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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삼(1년생 인삼)의 고향 평창리 평촌마을 | ||||||||||||||||||||||||||||||||||||
고려인삼의 자존심 용삼(龍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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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韓流)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한류의 원조는 인삼이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수많은 약재 가운데 인삼만큼은 고려인삼을 으뜸으로 쳤다. 자기 땅에서 난 인삼의 약효가 고려인삼에 훨씬 미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 경작인들 정착, 재배 용삼(龍蔘)은 용인에서 생산되는 인삼을 가리킨다. 용인은 일찍부터 인삼으로 이름났던 고장인데 용인에서 생산되는 인삼을 용삼이라고 불렀다. 용인 각지에서 수집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일제시대 이전부터 용인에서 인삼재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록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재배규모나 판매수익을 알기 어렵다. 다만 용삼의 성가가 대단했다는 자랑은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용인의 인삼재배에는 개성사람들의 공이 크지. 기업농이라고 할까. 제대로 된 농장경영을 했으니까. 나중에 주위 사람들이 배워서 농사 많이 했고.” 멀마 전 상가(喪家)에서 만난 전 용인인삼조합 관계자의 회고다. 이후 용인의 독농가들이 하나 둘씩 인삼경작에 합류하면서 용인의 인삼경작 면적이 대폭 늘어나게 되고 마침내 용인인삼조합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용인인삼조합의 관할구역이 가장 컸을 때는 인근의 화성, 시흥, 광주, 이천, 여주와 강원도 전체까지 관할했으니 당시 인삼계에서 용인이 가지는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인삼 파종과 성장과정 인삼은 씨앗으로 번식하는 작물이다. 초여름에 하얗게 핀 꽃이 칠월이 되면 붉게 익는데 빨간색으로 인해 마치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완전히 익은 종자는 손으로 따서 물에 씻어 겉에 있는 과육(果肉)을 제거하고 순수한 종자만 선별하여 모래에 섞어 묻는다. 그리고 약 백일동안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는데 이를 개갑(開甲)시킨다고 한다. 인삼종자는 완전히 익었다고 해도 배아(씨눈)가 덜 발달한 상태여서 그대로 심으면 2년 후에나 발아된다고 하는데, 개갑은 이를 인공적으로 단축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가을이 되면 묘삼이 1년생이 되는데 이때 캐어 선별한 다음 본포에 옮겨 심게 된다. 본포에 심은 묘삼은 5년의 성장기간을 거쳐 6년근 용삼이 되어 홍삼원료로 수납하거나 소비자에게 팔리게 된다. 묘삼의 고향 평창리 평촌마을
용인에서는 양지면 평창리 평촌마을이 대표적인데 전문적으로 묘삼농사만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묘삼농사는 1년으로 농사가 끝나기 때문에 자본회전도 빠르고 수익도 다른 농사에 비해 높았기 때문에 많은 농가들이 동참하였다. “우리 마을이 60호 가량 되었는데 절반 이상이 묘삼농사 했지. 크게 한 사람들은 별로 없고. 다들 부업이지 뭐. 농사지으면서 한 거지. 다른 농사보다 수입이 나으니까. 나도 묘삼으로 4남매 공부시켰어.”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유 노인의 회고다.
이 노인의 집으로 찾아가니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오충근씨라고 그분이 와서 인삼을 했고 배워서 묘삼농사를 지었지. 인삼만 전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일부는 자기가 심고 남는 것은 팔아서 자재도 사고. 그러면 비용이 덜 들지 않아? 나머지는 전부 부업이야 부업.” 마을의 대부분이 묘삼농사에 나서기는 했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보통 인삼씨앗으로 한말에서 두말 정도였고 많이 하는 경우 너덧 말 정도였다고 한다. 이 경우 150~160평 정도를 심을 수 있는 양이었고 한다. 특히 평창리는 토질이 사질양토로 묘삼경작에 적합하고 마을이 비교적 지대가 높아 물빠짐이 좋으며 북향으로 경사져 있어 해가림에도 유리한, 인삼경작에 좋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마을 옆에서 마사토를 구하기 쉽고 주위의 산도 높아 퇴비를 생산하기도 수월한 편이었다. 양직 방식 이용 묘삼 재배
묘삼도 퇴비를 잘게 빻고 이를 산에서 막 파온 마사토에 혼합하여 두둑을 지은 후 종자를 파종했다. 또 전면에도 발을 쳐서 햇빛관리를 했는데 아침이면 걷어 올리고 저녁이면 내려주기를 반복해야 했다. 이러한 재배방식을 양직이라고 하는데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들고 관리가 어려운 단점이 있는 대신, 양질의 묘삼을 생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고생 많이 했지. 처음엔 덤프차를 불러도 삽으로 마사를 퍼 실었지. 물도 져다 주고. 나중에 기계도 사용하고, 펌프도 사용하긴 했지만. 아무튼 고생많이 했어. 마사토 파오던 고갯길이 평지가 됐다니까.” 매일같이 주어야 하는 물도 일일이 물지게로 져다 조루로 뿌려야 했으니 지금보다 몇 배나 힘이 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 마사를 파오던 고갯길이 평지가 될 정도로 묘삼재배를 했다고 하니 당시 마을사람들의 고생이 훤히 보이는 것 같다. 평창리 일대에서 생산되던 묘삼은 대부분이 양직재배방식을 사용했으며 여기서 생산된 묘삼은 용인관내에 주로 공급되었다. 나머지는 용인인삼조합의 관할이었던 광주와 이천, 여주, 화성 등지는 물론, 멀리 금산까지 팔려나가 용삼의 성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반면 토직은 밭의 흙을 그대로 두둑을 지어 씨앗을 파종하는 것으로 노략과 경비를 크게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양질의 묘삼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두둑을 짓는 흙을 일일이 체로 쳐주어야 했는데 생각해보면 토직은 양직에 비해 최소한의 절약인 셈이다. 용인, 6년근 홍삼원료 생산 홍삼과 백삼은 말 그대로 붉고 흰 인삼을 가리킨다. 밭에서 막 캐낸 인삼을 수삼(水蔘) 또는 생삼(生蔘)이라고 하는데 이를 가공하는 방법에 따라 홍삼과 백삼이 나뉘게 된다. 즉 홍삼은 증기에 쪄서 말리기 때문에 붉은색을 띤다. 몇 년전 인삼왕 임상옥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상도〉에 나오는 소위 ‘구증구포’도 바로 홍삼제조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삼을 그대로 껍질을 벗겨 말리면 흰빛을 띠게 되는데 이를 백삼이라고 하며 후가공에 따라 곡삼(曲蔘)이나 반곡삼, 직삼(直蔘)으로 나누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홍삼이 백삼에 비해 장기보관이 용이하고 제조과정에서 암과 같은 질병에 유효한 성분들이 추가로 생성되기 때문에 훨씬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 홍삼은 국가 전매제도에 묶여 있었다. 담배와 인삼이 전매품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시대가 흐르면서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제조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전매제도하에서 홍삼은 반드시 6년근 인삼으로 만들었고 백삼은 4년근에서 6년근을 많이 사용했다. 금산과 풍기는 인삼으로 이름난 고장이지만 이전에는 백삼제조가 활발했던 곳이다. 용인은 6년근 홍삼원료를 생산하는 대표적 고장으로 대부분 전매청에 수납하는 관계로 일반 소비자는 용인산 6년근 인삼을 쉽게 구하기 어려웠다. 용인인삼조합도 역사속으로 연작(連作)이 거의 불가능한 인삼경작의 특성상 용인 관내에서의 경작면적이 감소되고 급격하게 도시화되면서 경작인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생산량도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용인 관내의 재배면적이 감소함에 따라 자연히 묘삼의 수요도 줄어들게 되고, 평촌마을 사람들은 경작지의 이동에 따라 재배지를 옮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마을의 묘삼농사도 자연히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인삼조합마저 이천으로 이전되어 용인인삼조합에서 동부인삼농협이 되어 이름마저 바뀌어져 인삼과 용인의 인연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용인의 인삼인들이 가졌던 인삼에 대한 열정이나 용삼의 명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들의 발자취가 용인의 자랑이 되고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것 또한 우리들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의 흔적들이 희미해지는 지금, 보다 많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평창리 평촌마을이 있다. <증언> 김익배 65. 남 <전 용인인삼조합 전무> 이대호 74 남, 유홍섭 남 68. <자료사진 제공> 양지면 송문리 우리인삼 원길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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