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규 이사장(경남대 총장)
nkchosun:‘2007년 9월의 윤이상 페스티벌’...‘처염상정’(處染常淨)
윤이상평화재단(이사장 박재규, www.isangyun.org)은 2007년 9월 16일부터 11월 10일까지 '2007 윤이상 페스티벌'과 제1회 '국제윤이상음악상'을 개최하고 있다. 윤이상(1917~1995)의 90번째 생일을 맞아 기획된 이번 행사는 그의 생일(9.17)부터 사망일(11.3)까지 윤이상의 다양한 장르의 음악 작품들을 축제에 담아내고자 하는 기획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생전에 “나의 음악은 경쾌하지도 않고 차라리 정의를 향한 절규 그리고 아름다움에의 호소에 더 가깝다. 거기에는 억압된 자들을 위한 위로와 외침이 있다. 나는 음악가이기 전에 양심과 정의감을 굳게 지키는 인간이고 싶다.”고 절규했던 윤이상, 1995년 11월 3일 독일 베를린서 끝내 고국의 품에 안기지 못한 채 영면에 든 그가 오늘 살아있다면 90세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독일로 간 뒤 죽을 때까지 모국 땅을 밟지 못한 그는 90번 째 생일상을 마침내 고국에서 받았다.
‘처염상정’(處染常淨), 이 말은 베를린에 있는 그의 묘비에 새겨진 말이다. 비록 연꽃이 더러운 진흙탕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를린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處染常淨’,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누군가 “반평생을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으로 살다간 윤이상 선생. 그의 삶의 궤적을 가장 잘 응축한 문귀”라고 했다.
이번 행사는 국내는 물론 베를린과 평양에서도 특별 음악회가 열리는데, 한국에서 10개, 해외에서 2개, 총12개의 행사가 진행된다. 새로 창단된 <서울 윤이상 앙상블> 창단 연주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식>, <국악과 윤이상의 만남>과 윤이상의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 한국 초연 등 다양하고 뜻 깊은 행사들이 계속된다.
‘2007 윤이상 페스티벌’을 주최한 윤이상평화재단(이사장 박재규)은 “윤이상은 유럽에서 ‘현대를 움직인 5명의 작곡가’에 손꼽히고 독일에서는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중 하나로 선정되는 등 세계음악계의 거목”이라며 “베를린 자택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만들어 매일 바라볼 정도로 조국을 그렸으나 결국 독일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불운한 삶을 추모하며 이번 페스티벌에 귀 기울여 주길 당부 한다”고 말했다.
이 행사에 초대된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80) 여사가 40년 만에 모국의 땅을 밟았다. VIP 대접을 받으며 남한 땅을 밟은 그녀는 "남편의 정치적 명예회복에 이어 예술적 명예도 회복되길 기대 한다"고 말했다. 곳곳에서 환영의 목소리가 높았고 격려의 말도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를 “김일성 교의 광신도”라고 하는 등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제발 이번 행사를 통해 윤이상 음악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분단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유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다음의 글, 남과 북의 백과사전도 같은 글로 집필되기를 기대해 본다.
[남한:Daum백과사전/출처:브리태니커] 윤이상(尹伊桑)-1917. 9. 17 경남 충무~1995. 11. 3 독일 베를린. 작곡가. 시인 윤기현의 아들로 17세 때 일본에 유학하여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되었고 8·15해방 후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었고 1953년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있었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파리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우고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형식으로 귀국시켰으며 재판결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을 작곡하고 그밖에 〈율〉·〈영상〉 등을 작곡했다. 1971년 서독 킬 문화상을 수상했고 독일국적도 취득했다. 1971년 8월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고 1973에는 미국 애스펜 음악제에 작품을 발표했다. 1977년 서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81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1988년에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의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한국에서 열린 윤이상음악축제에 참석하려 했지만, 한국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은 중국·한국의 궁중음악과 불교·도교의 신화적 소재가 주를 이루는데 주된 음악적 경향은 도교적이다. 그밖의 작품으로 〈낙양 洛暘〉(1961)·〈예악 禮樂〉·〈무악〉·〈무궁동 無窮動〉(1986)·〈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이 있다. '현존하는 유럽의 5대작곡가'로 꼽혔으며, 독일연방공화국대공로훈장, 괴테메달 등을 받았다.
[북한:《조선대백과사전(28)》,백과사전출판사,평양,2001년,325쪽] "윤이상 (1917.9.17-1995.11.4) 작곡가. 경상남도 충무시의 몰락한 량반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던 그는 17살때부터 약 10년간 서울과 해외에서 고학으로 첼로, 음악리론, 작곡 등을 배웠다. 그후 고향에서 고등학교음악교원을 하면서 8.15를 맞이하였으며 주체37(1948)년부터 약 8년간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고등학교, 사범학교, 대학들에서 음악교수로 활동하였다.
주체45년부터 약 2년간 프랑스와 도이췰란드에서 음악리론과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그후 오래동안 도이췰란드에서 음악대학의 교수, 작곡가로서 적극적인 창작활동을 벌렸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많은 음악가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일찍부터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나섰던 그는 주체56년 6월 이른바 《동부베를린사건》으로 랍치되여 남조선에 끌려 가 2년간 옥중고초를 겪었다.
그의 불우한 운명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 속에서 애국적인 음악가의 한생으로 빛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윤이상을 조국의 품으로 불러 주시고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여러차례 만나주시였으며 그의 작품들도 몸소 들어 주시고 그의 애국적인 창작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평양의 중심부에 그의 이름으로 된 현대적인 음악당과 음악연구소를 세워 주시였으며 풍치 아름다운 곳에 훌륭한 집도 마련하여 주시였을 뿐아니라 정기적인 음악회와 연구토론회를 진행할수 있도록 온갖 조건을 다 보장해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 속에서 그는 애국적인 음악활동을 적극 벌렸으며 주체80년부터 조국통일범민족련합 해외본부 의장으로서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자기의 심혈을 다 바쳤다. 작곡가로서 그는 많은 음악작품들을 남겼다.
실내관현악 《락양》(1962년), 훌류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곡 《영상》(1968년), 가극《심청》(1972년), 첼로협주곡(1976년), 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1981년),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2년), 교향곡 제1번-제5번(1983년-1987년),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제3번(1981년, 1983년, 1992년), 교향시곡 《화염속의 천사》(1994년) 등을 비롯하여 100여편의 음악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윤이상은 동양음악의 정서를 서양의 음악표현수단과 기법으로 형상한 독특한 현대음악을 창조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음악적뉴대를 이어 주는데서 큰 역할을 한것으로 하여 그의 이름은 우리 민족이 낳은 작곡가로 세계에 널리 알려 지게 되였다. 그는 도이췰란드의 《킬문화상》(1971년), 베를린음악대학명예교수(1972년), 뤼빙겐대학명예철학박사(1985년) 등의 학직과 학위를 받았다. 조국통일위업에 이바지한 공로로 하여 《조국통일상》(1990년)과 국기훈장 제1급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