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즐겼다는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차'는 떡잎 차가 아니라 차떡잎을 여러 번 찌고 말려 분말을 내어 반죽해 말린 차병(茶餠. 떡차)임을
강진 유배에 풀려난 지 10년이 더 지난 다산 정약용 선생이 69세가 되던 1830년에 강진 백운동에 있던 이덕휘(李德輝)에게 보낸 걸명시(乞茗詩)를 통해 밝혀냈다.
이 편지에서 다산 선생은 삼증삼쇄(三蒸三碎<日+麗>), 즉,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그것을 절구에 빻아 곱게 가루를 내서 돌샘에서 나는 물로 가루를 반죽해 진흙처럼 갠 다음, 이를 다시 작게 떼어 떡으로 굳혀 줄 것을 부탁했다.
삼증삼쇄는 구증구포의 공정을 줄인 것이므로 구증구포의 차 역시 '떡차'가 된다.
지금까지 '구증구포'라는 말을 한국 다도계에서는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린 떡잎을 다려낸 차' 정도로 푸는가 하면, 이를 이용한 차 제조법이 통용되기도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정>
떡차를 만드는 법
- 다산 정약용 선생이 월출산 아래 이덕휘에게 보낸 편지
잠깐 눈 돌리는 사이에 세 해가 문득 지났습니다. 생각건대, 효성스런 마음이 드넓어 제가 미칠 바가 아닙니다. 소식이 끊겨 생각만 못내 아득하군요. 안타까운 마음 말할 길 없습니다. 그간 편히 지내셨는지요? 다시 과거 시험을 보는 해를 맞으니, 비록 영화로운 이름에 뜻이 없다고는 하나 마땅히 글쓰기에 마음을 두고 계시겠지요.
어떤 공부를 하고 계십니까? 저는 나이가 들다 보니 병으로 실로 괴롭습니다. 기운이 없어 문밖에도 나갈 수가 없군요. 정신의 진액은 온통 소모되어 남은 것이라고는 실낱같습니다. 이래서야 어찌 살아 있다 하겠습니까?
보내주신 차 한 봉은 가까스로 도착했습니다. 이제야 감사를 드립니다. 올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차떡[茶餠]에 힘입어서입니다.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 주십사 부탁합니다. 다만 지난 번 부치신 차떡은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요.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합니다. 또 반드시 돌샘의 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습니다. 아시겠지요?
시험 보는 고을은 어디입니까? 경과(慶科) 때에는 틀림없이 올라오실테니 직접 주셔도 좋겠고, 그렇지 않으면 여름이나 가을에 연지(蓮池) 사는 천총(千摠) 김인권(金仁權)의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즉각 제게 전해올 겝니다. 이현(泥峴) 사는 조카는 청양(靑陽)에 고을 원이 되어 나간지라, 서울 안에는 부탁할만한 곳이 없어 인편에 전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습니다. 잠시 줄이고 다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경인년(1830) 3월 15일 먼 친척 아무개 삼가 드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서 및 다산 선생이 이덕휘에게 보낸 편지>
강진 시절 다산 정약용 선생은 월출산 아래의 백운동에 살던 이덕휘(李德輝)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다. 편지를 쓴 1830년이면 다산이 69세 때, 서울로 올라간 지 10년도 더 된 이때까지도 이덕휘는 다산에게 차를 부치곤 한 듯 하다.
차는 초의 스님과 강진 제자들도 부지런히 올려 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 남쪽에 새 차 날 무렵이 되자 마음이 조급해진 모양이다. 한 해 마실 차 양식을 마련할 걱정이 든 것이다. 인사 삼아 슬쩍 공부 이야기를 꺼냈지만, 정작은 올해 과거가 있으니 서울 올 일이 있겠다는 것을 환기시키려는 속셈이다. 나이가 들어 안 아픈 데가 없다고 엄살을 떨고서야 본론을 꺼냈다. 새 차를 따거든 지난 해처럼 차떡을 만들어 보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떡 잘 만드는 법을 낱낱이 적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어디서 들은 적 없는 이야기다. 세 번 찌고 세 번 말린 다음 이를 곱게 빻아 가루를 낸다. 그런 뒤에 돌샘 물로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찧는다. 그리고는 작은 덩이로 떼어 말린다.
올해 강진에서 열린 《다산유물특별전》에 출품된, 1816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는 상대에게 감사의 표시로 차떡 50개를 보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산이 평소 즐겨 마신 차가 지금 우리가 마시는 덖음 녹차가 아니라 떡차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산은 떡차(餠茶)가
아니라 차떡(茶餠)이라고 적었는데, 그 차이는 분명치 않다. 다산은 차떡을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약용 식품으로 애용했다. 체증이 심해 삼킬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고 했는데, 돌처럼 굳은 차떡을 어떻게 먹는지는 설명이 없다. 편지를 다 읽으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배달 사고라도 날까봐 전달 방법까지 꼼꼼히 쓴 것을 보면, 다산에게 차떡이 얼마나 소중했는 지 짐작이 간다. 우연히 남은 이 한 장의 편지로 우리 차 문화사를 밝히는 귀한 정보를 또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