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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 慈行童女 --- 第十 灌頂住善知識
1. 善財童子의 請法
(1) 善知識을 向한 尊重心
爾時에 善財童子가 於善知識所에 起最極尊重心하고 生廣大淸淨解하야 常念大乘하며 專求佛智하야 願見諸佛하며 觀法境界호대 無障碍智가 常現在前하야 決定了知諸法實際와 常住際와 一切三世諸刹那際와 如虛空際와 無二際와 一切法無分別際와 一切義無障碍際와 一切劫無失壞際와 一切如來無際之際하야 於一切佛에 心無分別하며 破衆想網하며 離諸執着하며 不取諸佛衆會道場하며 亦不取佛淸淨國土하며 知諸衆生이 皆無有我하며 知一切聲이 悉皆如響하며 知一切色이 悉皆如影하나니라
오늘은 대방광불화엄경 제 65권, 입법계품 39지 6이라, 입법계품 21권 중에서 여섯 권 째에 이제 들어가는 중입니다.
여기에서는 자행동녀(慈行童女)라는 선지식을 공부할 차례인데 화엄경에는 동남동녀(童男童女)라는 말이 잘 나와요. 자행동녀 이 분은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의 52 전차에다가 배당을 시키면 십주 중에 열 번째 주인 제10 관정주선지식(灌頂住善知識)에 해당되겠습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의 청법(請法),
선지식(善知識)을 향(向)한 존중심(尊重心)이라.
이시(爾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어선지식소(於善知識所)에, 그 때에 선재동자가 선지식의 처소에서
기최극존중심(起最極尊重心)하고 생광대청정해(生廣大淸淨解)하야, 지극한 존중심을 일으키고 광대 청정해를 내었다.
넓고 크고 아주 깨끗하고 훌륭한 이해를 내게 되었다.
선재동자는 평소에도 선지식에 대한 지극한 마음이 한결같은데 특히 여기서는 선지식에 대한 아주 지극한 존중심을 내고 선지식을 이해하는 그 이해심이 광대하고 청정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상념대승(常念大乘)하며 전구불지(專求佛智)하야,
불자들은 불교를 생각하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또 우리 나름대로 불교에 대한 이해를 다 가지고 있지만 과연 그 생각이 소승적이냐, 대승적이냐, 자신의 안녕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뭔가 발원하고 간절히 원하는 염원이 있느냐 하는, 이런 것들은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서는 대승(大乘)이라는 것하고, 불지(佛智)라고 하는 것을 선재동자는 생각을 한다고 했어요.
늘 대승을 생각한다고 했는데 반대로 소승이 있을 수가 있어요.
소승(小乘)은 말하자면 인생을 조그마하게 사는 사람, 아주 좁고 옹졸하게 자기만을 위한다고 할까, 그런 삶을 소승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반면, 그래도 좀 더 남을 배려하고 남 생각도 하고, 때로는 손해 보는 일이 있더라도 남을 위할 줄도 알고, 내가 손해를 좀 보기도 하는 그런 정도의 폭 넓은 삶이 있을 수가 있지요.
아예 남을 위해서만 사는 그런 보살정신의 삶을 사는 사람도 사실은 있지요. 오로지 남만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신문인가 보니 어떤 할머니가 봉사한 시간이 나와 있어요. 어떻게 그런 것을 계산했는지 몇 시간을 했더라? 몇 십 년을 했더라고요. 아주 연세가 높은 할머니인데 평생을 봉사를 하면서 살았더라고요. 그런 일도 또 있지요. 그런 이들은 아주 대보살이지요.
선재동자는 대승적인 삶을 생각하고 불지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지혜도 여러 가지 지혜가 있을 수가 있는데 부처님의 지혜를 오로지 구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정도의 지혜, 부처님이 갖고 있는 지혜, 그건 말하자면 이 인생과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정말 깊고 넓은 그런 지혜를 구한다는 거지요. 오로지 그런 지혜를 구하며,
원견제불(願見諸佛)하며 관법경계(觀法境界)호대, 그래서 모든 부처님 뵙기를 원하고 법의 경계를 관하되, 진리의 경계이지요.
깨달은 사람이지요, 부처님 보기를 원하고 그리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의 경계를 관찰하고
무장애지(無障碍智)가 상현재전(常現在前)하야, 장애가 없는 지혜가 항상 앞에 나타나서, 아무데도 걸리지 않는 지혜이지요. 우리가 생각하다보면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모르는 것도 많고 답답할 때도 많지요.
또 이해관계에 얽혀 놓으면 이해를 취하기가 쉽지, 옳은 생각을 갖기는 어렵거든요.
옳은 생각과 이해 사이에서 우리가 갈등하기 일쑤인데 거기에서 정말 옳은 생각을 취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럴 때 자기가 아는 것, 자기의 양심, 자기의 지혜에 장애가 있기 마련입니다.
선재동자는 장애가 없는 그런 지혜가 항상 앞에 나타나서,
결정요지제법실제(決定了知諸法實際)와, 결정코 요지한다, 깨달아 안다는 뜻이지요. 의심의 여지없이 환하게 알고 확실하게 안다는 뜻으로 결정요지(決定了知)라고 그래요.
무엇을 그렇게 아는가 하면 거기 셋째 줄 밑에까지 안다는 게 내려가요.
제법실제(諸法實際)라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진실한 경계이지요. 그리되면 한 송이 꽃이라면 꽃의 진실한 모습은 무엇인가?
또 어떤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의 진실한 모습은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진실한 모습, 그 실상은 무엇인가?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의 실상은 공적(空寂)이고 공(空)한 것이지요.
현재 눈앞에 벌어져 있는 너무나도 확실한 어떤 현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너머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너머까지를 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이지요.
그게 이제 제법(諸法)의 실제(實際)이지요.
그 다음 상주제(常住際)입니다.
제법의 실제가 허망한 것이고 공한한 것이고 무상한 것이라고 하면 상주제(常住際)라는 것은 그 반대로 항상 있는 것, 영원한 것, 불멸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꽃 한 송이가 피어서 그것이 시시각각 변화해 가고 며칠 안 가서 시들어 던져져야 하는 그런 현상을 꿰뚫어 아는가 하면 그런 변화무상한 속에서도 형체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실체,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실체도 역시 꿰뚫어 안다, 결정요지(決定了知)한다 이거에요. 그게 상주제(常住際)입니다. 항상 있다고 하는 거, 영원하다는 거지요.
우리 마음이 시시각각 변하지만은 마음의 본체는 역시 변하지 아니하는 데서 그 변하는 것이 나오는 거지요. 그것을 수연(隨緣)과 불변(不變)이라고 그래요.
인연을 따르고 어떤 상황을 따르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지요, 조석지변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하지만 그 본체인 실상은 또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마음자리가 있는 거지요.
또 어떤 물질, 예를 들어 휴지 한 장을 불에 태우면 금방 타버리고 없습니다. 그렇지만 휴지의 질량은 영원히 변치 않지요. 그게 상주(常住)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지요.
반야심경에서도 불생불멸, 법화경에서도 불생불멸, 화엄경에서도 불생불멸이 나오지요. 상주(常住)한다는 말을 불교에서는 잘 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양면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돼요. 불교의 교리를 아는 데는 양면성을 다 이해해야 합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양면성을 모든 존재는 다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그 다 꿰뚫어 알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영원하다는 데도 치우치지 않고, 무상하다는 데도 치우치지 않고, 치우치지 않는 견해와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 줄 아는 거, 내가 자주 말씀드립니다만 이걸 중도정견(中道正見)이라고 하지요. 중도적인 안목이라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법실제와 상주제와 늘 항상 있는 그런 경계와
일체삼세제찰나제(一切三世諸刹那際)와, 일체삼세 그것이 사실은 순간이거든요. 어떤 과거 현재 미래든지 간에 모든 과거 현재 미래는 한 순간이라고 하는 그런 경계와
여허공제(如虛空際)와, 아예 순간이라고 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텅빈 허공과 같다고 하는 그런 경계와
무이제(無二際)와, 그렇게 변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근본은 상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불이(不二)라고도 하고 무이(無二)라고도 하고 그러지요. 그게 이제 불이법문이지요.
또 사찰에 들어서면 불이문(不二門)이라는 것이 있어요. 둘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 문을 들어서면 둘이 아닌 하나인 진리를 우리가 모두 꿰뚫어 알아야 된다는 그런 뜻에서 문을 하나 세워놓고는 거기에다 불이문(不二門)이라고 써 놓았지요.
그래서 불이문을 통과하면 상당한 경지에 오르는 것, 상당한 소견이 트이는 것으로 그렇게 의미적으로 봅니다.
무이제(無二際)와
일체법무분별제(一切法無分別際)와, 일체법은 전부 차별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차별 아닌 것이 없어요. 모든 사람이 일체가 차별이고 물건 물건마다 전부가 차별이고 사건 사건마다 전부 차별이고 하여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차별인데 그 차별 속에 평등의 세계가 또 있어요,
그게 무분별제(無分別際)입니다.
일체법은 분별로써 가름해야 되는데 그 분별 너머 근본으로는 평등한 세계가 있고 그 게 이제 일체 법을 분별할 수 없는 그런 경계 또는 경지이지요.
일체의무장애제(一切義無障碍際)와, 이것은 이제 일체 도리입니다. 이런 의(義)자는 이치, 도리, 이런 뜻이에요.
일체도리에 대해 우리가 꿰뚫어 알아가지고 아무런 장애가 없는 그런 경지, 그런 경계이지요.
이 제(際)자는 우리가 보통 옥편상으로 지은 제(際)라고 그래요. 어디까지라는 뜻이지요.
그걸 이제 다른 말로 하면 경계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책상의 끝이라고 하면 경계가 되는 그 부분을 제(際)라고 그러거든요.
일체겁무실괴제(一切劫無失壞際)와, 위에서는 일체 의(義)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겁(劫)이라고 했습니다.
시간도 불교적인 안목에서 보면 영원한 것이고 영원하다 보니까 수많은 겁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끝나면 내일이 오고, 내일이 끝나고 모레가 온다고 하면 그것은 오늘이 무너지고 내일이 생기고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 많은 겁이 하나로 꿰뚫어져 있고 영원한 시간상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그 때는 오늘과 내일이 없고, 또 일겁과 이겁과 삼겁의 차별도 없지요.
없다고 할 때 ‘일체겁이 실괴(失壞)함이 없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실괴함이 없는 시간의 영원성, 시간의 영원성이라고 하는 것을 결정요지 한다는 거예요.
그것도 낱낱이 결정요지 하는데 해당되는 거예요. 그런 것을 결정요지하고.
일체여래무제지제(一切如來無際之際)하야, 그리고 모든 여래는 경계가 없는 경계이다, 경계가 없는 경계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서, 이런 말이에요.
우리가 말로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 경계, 차원 이런 말을 하지만 사실은 그게 차원도 없고 경계도 없고 어디까지 라고 하는 지음도 없습니다.
어디까지가 없는 어디까지, 말하자면 경계가 없는 경계, 그 뜻이지요.
일일체여래무제지제(一切如來無際之際)라고 하는 것은 지음이 없는 지음이지요. 지음이 없는 지음을 결정코 환하게 꿰뚫어 알아서
어일체불(於一切佛)에 심무분별(心無分別)하며, 일체부처님에게
마음에 이 부처님 저 부처님 분별할 것이 없고
파중상망(破衆想網)하며, 여러 가지 생각의 그물을 깨뜨린다.
보통 우리 불자님들이 말하기를 “어디 부처님이나 한 부처님이지 다를 게 있겠느냐”그러는데 사실 그래요. 갓바위부처님이나 어디 법당의 부처님이나 집에 잠깐 모셔놓은 부처님이나 부처님은 다 똑같지요.
나타난 그 모습은 하나의 그림자이지요. 예를 들어서 하늘에 달이 있는데 컵에다 물을 떠놓으면 컵에 마치 비치고, 흐르는 강물이 있으면 강물에 비치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 달’일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불상은 근본 부처님을 두고 형상화 해 본 거예요. 형상화 해 본 것이니 결국은 물에 비친 달과 마찬가지이지요.
또 이 성지(聖地)지 저 성지, 이 기도처 저 기도처, 이 법당 저 법당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도 역시 다 있어요. 다 있다고요.
법당에만 각양각색의 불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사람의 마음 속에도 다 부처님이 있지요. 그래서 그것은 통일된 하나의 부처님이라고 해서 여기에서는 어일체불(於一切佛)에게 마음에 분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 부처님이 영험이 있고 어디 부처님은 영험이 덜하다는 그런 분별이 없다 이거예요.
결국은 전부가 우리 한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 달리 다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생은 경계를 잘 따라가니까 예를 들어서 어디가 훌륭한 기도처이다 그러면 기분이 벌써 다르거든요. 며칠 전부터 다르고, 가면 벌써 마음이 다르고 거기에 가면 왠지 잘 될 것 같고 그렇지요. 그만큼 경계에 잘 빠진 다는 뜻이지 그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사실은 좋은 게 아니에요. 경계에 그만치 잘 빠진다는 뜻이지요.
거기에서 잘 되는 건 좋은데 그럼 다른 데 있으면 엉망이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거기 벗어나서 다른 데 가 있으면 엉망진창이 되는데 그러니까 그게 뭐 좋은 겁니까? 여여(如如)해야지요. 늘 여여 해야 되는 겁니다.
항상 자기 마음에 있는 주인공, 자기의 주인공, 그게 진짜 부처입니다. 그게 진짜 살아있는 부처인데, 거기에서 뭔가 찾으려고 해야 되고 해결하려고 해야 되고 거기에서 뭔가 지혜를 도출해 내야 되는데 그저 경계에만 자꾸 끄달리는 거예요.
물론 초보자에게야 당연히 그게 필요하지요. 하나의 방편으로 꼭 필요한 거지만, 십년이 가도 그만 백년이 가도 그만 절에 그렇게 수십 년을 쫓아 다녀도 내내 그 수준이면 그건 곤란한 거예요.
내내 그 수준으로 바깥에 뭐가 있는 걸로 생각한다면 불교를 제대로 믿는지 참 의심스러운 거지요.
여기에 선재동자가 그랬잖아요. 어일체불(於一切佛)에 심무분별(心無分別)이라고요. 여기에는 아미타불이 어떻고 석가모니불이 어떻고 하는 그런 분별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 분별이 중상망(衆想網)이라, 여러 가지 생각의 그물이지요.
그물이라는 것은 불교에서는 무조건 안 좋은 의미에요. 한 가지 예외가 있네요.
요즘 인터넷을 불교에서는 인다라망, 인드라망이라고 번역을 해서 써요. 왜냐 하면 인터넷의 그 구조가 불교의 인다라망이라고 하는 그물의 설명하고 똑 같아요.
인다라 라고 하는 것은 제석천을 말하는 것이지요. 인다라망(網)은 제석천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이지요. 그 궁전을 장엄하기 위해서 아주 아름답고 영롱한 보석으로 거대한 그물을 짰는데 그 그물에 보석이 몇 개인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본래 궁전만도 아름다운데다 수천만 수백만 개의 보석으로 그물을 짜 가지고 그 아름다운 궁전을 덮었으니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패션쇼 하는데 보면 얼금얼금한 거 덮어쓰고 나오는 사람들 있지요? 그게 그물이에요. 인다라망입니다. 그건 사람을 덮어 씌웠지만 제석천에서는 거대하고 아름답게 지은 궁전을 보석으로 짠 그물로 덮어 씌웠어요.
그런데 그 그물을 왜 요즈음의 인터넷 원리하고 같다고 하는가 하면 그 그물의 구슬이 옆에 구슬을 서로 반영을 해요. 이쪽에 있는 구슬은 저쪽 구슬을 비추고, 저쪽에 있는 구슬은 이쪽을 비추고,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구슬은 전부 하나에 다 비치고, 또 이쪽에 있는 구슬도 다른 구슬을 다 비추고 전부 연결이 다 되어 있는 겁니다. 연결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슬의 모습이 이쪽 구슬에도 다 비쳐져 있습니다. 이쪽을 보면 다 보여요. 지금 인터넷의 원리라는 게 전부 그런 식이지요. 전 세계가 전부 하나의 그물로 연결이 쫙 되어 있어요. 하나도 빠진 게 없어요.
어디든지 거기서 클릭만 하면 그냥 팍팍 떠요. 유럽이고 미국이고 소련이고 영국이고 뭐 북한이고 일본이고 어디 할 것 없이 어떤 세계, 어떤 집단도 다 연결 됩니다.
자살사이트 갈려면 자살사이트 클릭하면 팍 나와 버려요. 어떤 것이든 다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것이 이제 인다라망이라고 하는 제석천의 그물 원리와 똑 같더라고요. 그 그물이 실재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어요.
그 그물은 불교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계연기, 화엄경에서 말하고 있는 연기적 세계관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럼 그 법계연기, 화엄경에서 본 연기적 세계관이란 것은 또 뭐냐? 그건 모든 존재는 전부 서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전부 연관관계를 맺고 있어요,
그걸 뭐라고 하지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 먼지 속에 온 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거지요. 먼지 먼지마다 다 그렇다는 건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이지요. 맨날 외우는 거 아닙니까?
천도재 때도 외우지요. 영가는 그 도리를 깨닫고 가라는 거예요. 그 도리만 깨달으면 제도되는 것이고 천도되는 것이지요. 그런 뜻에서 천도재 마지막에 들려주는 이별곡으로 법성게를 외워서 영가를 천도되게 하는 거지요.
그 구성을 보면 아주 뛰어난 도인이 천도 의식문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어요. 참 아주 멋진 의식문인데 그런 도리를 깨달으면 우리가 이 세상을 벗어나서는 극락을 갈래야 갈 수가 없고, 이 자리를 벗어나서는 지옥 갈래야 갈 수가 없지요. 지옥이 극락이고 극락이 지옥이야. 또 이 자리가 지옥일 수가 있고 극락일 수도 있고 모든 존재가 전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같으면 부처님이 인터넷을 가지고 설명을 하셨겠지만 옛날에는 인터넷이 없어서 부처님은 인드라 그물에 달려 있는 구슬을 가지고 그 이야기를 했거든요. 지금 이제 과학이 거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너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인다라망이라 그런다고요.
우리가 너무 어리석고 미혹해서 그렇게 연관 지어져 있는 어떤 이치가 눈에 안 들어오고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지요.
알 필요가 있든 없든, 눈에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그것은 전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큰 산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베었다고 해요. 나무 한 그루 베면 옆에 나무에 영향이 없는 거 같지요? 당연히 영향을 끼쳐요. 거기서 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영향이 있고,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그 한 그루의 나무가 있고 없는 거에 다 영향이 끼쳐집니다.
가까이 있는 나무들은 그걸 다 알지요.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는 당장에 영향이 없다고 잘 모른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모두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 이게 이제 말하면 큰 눈이지요. 이 우주를 통시(通視), 한꺼번에 보는 그런 안목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세상을 바라본 안목이 어떤 것이냐?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바로 화엄경이 그것을 설명한 것이고 그래서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모든 것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지요. 하나하나에도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그렇게 포함되어 있듯이 또 다른 모든 것에 모든 세계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이런 식의 설명이 그동안도 여러 번 나왔습니다만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물이라고 하는 것은 뭐 그런 의미, 인다라망의 그물이 아니고 중상망(衆想網), 여러 가지 잡된 생각의 그물이라, 그러니까 망상의 그물이지요. 인다라망 외에는 불교에서 그물이라고 하면 전부 안 좋은 그물이에요.
뭐 애욕의 그물, 탐욕의 그물, 분노의 그물, 인연의 그물 전부 구속하는 것이고 장애되는 것이고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 그물을 누가 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부 자기가 만드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조그마한 집이라도 하나 있으면 우리가 그것을 못 벗어나잖아요.
뭐가 있지도 않지만 그 집착에서 못 벗어나지요. 못 벗어나는 그것이 하나의 그물에 얽혀있는 거지요. 그물에 얽혀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의 그물, 사람 마음이 또 작용하는데 따라서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 장애의 그물 역할도 또 해요.
이제집착(離諸執着)하며, 그래서 모든 집착을 떠나며
불취제불중회도량(不取諸佛衆會道場)하며, 제불의 중회도량을 취하지 않으며, 취할 게 없지요. 모든 부처님이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설법을 한다는 게 제불의 중회도량이거든요.
중회도량(衆會道場)이라는 것은 많은 대중이 모여 있는 그런 도량입니다. 뭐 그거라고 특별히 이런 경지의 사람이 더 나을 까닭도 없고, 그래서
역불취불청정국토(亦不取佛淸淨國土)하며, 부처님의 훌륭한 국토를 취하지도 아니 하지요. 이게 다 내 마음에 있고 제불의 중회도량도 내 마음에 있지요.
지제중생(知諸衆生)이 개무유아(皆無有我)하며, 또 모든 중생이 다 아(我)가 있지 아니함을 알며, 우리가 전부 아상을 내세우지요.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을 내세우는데 사실은 그 아상이 있는 게 아니에요. 있는 게 아닌데 우리는 어떤 습관에 의해서, 또 자기의 습관에 의해서 아상을 부리는 거지요.
그렇게 잠깐 동안 어떤 인연에 의해서 아상을 부립니다. 아상이란 것이 부릴 때는 있는데 제거를 하면 제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에서 아상을 없애라, 없애라 하는 이유가 없앨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앨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모든 중생이 아(我)가 본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는 거예요.
‘자기가 저렇게 아상을 부려도 사실은 그 아상이 없어’ 이렇게 보는 거예요.
지금 아상을 부린다고 해서 그 아상이 변하지 않는 상태로 그 사람한테 영원히 있는 것이 사실 아니에요. 한 생각 조금 달리 바꾸어서 보면, 누가 못나게 설치고 얄밉게 설쳐도 잠깐 저러다 만다고요. 얄미운 모습, 얄미운 성격이 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힘이 없어서도 그렇게 못해요. 좀 얄밉다가 말아요. 얄미운 짓을 하다가 만다고요. 그게 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조금 기다리고 참으면 없어져요, 그게 없어질 때가 있다고요.
그러니 느긋한 사람이 결국은 승리하는 거예요. 촐랑대고 까불다가 제풀에 지쳐서 아상도 못 부리고 뽐내지도 못하고, 자기 자랑도 결국은 못하지요. 처음에 몇 번 하다가 마는 거지요. 그런 차원도 또 있어요.
그래서 본래없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앉아 있으면, 혼자 까불다가 마는 겁니다.
지제중생(知諸衆生)이 개무유아(皆無有我)라, 중생들이 아상을 부리지마는 ‘저 아상 저거 며칠이나 갈려고’, 이렇게 느긋하게 기다리면 본래 없는 거니까, 그런 사실을 이제 아는 거지요.
지일체성(知一切聲)이 실개여향(悉皆如響)하며, 모든 소리들은 대개 시끄럽지만 역시 메아리와 같아서 기다리면 소리가 안 날 때가 있어요.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기다리면 끝날 때가 있고, 차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만 없어진다고요.
관광객이 선방 앞에 와 가지고 막 떠들고 노래를 부르고 놀아도 해가 지면 가지 말라고 해도 다 가버려요. 아무리 붙들어도 가야된다고 가야 된다고 하며 가버리지요.
더 떠들고 더 놀라고 해도 “아이구, 바빠요. 스님 왜 잡나요.” 하고는 다 가버린다고요. 그런 해결책도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급하게 서두르니까 당장에 자기에게 장애가 되고 문제가 되어 그거 해결하려고 덤벙대지만은 그러는 사이에 이미 해결이 되어가고 있어요. 못 떠들게 하려고 쫓아가는 사이에 그 사람은 이미 자리를 뜨고 있어요. 세상 이치가 그렇더라고요.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소리가 실개여향(悉皆如響)이라, 모두다 메아리와 같더라. 소리의 그림자가 메아리이지요.
소리의 실체도 허망하게 사라지는데 그 메아리야 허망한 것 중에도 더 허망한 것이지요.
지일체색(知一切色)이 실개여영(悉皆如影)하나니라, 일체 사물이 다가 그림자와 같아요. 눈앞에 보이는 모든 존재를 불교에서는 색(色)이라고 해요. 왜냐? 모든 존재는 전부 빛깔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불교에서는 사물이란 말보다는 색(色)이라는 말을 잘 씁니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모든 사물이 전부 공(空)이고 공이 그대로 사물이라고 그렇게 해석을 하지요.
그런 모든 사물들이, 돈을 위시해서 일체 명예와 부귀영화까지도 다 색에 해당되는데 그런 것까지도 결국은 어때요? 전부 그림자에요.
한바탕 꿈이고 그림자와 같아요.
세상에 아무리 큰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안목이 한 계단만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쓰잘데 없는 거고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내가 잘 드는 비유이지요. 어릴 때 구슬치기 하고 딱지치기 할 때는 그 구슬과 딱지가 밥보다 더 귀하고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했어요. 그보다 더 소중한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그냥 모으고 따고 해가지고 어디 서랍 속 장롱 속에다 깊숙이 무슨 보석 간직하듯이 그렇게 간직을 하지만, 일 년이나 이년이 지나 나이를 한 살이나 두 살만 더 먹어 버리면, 내가 왜 이걸 여태 여기다 놔뒀던가, 누가 볼까봐 창피한 거예요. 그렇게 차원이 달라져 버린다고요.
그 놀이할 때는 그것이 틀림없이 소중했어요. 땄는데 안 주면 울고불고 싸우고 야단을 한다고요. 그렇게 소중했었는데 안목이 한 차원만 달라져 버리면 그 참 우스운 게 되어 버려요. 세상사도 마찬가지예요.
누구는 이것을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안목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허망하고 아무 쓰잘 데 없는 짓이구나 하는 그런 차원의 삶이 있습니다. 이 천차만별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여러 안목 나름이거든요. 안목이 천차만별이에요.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자기 안목하고 같지 않다고 해서 탓할 건 없어요. 같지 않다고 탓할 건 없고 사람마다 안목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소견이 다르고 또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자기의 살아온 배경이 달라요.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달라요.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어떤 가치에 대한 판단기준이 다 다르지요.
어느 곳에 스님들이 사는데 대개 아끼면서 사는 곳입니다. 전기세도 자기가 내야하니까 아끼는데 어느 정도 아끼느냐 하면, 지금부터 전기 아끼는 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형광등이 20와트짜리지요. 저녁 식사를 하는데 불을 켜 놓으면 많이 닳는다고 형광등은 켜지 않습니다. 그래도 TV는 봐야하니까 TV불빛으로 식사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사는 동네가 있어요. 내가 어디라고 말하면 당장에 욕을 먹을 것 같아서 말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아파트에 밤에 가면 컴컴해요.
앞에는 거의 안 켜져 있고 뒤쪽으로 돌아가면 조그마한 불이 조금씩 켜져 있고 그렇다고 그래요. 그 곳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예요.
그래서 전기세는 한 가정에 만원도 안 나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엉뚱하게 몇 만 원씩 푹푹 쓰는 데가 있다는 겁니다. 전기요금은 만 원도 채 안 나오는데 몇 만원씩 한꺼번에 써버리는 수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아껴 가지고는요.
그러니까 자기가 살아온 배경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좌지우지 하는 거예요. 사람의 생각이 천차만별이라고 하는 것을 들여다보면 정말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경전에서는 그런 것을 많이 이야기 하고 있지요.
일체사물이 다 그림자와 같다는 이런 차원으로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뵙고는 선지식을 향한 존중심에 의해서 이러한 세상을 보는 이런 안목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첫댓글 안목을 조금만 높여도 가치관이 달라지겠다는 생각이 확실히 듭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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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을 버리는 것이 수행입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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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대승적인 삶...고맙습니다. _()()()_
通視的 眼目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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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一切色이 悉皆如影하나니라...연보리 님! 수고하셨습니다.._()()()_
있는 게 아닌데 우리는 습관에 의해서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을 내세운다. 안목이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진다. 연보리님, 고맙습니다. _()()()_
知諸衆生 皆無有我 무상에도 영원에도 치우치지 않는 삶 中道正見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어릴때 딱지 이야기 하시니 이해하기 쉽네요. 지금 중요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나중에는 크게 의미없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나이 든다고 다 그런것은 아니겠지요. 안목이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못고치니 중생인가 봅니다. 부처님 말씀을 철석 같이 믿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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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시시각각 변하지만은 마음의 본체는 역시 변하지 아니하는 데서 그 변하는 것이 나오는 거지요. 그것을 수연(隨緣)과 불변(不變)이라고 그래요.인연을 따르고 어떤 상황을 따르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지요, 조석지변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하지만 그 본체인 실상은 또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마음자리가 있는 거지요.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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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상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얄미운 짓도 가만히 버려두면 저절로 없어진다
입법 계품에서 3번 째로 空을 설하시는 군요
常念大乘 專求佛智
나무 입법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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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인욕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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