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6월 17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법화경 14번째 안락행품 이 되겠습니다.
안락행 품 참 이름이 좋지요, 안락행 품! 우리나라 보살님들의 이름 중에서도 안락행 이라고 하는 보살명이 있는데, 편안하고 즐거운 그런 삶이라는 의미가 되겠네요.
이 안락행 품은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보살로 하여금 말법시대에 법화행자가 4가지 안락행에 행처 와 친근처에 안주하며, 법화경을 수지독송 하라고 설법 하는 거지요. 이 안락행 품은 그동안 대승경전으로서의 왕!
경중의 왕이라는 법화경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물론 법화경을 어떻게 설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인가에 대한 가르침이고, 또 앞의 품에서 팔십만 억 보살들이 법화경을 펴겠다고 원력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비구니들도 원력을 많이 세웠어요. 그런 내용들이 앞에 있었지요.
법화경을 잘하겠다고 원력을 세운 이들은 많았는데 그들에게 법화경 설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이러이러한 것은 주의를 하고, 이러이러한 것은 삼가하고, 이러이러한 곳에는 가지 말고, 이러이러한 곳에는 가고 등등, 아주 구체적인 법사로서, 법화행자로서의 생활지침을 소개하는 내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살펴보면서 생각 하도록 하지요.
제목을 살펴보더라도 이 법화경을 어떻게 설할 것인가? 또 수행하는 방법을 해석 하는데 있어서 몸의 안락행(4 안락행: 身 口 意 誓願) -몸의 안락행. 입의 안락행, 마음의 안락행 서원의 안락행. 서원이 중요 하다고 제가 늘 강조를 드렸는데, 여기도 신 구 의 다음에는 서원이 있어야 된다는 뜻에서 서원 안락행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화경의 존귀함을 한 번 더 강조하는데 거기 계명주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법화7유중에서 6번째 비유가 되는데 이것도 빼놓을 수 없는 비유지요.
“상투에 얹어 놓은 이 구슬은 다음의 왕의 대를 이을 사람에게만 주지 그 외 아무에게나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법화경은 비유하자면 마치 그와 같은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4가지 안락행의 성취가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조금 분위기가 다른 내용들이 되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이치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법화행자로서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편도 많이 들어 있고, 법사로서. 법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보살로서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의 상황과 민족들의 관습이라고나 할까요.
풍속 관습이 나라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고 특히 인도 같은 데서는 부처님 당시가 다르고 또 5~6백년이 지난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의 모습이 다르고, 지금의 모습도 다르지요. 그런 시대적인 상황에서의 법화행자로 법화경을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행위의 모양새가 어떠해야 되겠는가, 불자로서의 그 당시의 생활규범 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하고 안 맞는 것이 많아요사실은..
그렇더라도 이것은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가장 모범이 될 수 있는 그런 수행자 또는 법화행자,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화경을 전하는 그런 사람으로서의 갖춰야할 규범 이라고 생각 하시고...
그렇다면 방편이 많은 것이죠. 방편과 진실을 말할 때, 진실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국가에서든지 다 통하는 것이 한결같이 적용되는 것이 진실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그 민족과 시대와 풍속에 따라서 서로 안 맞을 때는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방편이라고 나눠서 생각 하는 것이 제일 쉽고 간단한 방법 이라고 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요?
방편과 진실의 차이를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입니다. 안락행 품이라... ‘법화경은 어떻게 설하는가’
p.67
제14 안락행 품(安樂行品)
1.법화경은 어떻게 설 하는가
1 그 때 문수사리 법 왕자(法王子) 보살마하살이 부처님
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들이 매우 희유(稀有)하여 부처님을 순종하는 까닭에 큰 서원(誓願)을 내고 미래의 나쁜 세상에서 이 묘법연화경을 보호(保護)하고 지니며 읽고 해설하려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미래의 나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이 경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비구니들도 그렇게 하고 보살들도-보살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남녀의 분별이 사실은 없고 보살행을 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거지요.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미래의 나쁜 세상에서 이 경을 설하려면 네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물러야 하느니라.
앞서 제목에서 소개해드린 신 구 의 서원!
이렇게 네 가지 안락행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을 지니고 법화경을 설해야 한다는 것이 보살로서의 모양새고 품위이고 그렇지요. 스님이든지 불자라고 소문이 나있던지 아니면 먹물 옷을 입었던지, 스스로 나는 부처님의 제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어디에서든지 품위를 지켜야 하고, 모양새 있는 행위를 해야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 욕을 먹이는 일이 되거든요. 불자가 잘못하면 부처님께 욕이 돌아가는 수가 있거든요. 아들이 잘못하면 아버지에게 욕이 돌아가듯이...
자식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돌아가신지 10년 20년이 된 부모님께 아주 이름을 빛나게도 할 수가 있고, 이름을 욕되게도 할 수가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이치가 있듯이 정말 법화행자 라면 보살로서의 모양새와 품위가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뜻이니까 그런 원칙을 염두에 두고 보면 그런대로 ‘아 이것은 그당시 사람들의 관렴에 근거를 한 품위 지키기 이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될 줄 믿습니다.
p.68
2. 수행방법(修行方法)을 해석하다
(1) 몸의 안락 행(安樂行)
① 보살의 행(行)할 곳
2 첫째는 보살의 행(行)할 곳과 친근(親近)할 곳에 편안히 머물러야 중생들에게 이 경을 널리 설할 수 있느니라.
문수사리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행할 곳이라 하는가.
“행처” 라 그래요. 행할 곳. 그다음에 “친근처” 라 그렇게 합니다. “행처와 친근처”
만일 보살마하살이 욕됨을 참는 자리에 머물러 있다
면 부드럽고 화평하고 착하고 순종하면서 포악(暴惡)하
지 않아야 하며,
당연 하죠. 불자로서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또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마음가짐은 당연히 이래야할 줄 믿습니다. 또 마음에 놀래지도 않아야 하느니라. 놀래는 것도 없고 포악한 것도 없고 착하고 순종하고 화평하고 부드럽고, 참 좋은 마음가짐이죠.
또 법(法)에 대하여 행(行)한다는 것이 없이 행하며 참 좋은 말이죠. 불교에만 있는 표현법입니다. 행하면 행하고 안 행하면 안행하지 ‘법에 대하여 행한다는 것이 없이 행한다’ 또 행한다는 것이 없이 행 할 뿐만아니라 행하되 행함이 없고 행하지 아니하면서 또한 행한다. 그렇지요.
세속적인 우리의 관습상의 논리로서는 말 같지 않지만, 불교는 불교만의 독특한 경지가 있기 때문에 그런 세속적인 논리에 설사 맞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 이치를 이해 하려면 이런 데에 익숙해 져야 합니다.
‘스님들이 세속 법을 어긴다.’ 그전에도 언젠가 말씀드렸던가요? 스님들이 세속법을 어기는 것은 상관없어요.
불법을 어기지 않아야 되는 거죠. 부처님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우리는 곧잘 합니다.
세속법이야 그것이 어겨졌든 안 어겨졌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법칙을 어기지 않는 것이 우리 출가 스님으로서 불자로서는 우선하는 일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불교의 이치를 표현 하는 데는, 깨달음의 이치를 표현하는 데는 세속적인 논리에 맞고 안 맞고에 구애 받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格外(격외)” 라는 말도 쓰고 여러 가지 표현이 있지요. 모든 법의 실상(實相)과 같이 관찰하며,
모든 법의 실상과 같이 관찰한다. 실상 알기 참 어려운거죠.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를 두고라도 그것의 참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라고 했을 때,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행함도 없고 분별하지도 않아야 하느니라.
행하되 행함이 없고 분별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런 의미가 포함돼 있지요.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행할 곳[行處]이라 하느니라.
行處! 보살의 행처는 최소한도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는 것, 부드럽고 화평하고 착하고 순종하고 포악하지 않아야 하고 놀래지도 않아야 하고 법에 대해서 행한다는 것이 없이 행하고 모든 법의 실상과 같이 관찰하고 행함도 없고 분별 하지도 안아야 한다.
저 앞에서는 오종법사라고 해서 수지 독 송 서사 해설 이런 것들이 전부 법사에 해당되는데, 여기서는 보니까 법사로서의 요건이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② 보살의 첫째 친근(親근)할 곳
3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친근할 곳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국왕이나 왕자나 대신이나 관원들을 친근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그 뒷힘을 이용한다든지 아니면 이양을 생각한다든지 어떤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친 하는 일, 이런 것을 주의 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친해서 덕 보려고 한다든지 그건 수행자로서 모양새가 그렇잖아요. 남이 보기 이전에 자신부터 마음이 찝찝하지요 사실은... 아무나 그렇게 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나 불법을 공부해서 그 나름대로의 자기의 소신이 있는 사람은 벼슬 하는 사람, 돈 많은 사람, 이렇다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피하지요. 피할 필요도 없고 가까이할 필요도 없고, 굳이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요.
또 외도(불교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인 범지(바라문교도)나 니건자(자이나교도)들과 세속의 문필을 일삼은 이
‘세속적인 문필을 일삼는 이’ 그 당시 그런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세속적인 문학이나 철학을 일삼는 그런 사람들도-그길로 빠져 나가버리면 그건 불교하고는 거리가 멀지요, 그런데 사실 솔직히 말해서 천지도 모르니까...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서도 문학을 한다고 하고, 무슨 예술을 한다고 하고, 그림을 그린다느니 글씨 쓰는 연습을 한다느니 그 외 세속적인 취미생할을 살린다든지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자랑을 삼는 경우까지 있거든요. 그런 것이 길이 아닌데 승려로서 또는 수행자로써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정말 길이 아닙니다.
길이 아닌데 그것도 하나의 교화의 방편이라고 생각을 하고, 정말 교화의 방편이라고 생각을 하고 하면 그런대로 괜찮지만, 그 생각도 미처 안하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도연초 에 보면 어떤 사람이 나중에 법사가 되고 싶어서, 법사가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 당시 교통수단 이 말 이니까 말을 타고 법회에 초청을 받아 가기도 하고, 또 그때 일본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풍류객으로서의 어떤 요건도 갖추어야 되는 걸로 돼있어요 법사가...
법사가 되려면 그런 것부터 해야 된다고 그래서 말 타는 연습부터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높은 자리 좋은 자리에 가서 노래도 한곡 해야 되는데 그래서 그거 생각 하고 노래하는 것도 배우고 그러다 보니 말 타는 것 배우고, 노래하는 것 배우고, 한량들 하는 것부터 배우고 나니, 정작 법사가 갖춰 야할 공부는 하나도 안했더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속의 문필을 일삼는 이’ 가까이 하지도 말아야 하거늘 이것을 일삼는다면 정말 앞뒤가 안 맞지요.
그래도 우리가 경전을 이야기 할 때는 최소한도 가차 없이 이런 것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저도 이 속에 포함되고 그 외 많은 스님들이 이 속에 포함되는 이들이 있어요. 저의 도반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러나 우리가 이 위대한 대승경전을 앞에 놓고 가차 없이 이런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세속의 문필을 일삼은 이와 외도의 서적을 찬탄하는 이와 문학 한다든지 그 외 다른, 읽을 꺼리야 물론 많지요.
그렇지만,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불법공부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로가야타(유물론자)와 로가야타 를 거슬리는 이(쾌락주의자) 를 친근하지 말라. 또 흉악한 장난(권투 등등. 저도 T.V에서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것도 가까이 해선 안 된다는 것이지요)과 서로 때리고 씨름하는 일과 나라연(재주 부리는 사람, 마술하는 사람, 광대들, 서커스 하는 사람들) 등의 가지가지 장난꾼들을 친근 하지 말라.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화경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런데 에 관심이 많고 취미가 있고 거기에 심취해서 시간을 소비한다면 그건 모양새가 아니지요. 결코 그건 모양새 가 아닙니다. 또 그런 데에 시간을 보내다보면 공부는 뒷전 이 되고, 공부에 대해서 전혀 깊이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무한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보통사람 들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 정력을 그쪽으로 빼앗기면 공부 하는 데에 그만치 손해를 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을 이렇게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또 전타라(도살하는 사람)와 돼지. 양. 닭. 개를 키우는 이와 사냥하고 고기 잡는 나쁜 짓을 하는 이들을 친근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사냥 하는 이와 어부, 돼지를 키운다든지 양을 키운다든지 닭을 키운다든지 개를 키우는 이런 것들도 다 청정한 불법의 기준에서 보면 맞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하고 가까이 지내고 어울려서 그렇게 하면 ‘저 법 사가 저런 사람들 하고 어울려서 저런’ 것을 보게 되니, 그것도 모양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만일 오거든 그들에게 법(法)을 말하여 줄 뿐이고 바라는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법을 들으러 오면 당연히 법은 설해줘야 되지요.
그렇지만 그들에게 바라는 바가 없어야 한다. 그들이 그런 수단을 가지고 쌓은 재물이라든지 이익을 법사가 그걸 받아쓴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모양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문승(聲聞乘)을 구하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을 친근하지도 말고
소승들 이지요. 대승, 법화경 사상에서 보면 付佛法外道(부불법외도)라. 불법에 붙어서 사는 외도다. 간판은 불법이지만 불법이 아니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도 친근하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문안 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 사람들에게 안부도 물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방안에서나 거닐 때에나 강당에서도 함께 있지도 말라.
이 당시 “법화경이 대중 불교운동의 선언서다,” 이렇게 제가 표현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사람들을...
이건 정말 법화경은 대중 불교운동이요. 대승불교 운동이고 부처님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그런 운동이기 때문에 여기에 반하는 그런 사람들하고는 일단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정에서의 생각에 ‘뭐 가까이 좀 하고 토론도하고 의논도 교환하고 이러면 좋지 않겠나?’ 하지마는 그건 지금 우리의 입장이고, 법화경이 세상에 나와서 정말 부처님의 정신을 드러내려고 할 때 그 겪는 그런 어려운 갈등과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가 이해가 가요 사실은...
혹시 찾아오더라도 적당하게 법을 말하여 줄 뿐 바라는 일이 없어야 하느니라.
5 문수사리여, 또 보살마하살이 여인(女人)의 몸에 대하 여 욕망을 낼만한 모습으로(모습을 취하여) 법을 말하지 말고 그러니까 여인이 오면 여인 이라고 하는 말은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어요. 굳이 남녀 분별할 필요 없이, 이성을 보고는 이성적으로 욕망을 낼만한 어떤 모습을 취해서 법을 말하면 법이 어디로 가겠어요. ‘좋은 법을 말하면서 생각은 엉뚱한 데 가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고....
보기를 좋아하지도 말라. 만일 남의 집에 들어가더라도 소녀. 처녀. 과부들과 더 불어 함께 말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런 것 들이 그 당시로서 정말 모양새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부처님을 대신한 법화행자로서 전법사로서 부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정말 품위 있고 모양이 나는 그런 행동거지! 그것이 여기서 요구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다섯 가지 사내 아닌 사람(五種不男)을 가까이 하거나 친구를 삼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건 오종 불남. 다섯 가지 남자이면서 남자답지 않은 그런 오종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선천적으로 남자노릇을 못하는 남자.
두 번째는 보름 보름마다 남자와 여자가 뒤바뀌는 사람.
세 번째는 말하자면 “투우” 라고해서 전혀 남자행세를 못하다가 남의 어떤 성행위를 보아야 비로소 남자행세를 하는 그런 병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네 번째는 남자의 성기가 상대에 따라 변하는 그런 병이 있는 남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희한하지요?
이랬다 저랬다, 그렇게 남자로 여자로 그렇게 뒤바뀌는 병도 있는 모양 이예요. 속속들이 알기도 많이 알아요. 그 다음에 병적으로 남자행세를 못하는 사람, 이것을 오종 불남,
다섯 가지 사내 아닌 사내를 가까이 하거나,
그런 사람도 이상하니까 법사로서는...
어떻게 보면 “넓은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하는 자비심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법사로서의 어떤 품위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이해해야겠지요.
혼자서 다른 이의 집에 들어가지 말고, 만일 볼일이 있어서 혼자 들어가게 될 적에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염불(念佛)을 하여야 하느니라.
그래서 몸도 마음도 전혀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 우리가 상상이 되고 그려지지요?
만약 여인에게 법을 말하게 되거든 이(齒)를 드러내어 웃지도 말고, 가슴을 드러내지도 말라. 법을 위해서라 도 친하지 말아야 하거든, 하물며 다른 일이겠는가.
법 때문에라도 친해서는 안 된다, 이거지요. 이성간에 그렇게 친하게 되면 결국은 본능적인 인간의 모습이 들어나게 되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 보면 모습 또는 모양새 품위 이런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이...
‘이를 드러내어 웃지도 말고 가슴을 드러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나 이 어린 제자나 사미나 어린애 기르기를 좋아하지 말 며, 같은 남자끼리도 어린 제자 기르지 말라. 사미 기르기를 좋아 하지도 말라. 그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한 스승을 섬기기를 좋아하지도 말아야 하느니라.
남자로서 여자에게 품위를 지켜야하고 어떤 마음가짐 몸가짐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자와 남자 사이에도 어린 사미들을 너무 가까이 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모양새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 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법화행자에 대해서 품위 지키기를 요구하고 있느냐. 그런 뜻으로 우리가 이해해야 되겠지요.
6 항상 좌선하기를 좋아하여 한적한 곳에서 마음을 거두어 들여서 닦아야 하느니라. 문수사리여, 이것을 첫 째 친근할 곳이라 하느니라. 제 일 친근처 다 이것이죠.
몸의 안락행중에 나오는 친근할 곳입니다
③ 보살의 둘째 친근할 곳
7 또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이 공(空)하여 실상(實相)과 같음을 관찰하여 뒤바뀌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물러 가지 도 말고 굴려지지도 말아야 하느니라.
‘모든 존재가 공해서 실상과 같음을 관찰 한다’ 공하면서도 존재하고 존재하면서도 공한 것. 실상 공으로만 보면 “공관”이라하고, 공을 실상으로, 실다운 모습으로 보면, 그것이 우리가 흔히 익숙한 표현을 빌리면 “眞空妙有(진공묘유)” 그러지요. 참으로 공 한 가운데서 묘하게 존재 하고 또 묘하게 존재하면서 공하고, 이런 존재라는 것. 그것이 실상을 실상대로 파악한 입장이지요. 그래서 뒤바뀌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물러가지도 말고 굴러가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치우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있다는 데에도 치우치지 말고 없다는 데에도 치우치지 말고, 공관을 뛰어 넘은 거예요.
제가 늘 3단계로 이야기 하지요? 空(공) 假(가) 中(중) 또는 諸法假相(제법가상) 諸法空相(제법공상) 諸法實相(제법실상)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공으로 보는 것은 공상 이지만, 공에서 또 妙有(묘유)로 겸해서 보면 實相이 되는 것입니다.
실상은 그냥 그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텅 빈 공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말은 제법가상이지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제법을 공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산은 다만 산 일 뿐이고 물은 다만 물 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제법을 실상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견해를 크게 3종으로 나누어서 정리를 하면 아주 알아듣기 쉽습니다.
불교의 교리에서도 경전이나 기타 많은 조사스님들이 공부하고 정리한 것을 보면 거의 그렇게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스님은 스스로 ‘中道狂(중도광)’ 이라면서 전부 중도 하나로 꿰뚫어서 이야기 하고는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제가 금방 말씀드린 것으로 표현 하자면 제법실상을 中道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그러나 일반근기는 제법가상에 해당 되고 조금 더 공부한 사람들은 제법공상에 해당되고, 거기서 궁극적으로는 제법실상 곧, 중도에 해당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생 중도 이야기를 하고 스스로 “중도광이다.” 이렇게 표현 하면서 중도로 일관되게 경전이나 어록을 해석하는 것도 상당히 뛰어난 해석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그래 여기서 ‘뒤바뀌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물러가지 도 말고 굴러가지도 말아야 된다.’ 치우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공에도 치우치지 말고 유에도 치우치지 말고...
마치 허공의 성품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이 온갖 말이 끊어져서 생기지도 않고 나오지 않고 일어나지도 않아야하느니라.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실로 있는 것이 아
니어서 한량없고 그지없고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어야 하느니라. 다만 인연(因緣)으로 있는 것이며, 뒤바뀌어 생기는 것이므로 설 하느니라.
‘다만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 공한 것이다. 인연으로 있는 것이라는 이것이 空(공) 가운데 有(유)이고 유 가운데 공 인 것이지요. 제법을 실상으로 보는 것이고 중도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중도로 존재해요. 존재의 원리가 중도입니다. 이것은 중도 입장에서 모든 사상과 법을 이해하는 차원이, 중도의 입장에 서서 또는 제법실상의 입장에 서서 설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이러한 법의 모양을 관찰하기 좋아해야 하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둘째 친근할 곳이라 하느니라.
‘항상 이러한 법의 모양’ 항상 이러한 법의 모양이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제법실상의 입장이지요.
제법실상 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空(공)한 것으로도 보고 有한, 있는 것으로도 보고, 있는 것은 연기로 있다. 그러므로 공으로 돌아간다. 공으로 돌아가지만 또 이렇게 버젓이 말을 하고 말을 듣고 이러지 않느냐 나 자신부터도...
우리마음이 첫째 그렇게 생겼고 물질도 역시 그러한 원리에 의해 생겼습니다. 그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그렇게 존재하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안 되고 없다고 해도 안 됩니다. 물질도 마음이 있다고 해도 안 되고 없다고 해도 안 됩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표현이 맞는 것이지요. 세속적인 말로는 말 같지 않더라도, 이치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견해의 차이고 시각의 차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법화경이야기가 좀 독특하지요?
그러나 법화행자로서. 보살로서. 그리고 바람직한 불자로서 그 모양과 품위와 격식, 이런 것 들을 제대로 갖췄을 때 이러한 표현으로 말할 수 가 있습니다.
여기에 표현된 대로라면 상당히 모양새가 있고 품위가 있고 또 그 마음가짐도 아주 뛰어나고, 법화경을 부처님을 대신해서 설할 만한 모든 외적조건 내적조건을 제대로 갖췄다고 이해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법화경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록: 수경심. 정리: 대원성.
첫댓글 행함없이 행하는-無爲行布施가 참다운 보살행 이며, 성내지 않고 부드러운-和顔愛語가 진실한 공양 이로다!
미완이라...감사합니다. ()()()
대승경전의 왕! 법화경을 설하는 법사로서, 법화행자로서의 수행방법에는 신 [身]. 구 [口]. 의 [意]. 서원 [誓願], 생활규범이 되는 네 가지의 안락행[安樂行]이 있다. 대원성님!! 주말에도 이렇게 정성스럽게 올려주신 법공양에 감사드립니다. 나무묘법연화경!!!......_()()()_
대원성님 감사합니다..()()()
대원성님 늘 감사합니다._()()()_
대원성님, 다음 주를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요일 되세요. 고맙습니다._()()()_
환성님, 진여혜님, 청비님, 청정님, 무위자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고 많으시네요....대원성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요사이 법화경 강좌 시간에 참석을 잘못해서....이렇게 글로 읽을 수 있으니 참 다행입니다.....감사합니다...합장...
거듭거듭. 반복반복 들어도 법문은 좋다는걸 새삼 말할 필요 없지요. 법문 다음으로 반가운것은, (글쎄 이런말 해도 되나 몰라) 음~ 세상만사 무위정법인데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않는,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삽시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 소리가 법문 다음으로 반갑지요. 왜냐? 정리 작업이 힘든건 저~ㄹ대, 겨~ㄹ코 아
니고, 빨리 게시판에 올려 드리고 싶어서 "오늘은 여기 까지..."가 반가운 거죠.
스님께서 '오종불남'을 설하시는 가운데. "(부처님은) 속속들이 별걸 다 아신다"는 대목에서 법우님들도 저, 처럼 웃어 보세요. 정리하면서 또 어느순간에 피식 피식 웃음이 나오네요. 그리고 날마다님! 저, 님의 은혜로 날마다 포롱포롱 합니다.(뜻일랑 니 마음대로 때려 잡으슈)
갓 신입이 대원성님께 ()()()! 고해바다를 건너는 동안, 미추고락의 숫한 인연들 많았지마는 이 나이(?) 들도록 깨달음 없고 무중력의 공간에 버려진 쓰레기처럼 부유하고있는 이즈음, 대원성님의 인연법이 절 부축하는군요.대원성님의 법문정리는 곧 "오체투지"의 공양임을 압니다. 매맞아 싼 중생에게 채찍의 자비를---
'보살은 行한다는 것이 없이 行할뿐 아니라 行하되 行함이 없고 行하지 아니하면서 또한 行해야 하느니'...._()()()_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
보살의 行處!는 참는 것, 부드럽고 화평하고 착하고 순종하고 포악하지 않아야 하고 놀래지도 않아야 하고 법에 데해서 행한다는 것이 없이 행하고 모든 법의 실상과 같이 관찰하고 행함도 없고 분별 하지도 않아야 한다...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_()()()_
菩薩行處 親近處..._()()()_
제법실상 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空(공)한 것으로도 보고 有(유)한, 있는 것으로도 보고, 있는 것은 연기로 있다 -그러므로 공으로 돌아간다._()()()_
<제법가상....제법공상...제법실상...>...<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산은 다만 산일 뿐이고 물은 다만 물일 뿐이다...>
_()()()_
참는 것, 부드럽고 화평하고 착하고 순종하고 포악하지 않아야 하고 놀래지도 않아야 하고 법에 데해서 행한다는 것이 없이 하고 모든 법의 실상과 같이 관찰하고 행함도 없고 분별 하지도 않아야 한다. 감사합니다._()()()_
“만일 보살마하살이 미래의 나쁜 세상에서 이 경을 설하려면 네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물러야 하느니라...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_()()()_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이 공(空)하여 실상(實相)과 같음을 관찰하여 뒤바뀌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물러 가지 도 말고 굴려지지도 말아야 하느니라.... 감사드립니다... _()()()_
空(공) 假(가) 中(중) 또는 諸法假相(제법가상) 諸法空相(제법공상) 諸法實相(제법실상) ....감사합니다..._()()()_
보살의 行할 곳과 친근할 곳에 편안히 머물러야 중생들에게 이 경을 널리 설할 수 있느니라..._()()()_
_()()()_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실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한량없고 그지없고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어야 하느니라. 다만 因緣으로 있는 것이며, 뒤바뀌어 생기는 것이므로...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귀한법문 모셔갑니다.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_()()()_
身, 口, 意, 誓願 안락행에 머물러야 한다.....보살의 行할 곳과 親近할 곳에 편안히 머물러야 중생들에게 이 경을 널리 설할 수 있느니라...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이 空하여 實相과 같음을 관찰하여 뒤바뀌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물러 가지도 말고 굴려지지도 말아야 하느니라..._()()()_
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
분별함이 없이 분별한다고 하지만 법화행자처럼 분별할 것이 그렇게 많아서야.....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모든 법이 공하여 실상과 같음을 관찰하여 뒤바뀌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물러 가지도 말고 굴러가지도 말아야 하느니라.
부드럽고 화평하고 착하고 순종하고 포악하지 않아야 하고 놀래지도 않아야 하고 법에 대해서 행한다는 것이 없이 행하고 모든 법의 실상과 같이 관찰하고 행함도 없고 분별하지도 않아야 한다.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법화행자로서의 품위 유지-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