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을 항일의 연단으로 만든 박열 의사
박열 의사는 말과 행동으로 일제에 맞선 저항의 웅변가였다.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식이 강했고,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제의 식민통치에 더욱 강한 저항의식을 품었다. 1919년, 불과 열여덟 살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에서 항일운동의 길을 선택했다.
동역에서 박열은 민족해방과 인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가네코 후미코와 만나 서로의 신념을 공유하고 항일운동의 동지가 되었다. 두 사람은 단순히 연인이 아니라 일제의 권력과 천황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사상적 동지가 되었다.
박열의 저항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천황제를 타도하기 위해 폭탄을 이용한 황태자 공격 계획을 추진했다. 실제 거사를 실행하기 전에 체포되었지만, 그 계획 자체는 당시 일본 제국의 권력 핵심부를 정면으로 겨냥한 과감한 항일투쟁이었다.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열의 진정한 웅변은 법정에서 더욱 빛났다. 그는 일본 법정에서 죄인처럼 낮추지 않았다. 조선의 전통 예복을 입고 재판정에 섰으며, 재판관의 권위에 굴복하기보다 자신의 민족적 자존과 신념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그는 재판을 단순히 자신의 형량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통치와 천황제의 부당성을 세상이 고발하는 항일의 연단으로 바꾸어놓았다.
박열에게 웅변은 단순히 유창하게 말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진실 앞에서 두려운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그가 보여준 웅변 정신이었다. 감옥과 사형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태도는 말보다 더 강한 웅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열은 전문적인 연설가와는 다른 차원의 ‘행동하는 웅변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연단은 광장이었고, 그의 무대는 법정이었으며, 그이 웅변은 조선 청년의 자존과 독립 의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3,1운동의 함성에서 시작된 박열의 저항은 동경에서 이어졌고, 법정에서는 항일의 웅변으로 완성되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웅변은 어쩌면 한 마디의 명연설이 아니라, ‘조선인으로서 결코 일제의 법정에서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삶 자체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열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정신을 웅변으로 실천한 저항웅변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사랑보다 뜨겁고 국경보다 강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1920년대 일본 동경, 조선인 청년 박열과 일본인 여성 가네크 후미코의 만남은 평범한 사랑의 시작이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과 가난과 차별 속에서 성장한 일본인 여성이 만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와 시대의 부조리를 이해하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박열의 저항시 ‘개새씨’를 읽은 후미코가 박열의 ‘제국주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시에 공감하면서 항일운동의 동지가 되었다.
박열은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23년에는 한인과 일본인이 함께 참여한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했다. 후미코 역시 박열과 뜻을 같이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당신이 옳다고 믿는 길이라면 나도 함께 가겠다.”
두 사람의 사랑은 곧 동지애였고, 동지애는 정의를 향한 결단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맞서 싸웠다. 특히,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사회에 퍼진 조선인 학살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일본 당국은 이들을 ‘대역사건’으로 몰아세웠고, 결국 박열과 후미코는 천황과 황실 요인을 겨냥한 폭탄 투척 계획과 관련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법정에 선 두 사람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정을 자신들의 신념을 밝히는 연단으로 만들었다. 특히, 가네크 후미코는 수많은 회유에도 전향하지 않았으며, 1926년 2월 26일 열린 대심원 공판에서 조선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정해 자신을 ‘박문자’라고 밝혔다.
식민지 지배국의 법정에서 일본인 여성이 조선인의 편에 서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힌 것이다. 그 순간 법정은 단순한 재판장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사랑과 정의를 증언하는 마지막 연단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두 사람의 사랑은 꺾이지 않았다.
사형 선고를 앞둔 1926년 3월,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사형선고 이틀 전 동경 우시고메 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것이다. 일본 대심원은 결국 3월 25일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박열은 조선어로 재판정을 질책했고, 가네코 후미코는 만세를 외쳤다. 열흘 뒤 천황의 은사라는 명목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감옥은 사랑의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는 또 하나의 투쟁이었다. 박열은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었고, 후미코 역시 형무소에 갇혔다.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자유롭게 만날 수도, 함께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이 찾아왔다. 1926년 7월 23일, 가네크 후미코는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본 당국은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그녀의 나이 불과 스물세 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둔 채 그녀가 먼저 떠난 것이다.
후미코의 중음은 박열에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유해는 한때 형무소 뒤뜰에 버려질 처지였으나, 박열의 변호사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유해를 거두어 보관했고, 훗날 박열의 고향인 문경으로 운구되어 묻혔다.
정의에는 국경이 없었다. 박열에게 후미코는 일본인이기 전에 자신의 신념을 함께 한 동지였고, 후미코에게 박열은 조선인이기 전에 함께 자유를 꿈꾼 사랑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했고, 그들의 정의는 민족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향했다. 그것은 사랑이 어떻게 정의가 되고, 정의가 어떻게 희생이 되며, 희생이 어떻게 역사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가문과 가문의 벽을 넘은 사랑이었다면, 박열과 후미코의 사랑은 국경과 식민지배의 벽을 넘어선 사랑이었다. 두 사람 앞에는 사랑을 가로막는 국경이 있었고, 감옥이 있었으며, 사형이라는 죽음의 벽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두 사람의 신념까지 가둘 수는 없었다.
박열은 1945년 광복절을 맞아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광복 후에도 활동을 이어갔으며,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가네코 후미코 역시 박열과 함께한 항일투쟁을 인정받아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