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마춤정 / 안성
 
 
 
 

최근 댓글 보기

 
최신 댓글이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마춤정 / 활터이야기 스크랩 반구제기(反求諸己), 깨달음(佛)을 가르친 교훈이다.
lee1018a 추천 0 조회 17 12.01.17 17: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반구제기(反求諸己), 깨달음(佛)을 가르친 교훈이다.

 

 

 

우리는 평소에 어떤 마음(意識)으로 활을 쏘고 있을까?

 

내면의식 즉 참자기(眞我)인 본성(本性)에 의해 활을 내고 있을까?

 

외부의식 즉 가아(假我)인 자기의 현재의식(現在意識)에 의해 활을 내고 있을까?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흔히 우리는 깨달음(佛)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가져본다.

 

그리고 활과 깨달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깨달음을 일컫는 한자 불(佛)자를 보면,

 

사람인(人)변에 활궁(弓)자 위에 창과 칼(刂)이 덮여 쓰여 있는 것(弗)을 본다.

 

분명 활과 깨달음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가 활을 낼 때는,

 

진아와 가아의 합작에 의해 동작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느 일방에 의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활쏘기에 있어서 진아와 가아는,

 

일상의 언어에서와 같이 주어와 보어의 역할 같은 역할 분담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주어의 역할을 하고 어느 것이 보어의 역할을 할까?

 

 

 

 

깨달음을 가르친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은 본성이 하는 일이고 분석하는 것은 현재의식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때의 알아차림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한다.

 

알아차림이 왜 본성과 만나는 것이고 깨달음이 된다는 것일까?

 

 

 

 

선(禪)이나 명상(瞑想)에서 가르치는 깨달음은 자기의 본성(本性:眞我)과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왜 본성과 만나야 하는가?

 

우리 성인들의 몸속에는 대개 60조개의 세포가 있고,

 

그 세포 속에는 그 세포 하나마다 400여 만 개의 유전자정보가 축적되어 있다고 한다.

 

60조 x 400만 = ? . 웬만한 컴퓨터가 따라 잡지 못할 엄청난 정보량이다.

 

 

 

 

우리가 몸속에 지닌 세포 속의 방대한 정보에는 나를 낳아주신 최초의 선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오랫동안의 인류가 경험하고 깨달은 지혜가 축적되어 있어서

 

그것을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자기가 원하는 모든 정보가 그 속에 들어 있다고 한다.

 

삶에 필요한 지혜는 바로 자기 세포 속에 들어 있어서

 

그것만 깨달아도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활 꾼의 몸속에는 이미 활에 대한 모든 정보가 사실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보를 끄집어내어 쓰기만 하면 되는데도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선이나 명상에서 가르치는 깨달음은 자기내면의 관조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현재의식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가운데 우리가 첫 번째로 만나는 자기의 모습은

 

<첫 느낌> 그 자체를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득 떠오르는 느낌 즉 알아차려져지는 것이다.

 

따라서 알아차림의 질적 향상이야말로 깨달음을 온전하게 해 나가는 수행과정이라고 한다.

 

 

 

 

선이나 명상은 그저 고요한 정적인 상태에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정좌명상도 있지만 움직이면서 하는 동적명상도 있다.

 

춤을 추면서 하는 명상은 춤 명상이 되고 웃으면서 하는 명상은 웃음명상이 된다.

 

활을 쏘면서 하는 명상도 활쏘기라는 동적 명상의 한 장르로 분류할 수 있다.

 

집중한 가운데 자기를 느끼는 것, 자기의 본성을 바라보는 것은 모두 선이요 명상이다.

 

이 모든 것은 깨달음을 향한 인간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동작이나 사유를 하면서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음을 먼저 알아차린다.

 

그 연후에 왜 그랬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칭찬도 하고 반성도하는 분석에 들어간다.

 

아무런 의식적 가미가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으로 행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정작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깨달음의 첫 걸음>인가를 잘 모르고 지나가기 쉽다.

 

 

 

 

보통 사람들은 알아차리기를 중요시하기보다는,

 

행위의 결과를 두고 반성하고 분석하는 것에는 오히려 더 능한 것이 우리의 의식구조라 할 수 있다.

 

마음으로 느끼기 보다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우리는 활을 내면서 흔히 <反求諸己>란 말을 사용한다.

 

집궁제원칙(執弓諸原則) 마지막 항에 <發而不中이면 反求諸己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반구제기>를 사람들은 < 쏘아서 맞지 아니하면 자신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살피라.> 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여기까지이지 더 깊이 있는 해석을 들어 본 일이 없다.

 

 

 

 

자기내면을 바라보라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활을 통한 마음공부, 몸 공부를 하라는 가르침임에는 틀림없다.

 

각론을 통해 바른 공부가 시작될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오랫동안 구체적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었다.

 

내 느낌으로 활 꾼들은 자기 동작의 결과분석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첫 느낌>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양질인가 아니면 악질인가에 따라 그것을 알아차리는 인간의 깨달음의 질이 결정되는 것

 

이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한 여인을 만났다고 하자.

 

“정말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강간을 해 보고 싶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느낌은 겉으로 나타나 어떤 물리적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통념상 범죄의 구성요건이 되지 않지만 이렇게 차이가 큰 것이다.

 

자기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이 문득 떠오르는 첫 느낌이

 

얼마나 양질인가 아니면 악질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깨달음의 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활을 들고 사대에 서서 시위를 당기면서부터

 

자기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어떤가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활을 쏘는 자기에게서 순간순간 느끼고 알아차려 지는 것은

 

자기가 내는 활쏘기의 질(質)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활을 내고 있는 옆 사람의 시수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경쟁심에만 빠져 있는 자기를

 

알아 차렸다면 그는 과연 활쏘기의 본분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활 쏘는 동작 하나하나에만 마음을 빼앗겨 지형과 풍세를 읽지 못한 것을 알아차렸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활쏘기를 하고 있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활 꾼은 호흡(呼吸)을 통하여 집중하는 법을 배운다.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호흡을 통하여 우주의 기운이 내 내면 속으로 들어와 자기와 하나 되는 것에 집중해야한다.

 

자기와 하나 된 우주의 기운이 어떻게 자기를 통해 활을 쏘는 기운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가도 보아야 한

 

다.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인 자기의 내부의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데 집중해야 한다.

 

활쏘기를 마무리하는 동안까지 내내 참자기를 주시하면서 집중해야 한다.

 

 

 

 

무심으로 활을 내라는 말이 있다.

 

아주 찰나적 순간에 우리의 본성은 모든 것을 알아차리도록 되어있어서 그저 본성에게 맡기고

 

편안히 활을 쏜다면 우리의 몸은 저절로 주어진 조건에 맞는 활쏘기를 한다고 한다.

 

무심으로 돌아가 활을 쏠 수 있도록 자기의 본성을 믿고 맡길 수 있다면

 

그의 깨달음은 매우 훌륭하고 양질의 첫 느낌을 소유한 깨달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집중하고 알아차리는 가운데 참자기의 모습을 보게 된다.

 

현재의식은 그 행위의 결과를 평가하고 분석하게 되어있다.

 

현재의식은 두고두고 자기의 행위 결과에 대해 분석평가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무의식과 현재의식이 결합한 결과로 자기가 조금씩 형성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활쏘기에서 알아차림은 주어이고 분석은 보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진아 즉 본성이 하는 일이 주됨이요 가아 즉 현재의식의 역할은 보조적 임무라야 맞을 것 같다.

 

 

 

 

알아차리는 것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우리가 아무리 본성에 맡긴다고 하더라도 각자 수련의 깊이에 따라

 

알아차리는 본성과 결과를 분석하는 현재의식이 서로 나누어 하는 역할의 비율이 다르리라고 생각된다.

 

사실 우리는 알아차리는 것에 대한 공부보다는 결과를 분석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일에 더

 

능숙하다.

 

때문에 마음공부보다는 몸 공부에 더 치중하게 되는 셈이다.

 

 

 

 

활을 향해 다가가는 우리의 모습은 각자의 근기(根氣)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것은 활에 대해 자기의 본성이 알아차리는 정도와

 

몸으로 부딪쳐 가면서 현재의식이 분석한 것에 대한 비율로 나타나는 차이가 될 것이다.

 

 

 

 

반구제기는

 

몸으로 하는 활쏘기를 위한 기술적 공부보다는,

 

마음으로 하는 깨달음의 공부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하는 가르침인 것 같다.

 

활을 공부하는 각자의 그릇에 따라 그 비율은 달라질 것이지만....(20080106 和圓)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