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가즈나시를 떠나 도착한 곳은 카불이다. 예전에는 큰 도시였으나 지금은 아프간이라는 한 외방(外邦)집단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의 산세는 험하고 사람들은 웅강(雄强)하나 대부분은 강도질을 해먹고 산다. (…) 이어서 우리는 카마르시에 도착하였다. 두 산 사이에 있는 보루인데, 아프간인들은 이곳에서 곧잘 강도질을 한다. 우리가 이곳을 지날 때, 그들과 한바탕 접전이 벌어졌는데, 우리가 활을 쏘아대자 그냥 도망쳐 버렸다. 사실 우리 일행은 얼마 안되고, 그네들은 말만 해도 약4000필이나 가지고 있었다.”
중세 아랍의 가장 위대한 여행가이자 탐험가인 이븐 바투타(1304~1368)의 눈에 비친 아프가니스탄인들에 대한 인상도 그리 긍정적이진 않은 것 같다. 그가 남긴 방대한 여행기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언급한 몇 가지 안되는 기록도 아프간인들의 강도질이나 반란 등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다. 이를 통해 이슬람세계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미묘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독자들이 세계사 교과서나 각종 역사 관련 교양서를 통해 알고 있었던 희대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가 국내에서 완역됐다. 1808년 필사본이 아랍 탐험가 시첸에 의해 다시 발견된 뒤 전세계에서 약 15개 언어로 번역·출간됐지만 대부분 초역본이고, 완역본은 140여년전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래 두번째라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은 우리나라 출판 또는 학술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다.
모로코 탕헤르의 전통적인 이슬람 명문사족 가문에서 태어난 이븐 바투타는 21세때 메카 성지순례 여행에 나선 이후 30년간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3대륙에 걸쳐 거의 모든 이슬람 국가들과 중국 및 수마트라까지 10만㎞ 이상을 주유했다.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연대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은 중세 이슬람 세계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집대성해 보여주고 있는 사료적 가치로 인해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인류역사에서 여행기록의 쌍벽중의 하나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모두 23년의 여행기간중 중국에서 보낸 17년간의 활동을 중심으로 옥중에서 구술한 것이고 실제 여행여부가 일부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돼왔기에 이븐 바투타의 여행가로서의 위대성과 여행기의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여행기에서 이븐 바투타가 만난 통치자들만 해도 60여명에 이르며, 여행중 자신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가진 2000여명이 넘는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다른 자료를 통해 드러나는 이들 대다수의 이름과 날짜 등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것이 입증됐다.
현재 전하는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그가 태어난 모로코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마리니야조 술탄(군주) 아부 아난의 지시에 따라 1355년 직접 집필한 것을 당대의 시인이자 명문장가인 이븐 주자이 알 칼비가 다시 술탄의 교지를 받들어 요약·필사한 것이다. 세칭 ‘이븐 바투타 여행기’의 원제는 ‘여러 지방의 기사(奇事)와 여러 여로(旅路)의 이적(異蹟)을 목격한 자의 보록(寶錄)’인데, 역자 정수일씨는 이를 ‘수방편답기문보록(殊邦遍踏奇聞寶錄)’이란 한문제목으로 다시 축약했다.
이븐 바투타가 여행을 감행한 14세기 전반은 1258년 몽골의 침입으로 압바스 통일왕조가 멸망한 뒤 이슬람세계가 동방의 일한국과 서방의 맘루크 왕조, 이베리아 반도의 나스르 왕조 등으로 나뉘어 다극화가 추진되면서 이슬람문명의 지역적 특성이 가시화된 시기이다. 이븐 바투타는 바로 이 시기에 이슬람의 포교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신비주의 교단 수피즘이 각 지역에 세운 수행도장이자 무슬림 여행자들의 숙소역할까지 수행했던 ‘자위야’에 의지해 세계여행을 실현할 수 있었다. 여기에 무슬림은 혈통과 지위 여하에 관계없이 모두가 형제라는 이슬람 특유의 ‘형제애’ 덕분에 샤이흐와 법관의 신분으로 이슬람 세계를 편력한 이븐 바투타는 각지에서 숙식이나 여비, 안내, 호송 등 여행을 위한 모든 편의를 제공받았다.
여행기에는 이슬람의 성소와 명소, 법관을 비롯한 명사들, 각종 종교의식과 명절행사, 세계 유명도시의 사원 건축양식과 운영방식, 무슬림과 이교도의 관계 등 이슬람 문명 전반에 관한 것은 물론, 각지의 의식주 관습, 고유의 동식물과 농작물, 매매와 상거래, 관혼상제 풍습, 민간요법 등도 함께 서술돼 문화인류학적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가령 미망인이 죽은 남편을 따라 분신자살하는 이교도의 풍습 등 인도 투글루크 왕조에 관한 기록은 역사상 최초의 것이다. 이븐 바투타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피루스 등대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각 지방의 고사와 전설, 기적과 영험한 이야기들도 빼놓지 않고 전하고 있다. 이슬람문명에 대해 이 책만큼 생생하고 무수히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이 또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중세를 지배했던 이슬람문명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커다란 성과다.
2001-09-21
:: 출판사 서평
인류역사상 최고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
이 책은 중세 이슬람의 법관이자 학자로서 30년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빈 이븐 바투타(Ibn Batutah, 1304~68)의 여행기를 완역한 것이다. 흔히 우리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여행문학의 고전적 전범으로 꼽지만 알고 보면 사정이 좀 다르다. 이슬람세력이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14세기 초, 모로코 탕헤르(퇀자)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혈혈단신 세계 주유의 대장정에 나서 30년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 장장 10만여 km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야말로 희대의 여행가이자 탐험가라 할 수 있다.
23년간의 여행 동안 17년을 중국에서 보냈으며 이의 기록도 옥중 구술의 필사본이라는 마르코 폴로에 비해볼 때 이븐 바투타의 여행과 기록은 그 방문지의 범위와 여정에서나 탐험성 짙은 그 성격으로 보나 단연 독보적인 것이다. 모로코 명문사족의 자손으로 철저하게 이슬람문화 속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이븐 바투타의 이 여행의 동기는 무슬림의 필생의 종교의무의 하나인 메카 성지순례였다.
돈독한 신앙심, 넘치는 탐구심과 지식욕, 강인한 기상과 더불어 당시 세계의 지배적 세력이던 이슬람문명권의 현실적 힘은 그를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카스피해 북부와 인도, 중국, 아프리카 내륙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당시 성행하던 이슬람교파의 하나인 수피즘이 전도를 위해 세계 도처에 설치한 무슬림의 숙소인 '자위야'와 이슬람교 특유의 형제애는 이 오랜 여정을 가능하게 만든 또 하나의 주요한 배경이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죽을 고비를 기적적으로 넘겨가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역시 앞선 위대한 여행가들의 후예이지만, 당시 세계의 역사, 문화적 정황은 그의 탐험에 독특한 성격을 더해준다.
철두철미하게 이슬람적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한 여행문학의 영원한 고전
이븐 바투타가 세계를 탐험하던 14세기 전반은 1258년 압바쓰조 이슬람 통일제국의 멸망 후 세계 각지에서 지역중심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3대륙을 아우르는 이슬람세계는 여전히 세계 지배세력의 하나였으나 동쪽의 일한국, 서쪽의 맘루크조, 이베리아반도의 나스르조를 중심으로 이전의 통일 이슬람세계는 다극화하고 있었다.
각지에 파고든 이슬람문명은 토착화되는 한편으로 지역적 특성이 가미되어 독특하고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추세는 이븐 바투타의 탐구욕과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켰고, 10세기를 전후한 이슬람문명 전성기에 세계로 뻗어나간 무슬림 학자와 상인, 여행가들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은 그의 여행의 충실한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그의 대장정은 당대 이슬람 마리니야조의 쑬퇀(군주) 아부 아난에 의해 진가를 인정받고 기록으로 남게 된다. 이븐 바투타는 27년간의 아시아와 유럽 여행을 마치고 한창 아프리카 내륙을 여행하던 중 아부 아난의 특명을 받고 귀향해 여행기 집필을 시작한다. 이후 아부 아난의 지시로 이 여행기 원본을 요약하고 다듬은 당대의 대문장가 이븐 주자이 알 칼비의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난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여행기의 저본(底本)이다.
여행기 앞뒤에 붙은 이븐 주자이의 서문과 발문은 아랍문장 특유의 화려한 만연체 수사법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흔히 접하기 힘든 아랍문학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철두철미 이슬람적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문물을 접한 바투타의 개성과 함께 사실적 내용과 생동감 넘치는 서술은 이 여행기를 주저없이 여행문학의 고전으로 꼽게 한다.
동서교역사와 씰크로드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룬 정수일 선생, 그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상세한 역주를 붙여가며 세계 두번째로 완역
이 책은 지난 4백여년간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비롯한 약 15개 언어로 축약,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역본은 1853~58년에 빠리에서 출간된 프랑스어본이 유일하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에서 두번째의 완역본을 한글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서교역사와 씰크로드학의 권위자로서 현지에서 수학해 아랍어에 정통한 정수일 선생은 이 여행기의 더할 나위 없는 역자이다.
초역본들에서 보이는 한계를 충분히 감안하고, 찬미와 기원의 삽입구를 비롯한 중세 아랍문학의 특성을 보여주는 원서의 특징을 모두 살려 옮겼다. 또한 시공간적 거리에서 오는 이질감과 낯선 느낌을 해소하고 최대한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유명사와 문물에 대한 상세하고 방대한 역주를 붙였다. 옮긴이의 해박한 식견과 아울러,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굽힘없는 소신과 열정 가운데 태어난 번역본이라는 점에서 이 한글 완역본 역시 소중한 작업이다. 원서에 수록된 이븐 바투타 여정의 세부도 25장과 함께 옮긴이가 꼼꼼한 고증 끝에 만든 ‘이븐 바투타 여행로 전도’와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 여행로 비교도’가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