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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이틀간의 산행에다 비박을 계획하여 텐트에 침낭까지 넣으니 배낭이 묵직하다.
대간꾼의 안식처였던 구룡령의 승희민박이 더 이상 민박을 하지 않음에 따라 이틀간의 산행을 하려면 비박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
아들 덩치가 부쩍 커지고 있기 때문에 큰 배낭으로 바꿔 짊어지게 했다. 처음으로 바꿔 짊어진 배낭의 무게에 아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예전과 다르다고 했다.
아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생각해 봤다. 지금껏 걸머져 2년동안 걸어왔고, 앞으로도 쉽사리 뿌리치지 못할 삶의 무게는 어떤 것일까? 쉬운 산이 없듯이 쉬운 삶도 없다. 무게가 늘어나는 것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도 함께 커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산은 알지도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소리없이 몸과 마음에 깨우침으로 스며들 듯이...
산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한 때 나무였고
한때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산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풀과 바람과 돌과 함께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산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산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나 우리가 훗날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산으로 간다는 것은”(하성목)
★ 산행개요
- 산행일시(시간)
· 첫날 : 2012년 5월 5일 04:05 ~ 16:35 (12시간 30분)
· 둘째날 : 5월 6일 03:00 ∼ 13:00 (10시간)
- 산행코스
· 첫날 : 진고개-동대산-두로봉-신배령-만월봉-응복산-약수산-구룡령
· 둘째날 : 구룡령-갈전곡봉-왕승골삼거리-연가리골삼거리-쇠나드리-조침령
- 산행거리 : 실제거리 44.8km, 하산 1.4km
· 첫날 : 23.5km
· 둘째날 : 21.3km, 하산 1.4km (누적거리 671.6km/734.6km)
- 산행일행 : 아들과 둘이서
★ 기록들
<첫 날>
고속버스 안에서 3시간동안이라도 제대로 잠을 잔 것 같다.
닭목재의 인연으로 네 번째 이용하게 되는 강릉의 택시기사(010-6697-7378)는 진고개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5만2천원의 미터기 요금을 4만원으로 깍아준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횡재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닭목재 민박집의 인연으로 좋은 분을 만나 금전적으로 약간씩 도움을 받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진고개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다. 서울에도 있고 금남정맥 공주 근처의 진고개 그리고 오대산 진고개가 있다. 대개 진고개는 니현(泥峴)이라 하여 비가 오면 질척거린다고 해서 붙여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진고개는 고갯길이 길어서 긴고개라 불렸고, 이것이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을 것이란 해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오늘의 들머리 진고개는 평창군 진부면과 도암면을 경계로 하고 있다. 산행은 동대산까지 1.6㎞ 거리의 고도 500m를 넘는 것으로 시작한다(04:05).
동대산(東臺山, 1433m)은 오대산의 오대(五臺) 가운데 동대에 속하는 산으로 7㎞ 앞에 있는 두로봉보다 12m가 높다. 오대산(五臺山)은 주봉인 비로봉(毘盧峰, 1563m)과 호령봉(虎嶺峰, 1566m), 상왕봉(上旺峰, 1491m), 동대산, 두로봉 다섯 봉우리를 말한다. 대간 마루금은 그중에 둘을 지난다. 다섯 봉우리 아래 중대(中臺-知工臺), 동대(東臺-滿月臺), 서대(西臺-長嶺臺), 남대(南臺-麒麟臺), 북대(北臺-象三臺) 등 5개의 평평한 대지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각각의 자리에 암자가 있다.
오대산은 다섯 봉우리가 만드는 거대한 연꽃 봉오리와 같다. 그 한가운데 꽃심이 바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할 수 있다. 동대산에 이르자 오대산의 주변 산군이 여명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05:15).
<괴목들>
이 구간은 기괴한 모습의 나무들이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아직 나무에는 움이 트진 않았지만 바닥에는 봄의 기운이 힘차게 느껴진다. 난만한 연둣빛이 바닥을 꼼꼼히 채워나가고, 관중, 박새에 봄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 초록의 향연에 흥취를 더한다. 폐부 깊숙이 마시는 공기가 맑고 산뜻하다.
차돌백이가 하얀 부싯돌로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06:09). 옛날 시골에서 장난삼아 했던 것처럼 돌맹이 두개를 집어 들어 탁탁 쳐본다. 옛 어른들은 자그마한 이 돌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돌을 살아있다는 뜻에서 산돌이라 불렀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무가 쓰러지고 꺾인 이유를 알 것 같다. 겨우내 엄청난 눈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휘어졌다 제 방향을 잡기를 해마다 반복하며 괴목이 된 것이다. 덕분에 장애물을 여러분 넘어야 했고, 꽤 귀찮은 일이라 해도 그것이 싫지만은 않다. 여기저기 괴목을 배경으로 계속하여 카메라 셧터를 누르게 하는 기쁨이 있다.
<차돌백이 인근 안내도>
<차돌백이>
<노루오줌>
<얼레지>
<단풍취>
신선들의 길목인 신선목이에 자리를 잡아 아침식사를 했다(07:13). 까마귀 한 마리가 냄새를 맡고 계속하여 울어대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면서 그 자리에 밥 한덩어리 남겨 놓자 그 놈의 까마귀가 영악하게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내가 빨리 떠나길 바라며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두로봉(頭老峰, 1421m)은 연곡면 삼산3리와 홍천군 내면 명개리,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두로봉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아우라지 밑의 정선군 북평면에서 조양강으로 흘러 든다. 이 두로봉을 기점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양평 양수리까지 약 162㎞의 한강기맥(漢江岐脈)을 이루어 놓았다. 10년전 우연찮게 시작한 한강기맥이 내겐 아직도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어디 변죽만 울리고 마치지 못한 산줄기가 여기 뿐이랴? 다 게으른 탓이다.
두로령 갈림길에 위치한 두로봉 초소에는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사람이 근무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부터 신배령까지 통제구간이다. 자연공원법령이 개정되어 지난 해 11월부터 과태료가 10만원으로 하향조정 되었지만 아직 출임금지판에는 그 내용이 바뀌어 있진 않다.
두로봉 하산길은 지난 겨울 폭설로 인해 쓰러진 나무가 고스란히 등로를 덮고 있어 빠져 나오기 수월치 않다. 눈의 횡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모습이다. 그리고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계속하여 나타나며 가끔씩 눈위를 러셀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계절이 여름 한가운데로 질주하고 있음에도 아직 겨울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두로봉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형행색색의 야생화와 괴목이 어우러져 오히려 더 눈을 즐겁게 한다. 사물을 그렇게 보려고 하면 또 그렇게 보인다. 수없이 이어지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뭇가지의 형상들이 때론 요괴로, 때론 천사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나곤 했다.
신배령(新梨嶺, 1173m)의 밧줄을 넘어서면서 통제구간을 벗어났다. 예부터 이 곳에 신 돌배가 많았다고 해서 신배령이라 했다고 한다. 날씨가 따뜻해지며 물소비가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텐트와 침낭을 아들의 28리터 배낭에다 넣었고 평소보다 두배로 늘어난 무게 때문에 아들도 땀을 많이 흘렸다. 덩치가 아비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이젠 그 무게를 감당할 때가 되었다. 아비의 역할이라는 것이 아들 스스로 고통과 슬픔, 외로움과 불안감을 견딜 수 있도록 아들 곁을 지키는 지지대이면 족하다.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곧게 줄기를 세워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가 되면 더 이상 지지대가 쓸모 없어 지듯이, 이제 아들도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만월봉(1280m)에서 매가 엎드린 모양을 하고 있는 응복산을 넘어 설악까지의 마루금을 더듬어 본다(11:42). 나물산행 나온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로 산을 매우며 산속의 고요한 정적을 깨우고 있다.
응복산(鷹伏山·1,359.6m)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점심 밥상을 차렸다(12:23). 응복산은 백두대간의 이름난 봉우리 중 숨어 있는 명봉이라 한다. 산세로 봐선 강원도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다 덩치마저 크다. 정상을 정점으로 뻗는 큰 산줄기만 하더라도 백두대간 외에 조봉 능선, 복룡산 능선 등이 있고, 자잘한 산자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만월봉에서 보는 응복산>
약수산을 몇백미터 앞두고 아들과 아비의 물은 완전히 바닥이 났다. 귤 2개와 두유 한개로 구룡령까지 버터야 했다. 구룡령을 넘어 왕승골 삼거리 쯤에서 비박하기로 계획했지만 구룡령에서 일찍 자고 일찍 출발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고, 아들도 동의했다.
약수산은 생각처럼 금세 정상에 이르도록 허락하진 않았다. 다 온 것 같았지만 몇 번을 더 넘어야 했다. 약수산 정상 직전의 전망바위에서 산등성을 바라보는 기분이 낯설고도 새롭다. 모든 것이 내 발 밑에서 아득해지고 수굿해진다.
약수산(藥水山, 1306m)은 산이 품고 있는 약수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15:44). 약수산에서 발원하는 미천골에는 불바라기약수(미천약수)가 있고, 약수산과 갈전곡봉 사이 구룡령 계곡에는 갈천약수가 있다.
산림전시관 뒤쪽으로 구룡령(九龍嶺, 1013m)에 도착했다(16:35). 12시간이 조금 넘는 산행이었다.
구룡령의 원래 지명은 장구목으로 도로가 나기 전 강원도 홍천에서 속초로 넘어가던 고개였다. 일만 골짜기와 일천 봉우리가 120여리 고갯길을 이룬 모습이 마치 아홉 마리 용이 지난 듯하다 하여 구룡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고려 때에는 구운령(拘雲嶺)이라 했다.
하지만 현재 구룡령이라 부르는 56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는 원래의 구룡령이 아니다. 지금의 구룡령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원래의 구룡령 고개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하였다.
56번 국도에서 행상을 마치고 짐을 꾸리는 노부부가 보인다. 할머니에게 옥수수 막걸리 한잔을 달라고 하자 한통을 건네며 천원 깍아준다고 했다. 1.8리터의 막걸리를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단숨에 1리터를 마신 것 같다.
약수터에서 몸을 씻고 나무테크 위에 텐트를 설치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남아 있는 막걸리를 거의 다 비울 때 쯤 되자 잠이 쏟아졌다.
19시가 조금 넘은, 아직 날이 훤하게 밝아 있음에도 아들과 고스란히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후두득 거리는 빗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22시 30분, 검은 먹구름이 달빛을 가리며 몰려 오고 있었다. 방수가 잘 되지 않은 텐트라 조금만 비가 더 오면 입구 쪽으로는 비가 샐 판이다.
인터넷으로 일기예보를 검색하자 새벽 5시까지는 비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간이 갈 수록 빗줄기가 굵어지며 텐트를 요란하게 내려쳤다.
비가 약간 진정된 틈을 타 텐트를 산림전시관 밑으로 옮기기로 하고, 자고 있는 아들을 깨웠다. 앞뒤로 텐트를 들고 산림전시관 입구에 갖다 놓긴 했지만 매트를 따로 준비하지 않아 차가운 돌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은 불가했다. 라면을 끓이며 그 열기로 텐트 안을 훈훈하게 했다. 얄밉게도 새벽 1시가 넘어서자 하늘은 말끔하게 개었다. 섣불리 텐트를 옮긴 것이 후회되었다.
<둘째날>
새벽 두시가 조금 넘은 시간. 제대로 자지 못한 아들이 멍하니 앉아 한참동안 눈을 뜨지 못한다. 텐트를 정리하고 배낭을 수납하기까지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03시 정각, 달빛으로 휘황한 산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산죽 이파리에 빗방울이 맺혀 있긴 해도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구룡령 옛길에 이르렀다.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 구룡령의 위치를 표기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위치가 잘못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도 1013m의 구룡령보다 약간 고도가 높긴 해도 조침령까지의 마루금은 대체로 큰 등고차 없이 평탄하다. 숲이 우거져 조망이 좋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산행기가 지루하고 재미없는 길이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화창한 날씨에 야생화 가득한 초봄의 향취가 더해지면서 행복한 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구룡령 옛길>
갈전곡봉 전위봉에서 뒤를 돌아보니 헤드랜턴 불빛 서넛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1시간 50분에 걸쳐 도착한 갈전곡봉에서 배낭을 부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대간꾼 세분이 나타났다. 갈전곡봉(葛全谷峯)은 양양군 서면과 홍천군 서면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가칠봉 능선이 인제군 기린면과 홍천군 내면의 군계가 된다. 갈전곡봉의 원래 이름은 치밭골봉, 치밭은 칡밭의 변음이니 칡넝쿨 골짜기가 있는 산이란 뜻이다.
울산에서 오신 세분은 우리 부자와 마찬가지로 전날 진고개에서 출발하여 구룡령에서 하산한 다음 양양에서 하룻밤을 자고, 조침령까지 진행한다고 한다. 그들과 함께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길을 따라 나섰다. 오른쪽으로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을 지켜보는 것도 산행의 즐거움이다.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금씩 파고들면서 산길의 공기에서 향기가 난다.
삼각점이 있는 1107.4봉을 넘어(05:48), 통나무 의자가 있는 왕승골 삼거리에 도착했다(06:45). 어제의 계획대로라면 이곳에서 하룻밤을 비박했어야 했다. 그러나 매트와 방수포를 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곳이 아닌 구룡령에서 비박한 것은 그나마 잘 한 일이었다.
956봉 정상 못미쳐 平海孫氏의 유택(幽宅)이 자리하고 있다. 필시 이 높은 곳까지 어르신을 모신 연유가 있을 법 하지만, 여기저기 파 헤쳐진 봉분을 보니 과연 이곳을 유택으로 쓴 분의 뜻을 그 후손들이 잊은 모양이다.
956봉 인근 표지목 아래 자리를 잡고 아침밥상을 차렸다. 대개 이틀 산행 중 이 때쯤 되면 남아 있는 음식들을 조합하여 잡탕식의 식단이 차려지기 마련이다. 아들은 그 모양새만으로도 밥맛을 잃었는지 일찍 수저를 놓는다. 혼자서 꾸역거리며 남아있는 음식을 모두 처분한다.
연가리골 삼거리에서 울산팀을 다시 만났다(08:55). 연가리는 오지의 대명사인 3둔(屯) 4가리 중 하나이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3둔 4가리의 둔은 사람이 몇 명 은둔해 살 수 있는 깊은 산속 골짜기이고 가리는 화전을 일구어 한나절 밭갈이 할만한 좁은 지역을 의미한다. 흉년도 전쟁도 전염병도 없는 피난처 4가리는 아침가리(조경동), 연가리, 적가리, 명지가리이고, 3둔은 살둔, 달둔, 월둔이라 한다.
노란색의 피나물꽃이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봄볕 아래 나부죽이 엎드려 꽃망울을 틔우고 있다. 울산 대간꾼을 바짝 따라 붙는 아들의 모습이 노란색 피나물꽃과 같다는 느낌이 든다. 힘들어 하거나 찡그린 기색 없이 환하게 웃는 노란색 꽃들...
아들과 달리 아비의 체력은 점점 바닥을 보이는지 호흡이 가빠진다. 오늘 조침령에서 만나기로 한 왕년의 자유인산악회 정대장님에게는 12시 20분경이면 도착한다는 전화를 미리 넣었다.
동쪽으로 휘여져 대야영장에 터치다운하기까지 1시간 40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통나무 의자에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하며 보너스로 아들의 발등과 발바닥을 맛사지 하는 동안 울산팀은 또 앞서 나갔다.
왼쪽으로 휘어져 북쪽으로 급하게 틀자 나뭇가지 사이로 점봉산의 양수발전소 상부댐 근처 풍력발전기가 날개짓을 하고 있고 점봉산에 이어 설악주봉인 대청봉과 주능선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으로 황의리 2.0km, 왼쪽 진흙동으로 표시된 지점을 넘어서자(11:04), 418번 도로와 진동리 설피마을도 한눈에 들어 온다.
쇠나드리 옛조침령길에서 휴식하고 있는 울산팀을 다시 만났다(12:00). 옛 구룡령길과 같이 민초들은 조침령 터널이 생겨 나기 전이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이 길을 넘나 들었을 것이다. 때마침 정대장님이 조침령 오던 길에 타이어 펑크가 났다며 천천히 진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상부댐 인근의 풍력발전기와 점봉산>
핑계에 자리를 잡고 남아있는 비상식량을 다 털어낸다. 너무 지체했나? 조침령 나무계단을 따라 조침령 임도에 내려서니 13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카메라 하나만 들고 조침령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까지 다녀오자 13시 20분이었다. 정대장님이 418번 지방도 마을회관 앞에 도착했다고 한다. 조금 서둘렀어야 했는데... 아쉽다.
조침령(鳥寢嶺)은 고개가 너무 높아서 나는 새도 자고 넘어 간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산경표에는 무리지어 자고 넘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조침령(曺寢嶺)으로 되어 있다.
임도를 따라 1.4km 떨어진 418번 지방도에서 정대장님을 만났다. 큰 아이와 대간종주할 때 이곳 조침령과 한계령, 설악동에서 만났으니 벌써 5년이 지났다. 진동리 설피마을 방태천 계곡에 팬티만 입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초여름 같은 뜨거운 햇살이 쏟아진다.
조침령 418번 지방도를 굽이굽이 돌아 설악산이 지척인 정대장님 집까지는 4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집에서 키우던 토종닭은 잡아 닭죽과 함께 내놓았다. 시원한 맥주한잔과 함께 주린 배를 가득 채웠다.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귀농한 후 이 곳을 여러번 방문하려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실천하지 못했다. 12년전 백두대간 입문할 때 산악대장과 초보산꾼으로 만난 인연은 아직까지 진한 산사나이 우정만큼이나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정대장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속초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하려 했었다. 그런데 어린이날이 겹쳐 오후 7시 이후에야 서울행 고속버스 이용이 가능했다. 그나마 수원행 시외버스편 좌석이 몇 개 남아있어 많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초저녁 눈을 떠보니 수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