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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정기산행 전남,해남/달마산
*일 시 : 2017년03월 26일 (일요일)
*장 소 : 해남/달마산
*출 발 : 주공6단지05시20분-봉명동전자랜드05시25분-
광혜당05시30분-삼일고아원05시35분-이마트(국민은행)
05시40분-일봉예식장05시42분-남파현대닭집05시45분-원성동하이마트05시50분-교보05시55분-학화호두06시00분출발
관광버스 : 삼보투어(70바6581호)
산악회 찬조비 : 30,000원
****** 알 림 마 당 ******
1. 행동 양식은 개별 지참.
(산행시에는 개인등산장비필수,등..)
2.해남/달마산 산행에 지인이나 동료들과 함께
산행에 동참하실 분은 아래전화 번호로 연락 주시면 너무 고맙지유?
3.요번 산행은 평소보다 1시간 앞당김 시간준수 바랍니다
다울 임원 연락처
회장 : 윤 봉 순
☞ 010-6473-3221
부회장 : 한 만 희
☞ 010-3420-8920
부회장 : 강 진 수
☞ 010-9400-5967
산 악대장 : 박 동 석
☞ 010-6456-7660
여성산악대장 : 김 화 수
☞ 010-7720-9171
재 무 : 이 애 영
☞010-3090-3599
참고: 저희 천안 다울 산악회는 비영리 단체로 산행시 각자 체력에 맞게
산행 하여주시기 바랍니다..사고 발생시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달마산 산행 Photo 에세이
*. 해남 금강 달마산
이리 오너라.
새벽 뚫고 천리 길
일산서 일만이 왔다 여쭈어라.
아름다움에 시장한 역마살이 왔다 여쭈어라.
명산이라고 자자한 달마산 소문이
사실인가 보러 온 유랑의 산꾼이라 여쭈어라.
달마산(達磨山) 아니고 왜 달마산(達馬山)라 했나?
미황사가 왜 미황사(美黃寺)인가?
따져 보러 온 선비가 왔다 여쭈어라.
아침마다 술을 끊고
저녁마다 또 마시는 술꾼이
홍탁을 마시러 왔다 일러라.
*. 땅끝마을[土末]과 인연
이상하게도 전국의 웬만한 곳을 다니느라고 다녔건만 땅끝마을[土末]을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완도까지 왔다가도 대흥사와 두륜산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보길도나 거문도 등을 찾았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도(全圖)에서 육지의 최남단이 토말이요 가장 북쪽이 함경북도 온성부라 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의하면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가 천리요,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2천리로 잡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3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한다 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제주도까지를 포함하여 3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땅끝마을을 오늘도 가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고양시 일산에서 해남까지 458 km 거리를 와서 달마산 등반을 당일치기로 마치고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 달마산(達磨山)인가, 달마산(達馬山)인가
나는 달마산을 지금까지 달마산(達磨山)으로만 알고 있었다. 달마대사와 연관된 달마산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달마대사(達磨大師)란 누구인가. 눈이 툭 튀어 나오고 그 눈동자는 좌우가 따로 논다. 똥배가 임산부처럼 불뚝 튀어 나오고 신은 한 짝만 신고 다니는 못생겼으면서도 해학적으로 생긴 괴승이다.
원래 그의 인물은 출중나게 잘생겼었는데, 인물이 못생겨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자기 육신과 바꾸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대사는 남인도의 향지국(香至國) 셋째왕자로 태어났으나 출가하여 중국 소림사에 건너와 벽을 향하여 9년간이나 좌선하다가[面壁九年] 도를 깨우쳐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가 된 스님이다. 면벽할 때 물밀듯이 밀려오는 졸음과 싸우기 위해서 깜빡이는 눈꺼풀을 아예 도려내어 그의 눈은 언제나 왕방울이다.
그의 그림은 좌선하는 모습인 면벽달마(面壁達磨)나, 노엽달마(蘆葉達磨)라고 갈댓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모습도 있고, 초조문답(初祖問答)으로 양무제와의 문답의 모습 등 불화(佛畵)에서는 가장 많은 그림의 소재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포교를 위해 양나라를 가서 양무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함부로 하므로 왕이 사약을 먹이고 죽여서 웅이산에 묻어 버렸다.
양무제의 신하 송운이 있어 사신으로 인도에 갔다가 오는 도중에 신발 한 짝을 신고 오는 달마를 보았다.
이 말을 듣고 3년이 지났는데 '그럴 수가 ?' 하면서 양무제가 묘를 파보니 시신은 없어지고 빈 관 속에 신발 한 짝만 있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스님들도 절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하여 중국 무협지마다 나오는 이른바 소림사 무법을 창시한 스님이라고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진남포에 266m 달마산(達摩山 ), 평남에 1,382m의 달마봉(達摩峯), 황해도에 596m의 달마산(達摩山 )과 내가 가려는 전남 해남의 481m의 달마산(達馬山) 등이 있다.
*. 미황사 전설
그런데 해남의 달마산의 한자는 ‘達馬山’이다. ‘왜 그럴까?’하고 이상이 여기다가 달마산이 품고 있는 ‘미황사(美黃寺) 창건설화’를 보고 ‘達馬山’(달마산)인 연유를 깨닫게 되었다.
-신라 경덕왕 때였다. 지금의 땅끝마을인 사자포구(獅子浦口)에 돌배[石舟] 한 척이 나타났다. 배안에서 석가여래의 공덕을 찬미하는 범패(梵唄) 소리가 은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몰려 가까이 가면 슬그머니 배는 멀어져 가고, 물러서면 가까이 다가오곤 했다. 의조(義照) 스님이 이 소식을 듣고 장운 장서 두 제자와 함께 목욕재계하고 100여명의 선남선녀들과 더불어 배를 맞으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닿았다. 배에는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었고, 큰 상자가 있어 그 속에 불상과 불경과 불화 등이 가득하였다. 함께 싣고 온 검은 바위가 있어 이를 깨어보니 그 속에서 검은 송아지가 뛰어나오더니 순식간에 큰 황소로 자라는 것이 아닌가.
그 날 밤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인도국왕이요, 금강산에 일만 불을 봉안코자 왔다가 이미 대소사찰이 꽉 들어차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길인데, 이곳이 금강산과 비슷한 곳이니 절을 세우라. 불상과 경전들을 소등에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세워 봉안하면 불은(佛恩)과 국운(國運)이 함께 번성하리라.’ 하였다. 이튿날 의조선사가 소를 몰고 가는데 한 곳에 이르러 크게 울고 눕는지라, 그 자리에 절을 세워 통교사(通敎寺, 현재 자취 미상)라 하였다. 소가 일어나 다시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미황사였다. 그때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다 하여 아름다울 ‘美’(미), 금의인(金衣人)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려 누르 黃(황), 미황사(美黃寺)라 이름 한 것이다.
-'미황사 사적기'( 숙종 18년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 하는 것으로 미황사 진입로에 분(牛墳)마을이 있다. 소 ‘牛’(우) 묘지 ‘墳’(분)이니, 소가 죽은 마을이라는 뜻이니 위의 전설과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게 맞는가.
그래서 미황사 전설과 연관하여 ‘達馬’를 해석해보하여 보니 다음과 같다.
‘達’(달)은 ‘이르다(至)’는 뜻이요, ‘馬’(마)는 ‘말’이니 ‘말이 이른 곳에 절을 세웠다’로 해석된다.
전설대로라면 ‘달우산(達牛山)’이라야 하는데 왜 달마산(達馬山)이라고 하였을까? 우마(牛馬)는 가축으로 둘 다 짐을 운반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니 소를 말[馬]로 미화하였거나 격상한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게다가 불교에서 말하는 달마(達磨, Dharma)는 ‘진리’와 ‘법을 뜻하는 말이고, 유명한 달마대사와도 음이 통하는 말이니 달마산(達馬山)이라고 명명한 것이라 생각한다.
달마대사와 달마산의 연결 전설로는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긴 하다.
원나라 무렵 남송의 큰 배가 이 산의 동쪽에 와서 정박한 적이 있는데 한 벼슬아치가 산을 향하여 절하면서 여기가 달마대사가 상주하던 곳이라 하고 달마대사의 그림을 그려 가지고 갔다. -고려 스님 無畏 조
*. 달마봉 가는 길
달마산 달마봉[불썬봉] 가는 길로 우리들은 송촌리 표석이 있는 송촌마을을 들머리로 하여 가고 있다. 달마봉을 지나 문바위재나 사자봉고개로 해서 미황사로 하산하는 것은 도솔봉(421m)까지 종주를 할 수 없는 우리네 같은 당일치기 산행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석이 되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송촌마을을 향한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산길을 들어서니 솔잎이 깔려 카펫같이 푹신푹신한 길가에 진달래와 벚꽃이 만발하였다. 자그마한 송촌저수지를 지나 수정골로 들어서니 휘파람새가 '휘휘휘 휘호-' 하며 6시간 30분을 달려온 우리를 반갑게 맞어준다. 휘파람으로 따라 하였더니 이 호기심 많은 새가 따라오며 '휘휘휘 휘호-'를 거듭한다.
임도가 나타나기며 외나무로 개울을 건너 숲 속 길로 들어서니 삼림이 울창한데 여기가 남도라서 어린이 팔뚝만한 대나무가 하늘을 향하여 죽죽 벋어있다.
일주일 전에 고흥 팔영산에 만발하였던 동백은 다 떨어지고 그 몇 송이만이 얼굴을 삐죽 내밀고 가는 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할까? 앞은 험한 너덜겅이고 왼쪽으론 편안한 길인데-. 앞서 간 우리 일행의 부르는 소리 있어 위험한 너덜겅을 택하여 오른다.
작년 백두산 종주 시에 보던 너덜겅은 흑색이었는데 여기 바위들은 회색이다. 옛날 설악산 서부주능에서 만났던 그런 너덜겅이었다.
돌길을 지나서 길 같기도 하고 길 아닌 것 같기도 한 산죽 길을 헤치며 바위에 바위를 돌고 넘다 보니 바람소리 요란한 것이 길인가 싶은 곳이 나타나는데 웬 바람이 그렇게 부는지. 추워서 도저히 지금까지의 반팔을 고집할 수 없어 배낭에서 등산복을 황급히 꺼내 입었다.
오직 바람이 많이 불어댔으면 이름조차 '바람재'란 말인가. 그런데 바람재부터 남쪽으로 찬란한 다도해를 열어주고 있다.
서쪽 신안 앞바다 홍도서부터 여수 돌산까지의 구간이 다도해국립해상공원이다.
그 중 앞에 보이는 완도군만 해도 완도를 포함해서 60여 개 유인도와 143개의 무인도가 파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다도해이니 그 경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가면서 본 다도해의 섬과 섬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왔던가.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던 중국 계림 이강에서 본 수만의 봉우리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베트남의 하롱베이 등과 함께 우리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우리들의 한국의 산하였다.
*. 진달래 만발한 달마산 암봉 능선 길
아름다움도 대가를 치러야 차지하는 법이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한밤중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새벽 5시 30분에 6시간 이상의 흔들리는 차 속에서 온 우리들이기에 즐거움은 더하였다. 가장 아름다운 꽃 피는 계절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의 하나인 명산 달마산 암릉 능선을 타면서 다도해를 굽어보며 요산요수(樂山樂水)한다는 것은 우리들 산악인이 아니면 어느 누가 이런 행복을 어찌 누릴 수가 있겠는가.
산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우리와 코스를 거꾸로 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제 서울에서 내려와서 완도의 진산 상황봉(象皇峰 604m)을 올랐다가 마봉리에서 도솔봉(421m)으로 해서 사자봉-달마봉으로 하산 길에 있는 사람들이다.
바람재에서부터 시작되는 진달래꽃길은 달마산의 최고봉 달마봉[불썬봉]을 지나서까지 계속되었다. 밧줄이 아니면 오르내릴 수 없는 아슬아슬한 돌길도 있었고, 선혈 같은 진달래꽃은 그 암릉 남으로 북으로 기슭을 향하고 있다.
고려시대 고승인 무애가 달마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북으로 두륜산 접해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와 닿아있는 산, 마주한 기암괴석들이 우뚝 솟은 깃발과도 같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고 또는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멀리서 바라보면 하얗게 쌓인 눈이 공중에 한 발짝 다가서 서있는 듯하다. 이 암릉은 봉화대가 있는 달마산 정상 불썬봉을 거쳐 도솔봉(421m)까지 약8㎞에 거쳐 그 기세를 전혀 사그라트리지 않는다.
이 아름다움은 글보다 백문불여일견이란 말 같이 카메라가 더 잘 표현하는 것이니, 보시라 달마산의 진달래 핀 암릉의 모습을.
*. 달마산 최고봉 불썬봉
달마산 최고봉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바위 능선이 잠깐 쉬고 있는 초원 같은 안부에서 우리 일행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남으로 다도해를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서 제 각각 싸온 도시락을 먹는데 남자보다 여성회원이 많아서 진수성찬이다.
오늘은 몇 번 사양하다가 밥을 얻어먹었다. 요즈음 새로 나온 쌀 나면을 가지고 왔지만 요번에는 뜨거운 물을 담은 마호물통을 놓고 왔기 때문이다.
옛날 직장을 다닐 때도 그렇게 물건을 잘 잃어버렸다. 찾다 찾다 보면 내가 지금 무얼 찾는지도 잊고 만다. 그때가 퇴근시간이곤 했다.
달마산 정상까지는 465m봉과 460봉을 지나야 하는데 그곳들이 진달래와 어울린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상에는 치악산 정상에서 보던 크기만큼의 커다란 탑이 있었다.
그 탑 아래에 정상석이 이정표와 함께 서 있는데 '달마봉/불썬봉'이라 쓰여 있다.
옛날 조선 시대 이곳에 봉화대가 있어서, ‘제주도- 완도의 숙승봉(420m)-달마산-진도의 첨찰산(尖察山 495.2m)으로 해서 강화까지 봉홧불을 올려 나라의 위급을 알렸다. 그런데 여기는 해남군이라, 전라도 사투리로 ’불을 켜다‘를 '불을 써다’라고 하여 달마산의 최고봉을 ‘불썬봉’이라 한다.
미황사가 멀리 보인다. 가까이서 보는 절도 아름답지만 산 능선에서 보는 절은 더욱 아름다운 선의 세상 같다.
이 아름다운 산에서 느낀 것은 산이 너무 과묵한 것 같다. 가끔가다가 현 위치를 알리는 지도가 있을 뿐 갈림길에 있어야 할 이정표가 없어서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정상까지 또는 미황사까지 얼마 남았다는 등의 이정표가 어디에도 없다.
그러던 달마산이 문바위재에서는 어느 산보다 멋진 이정표를 자랑하든 세워놓았다. 직진하여 7km를 더 가면 도솔봉(421m)으로 해서 땅끝마을에 가는 길이요, 정상인 불썬봉은 0.5km 우리가 온 송촌마을까지는 5.5km라 하는데 미황사 표지는 빠뜨렸는지 없다.
그 이정표 위로 바위가 거센 힘을 자랑하듯 우람하게 서있는데 함께한 카우보이(닉네임)가 말하더라. '비아그라드 바위'라고.
문바위재에서 기암괴석에 놀라면서 하산 하는 길에 문바위가 있다. 하산길에는 미황사를 들어가는 문이요, 오름길에서는 달마산을 오르는 통천문 같은 문바위다.
달마산은 암릉 부분에 기기묘묘한 기암괴석들이 몰려있고 나머지는 육산 길로 산죽 우거진 멋진 오솔길이었다.
*. 미황사의 여정
달마산의 암봉으로 병풍 삼고, 서향하여 서정리와 국곡리 일대를 바라보며 서 있는 신라 33대 흥덕왕 때에 의조스님이 창건하였다는 고찰이 미황사다.
번성하던 시절에는 12 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고 미황사만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황사란 앞에서 말한 설화에서 유래된 말로 설화의 소의 울음이 지극히 아름다워서 아름다울 미(美) 자를 썼고, 꿈에 나타나서 절 지을 곳을 알려준 금인(金人)의 황홀한 금빛을 상징하여 누르 황(黃 자를 취해지었다 한다.
절 입구에 들어서니 '드디어 오셨군요.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달마산 미황사입니다.' 하는 간판이 멋지다. 절을 오르는 길 가에는 20일 뒤로 다가올 초파일 연등 행렬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다.
이 절에서는 대웅전(보물 제947호)과 응진당(보물제1183호)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대웅전은 자연미가 물씬 풍기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인데 단청을 하지 않아서인지 고찰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응진(應眞)이란 말은 석가모니의 가장 뛰어난 수행자를 뜻하는 말로 아라한 또는 줄여서 나한이라고 한다. 나한에는 보통 16분이나 500분의 나한이 있는데 미황사 응진당(應眞堂)에는 16분의 모습을 모셨다. 응진당의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250년 무렵인 영조 27년에 지은 팔작집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을 논할 때 등장하는 유명한 당우다.
이러한 대웅전, 응진당이 명부전과 함께 회색빛이 감도는 달마산 불썬봉과 어울려 서 있는 것이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흔히 미황사를 ‘삼황의 미’(三黃의 美)를 갖춘 사찰이라고도 한다. 미황사에는 ‘불상과 바위와 석양’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이다.
내가 절에 와서 꼭 가지고 가는 것이 절의 생수다. 수통에 가득 담아 가서 냉장고에 두었다가 그 물을 마시며 다녀온 산과 절을 즐겁게 회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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