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은 사람들만 만나면 <파이란> 포스터의 그 헤벌쭉한 웃음을 짓는다. 마냥 사람을 좋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최민식의 사람'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유한 웃음이 세상을 평정하는 사이 강건한 잣대는 스스로를 다져간다. 배우인 그가 보는 자기 연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의 연기가 세상 사람들과 만나 그리는 그림의 색깔 역시 이와 같다. '최민식스러움', 그것은 어떤 풍경인가?
기자시사회가 끝나고 저녁 무렵 마주 앉았을 때 최민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너털웃음 속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깊고 길게 뿜는 것이 편하고 맛있다는 폼새다. 맥주가 나오고 잔을 부딪쳤을 때 그는 알코올과의 오랜 해후를 즐겼다. "아휴, 임감독님 앞에서 담배를 어떻게 피워요? 술요? 못 마셔요. 처음부터 당신께선 현장에서 절대 술 안 드신다고 못을 박으시더라구요. 그게 결국 너도 술 마시지 말라는 얘기 아니겠어요. 야, 술맛 좋네. 한 모금에 도는구만." 임권택은 홍상수가 아니다. 어쨌거나, 그 표정이 풀어져 있긴 한데 문득문득 총총하고 결기가 있다. 이 남자, 득도라도 한 걸까?
그 며칠 전 앞서 한 번 만났을 때 최민식은 카메라 앞에서 포즈 취하길 정중하게 사양했다. 이제 뭔가 인공적으로 포장된 이미지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는 거였다. "이해해 줘요. 나 정말 세팅해놓고 카메라 앞에서 표정 잡는 거, 이젠 못하겠어요. 건방 떠는 게 아니라 배우라는 게 뭔가,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앞으론 어떻게 살 건지, 고민 많아요 요즘. 그런데 아무튼 뭔가 내 자신이 아닌 나를 만드는 건 아니다 싶은 거예요. 그냥, 나 막 얘기하고 있을 테니까 사진작가님이 알아서 멋지게 찍어줘요.(웃음)" 분명히 작년 <파이란> 직후에 만난 최민식과는 좀 다른 모습이다. 요즈음 생각이 많긴 많은 모양이다.
<취화선>의 오원 장승업을 통과하며 그는 지금 자기 연기에 고민이 많다. 그건 연기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고 연기자로서 자신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며, 결국은 자연인 최민식에 대한 고민이다. 하지만 <해피엔드>에서 <파이란> <취화선>으로 이어지는 최근의 연기들 속엔 분명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대담함이 있다. 매섭게 째려보다가도 순식간에 표정을 풀어버리는 그의 많은 캐릭터들처럼 묘하게 긴장시키는 기운이다. 그 자신은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관객은 '최민식스러움'에 익숙해 가고 있다.
주변을 더듬어 찾아낸 틈
아내 최보라의 연인 김일범의 집에 최민식이 연기한 서민기가 숨어든다. <해피엔드>의 한 장면이다. 아내의 밀연을 눈치챈 민기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잠입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아내의 예전 사진을 간직하고 있으며 현재도 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일범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 장면엔 최민식이 없다. 커트가 바뀌면 허탈한 표정으로 자기 아파트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 선 민기가 보인다. 그의 머릿속은 방금 전에 확인한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들어차 있지만 실은 텅텅 비어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엔 최민식이 있다.
연속된 이 두 개의 신은 최민식의 연기가 어디에서 빛을 발하는지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첫번째 신에서 민기는 자기 삶의 표면으로 밀려오는 거대한 사건과 맞닥뜨리고, 영화는 드라마의 물줄기를 바꾼다. 어떤 배우는 장르적인 직접성과 견고함을 보이는 이런 류의 장면에서 자기 진가를 발휘하지만 최민식은 이런 장면에서 심드렁하고 관례적이다. 대신 외적인 사건이 지나가고 그것이 내적인 심상으로 전환되었을 때 최민식은 자기 영역을 표시한다. 맥 풀린 멍한 표정과 초점 없는 눈동자는 그의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참담함과 그것에 진력이 나 생겨버린 기묘한 공허함을 마력처럼 발산한다. 최민식은 자기 밖의 거대한 외부보다는 자기 안의 작은 내부와 충돌했을 때 색깔을 낸다. 그에게 주어지는 상황을 외적인 사건, 내적인 심상, 그리고 외적인 사건이되 정보의 진척은 없고 심리적 대립이 존재하는 세 개의 상황으로 나눴을 때 최민식은 뒤의 두 가지 조건에서 최민식만의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의 연기는 일종의 주변성을 띠면서 관객이 의식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숨겨진 드라마를 길어올리는 것이다.
<취화선>은 그러기에 쉬운 영화는 아니다. 임권택 감독은 자기 영화 속을 거니는 배우들을 장식과도 같은 오브제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이자 가장 적합했던 경우가 형식미 자체를 영화의 주제로 삼았던 <춘향뎐>이다. <취화선>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죠. <취화선>에선 일관된 감정선을 죽 이어가기가 힘들었어요. 이 영화는 조각난 에피소드들이 연결돼 있는 식이고 인물이 영화 전체의 구조나 공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관계를 맺죠. 임감독님은 배우들이 뭔가를 드러내기를 계속 우려하셨어요.” 영화이론가 사둘의 말처럼, 어떤 감독은 배우를 대교향곡의 하나의 악기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처럼 배우의 연기를 고도의 제련술로 조여내는 임권택의 영화에서도 최민식은 자기 영역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작품 세계를 고민하거나 격동하는 시대를 관찰하는 장승업의 표정엔 최민식이 없지만, 매 맞은 몸에 좋다는 오줌 사발을 내팽개치며 너나 먹으라고 투정을 부리거나 주막 골방에 틀어박혀 무료하게 뒤척이는 장승업엔 최민식이 있다. 이것은 그의 연기가 보여주는 주변성이 일상성과 대구를 이룬다는 걸 말해준다. <해피엔드>의 헌책방에서 주인장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고 멋쩍게 웃는 최민식이나, <파이란>에서 비디오 가게를 점거한 후배에게 호통을 치다가도 토스트기를 가지러 다시 비겁하게 기어들어오는 최민식, 그리고 <취화선>의 동거 기생 진홍과 아귀 다툼을 벌이는 최민식에선 적나라하면서도 묽게 풀어진 일상의 담백이 흘러나온다.
<취화선>까지 열 편에 이르는 필모그래피 속에서 최민식은 일관된 캐릭터를 연기하며 시대에 획을 긋는 이미지를 고정시키진 않았다. 대신 그의 연기는, 특히 최근의 <해피엔드>와 <파이란>, 그리고 <취화선>에서 시대와 현실에 짓눌린 자들이 도망치는 절망적 안위의 작은 영역을 창조하고 공감시킨다. 이야말로 주변과 일상으로 채색된 그의 연기가 대중과 호흡하는 접점이다. “모든 연기의 기본은 솔직한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관객은 최민식이 연기한 인물들에서 적나라하게 꿈틀거리는 자기 자신을 확답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혁명에 동조하지도 그렇다고 방조하지도 않으며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 장승업”의 호방한 듯 우유부단하고 거친 듯 나약한 이미지는 최민식을 통과하며 더 많은 사람들의 심장 박동수와 일치된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구부정하게 종종걸음치는 최민식의 익숙한 이미지에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도 일단은 내멋대로 질러보겠다는 소극적인 해방의 조짐이 담겨 있다. 들이마신 숨을 참고 뒤돌아서 벽을 보며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는 최민식의 모습엔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진 않지만 뚝심을 버릴 순 없다는 소시민들의 다부진 진심이 들어 있다. 절망이 넘치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뿜어대는 이 역설적인 토닥거림은 최민식이 이 시대의 결 사이를 활보하며 그려놓는 그림의 형태다.
이 색깔에 이르기까지 최민식은 누구 못지않은 탐문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했고 게다가 색깔 만들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는 한참을 달려오다 <파이란>을 끝내며 크게 한 번 돌아봤고 <취화선>을 마친 지금 또 돌아보고 있다. 배우로서의 최민식이 연기라는 괴물과 싸워온 노정을 더듬기 위해 어느 한 시점으로 날아간다.
떠나가라 떠나가라
<취화선>의 촬영 일정이 끝나고 후반작업이 마무리되어갈 무렵 최민식은 회사 식구들과 함께 조용히 장승업의 천도제를 올렸다. 국립묘지 안에 있는 지장사에서였다. “기왕에 장승업을 연기했던 배우로서 마무리도 내 손으로 짓고 싶은 심정도 있었고, 후사가 없이 하늘을 떠돌고 있는 그를 달래고픈 마음”도 있었다. 최민식은 영화 안에 있었지만 동시에 영화 밖에 있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다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제를 올리고 나니 기분이 개운해졌다. “극중 장승업처럼 언제 아궁이로 기어들어갈지 몰라 조마조마했다”는 주위 사람의 말처럼 캐릭터에 깊게 빠져 있던 그로선 이 고통스럽기까지 한 몰입의 여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시, 최민식은 영화 밖에 있는 동시에 영화 안에 있었다. 천도제는 최민식의 마음과 육체에 중첩돼 있는 장승업을 떠나보내기 위함이었다.
최민식에게 몰입은 졸졸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개구쟁이 동네 녀석 같다. 좋은 연기란 캐릭터의 인성과 배우의 인성을 합일시키는 거라고는 해도, 막 내린 뒤에도 꽁지를 붙잡는 이 몰입이라는 녀석 때문에 도무지 정신이 사나운 것이다. 최근에 새로 장만한 DVD로 <파이란>을 다시 봤을 때 그는 또 울었다. <파이란>을 떠올리면 언제나 “비오는 날 소주 한 잔 앞에 놓고 아련해지는 마음”이다. <취화선> 현장에서도 그는 울었다. 극중 장승업의 스승으로 나오는 개화파 김병문이 갑신정변의 실패로 도피한 뒤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그림에 채색하는 장면에서 진짜로 눈물을 흘린 것이다. “아무리 지지고 볶던 스승이지만 죽음 앞에 도망다니는 걸 생각하니까 그냥 줄줄 흐르더라구요.” 하지만 이 순간 임권택 감독은 가차없이 NG를 외쳤다. 당초엔 잡혀 있던 클로즈업 쇼트도 빼버리고 풀 쇼트로 바꿨다. 지그시 감정을 누르는 임감독의 눈에 최민식의 몰입은 위험한 독이었다. 이날 최민식은 몰입에 대해, 그리고 그 언저리를 맴도는 또 하나의 단어, 절제에 대해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최민식 연기 인생의 1장을 차지하는 그것들에 대해 말이다.
누르는 순간 살아나는 것들
“막상 험난하고 고단한 인생을 현재진행형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무덤덤해요.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할 겨를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잖아요? 아무리 장승업의 낭인 인생이 애절하고 고통스럽다 한들 그게 장승업의 표정에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또 카메라가 과장하면 도리어 관객은 그걸 느낄 수 없죠. 하지만 절제되면, 더 슬프죠.” 절제는 배우가 캐릭터에 몰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안전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우가 캐릭터를 표현하는 걸 중재하기도 한다. 연기의 기초인 이 몰입과 절제의 줄다리기는, 그러나 최민식에겐 매번 가장 고민스럽고 고통스런 골칫거리다. 이것이야말로 최민식 연기의 알맹이가 되는 셈이다.
데뷔작인 <구로 아리랑> 시절에 최민식은 ‘무조건 내지르는 연기’밖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다혈질 작업반장 진석의 캐릭터엔 내지르는 게 어울렸다. <넘버 3>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절제의 묘미를 제대로 깨닫는다. 그가 맡은 마동팔 검사는 강직하고 진중하지만 관객은 그 캐릭터에서 유머를 읽었다. 이 영화는 그가 처음으로 코믹하게 등장한 작품이다. “웃기는 영화죠, 사회에 대한 풍자도 있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배우가 웃기자고 작정을 하면 그 순간 영화는 코미디가 안 돼요. 망하는 거지. 심지어 연기를 하면서도 이게 코미디라는 인식마저 지워버려야 해요. 마동팔은 자기 직업에 투철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은 캐릭터예요. 그럼 진지하게 가야 돼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충돌이 일어나고 거기서 웃음이 나오는 거죠. 코미디의 기본은 배우가 웃음을 절제하는 겁니다.”
<쉬리>를 끝내고 만난 <해피엔드>에서 최민식의 절제론은 다시 한번 다듬어진다. 그는 서민기라는 IMF 시대의 가장을 <쉬리>의 박무영처럼 연기하고 싶진 않았다. 이 둘은 상극의 캐릭터라고 할 만큼 다르다. 그에겐 동국대 시절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안민수 교수라는 큰 스승이 계시다(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그거 되겠니?”란다). 안교수의 지적이라면 머리를 조아리는 최민식은 <쉬리> 때 힘 좀 빼고 연기하라는 말을 들었다. 박무영의 캐릭터가 얼마간은 인위적인 힘이 필요한 역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서민기는 정말 힘을 빼자고 생각했죠. 박무영 연기 같은 각을 없애자. 왜냐면 <해피엔드>는 숨막힐 듯한 삶의 긴장을 담아내야 하거든요. 민기가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다음에 콩나물국을 먹고 있는 보라를 보며 ‘최보라씨, 사는 게 재밌어?’라고 하는 장면처럼 말이죠. 아주 긴 쇼트인데 둘 사이에 정말 숨이 막히는 긴장이 있어요. 그게 바로 <해피엔드>가 그리고 싶었던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고. 그런데 만약 서민기 캐릭터에서 과장이 나왔다면 그런 긴장감 못 만들어요. 그는 소심하고 상처받기 쉽고 상처받아도 항변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 모습 그대로 아무리 분노해도 있는 듯 없는 듯 절제하는 게 맞는 거죠.” 코미디 절제론과 일맥상통하는, 일종의 긴장 절제론이다. 그래서 최민식은 <해피엔드>의 결말이 서민기의 최보라 살인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불만이 많았다. 당초의 시나리오에선 민기가 아내를 죽이긴 죽이지만 상상 속에서 저지르고, 게다가 결말 자체가 미스터리적으로 처리돼 있었다. 그의 생각엔 그 상상 살인이 소심한 민기에게 더 적합한 것이었다. “그런데 <쉬리>의 박무영처럼 완전히 현실화되고 직설적으로 배설되니까 그전까지 죽 유지돼 왔던 절제의 긴장감이 허물어진 거죠. 영화의 주제도 ‘바람 피우면 죽는다’가 되고. 속 좀 상했어요.” 절제에 대한 그의 고집은 <취화선>에서의 슬픔 절제론으로 이어진다.
이쯤 되면 그가 걸어온 도정에서 절제라는 녀석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깊게 가위눌림을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제가 연기의 절대적인 미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느 순간 내질러야 할 때가 있죠. <취화선>에서 장승업이 지붕에 올라가 소리치거나 술집 때려 부술 때처럼 말이죠. <파이란>도 그랬어요. 나 좀 인정해달라고 허풍 떠는 인간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이뤄놓은 것도 없고. 그러니까 물 흐르듯 절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자주 속마음을 내질러야 되는 거죠. <대부 3>를 보면 알 파치노가 오페라를 보고 나오다가 저격을 당해 딸이 죽어요. 그 순간에 사자처럼 포효하잖아요. 거기선 내지르는 연기가 맞는 거죠.”
찬란하고 유일하며 다시 오지 않는 순간
절제와 내지름, 그것을 경보와 전력질주에 비유하는 최민식은 작가의 의도, 감독의 연출, 드라마의 균형, 이야기의 색깔 등 자기 연기를 향해 침투해오는 온갖 요소들 사이에서 어떤 발걸음을 취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것은 틈새를 비집고 최민식표 연기를 찾아내야 한다는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연기론의 기초를 세운 스타니슬라브스키는 배우란 건네받은 대본의 행간을 상상력으로 읽어 자기만의 부대본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관객은 부대본을 듣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대본은 집에서도 읽을 수 있다”는 얘기.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배우로서의 생명은 끝나는 거죠. 심지어 <펄프 픽션>처럼 감독의 스타일이 진하게 배어 있는 영화에서조차 배우들의 상상력은 요구돼요. 연기는 시나리오에 씌어진 인물에 ‘가장 근접한 사기’라고 생각해요. 감독과 작가는 배우가 관객을 대상으로 그런 사기를 치게끔 방조하고 공모하는 공범들이죠. 따라서 최고의 배우라는 건 성립이 안 돼요. 배우는 각자 자기 색깔에 맞춰 사기를 치는 거예요. 자기 그릇대로 인물을 창조하는 거죠. 한석규는 네모 그릇, 송강호는 세모 그릇, 나는 동그란 그릇, 다 달라요. 그런데 어떻게 우열을 가려요?”
<해피엔드> 전까지만 해도 그의 행간 창조는 전형적인 애드립의 형태로 나타났다. <넘버 3>에서 마동팔이 서태주와 놀이터에서 싸울 때 바지 밑단을 양말 속에 집어넣는 건 최민식의 애드립이었다. 시골 애들 싸우는 스타일로 순박하게.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부대본의 이른 결론은 글머리에 언급한 그런 종류의 것들로 증류되기 시작했다. 행간 채우기는 행간 속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우리 시대의 관객이 최민식에게 원하는, 그리고 어느 정도 만족해온 것들이다.
초기에 최민식은 시대와 직접적으로 소통했지만 정형화된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구로 아리랑>에서의 진석은 노동자들이 탄압받는 현실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피해받은 인물이었고, 최민식은 박종원 감독이 보여준 직설 화법에 공감했다. 비록 “그 자극적인 메시지가 현실에 가닿을 수는 있을지언정 영화로서 인정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이 생각은 최근 그가 연기한 일상의 인물들이 관객에게 제시한 ‘시대와 갓길로 가기’와 맥이 닿는다). 다시 박종원과 작업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그는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당시 한일회담 반대운동 등에 앞장섰다 결국 군사독재 정권의 나팔수가 된 이수정 공보대변인의 은유, 김정훈 선생을 연기했다. 두 영화에서 모두 그의 캐릭터는 정형의 틀 안에 있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손창민의 친구로 분한 최민식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이 모든 초기작에서조차 관객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최민식의 눈이다. 남성적이지 않고 수줍으며 부정형인 그의 눈꼴과 눈빛은 아마도 그 눈 속에 캐릭터 이상의 더 많은 이야기와 비밀스런 내심이 담겨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했다. 심지어 <쉬리>의 박무영조차 최민식의 눈빛으로 인해 전사로서의 강인함 외에 나른하고 사사로운 성격을 부여받는다. “영화는 배우의 얼굴 뒤에서 혼을 원한다”는 샤를르 뒬랭의 말처럼 말이다.
조금 낭만적으로 얘기하자면, 눈빛을 가교 삼아 이후의 최민식은 과격하거나 소심한 지표면의 캐릭터 밑을 파고 들어가 자신의 행동이 관객의 시선에 포착되는 그 찬란하고 유일하며 다시 오지 않는 즉흥의 순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거기에 최민식이 있고 최민식이 연기해 시대를 쓰다듬는 인물들이 있지만, ' 이것이 최민식의 연기다'라고 느껴지는 그 순간의 충일감과 쾌락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보이는 배우가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물이며, 인기라고 하는 단어의 매우 긍정적인 얼굴이다. 다시 스타니슬라브스키를 끌어들이자면,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과 욕망이 주어진 어느 한 순간과 반응하며 배우의 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최민식은 관객에게 즐거운 안도감을 선사한다.
최근의 그는 무너지는 역할들을 연기해 왔다. 그건 너무 악독스럽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극한으로 밀어내는 것이어서 최민식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일종의 피학적인 동질감과 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최민식의 연기가 관객을 중독시키는 심리적 에너지의 원천인 동시에, 이 시대의 남성들에게 다른 어디에도 울분을 토할 데 없으니 내 몸이나 때려보자는 식의 건강하고(?) 신속한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다(최민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주변 테이블로부터 수없이 많은 사인 요청이 들어왔다. 거의 대부분 아저씨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 막 퇴근하고 술 한 잔 걸치고 있었으며 그중 한 사람은 최민식에게 술을 샀다). 하지만, 그 피학적인 무너짐은 또한 최민식을 통과하며 지독하게 끈질기거나(<해피엔드>), 초월적인 향수를 환기시키고(<파이란>), 그 존재감이 사라지지 않는(<취화선>) 형태의 위안을 준다. 자연인으로서 그가 짓는 순진무구한 표정의 웃음처럼 그가 연기한 인물들의 그 숱한 웃음들은 그 위안이 살아 있는 인간의 것임을 재삼 확인하게 만든다.
최민식과 <취화선>
대화를 나누면서 최민식은 자주 이 말을 반복한다. “이제는 달라지고 싶어요.” <취화선>을 선택한 첫번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 이번 작업이 남다른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배우로서 ‘가오’가 생겼죠. 때도 묻고. <파이란> 끝내고 나서, 아 이젠 정말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어요. 지금 나를 둘러싼 조건, 환경을 다 떨쳐버리고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 그래서 이번 작업은 철저하게 나 개인을 위한 선택이었어요. 이젠 제대로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해야 하는데. 이젠 정말 제대로 하는 일만 남는 것 같아요. 인기, 흥행, 주변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는데, 이 작품 하면서 많이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진짜 작업을 위한 작업, 그 작업을 통해 살아가는 것, 내가 느끼는 세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연기인데 그것에 좀더 순수하게 접근하자는 거. 배우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이나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말이죠. 어렸을 땐 연극 하며 술 마시고 분석하고 밤새 토론하고. 그런데 그렇게 고민해 봐야 상투적인 답밖엔 안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엔 진짜 해답을 찾고 싶었죠.”
그 해답은,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자기도 정확히는 모르겠고, 뭐라 말할 수도 없단다. 대체로 이 부분에 관한 그의 말은 격앙돼 있고 추상적이다. “평판을 얻었다가 비난도 받고 흥했다 쇠하는 장승업의 인생이 배우의 삶과도 비슷해요. 그래서 더 이번 작업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얘기죠. 배우란 게, 진짜로 외로운 거예요. 커뮤니케이션할 사람들은 많죠.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서면 그때부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요. 확 패대기쳐지는 심정이라니까요. 하지만 이제 그 외로움에 버틸 수 있는 저항력은 생긴 것 같아요. 문제는 물이 됐다 얼음이 됐다 다시 물이 되는 변화의 과정에 끊임없이 들어가야 하는데, 아휴 힘들어요.”
그가 <취화선>을 선택한 두번째 이유는 이것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송능한 감독의 <넘버 3>나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은 확실히 그가 초기에 출연했던 전형적인 형태의 영화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관객과 대화하는 방식도 특이했고 스타일도 생경한 것이었으며 배우로서의 쾌감도 달랐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라고까지 거창하게는 말 못해도 분명히 다른 막이 오르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나 무슨 역이요?" "저, 김형, 그게... 삼촌 역을 좀 해주셨으면..."하고 제안하는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감독에게 선뜻 응했던 것도, 비중이 크고 작음은 접어두고 바로 그 새 스타일, 새 연출자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비슷한 호기심이 <취화선> 결정에도 작용했다. “도대체 거장이라고 하는 그분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떤 걸까, 배우고 싶었죠. 처음엔 현장에서 짜증도 많이 났어요. 한두 시간 고생해서 수염 붙이고 나가면 ‘어, 그게 아닌데’ 하시고. 세상에, 동강에서 해남까지 내려가면서 딱 두 컷밖에 안 찍었다니까요.(웃음) 또, 임권택 감독님 영화는 미리 대본 외우고 가봐야 소용없어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바뀌니까. 그러니 배우로서는 참 곤혹스럽죠. 하지만 나중에 가니까 그런 스트레스는 다 별거 아니더라구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현장에서 막 바뀌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싶어요. 결국 장승업이라는 캐릭터를 통째로 말아먹고 있으라는 얘기였으니까요. 물론 장승업이 영화 속에서처럼 그렇게 호방하기만 했을까, 좀더 말수가 적고 여성스러우며 섬세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남아 있긴 하죠.” 하동 가마터에 촬영하러 내려갔을 때 임권택 감독은 이틀 동안 영화를 찍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여기가 아직 낯설다”라고 했다. 공간과 자신이 하나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최민식은 봤다. “그건 합리적으로 1 더하기 1은 2가 되는 게 아니에요. 1 더하기 1은 1이 될 수도 있고 0이 될 수도 있죠. 근데 그게 결국 최대의 효율이더라니까요.”
다중 인격으로 살아가기
최민식과 얘기를 하다보면, "예에∼" 하며 고조된 저음으로 순진하게 맞장구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마흔이 넘어선 나이에 나름의 세계를 지닌 큰 배우 중 한 명이지만 막상 대면하면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다. 그냥 조금 눈빛이 남다르고 헤벌쭉 웃기 잘하는 소탈한 인간이다. "안민수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구요. 배우한다고 깝죽대지 마라, 너 옛날에 연극 스폰서 구하려고 짜장면집 들어가 사정사정하고, 밤새 포스터 붙이러 다니던 거 잊지 마라, 라고. <넘버 3> 때 송능한 감독은 또 이래요, 야 최민식, 너 CF 해라. 무좀약이면 어떻고 치질약이면 어떠냐? 그런 거 한다고 인간 최민식이 똥치질 되는 거 아니다. 가식 버리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야." 이 말엔 그가 최근에 조금 알게 됐다고 하는 배우로서의 인생 주사위 중 한 면쯤이 들어 있다. 달리 뭐라 설명하랴. 그러니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이에요. 그래도 혹시나 배우 그만 두면 와이프하고 짜장면집 할 거예요. 난 짜장면이 그렇게 좋아요. 늘 짜장면 냄새가 나는 집, 얼마나 좋아요"라는 말도 무슨 인생의 좌우명처럼 들린다.
인간은 평생의 1/3 혹은 1/4쯤을 잠 속에 파묻혀 살며 꿈을 꾼다. 이 정도면 꿈이란 게 그냥 쉬느라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깨어 있는 현실과 함께 진행되는 또다른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에겐 또 하나의 현실이 추가된다. 그가 평생을 걸쳐 서야 하는 카메라 앞에서의 삶이 그것이다. 배우는 여러 캐릭터를 연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비현실의 또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다중 인격체가 된다. 이 복합적인 삶 속에서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최민식에게 배우란 그런 것이다. 그는 캐릭터들을 떠나보내는 동시에 배우라는 삶의 권력이 인간 최민식을 통제하고 지배하길 원치 않는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스크린의 최민식과 현실의 최민식 사이에 거리가 좁혀진다 한들 얼마든지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함을, 그 넉넉함을 바라보는 관객의 여유를 만들어낸다. 득도란, 이런 게 아닐까?
에드가 모랭은 "영화는 스타를 만들어내지만 배우는 쫓아낼 수 있다"고 했다. 적어도 최민식에게 이것은 틀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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