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들은 서울에서 삼남으로 내려갈 때, '노들나루(노량진.鷺梁鎭)'보다는 '동재기나루'를 더 많이 이용했다. 그것은 동재기나루를 건너면 바로 남태령을 넘어 과천 고을을 지나 수원 북문쪽으로 곧장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재기나루를 지나면 '사댕이'(사당동) 벌을 지나 '승방들'을 거쳐 '남태령(南泰嶺)'을 넘게 되고, 고개를 넘으면 과천읍을 지나 '새술막'(과천시 문원동 일부), '찬우물'(과천시 갈현동 일부)로 해서 인덕원(仁德院)에 이르고, '지지대(遲遲臺)고개'를 넘으면 수원 북문으로 이르게 돼 있었다.
"동자기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춘향전>의 이도령 남행 부분의 이 구절을 보면 당시의 삼남로(三南路)의 뻗은 줄기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다.
이 길의 중요 길목인 남태령은 옛날엔 여우가 많아 '여우고개'라 불렸던 곳이다. 관악산의 북쪽 기슭은 전엔 여우가 많았던 곳으로, 6.25 무렵만 하더라도 밤이면 여우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곤 했었다.
정조 능행길은 원래 시흥 방향이 아니고 지금의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가는 길이었다. 노량의 배다리(주교)를 건너 용양봉저정-만안고개-금불암-금불고개(지금의 숭실대 부근)-사당리-남태령-과천행궁-찬우물점-인덕원천교-갈산점-원동점-사근참행궁-지지대고개를 거쳐 화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1795년 거둥길은 이 길을 피하고 시흥길을 택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남태령길을 닦는 것이 힘들어서였다. 한편, 야사에 의하면, 능행차길은 과천을 거쳐 인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찬우물점을 거치게 되는데 이곳에 김약로(金若魯 1694~1753) 무덤이 있어 이를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김약로는 노론의 영수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김상로(金尙魯)의 형이다. 아마도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을 가까이 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통한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새로 선택된 시흥길은 언덕이 적은 편이어서 길을 내기가 비교적 쉬웠다. 이 길을 만들기 위해 경기감사 서용보(徐龍輔)가 책임을 맡았고, 평안도의 남당성(南塘城) 공사에 쓰고 남은 돈 1만 3천 냥을 투자하여 1794년에 완성하였다. 이 길에도 안양천을 비롯하여 많은 개울이 있어서 크고 작은 교량을 세워야 했는데 서울에서 현륭원까지 모두 24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또한, 1천7백여 명의 인원이 말을 타고 5열, 많은 경우 11렬로 행진하는 까닭에 길의 폭이 이를 용납할 만큼 넓어야 했다. 길의 너비는 대략 24척으로 오늘날 10미터 정도에 해당한다. 이 도로는 순조 때에도 계속 확장되어 마침내 전국적으로 10대로(大路)에 들어가는 간선도로가 되었다.
서울/ 안양/ 과천 지경에 솟은 관악산은 서쪽 무네미고개 건너에 삼성산(456m), 북쪽으로 나아가 호암산(장군봉)을 솟구치고는 지세를 나추어 난곡으로 내려 선다.
동쪽 연주대 쪽으로 벋은 한 줄기는 남태령을 지나 우면산을 솟구치고, 다른 한 줄기를 북쪽으로 벋어 까치고개를 지나 동작나루를 오른쪽으로 보며 노량에 이르는데, 그 서쪽에 한국 제일의 명문 서울대학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고려 명장 강감찬이 태어난 낙성대를 품에 안고, 그 끝 자락에 동호(東湖: 玉水)- 용산강(龍山江)- 마포강(麻浦江)- 서강(西江)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한강의 물 구비를 내려다 보고, 남산의 푸른 솔을 올려다보는 동작동 명당자리에 제1국립묘지 자리를 마련 해 주고, 노량에 만고 충신 사육신의 뼈를 묻어 주니, 관악산은 이 강토의 영재를 기르고, 강토를 지킨 장수를 낳고, 나라에 보국(報國)한 분들과 여섯 충신의 유택(幽宅)을 마련해 주며 그 사명을 다 하고 있다. 관악산은 산의 형상이 전형적인 화성(火星)이다. 마치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는 형상이다.
그래서 조선조 초기에 한양천도(漢陽遷都)를 결정해 놓고 궁궐터를 잡을 때 관악산의 화성(火星)이 논란의 핵심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강화문 앞 두개의 해태상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견제하고, 중화(中和) 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등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오고 있다.
관악산은 예로부터 경기오악(京畿五嶽)의 하나로 꼽아왔다. 원래 악(岳) 또는 악(嶽) 자는 '큰 산’, '엄하고 위엄 있는 모양’ 을 의미하는데 언제부터 인가 '바위 산’을 의미하는 글자가 되었다.
* 오성(五星) : 원래 다섯 개의 행성, 즉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을 말하는데 풍수지리설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산의 형상에 적용하고 있다.
목성(木星): 산이 나무가 곧게 자라 듯 하늘을 찌를 것처럼 우뚝 솟은 산
화성(火星): 산이 불꽃처럼 하늘로 치솟는 산
토성(土星): 산정이 평평하게 생긴 산
금성(金星): 산마루턱이 둥글게 생겨 마치 종(鍾)을 엎어 놓은 형상의 산
수성(水星): 산등성이의 굴곡이 파상형을 이룬 산
▲ 경기오악(京畿 五嶽)
① 가평의 화악산(華嶽山, 1468m)
② 개성의 송악산(松嶽山, m)
③ 파주의 감악산(甘嶽山, 675m)
④ 포천의 운악산(雲嶽山, 935m)
⑤ 과천의 관악산(冠嶽山, 631m)
▲ 연주대(戀主臺)
관악산 최고봉(해발 631m) 동쪽 약 100m 되는 지점(해발 629m)에 언제 누가 지었는지 잘 모르지만 조그마한 누각 연주대(戀主臺)가 있다. 이 연주대의 이름 '연주(戀主)’의 유래에 대한 설이 많은데, 그 중 두 가지가 일반적이다.
하나는 왕위를 동생 충녕(세종)에게 양보한 양녕대군이 이곳에 있으면서 늘 동생이 나라를 잘 다스려 만 백성을 편안케 하고, 성군이 될 것을 빌면서 임금(主)을 생각(戀)하며 지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긍정적인 설이고,
또 하나는 왕위를 자의건 타의건 간에 동생에게 빼앗긴 양녕대군이 이곳에 와서 지내면서 늘 임금자리 (王位= 主)를 생각(戀)하며 지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부정적인 설이다.
▲ 남태령(南泰嶺) 월치전(越峙錢)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도 조정이나 지방이나 어딜 가나
백성들로부터 돈을 긁어 모으는데 기발한 아이디어를 다 짜냈다. 그 한 예로 시골사람이 과천을 지나, 남태령을 넘어, 동작나루 에서 한강을 건너, 남대문으로 도성에 들어 갈 때 내는 세금이 다음과 같이 모두 네 번 이다.
① 새전(賽錢): 남태령을 무사히 넘도록 굿하는데 내는 세금,
연령과 지방에 따라 차등과세 하였는데, 멀고 궁벽한 시골 사람 일수록 많이 냄.
② 월치전(越峙錢): 남태령 넘는 세금(호송비, 여자는 2배)
③ 도진세(渡鎭稅): 한강 도강 세금, 임산부는 1.5배
④ 입문세(入門稅): 남대문 통과 세금
그래서 생긴 말: 물건 판 돈 세금으로 다 빼앗기고 노자가 없어
'청산(靑山) 대추장수 머리 깎아 팔고, 청양(靑陽) 고비장수 몸 팔고 간다’
▲ 과천현감 송덕비명(頌德碑銘)
조선조때 지방 수령 중에서 과천현감이 가장 좋은 자리로 알려 지게된 것은 서울에서 가까운 이점도 있었지만, 새전(賽錢)과 월치천(越峙錢)과 같은 다른 곳에서는 없는 세금을 걷어들이면서 떨어지는 떡고물이 치부하는데 더 없는 좋은 기회이기 대문이다.
떡고물이 아니라 아예 떡판 채 먹어치우는 사또도 있었는데 어떤 현감이 재직간 두둑히 재물을 모아 상납도 하고, 서울에 집과 살림도 알차게 장만하고, 조정 요로에 구석구석 뇌물을 먹여 놨으니 임기 끝나고 또 좋은 자리로 영전할 수 밖에---
그러니 아전들까지 나서 송덕비까지 세워 준다고 야단들이니 사또! 그저 마음이 흐뭇할 뿐이다.
이방이 와서 송덕비명을 묻는다. 여유 만만한 현감! 너이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이튿날 재물을 바리바리 싣고 서울로 떠나는 구관사또 행렬이 남태령 밑에 잠시 멈추고, 말에서 내려 제막 할 송덕비 앞으로 가 비문을 읽어 본 즉
今日送此盜 (금일송차도: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낸다)
구관사또! 껄껄 웃고는 붓을 들어 그 옆에다 붙여 한 줄 쓰는데
明日來他賊 (명일래타적: 내일 다른 도둑놈 올 터인데)
구관사또는 떠나고, 기가 찬 아전이 또 한 줄 보태니.
此盜來不盡(차도래부진: 이런! 도둑놈 오는 것이 끝이 없구만!)
지나가던 행인이 읽어보고 또 한 마디 보탠다.
擧世皆爲盜 (거세개위도: 세상 모두가 도둑놈들 뿐이니까
과천은 삼국시대애는 고구려의 '율목(栗木)' 또는 '동사흘(冬斯 )' 또는 '율목군(栗木郡)'이었다. 이를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친 것을 고려 초에 '과주(果州)'로 고쳤고, 8대 헌종 9년(1018)에 이를 광주(廣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3대 태종 13(1413)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果川)'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는데, 다음 해에 금천(衿川.지금의 서울 금천구와 시흥시 일부)에 합쳐 '금과(衿果)'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복구되고, 7대 세조 때에 다시 금천에 합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또 복구하였다. 그리고, 조선 말인 고종 32년(1895)에 지방 관제 개편에 의해 군이 되었던 것을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시흥군에 편입되어 면(面)이 되었다.
1979년 4월 28일 경기도 조례에 의해 경기도 과천지구 지원 사업소를 설치하였다가 1982년 6월 10일 과천지구 출장소로 승격하였다. 출장소로 승격한 해부터 정부 과천청사와 서울대공원이 들어앉게 되었고, 1986년 1월 1일에는 시로 승격하였다.
현재 과천시와 군포시, 안양시, 서울의 강남구, 금천구, 관악구의 각 일부 지역이 옛날 과천군에 속했던 곳이다.
과천의 옛 땅이름 '율목(栗木)', '율진(栗津)'에서 율은 그대로 '밤(栗)'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율목'을 '밤나뭇골', '율진'을 '밤나룻골'의 뜻옮김으로 보기도 한다. '밤나뭇골'의 '율목'이 어떻게 해서 '밤나룻골'인 '율진'으로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당시엔 과천(율목) 영역이 남태령 너머 한강까지 미쳤기 때문에 나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과천의 또 다른 옛 이름 '동사홀'은 이두식 풀이로 보면 '돗 ' 또는 '돗 골'이 된다.
이를 어떤 이들은 '돋골'에 해당한다며 '해 돋는 고을'이란 뜻으로 보기도 하나, 땅이름의 일반적인 정착 과정으로 볼 때 그런 의미의 땅이름이긴 어렵다.
'동사흘(冬斯 )'을 이두식으로 풀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동(冬)=도
사(斯)=ㅅ 또는 사
흘=홀 또는 골(고을)
>동사흘=도사골(돗아골. 돗골)
그러나, '돗골'이나 '도사골'을 '해가 돋는'의 '돋'으로 본 것까지는 무리가 없으나, 이것을 '해솟음'의 뜻으로 본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돗(돋)'은 '높은 지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 지역이 산이 많아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풀어 가야 할 중요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 평양 감사는 안 해고 과천 현감은 한다는데
조선시대에 과천은 남도 사람들에겐 꽤나 잘 알려진 고을이었다. 그것은 수도 한양의 남쪽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삼남(三南. 충청-전라-경상) 지방의 길손들은 서울로 올라오려면 대개는 이 과천 땅을 지나야 했다. <대동여지도> 등의 옛 지도를 보면 천안 삼거리쪽으로 이어진 남도길이 직산, 진위(평택), 수원을 거쳐 이 과천 땅을 지나 서울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한다.
<춘향전)에 보면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로 내려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도 역시 과천 땅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다.
"동자기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그만큼 과천은 예 사람들이 서울로 올 때, 또는 남으로 내려갈 때 대개 거쳐야 했던 중요 고읍(古邑)이었다. 특히, 지방 사람들이 이 곳을 통과하자면 통과세(?)를 내야 지날 수 있어서 어지간히 신경을 쓰기도 했다.
'서울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
'현감이면 다 과천 현감이냐?'
옛 과천읍의 중심 마을은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官門洞) 일대이다. 그래서, 전부터 이 곳을 '읍내(邑內)'라 했다.
과천 현감들은 곧잘 이 읍내를 지나는 길손들에게 돈을 받아 챙겼다. 그래서, 별 힘도 없는 사람이 아니꼽게 권세를 부릴 때 '과천 현감 행세하듯'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과천 현감도 무조건 그 통과세를 받아 낼 수는 없었던지 별별 구실을 다 붙여 길손들을 동헌 앞에 불러들여 돈을 내놓도록 했다. 관 앞에서 담뱃대를 물고 지나갔다느니, 말을 내리지 않고 지나갔다느니 하면서. 아전들은 심지어 가죽신을 신은 것까지 트집을 잡아 문세를 물렸다. 이 문세 수탈로 인해서 길손들은 서울 문턱인 이 곳에서 적잖은 돈을 털려야 했다.
과천 읍내를 통과해도 서울로 가기까지는 또 돈을 털려야 할 곳이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닌 과천 읍내 북쪽의 남태령이다.
이 남태령을 넘을 때는 길손들의 뜻과는 관계 없이 젊은이들이 고개 밑에서부터 달라 붙어 고갯길에서 도둑들부터 보호를 해 준답시고 동행을 하곤 꼭 사례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고개넘잇돈' 즉 '월치전(越峙錢)'이라는 것이었다.
월치전을 받는 곳은 이 곳 말고도 서울 근처만 해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무악재였다.
□ 과천의 여러 마을들
지금은 과천시가 시가지 형태를 이루었지만, 40년 전만 하더라도 이 곳은 지방의 여느 시골과 별반 다름이 없던 곳이었다.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의 좁은 들 사이로 양재천의 상류가 지나고 있었고, 들 양쪽의 언덕 곳곳에 초가집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던 곳이 개발로 인해 많은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면서 이름높던 그 과천 고을이 옛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별로 그 옛날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럼, 여기서, 과천에 옛날에 있었던 마을들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관문골(官門洞), 읍내
전에 과천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과천 군청의 문이 있어서 '관문골'이라 했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그 옆의 '안점말(內店洞)'을 합해서 '관문리'라 했다.
이 마을에서 서쪽인 새술막으로 가는 길에 군수나 현감의 선정비들이 세워진 '비석거리'가 있었다. 그 비석들은 1972년 길을 넓히기 위해 중앙동 동사무소 옆으로 모두 옮겨 놓았다.
종앙동 동사무소 위에는 정조가 수원에 있는 부친(사도세자)의 능으로 참배하러 갈 때 쉬던 객사인 온온사(溫溫舍)가 있다.
·향교말(鄕校洞, 校洞)
지금의 문원동 관악산 입구쪽에 있던 한 마을로, 향교가 있어서 '향교말'이다. 발음 변화로 '생겻말', '생짓말' 등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개발로 인해 마을이 없어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문원(文原)'이란 이름은 향교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새술막(新酒幕. 外店)
길가에 있던, 문원동의 한 마을로, 옛날에 길손들이 잘 쉬었다 가는 곳이어서 새로운 술막 거리가 형성되었고, 그 때문에 '새술막'이다. 읍내 바깥쪽으로, 주점이 있던 곳이어서 한자로 '외점(外店)'이라고도 했다. 전국의 옛 도로 가에는 새술막 또는 '신주막(新酒幕)'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많은데, 이러한 곳은 대개 옛날에 많은 길손들이 지나다녔던 곳이다.
·홍촌말(洪村)
문원동의 한 마을로, 남양홍씨가 많이 살아 '홍촌(洪村)' 또는 '홍촌말'이다. 개발에 밀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정부 과천청사가 들어섰다.
·구리안(九里內)
골짜기 안에 있어 '굴(골)의 안'이란 뜻의 말이 이런 땅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관문동이나 문원동쪽에서 보면 완전히 골 안쪽으로 보이는데, 개발로 인해 이 마을도 없어졌다.
·다락터(樓基)
'다락'이 있어서 이 이름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산골 마을에 많이 붙는 '달(산)' 관계의 땅이름이 확실하다.
달+터>달 터>다 터>다락터
이 밖에도 과천시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마을이 있었다.
바바
·가는골(細谷) 문원동. 좁은 골짜기의 마을
·사기말(沙器幕) 사기점이 있었다고 하나……
·새터말 '사기말'과 '베레이' 사이의 새로 된 마을
·두집메 두 집밖에 없었으나, 나중엔 네 집이나……
·베레이(別陽洞) 청계산 골짜기 안의 벼랑쪽의 마을. '배랭이'
·한내(漢溪) 과천동. 옛날에 하리(下里) 지역. '큰 내'의 뜻. 큰 내(양재천)가 지나……
·삼거리(三巨里) 과천 읍내에서 올라와 두 길로 갈라지는 세 갈래의 길
·남태령(南泰嶺) 남태령고개의 과천쪽 마을.
·안골(內谷) 골짜기 안쪽 마을
·선바위(立岩) 산등성이에 바위가 서 있어. 지금 그 곳에 지하철역이 있다.
·뒷골(後谷) 골짜기 안 마을
·줄바위(注岩) 주암동. 원래 과천군 동면의 지역. 큰 바위가 줄지어 서 있어서. '죽바위'.
·돌무개(石浦) 돌이 많아
·삼부굴(三浦) 산밭골>삼붓골>삼부굴. 그 아래엔 '아래삼부굴'
·맑으내(맑내,淸溪) 막개동. '맑개'. 청계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내가…. '청계산'이란 이름의 바탕
·가루개(葛峴) 갈현동. 본래 과천군 군내면 지역. 옛날 과천과 수원 땅의 경계. 수계(水界)
워낙 고개가 높아 예부터 많은 도둑들이 들끓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 고개 밑에는 행인들이 고개를 잘 넘을 수 있도록해 준다며 장정들이 대기해 있었다고 한다.
이 고개를 전에는 여우가 많아 '여우고개'라 하기도 했었다
정조 임금도 수원을 오고갈 때 이 고개를 주로 넘었는데, 그 때까지도 이 고개를 대개 '여싯고개' 또는 '여우고개'라고만 불러 왔었다. 한자로는 '호현(狐峴)' 또는 '엽시현(葉屍峴)'으로 씌어 왔다.
학자들 중에는 '여우'의 비표준어로 '여시' 또는 '야시'가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높은 재'가 아닌 '낮은 고개'라 해서 '얕은 고개'의 표현인 '야지고개' 또는 '야시고개', '여시고개', '여우고개'가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어떻든, '여우고개'가 한자로 뜻옮김된 것이 '호현'이고, '여시고개'의 '여시'가 소리옮김으로 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느 땐가 정조 임금이 이 고개를 넘다가 근처 토박이 사람에게 이 고개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가 그 요사스런 짐승 이름이 들어간 고개의 이름을 바르게 댈 수 없다면서 서울 남쪽의 큰 고개라는 뜻으로 '남태령(南泰嶺)'이란 이름으로 얼렁뚱땅 대답을 한 것이 그대로 이름으로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남태령'이란 이름은 그보다도 훨씬 전에 이미 있음이 문헌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이 전설의 신빙성이 별로 없다.
남태령은 또 고개가 너무 후미지고 도둑들이 많다는 소문이 있어서 웬만한 장정도 이 고개를 넘을 때는 혼자서 넘질 않았다. 이를 악용해 남태령 밑의 '한내'라고 하는 곳에서는 행인들의 돈을 뜯어 먹는 얌체 '고개넘이꾼'이 있었다. 이들은 도둑들로부터 행인을 보호해 준답시고 함께 동행을 하여 고개를 넘겨 주고는 돈을 요구했다. 이른바 '고개넘잇돈' 한자로는 '월치전(越峙錢)'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지방에서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이 과천을 거쳐 지금의 과천동 '삼거리'라는 곳에 이르면 남태령길로 질러 가느냐 조금 돌더라도 말죽거리쪽으로 돌아가느냐를 결정하느라 망서리곤 했었다.
남태령은 그만큼 예부터 넘기가 거북한 고개였다. ///
서울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 나루에 이르고, 다시 흑석동(黑石洞)을 지나 강변을 끼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동작동(銅雀洞) 이수교(梨水橋)를 우편으로 돌아가면, 승방평(僧房坪) 석굴암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6㎞ 쯤 가면 큰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가 바로 남태령(南泰嶺)이다. 이 고개는 예전에 과천(果川)을 거쳐 수원(水原)으로 가던 옛길이었다. 또한 삼남(三南)으로 통하던 길이었고, 한때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극한 효성에서 아버지를 그리워 하여 묘소로 가시던 길이었다.
과천을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물맛이 좋아 정조께서 가자(加資)로 당상(堂上)벼슬을 제수(除授)했다는 우물이 있고, 그 위 산에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 아버님이신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할아버지에 의해 돌아가실 때 협력했다는 김상로(金尙魯, 1702-1766)의 형인 좌의정(左議政) 김약로(金若魯, 1694-1753)의 묘소이다.
곡담을 쌓아 정승묘답게 모두 갖추어진 묘였지만, 정조께선 지난날의 아버님의 애절함을 생각하여 지나는 길 옆에 놓인 그 묘소조차 보기 싫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 뒤 안양에 만안교(萬安橋)를 새로 놓고, 새 노정(路程)을 택하여 다니게 된 것이 이러한 연유에서였다고 한다.
정조(正祖)께서 과천에서 쉬어 가실 때, 과천의 옛 고을 이름을 따서 이 곳 아헌(衙軒)인 동헌에 부림헌(富林軒), 내사(內舍)를 고요하고 편안하다 하여 온온사(穩穩舍)라 명명(命名)하고 친히 현판을 썼으니(정조 14년(1790) 2월 11일), 지금까지도 그 현판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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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hlee.com/sub05/sub01_03_3.html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방배리였던 이 동리는 1963년 1월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방배동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고을'이라는 설과 이 동자체가 '한강을 등진 모서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세조의 큰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자리를 세종에게 넘겨주고 전국을 돌아다닐 때 자신의 왕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갔다 하여 방배동이라는 설도 있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인 남태령(南泰嶺)에 얽힌 사연이 있다.
남태령에 수목이 울창하고 후미진 곳이 많아 관악산을 넘나드는 여우가 많이 출몰하였다 하여, 여우고개〔狐峴〕라 불러 오고 있었다.
하루는 정조대왕이 수원 화산에 모신 사도세자의 능원에 행차하실 때 남태령 고개에서 어가(御駕)를 멈추시고 잠시 쉬어가게 되자 한 촌로(村老)에게 넌지시 고개의 이름을 물으니,
남태령(南泰嶺)이라 하옵나이다
하고 즉석에서 고개의 이름을 고치어 아뢰었던 것이다.
정조께서는 이 고개의 이름이 여우고개임을 이미 듣기도 했으려니와, 한편으로는 일찍이 고려조의 공신(功臣)이요, 명장(名將)으로 알려져 있는 강감찬(姜邯贊)이 이 고개를 지나가다가 여우들의 장난이 너무 심하여 크게 꾸짖어 호령하기를,
네 여우들이 다시 이 고개에 근접을 하는 날이면, 너의 족속은 모두 멸종할 줄 알아라 하고 한 소리가 있은 후로 다시는 여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을 들었기도 하였는지라, 효심도 극진하지만 인자(仁慈)하기로 유명한 정조께서도 그 괘씸
함을 참지 못하시고,
너 어찌 거짓 이름을 대었느냐? 그 죄 죽어도 마땅할 지니라
하며 크게 꾸짖으시었다.
촌로는 엎드려 죄를 기다리는데, 정조께선 촌로에게 거짓 이름을 댄 사유를 또 다시 묻자, 촌로는 죽을 때가 되느라고 그랬사옵니다. 상감마마께 감히 거짓 아뢰고자 한 것이 아니옵고, 이 고개는 원래 여우고개이오나, 상감께서 물으심에 그런 쌍스러운 이름을 입바르게 알려올림이 황송하옵기로, 생각나는 대로 알렸사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남태령이라 했는고 하고 정조께서 물으니
다름이 아니오라. 이 고개가 서울서 남쪽으로 오면서 맨 처음 있는 큰 고개이옵기로 그리 아뢰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정조께선 촌로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서는 잠시 가졌던 노여움을 풀고, 촌로를 오히려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란 벼슬을 내리셨는데, 그후로는 이 고개를 남태령(南泰嶺)이라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 촌로는 과천에 살던 변씨(邊氏)라 전해지며, 변씨(邊氏) 일족이 아직도 남태령 부근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남태령
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여시골(엽시골), 즉 여우고개라 불리는 고개가 흔하게 널려 있다. 이는 예전에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이었다.
한양에서도 인근 경기도로 나가는 관문에는 곳곳에 여우고개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다름아닌 오늘날의 남태령이었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로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이다.
18세기 말 효성이 극진했던 정조는 수원에 있는 선친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었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다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이가 "이 고개 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로 불리는데, 왜 거짓말을 아뢰느냐'고 힐책하자 이방 변씨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나 신하로서 임금께 여우고개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하고 아뢰니 정조가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에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부르게 된 것은 호랑바위가 있는 가까운 골짜기에 호랑골과 여 우골이 있어 여우가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명명되었다는 설과, 예날에 천년 묵은 여우가 사 람으로 변신하여 이 고개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 남태령이 란 이름이 붙게 된 시기에 대해 광해군 때 만들어진 춘향전에 이 남태령이 이미 나오고 있 으므로 정조 이전에 불려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관음사는 신라가 쇠퇴기에 접어든 895년(진성여왕 9)에 도선국사가 세운 비보사찰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해 줄 만한 유물이나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1943년 이후에 쓰여진 《봉은사본말사지》에 그러한 내용이 보일 뿐이며, 행덕이라는 스님이 쓴 <관음사중수기>에 삼한의 옛 절이라 했을 따름입니다.
더구나, 도선국사는 827년부터 898년까지 살았으므로 이 절을 창건한 895년은 국사가 입적하기 3년 전이며, 이 때는 도선국사가 15년간 전국 각처를 유력하다가 전라도 광양 옥룡사에 머물러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열고 있었던 무렵입니다. 이렇듯 도선국사가 절을 창건하였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찾아볼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사실로 간주한다면 아마도 관악산의 줄기인 안양시 삼성산 삼막사를 관음사로 중창할 무렵에 이 절도 관음사로 창건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이후 조선시대 철종 때까지의 절의 역사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조선초기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인문종합지리지에 변계량이 관음사 절경을 읊은 시를 통해 이무렵 관음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후기에인 영·정조 때 쓰여진 사찰종합서라 할 《범우고》,《가람고》와 영조 때 쓰여진 전국읍지인 《여지도서》라는 지리서에도 관음사가 보이고 있다. 예로부터 관음사의 아래에 있는 승방벌이라는 마을과, 그 앞에 승방교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관음사의 사세는 적은 규모가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조선초 초기부터 한양 땅을 오고가는 남녘의 사람들에게는 육로 길로서는 유일한 관문이었던 이 고개는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에 첫 번째로 높은 고개라고 해서 남태령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 옵니다. 그러므로 한양을 찾아오는 과객들은 이 고개를 넘기 전에 과천땅에서 하룻밤 여장을 풀어야 했으므로 과천땅에는 목로주막집들과 숙박업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로 이곳의 숙박업소들은 벼슬아치와 지방의 유생을 상대로 하는 곳이었므르로, 으례히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오는 선 비들은 이 곳에서 하룻밤만 묵는 것이 아니라 며칠씩 묵으면서 과거장에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기풍등을 매사에 빈틈없이 익히 고 수련한 다음 과거 전날은 이 산 자락에서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몸을 정갈하게 닦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해서 과거를 보 러가는 과객들이 목욕을 하는 시내라 해서 과천(科川)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도 하고 과거 보러 가는 과객들이 묵어가는 촌 이라 해서 과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점차 실과 果자를 붙혀서 부르게 된 오늘의 과천이라고 전해옵니 다. 이처럼 남쪽의 과객들은 육로길로 과천을 거쳐서 남태령 고개를 넘어 유유히 흐르는 한강수를 내려다 보면서 동작 나루를 향해 가노라면 남태령 북단 자락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 곳 북단 자락에서 서녘으로 다시 높은 산 고갯길이 있는 이 산에는 많은 까치들 이 서식하는 산이라 해서 까치산이라 부르는 산 자락을 지나게 마련이었습니다. 이 산 이름도 그 당시 옛 선인들 시대부터 부르던 산이름이 오늘날까지도 불러집니다.(사당 전철역에서 낙성대로 넘어가는 남부 순환도로 고개를 까치산 고개라고 부릅니다) 그 옛 날부터 길조라고 불려지던 까치들이 많이 서식하는 까치산 자락을 지날 때면 , 반갑게 반겨 주는 길조들과 선비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남녘 한 젊은 선비가 무예에 많은 수련을 쌓고 몇 해를 두고 춘추로 시행하는 왕궁의 대 행사인 과거장을 수없이 드나들며 과거를 보았으나 자신보다 못한 무예솜씨로도 무난히 등극을 하는데 이 선비는 초라하게 낙방하는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젊은 날의 자기에게 주어진 행사거니 하고 집에서도 과거보러 간다는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않고 때가 되면 슬며시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느덧 과거장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가 꽉 차 그 해에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 하는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춘계 과정에서 보기 좋게 낙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비는 실망하지 않고 초가을에 과장을 또 다시 찾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며칠을 육로 길을 걸어서 이 전설이 어린 남태령 고개 자락의 과천 땅에 당도했 습니다. 이 곳에서 그도 역시 여장을 풀고 가야 했습니다. 여장을 푼 선비는 단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그에게 까치들이 찾아와서 저마다 다음과 같은 사연을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비님의 소원은 무과에 급제하시는 것, 그것임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비님은 저희들의 애타는 소원이 무엇인 가를 모르시니 어찌 하겠소. 그러나 선비님께서 저희들의 소원을 들어 주시려고 하면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일입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모든 지혜를 다해서 선비님의 장원 급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저희들도 머리가 명석한 면도 있습니다. 태풍 이 불어서 큰 등치의 나무는 부러져도 우리들이 지어 놓은 집은 엉성해 보이나 부서지지 않는 지혜로 짓게 되었음은 조상대대로 물려온 지혜이오니 믿어 주시고, 저희들의 애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희들은 이곳에서 먼곳으로 이주해야 됩니다. 만일 저희의 애원을 들어주신다면 이곳에서 선비들께 인사를 드리오며 자자손손 번영을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하고는 모든 까치들이 자신의 이마 머리 앞에 서서 갸웃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꿈 자리에서 일어난 이 선비는 아무리 생각해도 얄궂은 꿈이었으나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른 새벽 시냇물에 목욕을 하고 여장을 꾸려 남태령 고개를 넘어서 이 까치산 자락춤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처럼 반기던 길조들은 아예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고 온 산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이상한 생각이 든 선비는 사방의 동정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 상스런 "쉬 ~ 쉬~쉬"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초가을 이른 아침인데 웬 큰 구렁이가 까치집들이 많이 지어진 큰 아름의 고목 나무를 타고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 아 그렇겠구나, 저 놈 때문에 너희들이 이주해야 될 큰 문제를 안고 있었겠구나 그래 알겠다 너희들의 소원은 이것이었구나." 하고 화살을 뽑아 힘있게 당기니 구렁이의 머리에 명중한 화살이 나무 통에 깊이 꽂혔습니다. "그래 내가 너희들에게 해야 할 일이 이것이었구나" 하고 선비가 계속 한양을 향해 가려 하자 많은 까치들이 하늘을 수놓으며 정 겨운 날개로 박수 갈채를 보내는 듯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비는 " 정말 신기한 일이구나
하고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과장에 도착하여 입시 절차를 마치고 과장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난데 없이 경복궁 뒷뜰 무사도 의 시험장 앞 큰 나무에 아침에 까치산에서 쏘아 죽인 그 구렁이가 나무를 옮겨다 놓은 것처럼 화살에 박혀 늘어진 채 있었습니다. 그러니 썩어가는 동물을 기호물로 하는 까마귀 떼들이 새카맣게 날라와 까욱까욱 짖어대며, 구렁이를 서로 찢어대는 것이었습니 다. " 이 경사스런 시험장에 이 무슨 변고이며, 그리고 그 누구의 장난인고? 대궐의 뒷 정원에 화살은 날린 사람은 누구인고? 이 심상치 않은 징조이니 오늘 무과 시험은 저 까마귀를 잡는 화살을 날려서 누가 많은 까마귀를 떨어뜨리느냐하는 것이 주제로다."
여기서 이 영물의 날짐승인 까치들은 혼신을 다한 힘으로 청년을 돕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많은 무과의 입무생들이 기 량을 겨루는 과정에서 아무도 한 마리의 까마귀를 떨어뜨리지 못하였으나 은인이 쏘는 화살은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고, 까마귀를 명중하게 했으니, 늦게나마 결국 길조들의 도움으로 무과에 등극하였다고 합니다.
과천 정부청사 지하철역에서 내려 관악산 쪽으로 바로 꺾어 걷는다.
길은 한적하고 깔끔하다. 게다가 도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여유마저 배어있어 시새움이 생겨날 지경이다.
이곳 과천은 성남의 분당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살기 좋은 도시 순위 1, 2위를 다투는 곳으로 꼴찌도시에 사는 자유촌 가족으로서는 시샘을 넘어 아예 찹찹한 마음이기도 하다.
여행을 하며 여러 도시를 걸어온 기연이도 저 사는 곳보다 좋은 동네임을 대번에 알아챌 만큼 눈썰미가 생겼는데, 잠시 걸어 마주친 장승과 솟대를 바라보는 표정은 지난번 수원의 만석거공원을 지날 때의 떨떠름한 모습과 별 다름없다.
'왜 의정부에는 이런게 없지?' 라는 시무룩한 얼굴..
온누리에 수천 개쯤이 있었을 그 흔한 장승은 이제 보이지가 않는다.
오히려 장승을 보게 되면 반갑고 신기해야할 만큼 우리네는 여유를 잃고 사는가보다. 아파트 입구나 동사무소마다 하나씩 세워두면 어떨까?
관악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 넘어에 향교가 보인다. 그러나 기연이는 향교보다는 계곡물에서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에 더 관심을 보인다.
향교에서 글을 배우는 것과 계곡물에서 놀며 자연을 배우는 아이들의 모습이 묘한 생각으로 대비된다.
향교를 둘러보고 나오도록 기연이는 계곡물에 눈을 박은 채 정신이 없다.
그늘 아래로 다가서 곁에 앉으며 힘없는 한마디를 내 놓는다.
" 아빠도 너만했을 땐 두험천(의정부를 흐르는 중량천의 옛 이름)에서 저렇게 물장구치며 놀았는데.. "
" 그런데 지금은요? "
" 물이 더러워 졌잖아.."
기연이는 그저 물장구 치는 아이들만 빤히 쳐다볼 뿐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런 침묵은 자연을 그대로 물려주지 못한 어른세대의 항변으로 다가서듯 하여 죄진 마음이다.
그나마 목젖까지 올라온 '미안하다'는 생각조차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파묻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며칠 후 이날 기연이의 침묵을 의정부시청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의정부에 공원을 만들고 두험천을 깨끗이 하여 물장구 치며 놀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의 글로...
계곡을 따라 길을 잠시 내려오면 중앙동 사무소가 나타나는데 과천초등학교 일대를 포함한 과천현의 관아가 자리했던 곳이다.
입구부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위풍당당이다.
580년, 조선시대와 일제 감점기를 꼬박 지켜보며 오늘에 이르렀으니 인간의 허망한 욕심따위는 범접할 수가 없다.
조금 위의 언덕에는 과천현의 객사로 쓰이며 정조가 쉬어가기도 했던 행궁인 온온사(穩穩舍)가 그림처럼 앉아있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는 과천역의 기록이 있으나 그 흔적은 찾을 수 가 없는데 혹 이곳 온온사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1694년에 세워진 이 객사는 기록과는 달리 일제에 의해 부서지고 불과 16년 전에 다시 세워 놓았다.
과천현 객사인 온온사
그나마 현재의 모습도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전라남도 승주군의 객사를 참고 하여 복원하였으며 원래 위치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인데 저 은행나무는 모든 것을 훤히 알터이니 여쭈어 보면 될터이다만 어느 누구도 물어볼 생각이 없다.
걷다보면 짧은 거리인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길이 있는가하면 먼 길임에도 짧은 시간이 걸리는 구간이 있다. 전자는 길이 좋아 걸음이 느려져 그런 것이고 후자는 길이 나빠 빠르게 탈출하고자 걸음에 힘을 주기에 그렇게 된다.
이곳 과천길은 짧은 구간임에도 진도가 안나가는 전자에 해당되는 길로서 이야기거리 또한 많다.
'과천부터 긴다'라는 속담이 있다.
삼남대로의 마지막 길목인 과천현에 도달한 촌뜨기들이 한양의 위세에 눌려 지레 기어 간다고 해서 생겨난 속담이라 하는데 순진하게만 생각한다면 틀림 없을 풀이이다.
그리고 또 다른 속담으로 '과천에서 뺨 맞고 남대문에서 눈 흘긴다.'는 속담도 있다.
나그네들이 과천부터 기어야 했던 앞 선 사연이 어쩌면 이 속담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최근까지도 대수롭지 않은 벼슬로 아니꼽게 권세를 부리면 '과천 현감이라도 되나?'라는 빈정거림이 있었으니 길손에 대한 과천 현감의 착취와 횡포는 대단했던 듯하다.
영남대로에서 과천에 해당되는 길목은 지금의 서초구 양재동인데 그곳에서는 이곳처럼 너저분한 뒷얘기가 들리지 않는다. 이는 영남과는 달리 서해의 수산물과 곡창지대가 많았던 삼남쪽의 지역적 풍요에서 기인되지 않나 싶다.
결국 과천을 오가는 길손은 신분으로도 만만한 상인이었거나 물류의 중요 길목이었을 터이니 시쳇말로 사람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돈 다발이 오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인데 어찌 쉽게 지나 보냈겠는가..
별의별 트집을 부리며 길손들을 괴롭히던 현감 중에는 길손을 모아서 험한 남태령을 넘게 해준다며 많은 돈의 수고비를 요구하였고 심지어는 길손의 주머니까지 털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남대문에 들어선 길손들은 당연히 눈을 흘겨댈 수밖에..
길을 걸으며 기연이에게 이런 얘기를 해 주니 그저 뜨악한 표정뿐이다.
복원된 남태령 옛길
걸음은 큰 찻길로 이어져 관문사거리를 지나 한내마을로부터 남태령 옛길을 넘는다.
남태령 옛길은 과천시에서 2년전에 복원한 길로서 길이 어떻게 생겨나고 없어지는가를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길의 복원은 영남대로의 구미에 있는 서울나들길과 이곳이 대표적인 곳인데 복원 그 자체만으로도 옛길을 찾아 걷는 자유촌으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진위와 평택 구간을 걷고 나서 평택시에 옛길의 복원과 안내판 설치를 건의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여하튼 많은 길이 복원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여우재 즉, 호현(狐峴)이라 불리던 이 고개는 정조 때부터 남태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조가 수원 화산의 능행길에 이 고개에서 잠시 쉬어가게 되자 변씨 성의 한 노인에게 고개의 이름을 물으니, 노인은 남태령이라 거짓 답한다.
정조는 이 고개의 이름이 호현임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정조는 그 노인을 꾸짖는다.
이에 노인은 왕의 물음에 여우재라는 쌍스러운 이름을 올림이 황송하여 이 고개가 한양에서 오는 첫 고개이어 그리 답하였다고 하니, 정조는 노인이 가상하여 벼슬을 내렸고 그후로는 이 고개를 남태령이라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현이 남태령으로 바뀐 사연 치고는 어딘지 모르게 옹색한 것같다.
정조는 처음 5년간은 이곳 과천길을 통해 화성으로 행차하였다가 시흥, 안양으로 길을 새롭게 만들어 바꾸는데, 그 표면적인 이유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에 의해 죽을 때 협력했던 김상로의 형인 좌의정 김약로(金若魯)의 무덤이 과천 근처에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은 대개 겨울철에 이루어졌었다.
6천명이 넘는 정조의 겨울철 행렬에 눈길의 험한 이 고개를 넘는다는 것이 결코 녹녹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남쪽의 큰 고개, 즉 능행길을 안양으로 돌리고 남태령으로 이름을 바꾼 결정적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찬찬히 사정을 살펴본다면 고개 이름과 길을 바꾼 속 사연을 이렇게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포장된 옛길을 조금 이으니 흙길이 나타나 삼남대로의 마지막 날을 걷는 자유촌 가족을 환영해준다.
남태령 흙길은 마루턱에서 망루(전망대)를 만나며 끝나고 찻길과 합류된다. 그러나 자유촌 가족은 찻길로 들지 않고 동쪽으로 나있는 여전한 흙길로 들어서 걷는다. 혹 길이 없어도 그만인 심산으로..
다행히 길은 이어져 마루 근처에서 경찰특공대의 철조망과 만나는데 그 철조망을 따라 내려오면 정각사 입구로 하여 남태령 지하철역으로 합류하게 된다.
소멸된 남태령의 서울쪽 옛길을 대신하는 훌륭한 구간이기도 하였다.
정각사의 평상에 둘러 앉아 준비해간 도시락을 펼치고 점심을 먹으니 가족 도보여행에 작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 고수레~ " 밥을 한술 떠서 던져준다.
기연이가 아까운 밥을 왜 버리냐며 눈을 휘둥그래 뜨며 거칠게(?) 물어온다.
" 이 밥을 먹게 해주어 고맙다는 인사이고 또 동물이나 벌레들과 나누어 먹자는 뜻이기도 하고.. "
어미의 설명에 고개 한번 주억 거리더니 저도 고수레~ 하고는 게눈 감추듯 뚝딱이다.
남태령 고개를 내려오면 산을 병풍처럼 깎아지른 관악산과 우면산 자락의 거대한 바위벽을 지난다.
채석장이었을 두 산을 서로 이어보지만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한번 부수면 복원은커녕 그림조차 그려지지가 않는다.
길은 사당사거리를 지나며 옛길의 이정표와도 같은 반가운 표석 하나를 만난게 된다.
표석은 승방평의 방향과 거리, 그리고 도구머리의 위치를 친절히 알려주고 있다.
방배우성아파트 단지가 된 승방뜰이라고도 불리는 승방평(僧房坪)은 승방이 있던 넓은 벌이라는 뜻으로 남태령을 넘나드는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하였으며 남태령을 넘는 일반 길손들도 쉬어갔던 곳으로 유명하였으며, 또한 이곳서 3백미터 거리에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다 하여 붙여진 도구머리, 도구두(道口頭)란 이름이 붙은 곳으로 남태령을 넘은 길이 이곳에서 노량진으로 갈리는 길이기도 하여 호패를 점검하던 검문소도 함께 있었다 한다.
길은 동작대로 곁에 있는 개울을 덮어 만든 도로를 택하여 이수진(梨水津, 이수교 일대)을 거쳐 동재기 나루, 동작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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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ccity.net/city/day/pages/day_04_18.htm과천의 자연마을,옛하리 일대의 마을
한내〔寒溪 寒內川 寒川〕
지금의 과천동(果川洞) 동사무소 북쪽, 즉 남태령(南泰嶺) 밑 골짜기 안으로 넓게 형성된 마을이 한내로, 이것을 한자로는 한계(寒溪 寒內川 寒川)라 했다.
여기서의 한내는 큰 내라는 뜻을 지닌다. 양재천이 마을 앞으로 지나는데, 과천 여러 곳의 물이 모여 흐르는 내여서 냇물의 양이 많아 이 이름이 붙었다.
관악산 동쪽 능선에서부터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을 가운데를 지나는데, 이 물이 흘러드는 양재천 가까이 이르러서는 그 남쪽의 다른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합한다.
마을 북쪽의 다른 골짜기 안으로는 무네미라는 작은 마을이 있고, 남태령을 넘는 큰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남태령(南泰嶺)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일대는 본래 과천군 군내면(郡內面)의 지역으로, 남태령 아래쪽이라 해서 하리(下里)라 하던 것을 과천이 시가 되면서 과천동(果川洞)으로 바뀌었다.
마을의 남동쪽으로는 선바위[立岩]라는 마을이 있고, 남서쪽으로는 삼거리(三巨里)라는 마을이 있다.
삼거리(三巨里)
이 곳은 옛날부터 서울로 가는 중요 길목이었다. 세 갈래 길이 있어서 그 이름이 삼거리이고, 그 길목의 마을 이름까지 똑같이 삼거리를 그 뿌리로 하고 있다.
과천 읍내에서 남태령(南泰嶺)을 넘는 길이 이 곳을 지나면서 동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갈래를 쳤다. 이 길은 옛날부터 우만이[牛眠]를 지나 말죽거리 쪽으로 가는 길이어서 남도에서 서울로 가는 길손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하고 많이 망서리던 곳이다.
옛날 남태령(南泰嶺)이 몹시 후미지고 고갯길도 험한 데다가 자주 산짐승들이 나오곤 해서 이 고개를 넘을 사람들은 대개 이 삼거리 마을에서 몇 명씩 모여 넘곤 했다. 또 더러는 마을 장정들이 길손들을 동행해 주고는 그들로부터 사례를 받고는 했다.
그렇던 세갈래 길이 지금은 네 갈래 길(남태령 네거리)로 변했다. 남동쪽으로 양재천을 건너 과천 서울대공원 쪽으로 들어가는 큰길을 새로 냈기 때문이다. 네거리가 된 지금은 사방으로 열린 길이 모두 넓어서 옛날 길손들이 걸어서 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동사무소 근처엔 옛날 한양에서 넘어오던 길손들이 잠시 쉬어 가던 고목 한 그루가 남아 있었다.
남태령(南泰嶺)
남태령 고갯길 아래쪽으로 골짜기를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남태령 밑에 있다고 해서 남태령(南泰嶺)인데, 남태령 넘어 서울에 있는 마을을 보통 넘어남태령이라고 부른다.
무네미(무너미)
남태령 마을 동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골짜기 안 깊숙이 자리해 있어 큰길이나 고갯길에서 볼 때는 마을이 있는 것조차 알 수 없다.
무네미(무너미)란 마을은 전국에 무척 많다. 대개는 물이 넘어서 이 이름이 나왔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으나, 여기서의 무는 뫼의 옛말인 모가 변한 것도 많다.
모너미(모넘이)〉무너미
즉, 무너미 중에는 뫼를 넘음의 뜻인 모너미의 전음인 것도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곳도 남태령 고갯길이나 한내마을 쪽에서 갈 때 작은 뫼 하나를 넘어야 가므로 역시 뫼 넘음의 뜻을 가졌던 이름이 아닌가 한다.
골짜기 아래쪽(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선바위〔立岩〕마을이 있다.
선바위〔立岩 禪岩 仙岩〕
삼거리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길, 즉 서울 양재동 쪽으로 가는 길 첫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남쪽으로 넓은 들을 안고 있는 이 마을은 그 서쪽에 한내마을을 두고있고, 북동쪽으로 뻗은 길가에 하락골 안골 등의 마을을 이어 놓고 있다. 그리고 남쪽 들 건너쪽으로 궁말 벌말 삼거리 등의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양재천이 관악산과 청계산 자락 사이를 흐르는데, 이 선바위 근처에서 두 산 자락이 가장 가까이 만난다.
관악산 자락의 이 선바위는 양재천을 건너 그 동쪽으로 1㎞도 안 되는 위치에 청계산 자락에 있는 광창마을을 두고 있다.
선 바위가 있어서 마을이름이 선바위이다. 입암(立岩) 선암(仙岩) 선암(禪岩)이라는 한자식 이름은 선바위의 뜻 소리빌기(意 音譯) 표기이다.
지금 이 마을의 동쪽에는 과천시 하수 종말 처리장이 있다.
광창(光昌)
과천경마장 서쪽에 이 마을이 자리해 있다.
청계천 산자락에 있는 이 마을을 건너쪽(서쪽)으로 선바위 하락골 안골 등의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마을 뒤쪽 등성이 너머로 청계산의 한 봉우리인 옥녀봉(玉女峰)이 바라다 보인다.
광창(光昌)이란 마을 이름이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는 잘 확인되지는 않는다. 더러 한자식 글자풀이로 몇 가지 설이 나와 있기는 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마을이 제법 크고 들 가운데로 불쑥 나온 청계산 지맥 끝에 자리해 있어 과천동(果川洞)의 어느 마을에서나 이 마을이 잘 보인다.
하락골[河洛洞]
선바위에서 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500m 쯤 간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우면산(牛眠山) 남쪽 기슭에 있는 마을로, 남쪽 양재천과 들을 사이에 두고 건너쪽의 광창 마을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뒤쪽(북쪽) 골짜기 안으로는 뒷골이 있다.
하락골에서의 하락(河洛)은 양재천이 이 곳을 지나므로 물이 떨어짐의 의미를 담은 것인 듯 하다.
그런데 이 마을의 이름은 시흥군에서 나온『통계연보』에 의하면 화락골〔和樂谷〕로 되어 있기도 하다.
뒷골〔後谷〕
하락골 뒤쪽 우면산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를 타고 계속 오르면 우면산의 서쪽 능선을 넘어 서울 서초구 방배동(方背洞)에 이르게 된다. 방배동(方背洞)의 방배(方背)는 우면산을 등지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의 이 방배동도 옛날 과천군 동면(東面) 또는 상북면(上北面) 지역이었다.
이 뒷골 마을이 과천시 전체로 볼 때 가장 북쪽이 된다.
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과천시 하천종말처리장 근처에서 양재천으로 들어간다.
뒷골이란 이름은 마을 아래쪽(남쪽) 하락골과 그 옆의 선바위 마을을 기준하여 붙여진 땅이름이고, 한자 지명 후곡(後谷)은 그것의 의역 표기이다.
안골〔內谷〕
하락골에서 길을 따라 300m 쯤 동쪽으로 간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양재천이 있고, 그 내 건너 청계산 기슭에 지금 과천경마장이 자리해 있다.
마을 동쪽 400m 지점 쯤에 식유촌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서울 우면동에 속하는 마을이다. 즉, 과천과 서울의 경계선이 안골과 식유촌 사이를 지난다.
관악산 기슭의 두 산자락이 마을을 삼태기처럼 둘러싸고 있어 마을이 산 안에 있는 듯이 보여 안골이라 하고, 한자로는 내곡(內谷)이라 한다.
`남태령부터 긴다'또는 '과천부터 긴다.'는 말이 있다. 시골 사람이 한양의 관문이 남태령을 넘으면서 곧 나타날 한양의 으리으리함을 생각하며 지레 겁을 먹는다는 뜻이다.
서울 사당동과 과천 관문사거리를 잇는 남태령 고개는 대관령, 문경세재 등과 함께 옛날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길목이었다.
대관령과 문경세재 만큼이나 험준하지는 않아 여우재(얕은 고개)로 불렀었지만 한양을 목전에 두고 버티고 선 고갯길에 사람들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현재 남태령은 서울 사당동과 과천을 잇는 대로로 뻥 뚤려있지만 옛날에는 한두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일제시대 신작로를 내면서 서울 쪽 반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과천쪽 일부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최근 과천시가 이곳에 남태령 옛길을 복원시켰다.
과천시 관문사거리에서 서울쪽 오른편에 마을이 보이고 샛길이 나있다. 현재의 남태령 대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좁은 길이 남태령 옛길. 1㎞도 채 안되는 짧은 거리지만 옆으로 작은 계곡이 있고 주변에 숲이 우거져 개나리 봇짐을 지고 고개를 넘던 옛 선조들의 모습을 다소나마 떠올릴 수 있다. 옛길이 끝나는 고개 정상 바로 아래는 지나온 길과 멀리 서울대공원 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누각이 세워져 옛 정취를 살려준다. 옛길은 대로로 이어지면서 끊기고 대로와 만나는 입구에는 남태령 옛길 표지석이 서 있다. 누각 옆 산으로 샛길이 나있는데, 이길은 군부대를 거쳐 지하철 남태령역까지 내려가는 길로 옛길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지만, 봄철 산불예방때문에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돼 있다.
자료제공 조선일보 2000.4.23
저희 회사는 1992년 ㈜ KOREA CONDOR이라는 상호로 출발하여 미국의 토질안정제(Condor Soil Stabilizer,CONDOR S.S, C.S.S)제조회사인 Earth science Products Corporation과 기술협약을 체결하고 전기화학적 토질안정제(C.S.S)를 도입 하여 자연 친화적 흙 콘크리트 포장과 연약지반처리에 적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한편 도입된 CONDOR S.S의 특징 및 성능을 입증코자 농어촌진흥공사 농어촌연구원에 시험용역을 의뢰하여 1992년 6월 부터 2차에 걸쳐 시험보고서를 접한바 있고 1993년 양재동 서울문화회관에서 베네쥬엘라 카라카스대학 토목공학과 교수 DR. RICARDO ESCOBA를 초청하여 신기술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 시공위치 : 경기과천 남태령 옛길 인도
▶ 시공일자 : 1999年 7月
▶ 상세설명 : CONDOR C.S.C. 흙포장 공법
과천남태령
▶ 시공위치 : 경기과천 남태령 옛길
▶ 시공일자 : 1999年 6月 3日
▶ 상세설명 : CONDOR C.S.C. 흙포장 공법
과천남태령
▶ 시공위치 : 경기과천 남태령 옛길
▶ 시공일자 : 1999年 6月 3日
▶ 상세설명 : 경기과천 남태령 옛길 시공 3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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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는 그 길을 다니던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한(恨)과 눈물…. 사연이 없는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다. 만남의 설렘과 이별의 아픔이 세대를 유전(遺傳)하며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가는 곳, 그래서 길은 그 자체가 역사이며 문화재다.
우리에게는 역사로만 기억되는 잊혀진 길이 있다. 삼국시대 이후 수천년 민족의 대동맥 구실을 해온 옛길들. 선인들은 ‘가장 빠른 길’, 그 지방을 대표하는 ‘큰길’에 ‘대로(大路)’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뻗어 있던 구대로(九大路)가 바로 그것이다. 장원급제의 꿈을 안은 과거객들의 발길이 머물고, 생활에 찌든 보부상의 땀 냄새가 밴 대로에는 사람뿐 아니라 우마차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그 길 위에는 여인숙 구실을 하던 원(院)과 주막, 객주가 생겨났고, 말을 갈아타고 길을 관리하던 역(驛)이 설치됐으며, 외적들의 침략을 막는 산성(山城)이 세워졌다. 현재의 지명 가운데 ‘원’ 자가 붙은 곳(이태원, 노원, 장호원)과 주막거리, 구역터, 역말과 같은 지명을 가진 지역은 모두 옛 대로에 있던 곳이라고 보면 된다.
상당 구간 원형 그대로 보존·농로나 지방도 형태로 남아
경남 양산시 원동면 서룡리 신주막 옛길. 한 할머니가 낙동강 둑 벼랑 위의 이 길에서 죽은 남편을 그리며 울고 있다. 구대로 중에서도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영남대로와 호남대로(삼남대로)는 민족 이동의 근간이자, 왜군의 침탈을 막는 가장 중요한 대로였다. 서울 한양을 출발해 용인-충주-문경-상주-구미-대구-청도-밀양-삼랑진-양산-부산 동래에 이르는 영남대로의 ‘대동지지’ 원래 이름은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일명 동래로라고도 불리며 950리 길 위에 있던 옛 역과 원 이름의 절반 정도는 마을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 한양에서 전남 해남 우수영까지의 호남대로는 일명 해남로로 불리며, 구대로 중에선 팔대로(八大路)에 해당한다. 한양 동작진-남태령-과천-안양-수원-평택-천안-공주-논산-김제-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에 이르는 970리의 대장정이다.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들의 통행로가 바로 영남대로였으며, 과거 급제한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춘향을 찾은 길이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주도 유배길이 호남대로였다. 특히 영남대로는 왜군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군사도로로 임진왜란 이후 이 길을 따라 읍성들이 강화되고 길이 정비됐다. 정비된 길 가운데 협곡의 산허리 벼랑을 깎아 덧붙이거나 축대를 쌓아 길을 튼 잔도(棧道)도 세 군데나 됐다. 이 길은 위험하고 좁아 한 사람이 비켜서야 갈 수 있는 곳이 대부분. 문경의 관갑천잔도와 밀양의 작천잔도, 양산의 황산천잔도가 바로 그곳이다. 부사나 관리의 행차가 있을 때는 천민이 비켜서다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산업화와 경지정리의 와중에도 이 두 대로의 구간 중에는 아직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거나 농로나 지방도, 국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일찍이 옛길의 문화재적 가치를 알아본 문경시는 문경새재를 비롯해 최근에는 관갑천잔도와 인근의 석현성을 복원했으며, 인근의 고모산성까지 손을 봤다. 문경시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자치단체도 표석을 세우는 등 옛길 복원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전남 해남의 대둔산 길 이에 ‘주간동아’는 역사와 이야기 속으로 사라진 영남대로와 호남대로를 다시 복원해 걸어보기로 했다. 모든 길을 한 번에 다 걷는 것은 힘든 만큼 옛길 가운데 주변 풍광이 수려하고, 보존 상태가 좋은 12곳을 선정해 관련 지도와 가는 길, 주변 관광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들은 이미 두 대로를 걸은 사람들(추석 특집2 다시 걷는 우리 옛길 참조)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한 곳으로 걷기에도 좋지만 그 길을 갔던 조상들의 애환과 사연이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는 등산로나 오솔길, 농로로 변한 옛길을 걸어가다 보면 진정한 답사의 재미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옛길을 모두 걷고 싶은 사람들은 본지 특집 기사와 연계된 별책부록 ‘다시 걷는 우리 옛길’ 브로마이드의 대동여지도와 옛길의 현재 위치를 참조하면 큰 도움이 된다. 별책부록 브로마이드에는 ‘주간동아’가 엄선한 8곳의 ‘대로 옛길’의 자세한 약도, 사진과 함께 고속도로 주유소 정보, 대동여지도, 현재 위치 정보가 함께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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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에 대한 조선왕조의 신봉은 신경질적일 만큼 강했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함흥은 원래 함주(咸州)였던 것을 왕이 일어났다 해서 함흥(咸興)으로 격상시켰고 고을 주(州)가 들어간 지명은 천(川)으로 낮춰버렸다. 과주가 과천이 되고, 묵주가 묵천, 진주가 진천으로 바뀐 것은 태종 15년(1415)인데 이것도 병적으로 과민한 왕실 풍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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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농·임·수산업(農·林·水産業)과 관련된 지명
① 경북 금릉군 農所면 : 농막이 있던 곳.
② 전남 영광군 弘農면 : 큰 농사를 지을 땅. 영광 원자력 발전소가 있음.
③ 전북 옥구군 米面 : 쌀의 주산지. 일제 강점기에 간척. 열촌. 현재 米星면
④ 전북 군산시 藏米동 : 군산이 쌀 수출항이었기 때문에 쌀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음.
※ 주변에는 이와 관련하여 米原동, 米場동 등이 있음.
⑤ 서울 송파구 蠶室동 : 東蠶室이 있던 곳.
⑥ 서울 관악구 新林동 : 나무들이 울창하였음.
⑦ 경기도 果川시 ☜ 果州(밤나무가 많았었다)
⑧ 서울 종로구 梨花동 : 배나무 고개
⑨ 대구시 중구 桃源동 : 무릉도원과 관련. 복숭아 꽃. 서울 용산구 桃園동
⑩ 경남 통영군 한산면 漁遊島 : 물고기가 노닌다는 의미
※ 황해북도 과일군 : 북한의 사과 주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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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의 관문 과천과 남태령
□ 과천의 행정구역 변화
과천은 삼국시대애는 고구려의 '율목(栗木)' 또는 '동사흘(冬斯 )' 또는 '율목군(栗木郡)'이었다. 이를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친 것을 고려 초에 '과주(果州)'로 고쳤고, 8대 헌종 9년(1018)에 이를 광주(廣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3대 태종 13(1413)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果川)'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는데, 다음 해에 금천(衿川.지금의 서울 금천구와 시흥시 일부)에 합쳐 '금과(衿果)'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복구되고, 7대 세조 때에 다시 금천에 합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또 복구하였다. 그리고, 조선 말인 고종 32년(1895)에 지방 관제 개편에 의해 군이 되었던 것을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시흥군에 편입되어 면(面)이 되었다.
1979년 4월 28일 경기도 조례에 의해 경기도 과천지구 지원 사업소를 설치하였다가 1982년 6월 10일 과천지구 출장소로 승격하였다. 출장소로 승격한 해부터 정부 과천청사와 서울대공원이 들어앉게 되었고, 1986년 1월 1일에는 시로 승격하였다.
현재 과천시와 군포시, 안양시, 서울의 강남구, 금천구, 관악구의 각 일부 지역이 옛날 과천군에 속했던 곳이다.
과천의 옛 땅이름 '율목(栗木)', '율진(栗津)'에서 율은 그대로 '밤(栗)'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율목'을 '밤나뭇골', '율진'을 '밤나룻골'의 뜻옮김으로 보기도 한다. '밤나뭇골'의 '율목'이 어떻게 해서 '밤나룻골'인 '율진'으로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당시엔 과천(율목) 영역이 남태령 너머 한강까지 미쳤기 때문에 나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과천의 또 다른 옛 이름 '동사홀'은 이두식 풀이로 보면 '돗 ' 또는 '돗 골'이 된다.
이를 어떤 이들은 '돋골'에 해당한다며 '해 돋는 고을'이란 뜻으로 보기도 하나, 땅이름의 일반적인 정착 과정으로 볼 때 그런 의미의 땅이름이긴 어렵다.
'동사흘(冬斯 )'을 이두식으로 풀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동(冬)=도
사(斯)=ㅅ 또는 사
흘=홀 또는 골(고을)
>동사흘=도사골(돗아골. 돗골)
그러나, '돗골'이나 '도사골'을 '해가 돋는'의 '돋'으로 본 것까지는 무리가 없으나, 이것을 '해솟음'의 뜻으로 본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돗(돋)'은 '높은 지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 지역이 산이 많아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풀어 가야 할 중요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 평양 감사는 안 해고 과천 현감은 한다는데
조선시대에 과천은 남도 사람들에겐 꽤나 잘 알려진 고을이었다. 그것은 수도 한양의 남쪽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삼남(三南. 충청-전라-경상) 지방의 길손들은 서울로 올라오려면 대개는 이 과천 땅을 지나야 했다. <대동여지도> 등의 옛 지도를 보면 천안 삼거리쪽으로 이어진 남도길이 직산, 진위(평택), 수원을 거쳐 이 과천 땅을 지나 서울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한다.
<춘향전)에 보면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로 내려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도 역시 과천 땅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다.
"동자기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그만큼 과천은 예 사람들이 서울로 올 때, 또는 남으로 내려갈 때 대개 거쳐야 했던 중요 고읍(古邑)이었다. 특히, 지방 사람들이 이 곳을 통과하자면 통과세(?)를 내야 지날 수 있어서 어지간히 신경을 쓰기도 했다.
'서울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
'현감이면 다 과천 현감이냐?'
옛 과천읍의 중심 마을은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官門洞) 일대이다. 그래서, 전부터 이 곳을 '읍내(邑內)'라 했다.
과천 현감들은 곧잘 이 읍내를 지나는 길손들에게 돈을 받아 챙겼다. 그래서, 별 힘도 없는 사람이 아니꼽게 권세를 부릴 때 '과천 현감 행세하듯'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과천 현감도 무조건 그 통과세를 받아 낼 수는 없었던지 별별 구실을 다 붙여 길손들을 동헌 앞에 불러들여 돈을 내놓도록 했다. 관 앞에서 담뱃대를 물고 지나갔다느니, 말을 내리지 않고 지나갔다느니 하면서. 아전들은 심지어 가죽신을 신은 것까지 트집을 잡아 문세를 물렸다. 이 문세 수탈로 인해서 길손들은 서울 문턱인 이 곳에서 적잖은 돈을 털려야 했다.
과천 읍내를 통과해도 서울로 가기까지는 또 돈을 털려야 할 곳이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닌 과천 읍내 북쪽의 남태령이다.
이 남태령을 넘을 때는 길손들의 뜻과는 관계 없이 젊은이들이 고개 밑에서부터 달라 붙어 고갯길에서 도둑들부터 보호를 해 준답시고 동행을 하곤 꼭 사례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고개넘잇돈' 즉 '월치전(越峙錢)'이라는 것이었다.
월치전을 받는 곳은 이 곳 말고도 서울 근처만 해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무악재였다.
□ 과천의 여러 마을들
지금은 과천시가 시가지 형태를 이루었지만, 40년 전만 하더라도 이 곳은 지방의 여느 시골과 별반 다름이 없던 곳이었다.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의 좁은 들 사이로 양재천의 상류가 지나고 있었고, 들 양쪽의 언덕 곳곳에 초가집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던 곳이 개발로 인해 많은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면서 이름높던 그 과천 고을이 옛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별로 그 옛날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럼, 여기서, 과천에 옛날에 있었던 마을들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관문골(官門洞), 읍내
전에 과천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과천 군청의 문이 있어서 '관문골'이라 했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그 옆의 '안점말(內店洞)'을 합해서 '관문리'라 했다.
이 마을에서 서쪽인 새술막으로 가는 길에 군수나 현감의 선정비들이 세워진 '비석거리'가 있었다. 그 비석들은 1972년 길을 넓히기 위해 중앙동 동사무소 옆으로 모두 옮겨 놓았다.
종앙동 동사무소 위에는 정조가 수원에 있는 부친(사도세자)의 능으로 참배하러 갈 때 쉬던 객사인 온온사(溫溫舍)가 있다.
·향교말(鄕校洞, 校洞)
지금의 문원동 관악산 입구쪽에 있던 한 마을로, 향교가 있어서 '향교말'이다. 발음 변화로 '생겻말', '생짓말' 등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개발로 인해 마을이 없어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문원(文原)'이란 이름은 향교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새술막(新酒幕. 外店)
길가에 있던, 문원동의 한 마을로, 옛날에 길손들이 잘 쉬었다 가는 곳이어서 새로운 술막 거리가 형성되었고, 그 때문에 '새술막'이다. 읍내 바깥쪽으로, 주점이 있던 곳이어서 한자로 '외점(外店)'이라고도 했다. 전국의 옛 도로 가에는 새술막 또는 '신주막(新酒幕)'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많은데, 이러한 곳은 대개 옛날에 많은 길손들이 지나다녔던 곳이다.
·홍촌말(洪村)
문원동의 한 마을로, 남양홍씨가 많이 살아 '홍촌(洪村)' 또는 '홍촌말'이다. 개발에 밀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정부 과천청사가 들어섰다.
·구리안(九里內)
골짜기 안에 있어 '굴(골)의 안'이란 뜻의 말이 이런 땅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관문동이나 문원동쪽에서 보면 완전히 골 안쪽으로 보이는데, 개발로 인해 이 마을도 없어졌다.
·다락터(樓基)
'다락'이 있어서 이 이름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산골 마을에 많이 붙는 '달(산)' 관계의 땅이름이 확실하다.
달+터>달 터>다 터>다락터
이 밖에도 과천시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마을이 있었다.
바바
·가는골(細谷) 문원동. 좁은 골짜기의 마을
·사기말(沙器幕) 사기점이 있었다고 하나……
·새터말 '사기말'과 '베레이' 사이의 새로 된 마을
·두집메 두 집밖에 없었으나, 나중엔 네 집이나……
·베레이(別陽洞) 청계산 골짜기 안의 벼랑쪽의 마을. '배랭이'
·한내(漢溪) 과천동. 옛날에 하리(下里) 지역. '큰 내'의 뜻. 큰 내(양재천)가 지나……
·삼거리(三巨里) 과천 읍내에서 올라와 두 길로 갈라지는 세 갈래의 길
·남태령(南泰嶺) 남태령고개의 과천쪽 마을.
·안골(內谷) 골짜기 안쪽 마을
·선바위(立岩) 산등성이에 바위가 서 있어. 지금 그 곳에 지하철역이 있다.
·뒷골(後谷) 골짜기 안 마을
·줄바위(注岩) 주암동. 원래 과천군 동면의 지역. 큰 바위가 줄지어 서 있어서. '죽바위'.
·돌무개(石浦) 돌이 많아
·삼부굴(三浦) 산밭골>삼붓골>삼부굴. 그 아래엔 '아래삼부굴'
·맑으내(맑내,淸溪) 막개동. '맑개'. 청계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내가…. '청계산'이란 이름의 바탕
·가루개(葛峴) 갈현동. 본래 과천군 군내면 지역. 옛날 과천과 수원 땅의 경계. 수계(水界)
·찬우물(冷井) 찬 우물이 있어서. 과것길 길손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가일(佳日) '가루개' 서쪽 마을. '가장자리 마을'의 뜻.
·제비울 제비가 집을 많이 지어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좁은 골짜기'의 뜻
·샛말 등성이 가운데에 박힌 마을. 사이의 마을의 뜻.
·옥탑골 '오탓골'이란 이름이 변한 듯. '외진 터의 마을'이란 의미 지녔을 듯
·자경골(自耕) '자긍골'이 원이름일 듯. '작은마을'의 뜻을 지닌 듯
□ 남태령
이 고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워낙 고개가 높아 예부터 많은 도둑들이 들끓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 고개 밑에는 행인들이 고개를 잘 넘을 수 있도록해 준다며 장정들이 대기해 있었다고 한다.
이 고개를 전에는 여우가 많아 '여우고개'라 하기도 했었다
정조 임금도 수원을 오고갈 때 이 고개를 주로 넘었는데, 그 때까지도 이 고개를 대개 '여싯고개' 또는 '여우고개'라고만 불러 왔었다. 한자로는 '호현(狐峴)' 또는 '엽시현(葉屍峴)'으로 씌어 왔다.
학자들 중에는 '여우'의 비표준어로 '여시' 또는 '야시'가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높은 재'가 아닌 '낮은 고개'라 해서 '얕은 고개'의 표현인 '야지고개' 또는 '야시고개', '여시고개', '여우고개'가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어떻든, '여우고개'가 한자로 뜻옮김된 것이 '호현'이고, '여시고개'의 '여시'가 소리옮김으로 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느 땐가 정조 임금이 이 고개를 넘다가 근처 토박이 사람에게 이 고개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가 그 요사스런 짐승 이름이 들어간 고개의 이름을 바르게 댈 수 없다면서 서울 남쪽의 큰 고개라는 뜻으로 '남태령(南泰嶺)'이란 이름으로 얼렁뚱땅 대답을 한 것이 그대로 이름으로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남태령'이란 이름은 그보다도 훨씬 전에 이미 있음이 문헌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이 전설의 신빙성이 별로 없다.
남태령은 또 고개가 너무 후미지고 도둑들이 많다는 소문이 있어서 웬만한 장정도 이 고개를 넘을 때는 혼자서 넘질 않았다. 이를 악용해 남태령 밑의 '한내'라고 하는 곳에서는 행인들의 돈을 뜯어 먹는 얌체 '고개넘이꾼'이 있었다. 이들은 도둑들로부터 행인을 보호해 준답시고 함께 동행을 하여 고개를 넘겨 주고는 돈을 요구했다. 이른바 '고개넘잇돈' 한자로는 '월치전(越峙錢)'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지방에서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이 과천을 거쳐 지금의 과천동 '삼거리'라는 곳에 이르면 남태령길로 질러 가느냐 조금 돌더라도 말죽거리쪽으로 돌아가느냐를 결정하느라 망서리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