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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들마을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에 위치한 전통마을이다.
‘두들’은 ‘두드러지다’ 혹은 ‘돋다’에서 갈라져나온 ‘둔덕’의 순 우리말로 이는 ‘언덕 위의 마을’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졌다. 마을 뒤로는 두들산이 있고 앞에는 화매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지형이다.
마을의 형성은 약 4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청과 굴욕적인 외교를 맺게 되자 1640년(인조18년) 이시명(李時明)은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며 마을을 이루었고, 이후 재령이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마을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고 이조판서를 지낸 이현일, 1919년 파리장서사건에 유림대표로 서명한 독립운동가 이동호, 이명호, 이상호가 이곳 출신이다. 1600년대 경상도 양반가의 음식조리법을 소개한 『음식디미방』의 저자인 정부인 안동 장씨 장계향(이시명의 부인) 또한 유명하다. 시(詩)·서(書)·화(畵)와 성리학에 능하여 조선시대 여인 중 유일하게 여중군자(女中君子)라 불렸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마을에는 약 30여 채의 전통가옥이 남아 있으며 이들은 새롭게 들어선 한옥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대표적인 전통 가옥은 이시명과 부인 안동장씨가 살았던 석계고택이다. 一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안채 건물로 이루어진 간결한 二자형 배치를 보인다. 기존 종가집과 달리 지붕 끝에 세우는 기와(망와, 望瓦)가 없고 사랑채 지붕이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집에는 곳간채가 없고 주변으로 토석담장이 둘러져 있어 간결하고 검소한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불린다.
그 외에도 18세기 초에 세워져 1830년 이곳으로 이건된 주곡고택(做谷古宅, 경북민속자료 제114호), 17세기 후반 세워져 이현일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던 남악정(南嶽亭, 경북 문화재자료 제80호)이 보존되어 있다. 19세기 초 건립된 유우당(惟宇堂, 경북민속자료 제285호)과 보릿고개로 힘든 주민들을 위해 구휼식당을 배급하던 낙기대(樂飢臺)도 남아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영양 두들마을 (두산백과)
*석보팔경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院里里)에 있는 8대 경승지로 광로산(匡蘆山), 병암산(屛岩山), 낙기대(樂飢臺), 세심대(洗心臺), 동대(東臺), 서대(西臺), 석천서당(石川書堂), 광록정(廣麓亭)을 말한다.
광로산은 일월산(日月山)의 낙맥으로 수천평의 잔디로 덮여있는 초원이다. 병암산은 90m 높이의 언덕으로 두들마을 앞산이라고도 부른다. 아래로는 관광지로 유명한 화매천(花梅川)이 있다. 낙기대, 세심대, 동대, 서대는 주남천(做南川) 언덕 위에 있는 비석들로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이 글을 새기고 명인지사(名人志士)들의 유상지(游賞地)로 사용되고는 했다. 이곳에 오르면 심신이 상쾌하여 배고픔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69년 이맹호가 세심대를 수축(修築)하였다. 석천서당은 약 1800년경 사림에서 건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며 지금은 양로회원이 모여 시강(詩講)하는 장소이다. 광록정은 재령사림(載寧士林) 이승일의 정자로 네칸 반의 동서실(東西室)과 중당(中堂)이 있다.
*원리 주곡고택(做谷古宅, 경북민속자료 제114호)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4호. 이 건물은 조선중기 유학자인 이도(李櫂)의 주손댁(胄孫宅)이다.
이도는 재령이씨 영해파 입향조인 이애(李璦)의 5대손으로 영해의 인량리에서 태어났으나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주사동(做士洞)으로 우거(寓居)하였다. 주곡고택은 선생이 주사동으로 우거할 때 지어진 것이며, 순조 30년(1830) 후손들에 의해 현위치로 이건되었다. 고택은 두들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광려산(廣麗山)을 배산하여 아늑한 산자락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정침은 정면4간 측면 4간 반 규모의 구자형(口字形)건물로 뜰집에 가까운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은 평면상에 몇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대청 우측의 신방(新房)에는 대청쪽으로 문을 내지 않아 독립성을 갖게 배려하였으며 사랑방에는 크기와 위치가 다른 수납벽장들을 설치하여 수납시설의 다양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감실방(監室房)에는 감실아래에 두꺼운 널판을 설치하였는데 이 널판은 제사를 지낼 때는 앞으로 빼낼 수 있게 한 특이한 구조이며, 부엌에 묻어놓은 물두멍 등은 당시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유우당(惟宇堂, 경북민속자료 제285호) : 이상도(1773∼1835) 선생이 지은 살림집.
원래는 조선 순조 33년(1833) 석보면 주남리에 세운 것을 선생의 후손인 이돈호(1869∼1942)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돈호는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가담한 바 있으며 그의 조카인 병각은 조지훈·오일도·조세림과 함께 항일애국시인으로 활약하였다. 건물이름은 이상도 선생의 첫째 아들인 기찬의 호를 따른 것이며 제사를 지내는 곳과 사당 2채로 구성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건물은 전형적인 민가 건물로 ㅁ자형을 이루고, 사당은 1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조선시대 1899년에는 이곳에 국립 병원격인 광제원이 있었다 하며, 석계고택과 석계 석천서당을 포함하여 전통가옥 30여 채를 비롯하여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씨를 기리는 안동 장씨 유적비,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을 둘러친 절벽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새겨 놓은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 유묵도 뚜렷하게 보인다. 1994년 정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되었다.
*남악정(南嶽亭, 경북 문화재자료 제80호) :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온 숙종(재위 1674∼1720) 때 성리학자 갈암 이현일(1627∼1704)의 정자이다. 이현일이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 위하여 숙종 2년(1676) 2칸짜리 초가집으로 지은 것인데, 순조 22년(1822)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고쳐지었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출입문에는 ‘홍도문(弘道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숙종의 글씨라고 한다.
2. 음식디미방
340여 년 전에 장계향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조리서 "음식디미방"
장계향(안동장씨)의 일화에 서당에서 글을 읽는 도령들 뒤편에서 글을 청강하던 장계향(1598~1680)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훈장이 우주의 질서에 관하여 학생들에게 질문하였으나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하자 훈장이 한숨을 내십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멀리서 청강하던 장계향에게 다시 물어보니
"성인의 도는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데 그 궁극이 있는 것이지, 도를 닦는 한 개인의 성취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 욕심이라 배웠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우주의 질서입니다. 함께 사는 최고의 도덕률은 나누고 돌봐주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니 아버지인 훈장으로서 너무나 여식의 지혜에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소학'과 '십구사략'등을 깨우쳤으며, 최초의 시인 '성인음'은 지적 희열을 느낀 순간 '성인'을 지향하며 쓴 시입니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생계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병들어 누운 할머니에게 직접 죽을 쑤어주고 돌아와 쓴 '학발시' 에서는 하층민들의 삶을 깊은 통찰력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경신음', '소소음', '맹호도', 초서체로 쓴 '적벽부'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
장계향의 작품들의 특징은 조선시대 양반 여성들이 쓴 시들은 대개 자연이나 유교적 덕목에 한정되어 있으나 신분의 장벽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사람에게 공감하고 시대의 고통을 절감하며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실천적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경북 안동 경당고택 : 정부인 장씨의 친정, 장계향의 어린 채취가 서린 곳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세상을 배운 여성 성리학자 장계향의 학문. 아버지인 훈장은 퇴계 이황의 심학적 도통과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서애 유성룡의 경 사상을 이어받은 경당 장흥효이며 그의 아버지에게서 성리학적 가르침을 사사 받습니다.
장계향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교육은 퇴계 심학의 근본은 지와 행의 일치였습니다. 지와 행의 기본이 성이라면 성을 이루려는 노력은 경입니다. 장흥효는 늘 딸에게 경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만물의 관계를 살펴 부끄러운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서애 유성룡의 정치적 개혁정신과 인간평등 사상 역시 장계향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어느덧 혼인할 나이가 되어 아버지의 제자 이시명(재령이씨) 과 혼인한 후 나랏골 충효당의 큰살림을 도맡게 된 장계향은 어른들의 허락하에 재령 이씨의 재물을 구호에 사용합니다. 재물을 나누어 줄 때 그냥 주지 않고 마당을 쓸게 하고 수고비로 주는 등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지 않게 주었다고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집의 노비가 감기에 걸렸을 때 직접 삼계탕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게 합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 이시영과 장계향은 정당하게 상속받은 재산이 있었지만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 사는 가난한 삶을 택합니다. 인류애적 나눔, 지식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물적 소유의 떳떳함을 선택한 장계향의 삶은 현재의 많은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장계향 "음식디미방", 맛의 조화는 인간 삶의 조화 장계향은 맛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섞여 다양한 차이가 어우러지고 통일성을 이룬 것이 '맛'입니다. 한 가지 재료로는 맛을 낼 수 없고, 한 가지 색깔만으로는 무늬를 만들 수 없으며, 똑같은 소리로는 화음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조화가 필요합니다. 이 조화가 가장 잘 구현된 것이 바로'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계향이 70 즈음 쓰기 시작한 '음식디미방'은 이런 장계향의 철학을 잘 담고 있습니다. 한글로 된 최초의 요리서이며 요리의 재료가 모두 우리 땅에서 나는 것이며 밥상을 차리는 것도 조선의 여성이며 이 책을 읽는 사람도 조선 사람이기에 언문으로 작성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음식디미방'에는 146가지 음식의 조리과정이 한글 구어체로 자세히 적혀있어 지금도 그대로 재현이 가능합니다. 또한 조선시대 손님접대와 식생활문화 연구에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여성에 의해 쓰인 가장 오래된 조리책 이라는 점에서도 극찬을 받고 있습니다.
3. 남자현지사 생가(南慈賢志士生家)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양군과 남자현의 후손들이 3년 여의 조성 기간을 거쳐 1999년 11월 30일에 복원한 생가(生家)이다. 대지면적은 4,919㎡이며, 본채·문간채·추모각 등의 건물과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기념비(남자현지사 항일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5칸 규모의 외문을 지나면 본채와 문간채가 있고, 본채 뒤편 경사진 산 쪽으로 정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 추모각이 있다.
1872년 12월 7일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태어난 남자현은 19세 때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사는 김영주(金永周)에게 시집을 간 후, 남편이 의병으로 활동하다 전사한 후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만세운동 후 중국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적을 두고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운동을 벌였으며, 1933년 3월 1일 일본의 만주정부 건국일에 일본대사 부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폭살하려던 거사가 밀정에게 발각되어 모진 옥사를 치렀다. 남자현은 1933년 8월 22일 중국 하얼빈 조선여관에서 숨을 거뒀으며,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4. 문향의 고장, 영양
경북 영양은 문향의 고장이다. 일월면은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의 고향이고, 영양읍 감천리에는 시인 오일도, 석보면에는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가 있다.
* 주실마을(조지훈 생가)
먼저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가면,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의 생가를 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는 그의 문하생들이 세운 시비가 있고, 비에는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어 눈길을 잡는다.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 바위 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 (중략) /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
조지훈선생이 태어난 호은종택이라는 이 집은 조선 중기인 인조 때에 지은 것으로 한국전쟁 때 일부 소실되었던 것을 1963년 복원하였다. 언뜻 보기에도 고고한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듯한 이 호은종택은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 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가에는 조지훈선생이 태어난 태실이 그대로 남아있고 인근에는 어렸을 적 수학했던 월록서당도 그대로 있다. 조지훈은 20세에 문단에 데뷔했으며, 해방 후 김동리 등과 함께 청년문학가협회를 창립,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문화운동에 힘썼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의 한 사람이었으며 승무 풀잎 단장 역사 앞에서 봉황수 등 2백50여편의 시를 창작했다.
* 감천마을(오일도 생가)
주실마을에서 나와 영양읍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감천마을이 나오고 이곳에 시인 오일도의 생가가 있다. 시인 오일도는 24세 때 등단하여 1935년 사재를 털어가며 순수 시문학지 시원을 창간한 인물이다. 감천마을 중앙에 터를 잡은 그의 생가는 44칸짜리 건물로 경북 문화재자료 제 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일도 생가 앞의 하천절벽에는 천연기념물 제 114호인 측백수림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어 좋은 경관을 이룬다. 오일도 시비는 마을과 조금 떨어진 도로변 소공원에 세워져 있다. <저녁놀>이라는 시가 시비에 새겨져 있고 명시를 감상하며 다시금 여행길을 떠나게 된다.
"작은 방 안에 /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피우고 /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 하늘 저 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놀 // 이 우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 또 무엇이랴 / 저녁놀타고 나는 간다 // 붉은 꽃밭속으로 / 붉은 꿈나라로"
* 두들마을(이문열 고향)
한편 청송군 진보면과 이웃한 석보면 원리리로 가면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인 두들마을이다. 석계고택, 석천서당, 장부인 안동장씨 유적비 등이 생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이문열 선생이 왜 문학에 심취하고 또 많은 대작들을 쓸 수 있었는지 이해할 만하다. 이문열은 <새하곡>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고 주요 작품으로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젊은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레테의 연가>, <사람의 아들>, <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삼국지>, <수호지> 등이 있다.
5. 영양의 모전석탑
1) 영양 산해리 5층모전석탑[英陽山海里五層模塼石塔]
국보 제187호. 영양읍에서 안동으로 가는 31번 지방국도변에 있다. 탑은 험준한 산으로 쌓인 계곡을 따라 흐르는 반변천 옆 밭 가운데 서 있다. 탑이 위치한 마을은 오래전부터 봉감(鳳甘)으로 불려 일명 봉감탑이라고도 한다. 탑은 토석을 섞어 만든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노반으로 구성되었다.
탑이 위치한 주변 밭에는 기와 파편과 청자 파편이 많이 흩어져 있을 뿐 사찰에 대한 문헌기록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전혀 없다. 1930년대 아리야마 쿄우이치[有光敎一]의 조사로 처음 알려졌으며, 1943년 스기야마 노부조[衫山信三]의 『조선의 석탑(朝鮮の石塔)』에 소개되면서 알려졌다. 이후 1981년과 1988년 해체보수가 이루어졌으며 1999년의 방수처리, 2000년의 기단 보수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었다. 기단부는 토석을 섞어 만든 4단의 석축으로 쌓아 올렸다. 그 위로는 3단의 탑신 받침을 두었는데, 제일 하단은 상면만을 다듬은 높은 판석을 11매 놓고 그 위로 얇게 다듬은 모전석재 2단을 들여쌓았다.
탑신부는 5층으로, 1층에 비해 2층부터 급격한 체감을 보이고 있다. 초층탑신은 총18단으로 쌓아 올렸다. 초층탑신 남면에는 화강암 장대석으로 하인방과 문설주, 상인방을 놓아 문비를 설치하고 내부로는 감실을 마련했다. 문비의 문설주와 상인방에는 호형(弧形)의 문비형을 조각하여 짜맞추었는데, 이 같은 문비 형식은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에서 시작되어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 등 통일신라시대 모전석탑과 전탑의 문비에 나타난다. 감실내부 입구의 상인방과 하인방에는 회전돌기축 홈이 남아 있어 원래 문을 달아 개폐했음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의 지붕받침은 1층부터 5층까지 7·6·5·5·5단이며 상면 지붕 옥개는 모두 5단으로 내어쌓았다. 특이한 것은 각층 하단에 2단씩의 돌출턱이 마련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안동 운흥동 오층전탑과 같이 기와를 얹어 고정하기 위한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륜부에는 2000년 수리 당시에 보수하여 새롭게 추가된 노반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주로 붉은색 이암 계통의 석재가 사용되었다. 특이한 점은 다른 모전석탑에서 보이듯이 돌을 작게 다듬에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비교적 돌들은 큼직큼직하게 다듬어 모전석의 숫자를 최소화하면서 쌓아 올린 점이 특징이다. 한편 1989년 해체·수리에서 몇가지 특징적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먼저 5층 지붕의 중앙에서 약 30∼35㎝×40∼50㎝의 직사각형 구멍이 발견되었고 아래로 향할수록 넓어져 4층에서는 50∼55㎝×70∼75㎝로 3층 탑신 상부까지 이어져 있었다. 특히 4층 탑신에서 나무기둥의 흔적이 발견되어 목재 심주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석탑과 모전석탑 건립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해체결과 모전석들이 외부로 노출된 부분만 다듬어져 있었고 탑 내부로 감춰지는 부분은 가공되지 않았다. 이렇게 뿌리가 긴 돌들이 내부의 다른 돌이나 흙으로 단단히 다져져 있어 탑이 내구성을 지닐 수 있었다. 한편 5층 상부와 탑 내부에서 다량의 기와가 발견되어 원래 탑 지붕에 기와를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전석탑의 재료의 특성상 파손 및 결실이 두드러져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 가운데 가장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탑이다. 또한 완전한 해체수리를 통하여 탑 내부와 기단의 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현이동 모전오층석탑, 영양 삼지동 모전석탑 등 영양 지역에 집중된 지역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어 한국탑파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현이동 오층모전석탑[縣二洞模塼五層石塔]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현2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6.98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 1단으로 된 방형의 높은 석축기단 위에 전(塼)모양으로 다듬은 흑회색 점판암(粘板岩)을 쌓아서 건립한 탑이다.
기단 위에는 나직한 받침을 조성하고 그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1층 기단(基壇) 위에 제1탑신 동면에 방형의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있는데, 입구에 화강석으로 된 문주석(門柱石)을 삽입시켜 감실을 견고히 하였다.
그리고 문주석 앞면에는, 도식화(圖式化)된 문양이기는 하나, 유려한 솜씨로 당초문(唐草文)을 양각하여 가식하였다. 감실의 문주석에 금강역사(金剛力士)를 조각하여 장엄함을 나타내는 경우는 가끔 볼 수 있으나 온화한 당초문으로 가식한 경우는 드문 예로서 이색적인 석탑이다. 탑신의 2층까지만 남아 있던 것을 새로이 복원해 놓은 것으로,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보주(寶珠)가 차례로 얹혀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흑회색의 점판암 재질과 둔탁한 겉모습이 어우러져 육중한 느낌을 자아낸다.
3) 영양 삼지동 모전석탑[英陽三池洞模塼石塔]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영양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영양읍내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삼지리 뒷산 중턱에 있는 모전석탑이다. 절벽을 이룬 산중턱의 커다란 바위를 기단(基壇)으로 하여 그 위에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로 쌓았다. 당초 3층탑이었는데, 현재 2층만 남아 있으며, 탑 위에 노반과 복발(覆鉢)·보주(寶珠)가 있어 상륜부(相輪部) 형식을 갖추고 있다.
모전탑이란 흙이나 돌로 벽돌모양을 만들어 쌓은 탑이다. 경주 분황사석탑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깍아 세운 것이고,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은 흙을 구워 벽돌모양을 만들어 쌓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고래로 벽돌로만 쌓은 건축은 없이 단지 궁궐이나 사원에서 장식으로 문양을 넣은 벽돌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때문에 "한국의 전탑은 겨우 신라시대, 그것도 안동과 여주에만 한정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 탑의 예에서 보듯 경상북도 일대를 비롯하여 많은 곳에서 전탑이 발견되고 있다.
이 탑의 높이는 3.14m이고, 초층탑신의 폭은 1.41m이다. 초층탑신 전면에는 감실(龕室)이 설치되어 있으나 불상은 없고 구조도 많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감실에서 신라 금동불상 4구가 나왔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998년 석탑 해체보수시 석제 사리함과 사리 1과가 출토되었는데, 석제 사리함은 국고에 귀속 조치하고, 사리와 신규 제작한 사리함은 재봉안하였다. 석제 사리함은 모전석탑 계열에서 자주 출토되고 있으며, 경주 분황사석탑에서도 출토된 적이 있다.
이 탑은 현재의 연대암 부근에 영혈사가 있었는데, 그 절에 있었던 탑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축조연대도 삼국 통일 이전으로 생각된다.
4) 현일동 삼층석탑[縣一洞三層石塔 ]
1977년 8월 22일 보물 제610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27m, 기단폭 2.13m이다. 이 석탑은 밭 가운데에 있으며 주변에 신라·고려의 와편(瓦片)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층 기단(基壇) 위에 층을 올린 중형의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3층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탑의 맨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만이 남아 있다. 상층 기단 면석에 우주(隅柱:귀기둥)와 탱주(撑柱)가 있고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조각되어 있다. 상층 기단의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하면에는 부연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이 별개로 되어 있는데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하층 기단에는 한 면을 3구(區)로 나누어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1층 탑신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배치되어 있고, 사각 사리공(舍利孔)이 있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홈이 음각되었고 4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졌다. 반전된 전각(轉角)에 풍경(風磬)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으며 옥신괴임은 2단이다. 탑의 조각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5) 화천동 삼층석탑[化川洞三層石塔 ]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화천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1977년 8월 22일 보물 제609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59m, 재료는 화강석이다.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식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1974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기단부가 파괴되었고, 상륜부도 결실되었다.
현일동 삼층석탑(보물 610)과 같이 기단부와 탑신석에 장엄한 조각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9개의 돌로 된 하층 기단부는 3개의 돌로 된 면석과 우주(隅柱:귀기둥)와 탱주(撑柱)가 있고, 또한 안상(眼象)을 음각하였으며 그 안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상층 기단부에도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여 구역을 만들었으며,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이 각각 별개석으로 되었으며, 여기에 우주가 있다. 1층 옥신 각면에는 악귀를 밟고 서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자세를 생령좌(生靈座)라고 한다. 1981년 탑 부근에서 부도비로 추정되는 비석 조각이 발견된 적이 있다.
탑의 조각양식이나 수법으로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6) 용화동 삼층석탑[龍化洞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 높이 3.41m. 일월산(日月山) 남쪽 기슭 용화동 입구, 밭 가운데 있는 이 석탑은 지대석 높이 26㎝, 하기단 1변의 길이가 2.12m이다.
2층기단에 삼층석탑을 올려놓은 양식으로 기단석은 4매의 판석을 세워 조립했으며, 초층 이상의 각 부재는 단석(單石)으로 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으나 기타 부재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상대갑석은 모서리가 일부 깨져 있고, 옥신에는 양 우주(隅柱)가 있으며 옥개받침에는 몰딩(moulding: 테두리장식)이 있는데, 초층과 2층은 4단으로 되었고 3층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삼층석탑의 체감률에 비하여 상기단의 크기가 작고 옥개석이 중후한데, 옥개 하면에는 낙수구(落水溝)가 마련되었다. 1985년 해체, 복원되었다.
7) 신구동 삼층석탑[英陽 新邱洞 三層石塔]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84호로 지정되었다. 1999년 석탑의 보존관리상 해체 복원하였다. 영양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중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을 올린 일반형의 석탑이다. 하층기단 하부가 매몰되어서 지대(地臺)의 구축상태를 알수 없으나, 부분적으로 발굴 작업을 하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기단부분은 판석(板石)을 조립한 것이고,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을 모두 한 개의 돌로 조성하여 쌓아간 것이다. 현재 하층기단은 원형을 잃은 갑석(甲石)을 제외하고는 매몰되어 있고, 상층기단 이상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옥개는 3층까지 그대로이나, 옥신은 2층까지만 제 것이고, 3층옥신은 한 개의 돌로 조성된 노반(露盤)이 끼워져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3층 옥개석 상부 중앙에 찰주(擦柱)를 밖는 둥근 구멍이 있고, 그 위에 한 개의 돌로 조성한 복발(覆鉢)이 놓여 있다. 3층 옥신 대신 끼워져 있는 노반과 함께 현재 2개의 상륜부재(相輪部材)가 남아 있는 셈이다.
상층기단의 면석과 1층옥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상층기단 앞면에는 감실(龕室)처럼 면석을 들어내고 현재 그 앞에 내력을 알 수 없는 석불이 한 구 모셔져 있다. 옥신괴임은 보이지 않으나, 옥개(屋蓋)의 층단받침이 4단으로 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8) 연당동 석불좌상(英陽蓮塘洞石佛坐像:경북유형문화재 111)
영양 연당동 석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높이 1.12m의 약사여래상이다. 목 부분이 절단되고 안면에 파손이 심하여 광배(光背)는 세 조각으로 절단되었으나 불상형식은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 1981년에 보호각을 신축하였다.
6. 선바위와 남이포
입암면 연당리에 있는 선바위와 남이포는 '영양고추'와 같이 영양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선바위 관광지에서 다리를 건너 절벽 밑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남이정’이란 정자가 나온다. 강 건너 절벽에 촛대처럼 하늘로 치솟은 바위가 선바위다.
남이포는 조선시대 남이 장군이 모반세력을 평정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외에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지훈문학관, 수하계곡, 측백수림, 서석지와 연당마을, 두메송하마을, 영양고추홍보관, 용화리삼층석탑, 삼의계곡, 일월산과 자생화공원, 반딧불이천문대 및 생태공원 등이 있다.
7. 서석지(瑞石池)
남이포의 긴 다리를 건너 연당리로 들어서다보면 멀리에서부터 산들이 이 마을을 조심스럽게 에워싸고 있는 형상을 보게 된다. 마을은 나직한 흙벽담과 돌담으로 정겹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높지 않은 흙담 안에서 꽤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담장을 훌쩍 넘어 세상을 건너다보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띈다. 400년을 묵은 그 은행나무가 있는 담 안에 바로 조선시대 민가 정원의 백미라는 서석지가 있다. 못 가운데 기이한 형태의 돌들이 많아 이름을 그렇게 지었나보다.
서석지 석문 정영방이 광해군 때 조성한 조원으로 못 가운데 기이한 돌들이 있어 서석지라 이름 붙였다.
중요민속자료 제108호인 이 조원(造苑)은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1577~1650)이 조선시대 광해군 5년(1613)에 조성한 민가의 연못이다. 본래 예천에서 태어난 그는 선조 38년(1605)에 벼슬에 나아갔으나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더 한적한 곳으로 숨어들어 이곳에 은둔했다. 자양산 남쪽 완만한 기슭에 있는 이 깊숙한 산골마을에 들어서서야 산세가 아름답고 인적이 드물어 “석인군자(碩人君子)가 은거하여 뜻을 세울 만한 곳”이라고 하며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서석지에 보관되고 있는 「林泉山水圖」를 보면 태백산에서부터 뻗어내려온 산줄기와, 일월산 좌우에서 발원해 내려온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이 서석지가 자리하니, 이곳은 중심인 내원(內苑)일 따름이고, 주변의 물과 산은 자연 그대로가 외원(外苑)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서석지가 자리잡은 넓지 않은 터에는 나지막한 돌담을 둘렀는데 들어가는 문이 정면을 향해 있지 않고 한 번 꺾인 담에 나 있어 옆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색다른 공간 체험을 하게 된다. 문을 열었을 때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려고 문을 좀 비껴 낸다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맞담을 치거나 해서 시선을 한 번 차단했던 옛사람들의 방식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부담을 줄이고 안에서 맞는 이나 밖에서 드는 이가 서로 기척을 느끼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연못이 펼쳐지는데, 건너편 마주보이는 곳에 주일재(柱一齋)가 있고 북서쪽으로 경정(敬亭)이 있다. 주일재는 방 두 칸, 마루 한 칸으로 공부하기에 알맞고, 경정은 앞 네 칸은 마루로 활짝 틔우고 뒤쪽은 가운데 두 칸을 대청 삼고 양쪽에 방을 한 칸씩 들여, 마루에서 건너편의 서석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알맞다. 경정 뒤에는 수직사(守直舍) 두 채가 있다.
서석지 배치평면도
연못가는 잡석으로 자연스럽고도 깔끔하게 쌓았는데, 주일재 앞에 장방형 단을 튀어나오게 꾸미고 소나무, 대, 매화, 국화를 심어 아름다운 네 벗을 갖추어놓고는 이름하여 ‘사우단’(四友壇)이라 했다. 여름이면 못에 연꽃이 만발하니 이 네 벗과 더불어 어떤 친구도 부럽지 않을 듯하다.
연못의 동북쪽 모퉁이에는 산 쪽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수구인 읍청거(挹淸渠)를, 그 대각선 반대편인 서남쪽 모퉁이에는 물이 나가는 토장거(吐藏渠)를 설치했다. 읍청거 쪽 못바닥은 암반이 울퉁불퉁 솟아난 모습이어서, 마치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어느 바닷가 풍경을 축소해서 가져다놓은 듯한데, 20여 개의 서석(瑞石) 무리가 물속에 잠기거나 드러난 채로 있다. 그 생긴 모습에 따라 신선이 노니는 돌[仙遊石], 구름 봉우리 모양의 돌[祥雲石], 물고기 모양의 돌[魚狀石], 별이 떨어진 돌[落星石] 등 이름이 붙어 있어 자연의 오묘한 극치를 즐기려 했던 정영방의 이상적인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더욱 기이한 것은 이 서석들이 본래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서석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것을 충분히 이용하여 못을 꾸몄다고 하니, 그 생김새가 너무도 기이하여 오히려 믿기 어려울 만큼 오묘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 연당리 일대는 현무암류의 약암과 사암·니암 등이 절경을 이룬 곳이 많은데, 서석군을 이룬 돌은 석영사암이어서 물속에서도 돌빛이 희게 빛나 보여 기이함을 더해준다. 또 이 연못의 물은 돌 사이로 흐르는 물[石澗水]과 복류수(伏流水)로 채워지기 때문에 날이 가물거나 비가 흔할 때에도 늘 그 수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자연을 인공적으로 재배치하여 원을 꾸미는 방식이 아니라 주어진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고 인공적인 장치는 최소한으로 하여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는 옛사람의 지혜가 참으로 감탄할 만하다.(답사여행의 길잡이10-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첫댓글 다시한번 상상의 나래를 펴고 영양 답사를 하였습니다.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참석못해 아쉽지만 왕년의 기억을 끄집어내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