김치의 은공을 갚기는 커녕 사진을 보내줄 길이 없다.
받아 둔 메모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기다리는 빛바랜 사진
제목 <주인공을 기다리며>로 쓴 글의 요약이다.
통영에 들를 때마다 환갑줄에 접어들었을 그네가 생각나고 미안한
마음이다.
충무시에서 유숙하기는 1984년이 처음이다.
수출입 전문은행의 작은 해안도시 지점 개설은 정략의 냄새가 다분
했지만, 그 덕에 내 주우(酒友) M이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나 또한 그 덕에 몇번 오가며 환대받았으나 고속버스에 6 ~ 7시간씩
시달려야 하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한데, 이즈음엔 4시간 남짓 걸린다니 얼마나 편해진 것인지.
중부고속국도가 대전 ~ 통영까지 연장 개통된 덕이다.
C목사는 서울을 떠나 부산권역에서 영상(映像) 선교에 진력중이던
나의 각별한 친구다.
내가 몸담고 있던 대학에서 다소 편한 일하기를 권했지만 그는 뿌리
치고 낯선 곳에서 힘든 짐을 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우리 부부를 위하여 만사 제쳐놓고 충무 바닷길을
함께 하며 갖가지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그러던 그가 나만 두고 하늘나라의 부름에 응했다.
정녕, 그 곳도 인재난(人材難)에 허덕이고 있었던가.
한참 일할 40대의 그를 데려갔으니.
말짱하던 M도 가버렸다.
그 후로는 내 마음을 아리게 하는 통영 방문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랬기에, 이 아련하고 아린 추억들을 간직한 통영은 통영별로(統營
別路) 걷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내 마음을 몹시 무겁게 했다.
통영의 DNA
통영시 도심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중부고속국도와 엉켜있는 14번국도에 올라서서 오른쪽 조금 떨어진
통영향교를 확인하고 통영의 관문인 원문(轅門)고개를 넘었다.
옛날, 천자(天子)가 지방에 갈 때 수레로 울타리를 만들고 출입구에
수레를 세우거나 엎어서 만든 문의 형태를 원문이라 했단다.
훗날 '군영으로 들어가는 문(軍門)' 또는 '진영(陣營)의 문'을 뜻하게
되었는데 통제영과 원문의 선후관계는?
당연히 원문이 통제영을 뒤따랐겠으나 원문이 먼저였다면?
통제영지야 말로 점지된 곳이라 하겠다.
원문고개(1)와 고개마루에서 본 죽림마을(2:왼쪽은신도시와죽림만)
한데, 이 고개가 바로 "귀신잡는 해병" 신화의 산실이란다.
6. 25동란때 통영에서 한국군해병대가 최초의 단독상륙작전을 펴서
적을 완전 격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서.
이 때, 이 해병대를 지칭해서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
이라는 표제로 쓴 한 종군기자의 글이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인 뉴욕헤랄드트리뷴지의 젊은 여기자
마거릿 히긴즈(Marguerite Higgins)의 종군리포트였다.
이 리포트 제목이 '귀신 잡는 해병'(Ghost-catching Marines)으로
각색되었다는 것.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은 1592년(선조25년)의 일이다.
통영앞바다 한산도에서 왜수군을 격파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감히
남해안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했다.
그로부터 358년 후인 1950년, 충무공의 후예인 우리의 해병은 역시
통영에서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산대첩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조선의 수군과
그들의 후예인 대한의 귀신잡는 해병의 DNA가 일치한 것 아닌가.
조선과 대한민국이 하나인 것처럼 오직 전승(戰勝)의 DNA인가.
통영의 DNA라 할 수도 있겠다.
무심코 원문고개를 내려설 때 문득 잡힌 생각이다.
그래서 곧바로 통제영지(문화동)로 직행했다.
여기가 바로 통영별로의 출발지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니까.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잖은가.
내가 지금껏 들른 순대국밥집 중에서는 전국 최고로 청결한 '임금님
순대국밥' (무전동)에서 아침겸 점심 식사부터 했다.
위가 풍만해짐으로서 좀더 이성적이 되었나.
조금 전의 DNA생각을 정정하게 되었다.
6. 25동란은 왜구와의 전쟁과 달리 동족간의 싸움이다.
이데올로기(Ideologie)의 제물이 되었을 뿐 언제가는 한 데 뭉치게
될 한 핏줄이므로 패배한 그들도 충무공의 후예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