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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수술하기 까지 생사를 넘나들었던 나의 암( 침샘암 말기)투병생활을 회고해본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을 축구경기처럼 4단계로 크게 구분하여 말하곤 한다.
태어나서 25세까지를 연습게임, 그 뒤 50세까지 25년간을 전반전, 그 후 75세까지 25년간을 후반전, 마지막 100세까지 25년간을 연장전으로 생각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골을 넣기 위해 열심히 뛰어야 후회 없는 삶을 살고 가는 게 아닌가 하여 혼자 그렇게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며 후반전을 10년쯤 남겨둔 시기에 침샘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요즈음은 흔히 100세 시대라고 하여 건강관리를 잘하면 100세를 넘겨 장수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100세까지 활동을 하겠다는 목표는 아주 무리한 목표는 아니라고 본다.
가황 나훈아가 꿈을 잃고 11년간 방황하며 잠적한 후 70이 넘어 꿈을 찾고 화려한 컴백을 하는 모습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인생 후반전이나 연장전에서 결승 골을 터뜨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는 자연농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60세부터 젊을 때 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건강을 너무 과신하면서 병원과 약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약을 먹는 것은 독을 먹는 것이라고 현대의학을 부정하면서 자연농이 건강의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하는 강한 아집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 눈에 마치 사이비종교 교주처럼 비치기도 했을 정도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6년간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새벽부터 어두워지기 전까지 힘든 농사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아주 오래전부터 나 있었던 왼쪽 귀 뒤쪽 작은 종양이 커 지면서 몸에 이상한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의 작은 종양은 1㎝ 정도 크기로 10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병원에서도 양성이고 당장 수술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하여 그냥 지내왔던 것인데 무리한 노동과 그 당시에 개인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일이 몇 가지 겹쳐 몸이 망가지고 있었던 것을 빨리 대처하지 않고 무식하고 미련하게 병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다시 병원 문을 두드렸을 때는 종양의 사이즈가 5㎝ 정도로 커져 있었고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변해있었고 종양 부위가 간헐적으로 바늘로 찌르는듯한 느낌도 있었고 잠자다 깨어나서 침을 뱉으면 갈색으로 변해있었고 얼굴색도 정상적이 아니고 약간씩 검게 변하고 있었으며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 얼굴이 비대칭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마침네 8월1일 서울의 5대 종합병원 이비인후과 과장으로 부터 침샘암 말기 판정을 받고 말았다. 신경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고 임파선 절제를 해야될지도 모른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에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몹쓸 병에 걸린 것일까?
그때의 심정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지금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2016년 8월 11일 수술날짜가 잡혔지만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고 오진일 수도 있다는 한 가닥의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면서도 정신을 차려야 산다는 속담과 같이 진찰실을 나오자마자 바로 사무실 여직원에게 전화해서 침샘암의 최고명의를 검색도록 하여 신촌세브란스 최은창 교수에게 예약하고 조직검사 등 모든 검사자료와 10년 전 슬라이드 자료까지 챙겨서 갔지만, 결과는 똑같이 침샘암이라는 것이었다.
간호사는 멀쩡한 나에게 보호자 없이 혼자 왔느냐고 되물으며 암환자등록을 해주겠다며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동안 여러 가지 정보를 통해 이병이 굉장히 위중하고 위험한 병이라는걸 알았고 소설가 최인호 씨 등 유명인들도 이 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 이겨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사례도 보았다.
평소 나는 차분하고 대범한 편이었지만 참으로 화도 나고 겁도 나며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농장 골방에서 숙식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악의 경우까지 대비하면서 한 달 동안 힘들게 지냈다.
점점 더 커지는 느낌도 들고 간헐적으로 통증까지도 있는 종양 부위를 만지면서 수술을 하지 않고 낫게 하는 방법은 없는지?
수술하고 치료하면서 고통받다가 죽느니 그냥 지내다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혼자 고민하다 주변의 의료인들과 상의도 해보았지만, 결론은 본인이 내려야 했다.
수술날짜가 한 달 후로 잡혀서 그동안 침술가에게 침도 여러 번 맞아 보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좋지 않았고 종양을 조금씩 녹여 없앤다는 한의원이 있어 150만 원짜리 비싼 약을 사서 조금 먹어보다 다른 부위까지 망가지는 것 같아 그만두었고 자석궐사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자석 요법이 용하다 하여 200만 원짜리 기구도 사서 무용지물이 되었고 자석 요법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을 받기도 했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먹는 것도 잘 먹어야 한다고 해서 팔뚝만한 민물장어, 토종 오골계, 자연산 전복, 암에 좋다는 각종버섯등 온갖 귀한 것들을 구해 남편을 살리려는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다행히 체중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잠 못 이루며 참으로 고통스럽게 보내고 드디어 2017년 9월 8일 7시간에 걸쳐 긴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수석 코디네이터로부터 80% 이상 재발한다는 좋지 못한 소식을 들었지만 달리 선택할방법은 없었다.
수술결과는 다행히 전이된 곳이 없어 림프샘도 자르지 않고 신경도 자르지 않고 잘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문제로 나타난 곳이 왼쪽 눈이었다.
왼쪽 눈이 감기지 않는 것이었다.
기막힌 일이지만 현대의학이 해결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는 것이란다.
한쪽 눈을 오래 감지 못하면 각막이 손상되어 실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안약을 매일 넣으며 잘 관리하며 주의하란다.
1년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완전하게는 감기지 않고 있다.
수술 후 병원에 입원 일주일 하는 동안 엄청난 약을 먹고 주사약병도 5~6개 매달고 있었고 계속 피 주머니도 차고 있었다.
추석을 집에서 쇠는 게 좋겠다고 하여 여러 가지 약을 한 보따리 받아들고 퇴원, 통원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그 외에도 많은 후유증이 있었지만, 최은창 주치의와는 한 달 후 면담한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자세한 치료계획을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다.
하기야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를 면담해야지, 수술도 해야지 하는 대한민국 의사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기댈 때 없는 약자를 좀 안심시킬 방법은 없는지 아쉽다.
엄청나게 부어오른 반쪽 얼굴, 전혀 감각이 없는 반쪽, 감기지 않는 눈, 한 달 동안 거의 변화 없이 그대로였으며 음식먹고 양치질하고 세수 등 하루하루 통증과 불편함은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10월 6일 최은창 교수와의 면담이 있었다.
부기가 빠지고 상처 부위가 아물면 좋아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꼭 받아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2. 항암과 방사선 치료, 항암치료는 이혜련 교수 이창걸 교수가 담당이었지만 이들 의사는 죄수에게 형량을 선고하듯 항암 주사를 맞아야 하는 횟수와 방사선을 쬐어야 하는 횟수를 말하고 상세한 치료방법과 시간은 주사실과 방사선실에서 하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항암치료는 6번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번에 3시간 반씩 주사를 맞는 것이었다.
주사실은 칸막이가 있는 곳도 있지만, 대기자가 많은 경우는 20여 개의 자가 놓인 곳도 있었는데 6번 중 2번은 의자에 앉아 3시간 반을 주사를 맞았다.
암도 여러 종류가 있고 환자도 남녀노소 여러 명이 있고 병색이 짙은 사람, 옅은 사람, 건강해 보이는 사람,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 목도리를 하고있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환자들이 좋아지기를 기대하며 숙연한 마음으로 주사를 맞고 있는 것 같았고 나도 만감이 교차하지만 재발하지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비는 겸허란 마음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나처럼 3시간 이상 주사를 길게 맞는 환자는 거의 보지를 못 했는데 주사시간이 길다는 것은 병도 중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보내는 3시간 반은 정말 길게 느껴졌었다.
주사실에는 보호자도 출입을 제한하지 않지만 나는 항상 혼자서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온갖 좋지 않은 생각을 했었다.
방사선치료는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하루에 10분씩 방사선을 쬐는 것이었다.
얼굴에 맞는 투구모양의 특별제작한 모자를 쓰고 기계 안에 누워있으면 되지만 이때도 온갖 잡생각이 다 들며 편하지 않았었다.
방사선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귀밋머리카락도 빠지고 얼굴의 양쪽 색깔이 확연히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방사선이 왼쪽 얼굴의 세포를 태워 버리는 느낌이 들며 왼쪽 귀와 얼굴 부분이 차츰 거무스레하기 변하기 시작하였고 수염도 왼쪽은 전혀 나지를 않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현상은 치료가 끝나고도 7~8개월 지속하였고 얼굴색은 지금도 차이가 나지만 머지않아 완전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3. 치료 후유증, 수술 후 약 1개월 지나자 시작된 방사선과 항암치료는 시작 후 2주째부터 밥맛이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음식 자체가 보기도 싫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속도 미식거리기 시작했다.
이 증상은 치료가 끝나면 바로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1년이 넘은 지금도 예전처럼 맛있게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입맛이 완전해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될 것 같다.
암 치료 후에 왜 음식이 보기조차 싫을 정도로 입맛이 변해버리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미각뿐만 아니고 모든 몸의 기능 자체가 함께 망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음식이 보기도 싫고 먹기 싫어 끼니때가 다가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니까 억지로 음식을 집어넣는 고통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견디기 어려웠지만, 나의 회생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내의 심정도 헤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끔 조금이라도 당기는 음식이 있어 최고의 맛집을 찾아 멀리까지 갔어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맛을 느끼면서 먹은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때 간장게장, 생태찌게, 복매운탕, 초밥 등 최고의 맛집을 골라서 다니던 일과, 부산 기장에서 동생이 수시로 보내준 싱싱한 자연산 해산물과 어머니의 손맛을 전수받은 제수씨의 추어탕도 맛도 모르면서 먹었던 기억들이 새롭다.
몸의 면역력이 약화되어서인지 많은 약과 주사의 부작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피부의 여러 부위가 빨갛게 물집이 생기면서 가려워 고통스럽게 보낸 날이 7~8개월 이상 된 것 같고 1년이 지난 아직도 완전하지는 않다.
피부과 병원치료를 받고서야 좋아졌다.
수술한 지 15개월이 지난 지금도 부기가 다 빠지지 않았고 목을 움직이면 통증이 제법 심하고 왼쪽 얼굴의 신경이 다 돌아오지 않아 먹는 것이 아직도 불편하고 외모도 약간 비대칭 상태이다.
그렇게 크고 위험한 수술후유증이 이 정도로 회복되는 것은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주위에서 말들 하고 이제 얘기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좋아졌다는 말들을 하지만 모두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 줄 나는 잘 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이 긴 세월 겪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째던 아주 미세하나마 지금도 좋아지고 있으니 앞으로 1~2년 안에 거의 정상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기로 했다.
조급하게 생각하면 화만 치밀어 오르고 회복속도도 더 더디게 될 것이고 의사나 현대의학이 해결해줄 수 있는 후유증은 아닌 것 같다.
4, 향후 치료계획 : 혈액검사, CT, MRI 등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으면서 경과를 지켜 보고 있으나 이상징후가 없어 항암 담당 의사는 진료가 끝났고 주치의는 3개월에 한 번 방사선과 의사는 4개월에 한 번 검사와 진료를 하고 있으나 TERM이 점점 길어져 5년 후에 완치판정을 받으면 마무리 될 것이다.
5, 건강에 대한 내 생각 : 나는 자신의 건강을 너무 자신하고 있었으며 자연 농에 푹 빠져 자연농 환경과 식재료가 건강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강하게 믿고 이를 종교를 전도하듯이 열심히 알리려고 노력하고 다녔다.
가끔 내 생각이 너무 한쪽에 치우쳐있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과는 설전하기 직전까지 가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아집 같은걸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에 아프고 난 이후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는 말이 있지만 한 가지에 푹 빠지면 그것에만 몰두하여 다른 것들은 잘 돌아보지도 않는 나의 성격 탓이 더 컸던 것 같다.
6, 건강하게 100세까지 : 건강을 잃고 고통을 받으면서 방황해본 나는 요즈음 이번의 암 수술과 항암, 방사선치료가 남은 인생을 조심하면서 건강하게 살게 할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것이라고 생각한다.
호사다마라고 살아오면서 비교적 좋은 일들이 많았었는데 옛날 같으면 생의 마감을 준비해야 할 나이에 감당하기조차 힘든, 거의 죽을뻔한 고통을 긴 세월 겪으면서 나는 많은 공부를 했고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건강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합리적이고 올바른 건강상식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산소와 영양이 풍부한 깨끗한 피가 온몸 구석구석을 활기차게 돌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보통의 의사들은 환자가 진료실을 찾으면 약과, 주사, 수술 등으로 일시적으로 통증을 완화하는 조치들을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되지는 못한다고 본다.
마치 고여있는 더러운 물에 파리, 모기약을 뿌려 이들을 일시적으로 없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파리 ,모기는 다시 들끓게 된다, 근본적으로 물을 맑게 하고 흐르게 해야 이들의 서식을 막을수 있는 것이다. 병도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더 자주 더 강한 약을 써야 일시적으로 라도잡을 수가 있는 원리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병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기본이 회복되도록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피를 맑게 하는 것을 의사에 따라서는 피의 해독, 혈액 건강, 인체정화,내몸훈련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맑게 하는 방법은 대체로 큰 차이는 없다.
만병 일독, 통즉 불통, 불통즉통이란 피의 흐름이 좋으면 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우선 먹거리는 샐러드, 주스 채소나 곡물 중심으로 하면 좋고 운동도 적당하게 무리하지 않게 하고 일도 과로하지 말도록 하며 마음은 편안하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하면 피는 깨끗해지게 되어있는 것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더 보태고 주의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큰 틀은 아주 간단하기 때문에 누구나 스스로 피를 맑게 하여 건강한 몸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원인 모른다거나 유전적으로 타고났다는 고혈압, 당뇨, 콜레스톨, 비만등의 대사질환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7, 자연농과 건강 : 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역시 먹는 것이다.
인류가 약 1만 년 전에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300여 년 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먹거리가 재배, 조리, 가공식품의 방향으로 급격히 변화하였는데 우리 인류의 긴 역사로 보면 이 짧은 기간에 유전자가 같이 변하지 못하여 여러 가지 질병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는 서울대 홍윤철 교수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한다.
그래서 기존 대사질환 외에도 최근에 급격히 증가하고있는암, 치매, 알츠하이머, 파킨슨, 뇌 질환 등 대사질환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먹거리형태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향이라고 그의 저서 "질병의 종식"에서 설명한다.
하지만 요즈음 생으로 먹을 수 있는 채소나 곡물은 찾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생으로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과일, 채소, 곡물은 오로지 자연 농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농의 식재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들의 예방과 치료에 가장 좋은 보약이 아닌가 판단된다.
자연농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첫댓글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암과 같은 위험한 병도 자연농의 삶을 영위하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임상실험으로 보여준것이라 생각하여 기록으로 남겨 보았습니다.
건강 잘 유지하시길 기원합니다.
예,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자연재배로 많은 열정을 가지시고 그동안 힘든 시절을 보내신것 같습니다. 힘내시고요. 반드시 완쾌되리라 믿습니다.
예, 이제 많이 좋아졌습니다. 건강이 제일이니 항상 유념하세요,
힘든 시절 희망과 빛이 되어주신 큰아버지. 제 인생의 멘토. 꼭 나으세요. 꼭 나으실겁니다.
그래, 이제 고비는 넘긴것 같다. 맡은일 잘하고 건강도 잘 챙겨라.
이제야 어르신 소식을 보았네요.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일전에 부부가 함께 찾아뵙고 소중한 말씀 많이 들었었습니다.
그때 맛본 혜림원에서 수확한 블루베리의 맛은 선생님의 열정이 담겨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이번 역경은 삶의 열정에 대한 쉼표로 생각합니다.
100세시대에는 쉼표가 새로운 삶의 에너지원이 된다고 봅니다.
혜림원에 계시면 다시 한번 찾아가서 뵙겠습니다.
건강하신 모습을 다시 뵙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