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한양도성
(제국주의에 잠식된 한양도성 성벽)
도성의 성문들은 철거 당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성문에 비해 도성의 성벽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갔다. 교통로 확보, 일본 제국주의의 과시로 인해 평지의 성벽뿐만 아니라 산등성이의 성벽까지 철거되었다. 그 중 대대적으로 성벽이 파괴된 구간이 남산과 현재 동대문 운동장 부근이다. 특히 남산은 조선이 개항할 때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곳으로 일찍이 통감부와 초기 조선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중심지였고 나중엔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를 넘어서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조선신궁이다. 조선신궁 건설은 곧 대대적인 도성의 파괴를 의미했다. 조선신궁이 산등성이의 성벽을 대대적으로 파괴했다면 경성운동장은 평지의 성벽을 대규모로 파괴했다. 상대적으로 평지의 성벽은 산능선에 있는 것들보다 파괴가 심했고 현존하는 성벽도 일부일 뿐만 아니라 어떤 구간은 현재 복원자체가 불가능한 곳도 있다. 이렇듯 일제는 한양도성을 다각적으로 훼손했다.
▲ 1929년 조선박람회를 위해 발행한 경성지도, 좌우 성벽이 헐린 숭례문과 남산 위에 세워진 조선신궁 부분이다.
▲ 좌우 성벽이 헐린 흥인지문과 그 우측에 세워진 경성운동장이 보인다. 동대문 좌측의 낙산구간과 맨 우측에 광희문 부근에 성벽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남산 구간의 성벽 파괴는 예상된 것이었다. 도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남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거주하던 곳이라며 이곳을 신성시하였다. 그래서 조선 정부로부터 영대차지권(국내 거류 외국인에게 일정한 지대를 내고 영구히 토지를 빌리는 권리)을 획득하고 1898년에 종교 활동을 위한 대신궁(大神宮)을 건설하고 왜성대공원을 만든다. 1908년에는 아예 무상으로 30만 평의 토지를 대여 받아 한양공원을 세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인들은 공원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신이 거주하는 신성한 장소로 만든다. 그럼으로써 경복궁 자리의 조선총독부에서 남산의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을 만든다. 일본은 1911년 그들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제국의회에 ‘조선신사 창건준비’에 관한 예산안을 제출한다. 그리고 1915년부터 본격적인 신궁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여러 후보지 중에서 남산이 최종결정 된다. 북쪽의 조선총독부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남쪽에 세움으로써 경성의 중심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한 것이다. 그리고 남산이 가진 왜성대의 역사와도 연결 지어 조선 통치의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
▲ 1929년에 제작한 경성시가도. 남산신궁 우측으로 일부 남아있는 성벽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조선신궁의 건축 부지는 처음엔 왜성대 공원으로 결정되었지만 1918년에 한양공원으로 최종 결정됐다. 왜성대 공원은 예로부터 거류일본인이 많다보니 개인 사유지가 많았다. 그래서 건축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장소를 변경한 것이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대표 신사인 이세 신궁을 모델로 지어졌다. 당시 신사 설계를 맡은 자는 메이지신궁을 건립했던 동경제국대학 교수 이토추타(伊東忠太)였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신궁 건설에 각별히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이토추타는 이세신궁과 같은 신명조(神明造) 양식으로 건물을 지어 조선에 건립된 수많은 신사들의 총본산으로 삼았다. 특히 일반적으로 신사가 남향 혹은 동향으로 짓는데 비해 조선신궁은 서북향을 지었는데 이것은 장차 중국 대륙을 향해 뻗어나갈 일본의 위세를 상징화한 것이다.
▲ 신명조 양식의 대표적 건물인 이세신궁이다.
▲ 조선신궁의 조감도
▲ 이세신궁과 같이 신명조 양식으로 지은 조선신궁
▲ 조선신궁을 설계 감독을 맡은 이토주타(伊東忠太) 그는 일본 건축사를 창시한 당시 건축 분야의 선구자였다. 이를 통해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조선신궁 건설에 신경썼는지 알 수 있다.
▲ 이토 추타의 대표작인 츠키지 혼간지(築地 本願寺), 그는 건축 진화론을 주장하며 새로운 건축양식을 개발했다.
하지만 조선신궁의 부지, 설계, 예산 모든 것이 확보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그것은 조선신궁에 안치될 제신(祭神)의 선택 문제였다. 조선신궁이 식민지의 과거 수도에 지어졌기 때문에 거기에 모셔질 신의 선택은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신의 선택에 관해 수많은 의견이 오갔다. 먼저 진구황후(삼한을 정벌했다고 일본에 전해지는 인물, 임나일본부설의 배경이 되며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들은 조선을 무력 침공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조선통치를 무력 점령이 아닌 ‘문명 전파’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에게 있어서 이들을 제신으로 삼을 경우 자기모순이 되고 조선인의 반감을 살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들은 애초에 제신 명단에서 퇴출된다. 그러다가 논의 중에 메이지 천황이 사망했는데 이를 계기로 메이지 천황을 조선신궁의 제신으로 결정했다. 메이지 천황은 일본에 근대화를 이룩한 인물이었으며 그 이룩한 근대화를 조선에 가져다준다는 명분을 내건 일본에겐 메이지 천황은 식민지 조선에 안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 1912년 사망한 메이지 천황, 죽음 이후 그는 일본인에 의해 신이 되어 조선신궁에 모셔졌다. 조선인들은 강제로 그에게 참배를 해야했다.
메이지천황이 안치된 후 일부에서 다른 신을 합사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메이지 천황과 더불어 일본의 창조신인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를 합사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의 나라에 광명 비춰주는, 즉 번영을 가져다주는 존재를 아마테라스 오오카미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이 신을 조선에 안치함으로써 조선에도 자신의 번영을 가져다주게끔 한 것이다. 남산에 일본의 신이 모셔지면서 본래 남산에 있던 신은 쫓겨나게 된다. 민족의 위상에 그들이 믿는 신의 위상과 비례함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산타워 앞에 있는 팔각정에는 국사당이라고 국가에서 굿을 행하던 사당이 있었다. 이 사당은 태조가 목멱대왕(목멱산은 남산의 옛 이름)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이 시초이다. 일제는 국사당이 조선신궁보다 높이 있다는 이유로 이곳을 인왕산으로`옮기게 했다.
▲ 일본의 단군이라 할 수 있는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 그녀는 태양신이었고 일본의 욱일승천기는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를 상징한다. 즉 욱일승천기는 일본인이 태양신의 자손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종의 선민사상이다.
▲ 남산 국사당의 내부 사진. 국사당에 모셔졌던 조선 고유의 신들은 일본 신에게 밀려 인왕산으로 쫓겨났다.
▲ 현재 인왕산에 위치한 국사당. 인왕산으로 옮길 당시 남산의 국사당을 해체 이전했기 때문에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신궁의 제신 문제도 해결되자 조선총독부는 1918년 11월 28일 일본 내각에게 창립을 청원한다. 조선신궁은 허가를 받았고 곧바로 1921년 완공을 목적으로 공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일본은 긴축재정에 들어가 공사는 1925년 완공 계획으로 변경된다. 1925년 10월 15일 총독부는 일일 휴일로 정하고 진좌제를 거행한다. 진좌제는 신사에 신상(神像)를 안치하는 의식이다. 조선신궁의 신상(神像)은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에 진좌제는 퍼레이드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상은 진좌제에 앞서 10월 8일 새로 신장한 경성역에서부터 조선신궁까지 운송되었다. 총독부는 이날 관공서를 비롯해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관민과 학생들을 강제 동원하여 진좌제에 참여시켰다. 그래서 일부에선 강제 동원을 두고 신앙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반발했다. 당시 한 기자가 쓴 글에 보면 ‘이것은 극히 졸한 일이고 아니 할 수 없으니 적어도 역사상으로 보아서 현대문명국에서는 신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아니 할 수 없는 유래와 이유를 몰각하는 행동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고 총독부를 비난했다.
▲ 조선신궁 진좌제에 앞서 완공한 경성역. 완공 이후 첫 열차에 조선신궁의 신상을 운반했다고 한다. 경성역은 일제시대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건물이었고 총독부는 역사를 경성운동장처럼 동양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로 지었다.
▲ 제 3대 조선 총독인 사이코 마토코. 진좌제에 참석하고 있는 사진이다.
남산에 있던 도성의 성벽들은 조선신궁 건물의 축조보다는 이곳에 이르는 참배도로 때문에 파괴되었다. 참배도로는 3길로 나눠서 지었고 그 중에 현재 백범광장이 있는 구간은 조선신궁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는 365개 계단이 세워지면서 성벽이 대대적으로 헐렸다. 그 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본격적인 병참기지화정책을 펼치면서 조선신궁은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같은 강압적인 동화정책의 중심이 되었다. 조선신궁 입구 앞에 16.5m에 달하는 ‘황국신민서사지주’라는 비석을 세움으로써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속에 황국신민이란 의식을 주입시켰다. 그 내용은 “첫째 우리는 황국신민이여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둘째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信愛)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셋째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 단련의 힘을 키워서 황도(皇道)를 선양하자”라고 되어있다. 이렇게 남산구간의 성벽은 일제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정책에 의해 헐린 대표적인 곳이다.
▲ 황국신민서사지주의 사진.
▲ 조선신궁 진입로에 있는 돌계단 본래는 성벽이 있던 곳이다.
▲ 조선신궁에 이르는 참배도로. 이 도로는 본래 숭례문에서 남산에 이르는 성벽이 있던 곳이다.
▲ 조선신궁 돌계단을 없애고 만든 백범광장 아래에 새로 복원한 한양도성의 성벽이다.
조선신궁과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로 헐린 구간은 현재의 동대문운동장 공원 자리이다. 1926영 총독부는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구간의 토지를 사들여 경성운동장을 짓는다. 이 구간은 성동원두(城東原頭·서울 도성 동쪽의 넓은 벌판)라 불리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저지대였기 때문에 조선의 임금들이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보완책을 고심하던 곳이다. 하지만 조선의 임금이 고심했던 역사가 무색하게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일제는 제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이곳에 대규모의 기념비적 건물을 세운다. 이 운동장은 22700평에 달하는 면적 위에 지었는데 동아시아 제일의 경기장이라 부르던 일본 코시엔(甲子園)에 비견될 만한 규모이다.
▲ 경성운동장의 본래 이름은 '동궁전하어성혼기념 경성운동장'이다. 히로히토 태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기념물이다.
▲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체육대회의 모습. 이곳은 나중에 조선민이 단결하는 곳이 되었다.
▲ 일본 동경의 코시엔 모습. 경성운동장은 코시엔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 규모로 지어졌다.
경성운동장 건설의 또 다른 목적은 바로 우민정책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창경궁을 훼손해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것처럼 한양도성의 흔적을 없애고 조선민들이 운동장에서 스포츠와 오락에 빠지기 바라며 운동장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성운동장은 민족이 단결하는 공간이 되었다. 조선체육회, 야구대회, 축대회가 열릴 때마다 경성운동장은 수많은 관중들로 가득 찼다. 특히 당시 축구 투톱이었던 경성과 평양의 축구시합이 열렸을 때는 2만여명의 관중들이 몰려와 일본 순경을 긴장시켰다고 한다. 결국 1930년대 일제가 전시체제에 들어가고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펴고 조선인들 행동에 민간해 지면서 운동경기를 제한하고 1938년에는 조선체육회를 폐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