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양 순 :
오 정 희 :
한 성 자 :
김 성 환 :
오 두 섭 :
이 강 춘 :
박 일 우 :
황 병 노 :
장 은 걸 :
때
제 1 막 - 1980년 여름의 그 저녁
제 2 막 - 다음 날 저녁
무 대
강변과 술집.
무대 왼편은 모래사장, 오른편은 술집이다.
객석 쪽으로는 강이 흐른다.
술집 오른편 벽엔 찬장, 그 아래에는 안채로 통하는 작은 쪽문, 뒤편엔 낡은 천조각으 로 가려진 출입구. 천조각에는 서투른 페인트 글씨로 ‘대포, 소주, 약주, 각종안주’ 라 고 쓰였으나 이제는 세월에 바래어 희미하다. 왼편과 앞쪽에는 각각 하나씩의 들창이 있는 것으로 가정이 되어 그 들창으로 하늘과 강 건너의 촌락을 바라볼 수 있다.
무대 왼편의 모래사장에는 한 그루의 거대한 아카시아 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에는 몇 개의 검은 바위가 뒹군다.
강 건너, 객석 너머로는 초라한 마을과 가난한 논밭이 있다.
강 하류에는 그 강을 건너는 교량을 세우는 일이 한창인 공사장이 있고 상류에는 하 나의 커다란 공장이 있으나 물론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왼편으로는 강 하류로 나가는 길이, 오른편으로는 상류로 나가는 길이 있다.
제 1 막
막이 오르면 강가에 양순이 쪼그리고 앉아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다.
나오는 것은 없다.
그 옆에는 정희가 서 있다.
그녀들은 찬란한 색의 그러나 낡은 한복을 입었다.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하여 나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객들이 그녀들의 손등을, 탄력을 잃은 피부가 셀로판 종이처럼 까실까실해 진 그녀들의 손등을 볼 수 있다면 이런 곳에서 술꾼들의 위안이나 즐거움이 되기에는 그녀들이 이미 늙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으리라.
때는 저녁 무렵.
노을이 깔리며 어둠이 머리칼을 풀고 강을 건너는 중이다.
정 희 : (양순의 구역이 멎기를 기다려) 누구 씨라는 걸 아니?
양 순 : …
정 희 : 누구 씨니?
양 순 : (일어서며) 이놈의 강 썩은 냄새 때문에 더 하네.
정 희 : 알지도 못하면서 뭐하러 낳아?
양 순 : 모르긴 왜 몰라?
정 희 : 알아? 누군데? 응, 누구야?
양 순 : (아카시아 나무 밑으로 간다. 그것을 올려다보며) 내가 여기 왔을 땐 아주 조그 맸는데, 벌써 이렇게 컸어.
정 희 : 저 건너 밭에는 아무 것도 안 자란데. 씨를 뿌려도 다 죽어 버린 데.
양 순 : 어릴 때 고향에서 아카시아 나무를 뽑으려고 했던 적이 있어.
정 희 : (슬며시) 오씨니? 오씬가 보구나, 그렇지?
양 순 : 겨우 무릎만큼 자란 아카시아였어. 뽑아내려고 흙을 파는데, 뿌리가 끝없이 끝없 이 뻗어있는 거야. 오기로 계속해서 그 뿌리를 따라가 봤지. 끝에 가보니 수천수 만 가지의 실 뿌리들이 축구공처럼 단단하게 얽혀 있었어. 무언가를 둘러싸고, 뭐였는지 아니? (사이) 인분덩어리였어. 그 작은 인분덩어리를 찾아 뿌리들이 그 처럼 멀리 뻗어간 거야. 왠지 알아? 그 인분덩어리가 아카시아에게는 목숨이기 때문이었어. 목숨. 아카시아 뿌리들은 목숨을 찾아 뻗어간거야.
정 희 : 징그럽다, 얘.
양 순 : 징그러운 게 목숨이야.
정 희 : 오씨 얘기니까 니가 그렇게 낳으려는 거지, 뭐. 그렇지? (웃는다)
양 순 : 헛소리 마.
정 희 : 아냐? 그럼…
(사이)
양 순 : 내 애기야.
정 희 : (웃는다. 백치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양 순 : 지난번 애기 지울 때 의사가 그랬어. 이젠 애기를 가질 수 없을거라구.
정 희 : 돌팔이로구나, 그놈의 안경쟁이.
양 순 : 그런데 생겼거든 (사이) 이번 애길 지우면 다신 애길 가질 수 없게 되고 말아.
정 희 : 그럼 편하지, 우리 같은 것들이 어떻게 애기를 기르니?
양 순 : 왜 못 길러? 젖먹이구, 기저귀 빨구, 잠재우구…
정 희 : 아줌마가 너 배불러서 다니는 꼴을 보려고 하겠니?
양 순 : …
정 희 : (깔깔거리며) 당장 잡아먹을 라고 할거다, 아마.
(사이)
양 순 : 나… (사이) 도망 갈 거야.
정 희 : (놀라서) 뭐야! (사이) 오씬 어쩌구?
양 순 : (한숨) … 몰라, 모르겠어.
정 희 : (웃는다, 의미 없이)
왼편으로 성자가 들어온다.
한복을 입었으나 낡고 색이 바래어 허드레 옷과 구별할 수 없다.
자그마한 몸집에 머리칼이 세어 반백이 된 50이 갓 넘은 여자다
성 자 : (독백) 어이구, 큰일이다. 이놈의 영감… (바위 위에 앉는다)
(사이) 어이구, 빌어 먹을 영감태기…
정 희 : 니 팔자도 참 기박하구나.
양 순 : 세상에 기박한 팔자 아닌 사람 없어. 나이 서른 넘기면 다 기박한 팔자 되는 거 야.
정 희 : 그 애기가 니 팔자 더 기박하게 만들 거다, 얘.
양 순 : 지금 보다 더 기박해 지겠니? (웃는다)
무대 왼편으로부터 성환이 들어온다.
더러운 작업복을 입었고 목엔 때묻은 타월을 걸었다.
30이 가까운 나이.
그는 흘낏 성자를 바라보지만 아는 체도 않고 술집으로 들어간다.
검게 그을은 팔과 얼굴
정 희 : 어서 오세요. (성환 구석진 탁자에 가서 앉는다)
뭐 드실래요, 김씨?
성 환 : (외면한 채) 소주.
정 희 : (소주병, 잔, 풋고추 따위를 준비하며) 기박한 팔자 아닌 사람도 많기만 하더라. 그저께부터 하루도 안 빼고 오는 그 남자도 그렇고.
양 순 : 그 사람은 팔 병신이잖니.
정 희 : (준비한 것들을 성환의 탁자에 놓으며) 팔 하나 없으면 어떠니? 돈 많으면 그만 이지. ( 소주병 뚜껑을 따려는데)
성 환 : (외면한 채) 놔두고 꺼져. (정희는 그를 떠난다)
양 순 : 어쩌다 팔이 그렇게 됐을까?
정 희 : 몰라. 양순아, 우리 라면 끓여 먹을래?
양 순 : 라면? (갑자기 헛구역질을 시작한다. 급히 쪽문을 통해 사라진다)
성 환 : (그런 그녀를 증오에 찬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미친것들! (이로 소주병 뚜껑을 따서 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 꿀꺽 삼킨다)
정 희 : (창에 대고 성자에게) 아줌마, 손님 왔어요.
성 자 : (부시시 일어나 술집으로 들어오며) 어이구, 이놈의 영감…(성환에게) 김씨.
성 환 : (대답하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성 자 : 혹시 우리 영감 소식 못 들었수?
성 환 : (대답하지 않는다)
정 희 : 왜 아저씬 가끔 그러는지 모르겠더라. 술있지, 담배 사주지, 용돈 주지…
나두 그런 팔자나 한번 돼봤으면…
성 환 : (쏘아보며 혀를 찬다) 너 같은 게 그걸 알 리 없지.
성 자 : 넌 니 일이나 해! 양순이는 어디 갔어?
정 희 : …어이 좀 아픈가봐요.
성 자 : 돈 벌 궁린 않구 걸핏하면 아프다구 누워버리면 대수들이야? 그게 아주 오씨 만 난 뒤론 밤손님도 안받구… 나오라구 해!
정 희 : 아줌마가 그래요.
성 환 : 그게 애기 밴 보양입디다.
성 자 : 뭐, 뭐야?
성 환 : 짐승 같은 것들!
성 자 : 정희야, 정말이야, 그게?
정 희 : 몰라요, 난.
성 자 : 모르긴 왜 몰라?
정 희 : 내가 의사예요? 그런걸 알면 이런데 붙어있지도 않아요. 돈만이 벌어서 편하게 살죠. 부자들만 사는 동네에서. 노란 색 찰 사서 내가 직접 운전해서 다니구요. 애길 낳으면요, 매일 데리고 다닐 거예요. 대공원이랑, 동물원이랑, 만화영화, 백 화점이랑… 노란 색 옷을 입혀서요.
성 환 : 넌 애도 못 낳는 병신 아니냐?
정 희 : 암튼 만일 말이예요, 만일. 얼마나 좋아요? (웃는다. 백치처럼) 한잔 줘요, 김씨.
성 환 : (주지 않는다) 작부라는 게 세상에 없었다면 대체 뭣들이 됐을까?
정 희 : (성환이 마시던 빈 잔을 든다) 나요? 영화배우요, 김지미 같은.
성 환 : 걸레 같이 더러운 낯짝을 하구 앉아선…
정 희 : (스스로 소주를 따라 마신다.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씹는다) 내가 한 잔 드릴게 요, 김씨.
성 환 : 그거 들구 저리 꺼져.
정 희 : 병째 날 주는 거예요? 아유, 좋아라! 고마워요, 김씨. (소주병을 들고 그를 떠난 다)
성 환 : 야!
정 희 : 네?
성 환 : (탁자 위의 잔, 풋고추, 된장 등을 가리키며) 이것들 다 없애!
정 희 : 왜요?
성 환 : (탁자 왼편 끝에 팔을 눕혀서 갖다 대고 그것을 오른편 끝까지 밀어 붙여서 탁 자 위의 잔, 풋고추, 된장그릇 따위 등을 모두 바닥에 떨어뜨린다)
정 희 : (깔깔거리며 웃어댄다)
성 자 : (정희에게) 이 미친 게 웃기는… 왜 그래, 김씨?
성 환 : 다른걸루 소주 하나 갖다주쇼.
성 자 : 소주? (성희가 들고 있는 걸 가리키며) 저기 있잖아?
성 환 : 돼지새끼하고 같은 그릇에 밥 먹는 사람 봤소?
성 자 : 으, 응. (다른 소주와 잔 따위를 성환의 탁자에 갖다 놓는다) 왜 김씬 우리 애들 하고 술을 안 먹어?
성 환 : … (소주병 뚜껑을 이빨로 따소 잔을 채울 뿐)
성 자 : 애들이 맘에 안 드나? 다른 애들 데려다 놓을까?
성 환 : 쟤들이 애들이요? 늙은이들이지.
성 자 : 젊고 싱싱한 것들.
성 환 : … (술을 꿀꺽)
성 자 : 포동포동하고 예쁜 것들 말야.
성 환 : (다시 잔을 채우며) 거기 오래도록 앉아서 지껄일 셈요?
성 자 : 엥? (무안하다. 일어서며) 뭐하구 있어? 이거 치우지 않구. (술집을 나가 다시 강 가에 앉는다)
정 희 : 더러운 강엔 왜 나가 앉아있지?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성환이 떨어뜨린 것들을 치운다)
성 환 : 너희들 냄새보다는 낫지.
정 희 : 우린 매일 목욕해요.
성 환 : (냉랭하게) 시간마다 목욕을 해봐라. 너희들 다리사이에서 나는 썩은 냄새가 없 어지나.
정 희 : … (작게 소리내어 웃는다)
성 환 : 웃긴. 썩은 강물을 뱃속에 끼고 앉은 게
정 희 : (웃을 뿐이다. 노여움도 부끄러움도 없다)
기차소리, 먼데서부터 가까워졌다가 멀어져 간다.
왼편에서 두섭과 강춘이 들어온다.
두섭은 갓 서른을 넘긴 사내로 검게 염색한 군용작업복을 입었다.
강춘은 낡은 반팔의 남방셔츠를 입은 50대 초반의 사내.
그들은 얼굴, 어깨, 팔이 검게 그을렸고, 특히 얼굴에는 값싼 담배와 술로 인한 주름살이 험하고 깊다
강 춘 : 그 녀석 십장도 감투라고 나으리 들 하는 짓거린 도맡아 하드라니까. 거짓말에다 엉터리로 따지자고 덤벼들질 않나, 욕설이 입에서 춤을 추고 도도하게 뻗대면 서 누명이나 씌우고… 뭐야? 선동? 나, 원 참.
두 섭 : 어딜 가나 그런 놈들 등쌀에, 빌어먹을….
강 춘 : (강가의 성자를 발견하고) 아줌마, 들어갑시다. 아줌마랑 술이나 퍼먹어야 이 속 다스리지 울화 치밀어서 등창 걸리겠네.
성 자 : 어서 들어가요. (그들과 같이 술집으로 들어간다) 얘들아, 손님 오셨다.
정 희 : (반색) 어머, 오랜만이다, 이씨. 그 동안 어디 가서 술먹었어?
두 섭 : 양순인 어디 갔냐?
강 춘 : 허어, 이 녀석은 오나가나 양순이, 양순이…
성 자 : 양순인 아직도 안 나왔어? 내, 요것을 그저… (쪽문으로 안채로 들어간다)
정 희 : 뭘 드실래요?
강 춘 : 널 먹어야겠다. 줄래?
두 섭 : 막걸리하고 두부. 양순이 좀 데리고 나오구. (성자와 양순, 쪽문을 통해 나온다)
성 자 : 오씨가 얠 어떻게 해주든지 해야지, 오씨 드나들기 시작한 뒤론 얘 부리기 힘들 어서 장사 못해 먹겠어.
양 순 : 왜 오씬 붙들고 그래요? 내 몸 아픈 게 어디 오씨 탓이예요?
성 자 : 글세, 오씨 만난 뒤론 왜 특히 몸이 아퍼?
강 춘 : 이 녀석 옆에 철썩 붙어 있거라. 밤낮 부르는 게 니 노래란다. (성환을 발견한다) 아니, 이 사람…(화가 치민다. 흘겨보다가 두섭에게) 내가 제일 꼴 보기 싫은 놈 들이 어떤 놈들인지 아냐?
두 섭 : 십장 같은 놈들이겠지. (성환, 옆에 앉는다. 어깨동무를 하며)
강 춘 : (쳐다보지도 대꾸하지도 않고 소주를 삼킨다)
강 춘 : 남들 다 피볼 각오하는데 혼자 미꾸라지처럼 빠져서 몸사리고 있는 놈들.
두 섭 : 앉으쇼, 이씨도. (성환이 비운 잔을 들어 성환에게 내민다) 오래 기다렸냐?
성 환 : … (말없이 두섭이 내민 잔에 술을 따른다)
강 춘 : 밸 썩는 냄새 때문에 그 녀석 옆엔 앉기 싫다.
정 희 : (막걸리와 두부, 사발 등을 탁자에 놓으며) 냄새? 김씨한테서도? (깔깔거린다)
강 춘 : 이런 놈들 때문에 십장 같은 놈들이 득셀 하는 거야. 똑같은 것들이지. 이런 놈 들이 십장 되면 그따위 짓들 하는 거구.
성 자 : 왜? 무슨 소리야?
양 순 : 무슨 일이 있었어, 오씨?
강 춘 : 지금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70명쯤이거든 그 사람들이 하루에 한 시간씩 일을 더하면 몇 시간인가?
성 자 : 일흔 시간이네.
두 섭 : 일곱 사람 몫의 일이기도 하고.
강 춘 : 적달 동안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일을 해 왔거든.
두 섭 : 하루에 한 시간씩이 뭐야? 두세 시간씩 더했지.
강 춘 : 그래서 십장한테 가서 따지기로 했어. 인부들 일곱을 더 구해서 쓰든지, 아니면 그 일곱 사람 몫의 노임을 우리한테 분배하라고 말이야.
성 자 : 일곱 사람 몫의 노임을 적달 동안? 어이구, 그 사람 벌었네? 3백만 원이 넘잖 아?
강 춘 : 오늘 7시에 연장 다 놓고 십장한테 몰려갔지.
성 자 : 그래서? 잘됐어?
두 섭 : 이씨가 십장 코를 깨버렸어. (웃는다) 신기하더라, 성환아. 시커먼 강물에 십장이 흘린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그 시뻘건 게 말야, 십장 피도 빨간 색이라는 게 갑 자기 너무나 신기하고 이상해.
성 환 : …
강 춘 : 헌데, 이 김성환이라는 놈 하나만 빠진 거야. (성환을 노려본다) 노가다 뿐야? 여 기에 목이 매었어? 젊은 자식이 비겁하긴… (막걸리를 벌컥벌컥)
두 섭 : 얜 원래 그래요, 옆에 있는 내가 듣기에도 울화가 치밀 소릴 듣고도 가만 앉아 있는걸 본적이 한 두 번이 아니예요. 전엔 어떤 열 일곱 여덟쯤 돼 뵈는 놈이 얘 한테 욕설을 퍼붓는데…
성 환 : 두섭아. (두섭, 성환을 바라보면 성환은 말없이 두섭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린 다)
두 섭 : … 그만 두지.
성 자 : 김씨 같은 사람이 똑똑한 거야. 세상 살 줄 아는 사람이야. 이리 둥글, 저리 둥 글, 모난 돌이 정 맞는 거야. 고단한 건 자기뿐이거든.
두 섭 : (성환 에게) 내일 떠나겠다.
강 춘 : 아침에 노임 계산해서 받고.
성 환 : …
두 섭 : 그렇게 알고 있어.
성 환 : 잔 돌려.
강 춘 : 개새끼들도 제 밥그릇은 지키는 법이야, 이놈들아 밥그릇 빼앗기고 그냥 떠?
두 섭 : 보름동안 일한 거 한 7만원 되나?
강 춘 : 3백만 원이야.
두 섭 : 빌어벅을. 이씨 몫은 5만원밖에 안돼요.
강 춘 : 십장 녀석이 몽땅 먹은 거야.
두 섭 : 비슷한 놈들끼리 나눴겠지. 펜대 쥔 놈들이랑.
강 춘 : 그걸 내손에 쥐기 전엔 난 안 떠나.
두 섭 : 원래 우리가 모인 게 그걸 돌려받자는건 아니였어. 그저 앞으론 그러지 말아달라 고 부탁이나 하려고 한 거지.
강 춘 : 부탁? 미친것들. 돈 맛 본 주머니한테 부탁이 통해? 십장녀석이 앞으로 잘 얘기 해 보겠다니까 슬금슬금 뒤꽁무니나 빼고… 어이구, 그런 병신들이랑 모여서 무 슨 일을 하려고 한 내가 멍청이지.
두 섭 : 절벽 앞에선 다 다리 떨리게 마련 아뇨? 여기 일자릴 놓치면 이씨가 그 병신들 일자릴 다 마련해 줄 형편도 아닐 테고. 절벽 앞에 든든하게 다릴 놔보쇼, 병신 하나도 없을 테니까. (막걸리를 벌컥벌컥) 빌어먹을 놈의 목구멍이 병신이지.
정 희 : 나도 한잔 줘요, 오씨.
두 섭 : 그래라. 좋은 거라곤 술맛뿐인 세상인데 마시는 거지. (따라준다)
정 희 : (마신다, 단숨에) 노래 하나 할까?
강 춘 : 다 윗자리 놈들 허락 받고 하는 일들인데, 부탁? 미친것들, 불도저를 갖구 그저 문대 버려야지.
정 희 : 나, 노래 하나 할까?
두 섭 : 절벽에서 뛰어내렸다가 병신 되는 건 누가 보살피구?
정 희 : 나, 노래 하나 할까?
강 춘 : 쇳덩이래도 씹을 건 씹고 꿀사탕이래도 뱉을 건 뱉어야지.
정 희 : 술이나 더 줘요, 그럼. (강춘, 막걸리를 따라 준다. 단숨에 마신 정희) 아, 시원하 다. 자, 이번엔 오씨가 마셔요. (잔을 내민다)
강 춘 : 너, 술 잘 먹는구나. 그렇게 마시고도 꺼떡 없는데.
두 섭 : 걔가 원래 술고래예요. 우리 셋 보다도 더 많이 마셔댈걸.
성 환 : 위에 있는 입으론 술을 먹고, 아래 있는 입으론 뭘 먹겠냐?
정 희 : (깔깔거린다) 다 아시면서 뭘?
양 순 : (화를 벌컥) 우리가 무슨 입으로 뭘 먹건 무슨 상관이야? 응?
두 섭 : 그만 둬라, 그만 둬.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 보자.
강 춘 : 싸울 일은 싸워야지, 그냥 넘어 가서 되는 일 하나도 없단다, 이것들아.
두 섭 : 이씨도 그 얘긴 좀 그만 합시다. 울화 치미는 게 어디 이씨뿐인 줄 아쇼?
정 희 : 어서 마시고 어서 잔 돌려요, 이씨. 네?
강 춘 : 내가 주마. 내가 술을 주면 넌 뭘 줄래?
정 희 : 달라는 대로. (킥킥거린다. 백치처럼) 입을 줄까? 어디 있는 걸루다? 응?
양 순 : 야, 이 미친것아, 좀 조용히 있어. 뭐가 좋아서 킥킥대니? (성환 에게) 왜 매일 와서 못살게 구는 거야, 당신? 우리가 밥을 달랬어, 옷을 달랬어? 응? 왜 못살 게 굴어?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어?
두 섭 : 그만 둬.
성 자 : 아니, 저게 손님한테 무슨 말버릇이람?
양 순 : 손님이 우리 목을 졸라 죽인대도 돈만 낸다면 손뼉을 칠거유, 아줌만?
두 섭 : 잠자코 있어, 좀.
강 춘 : (성환을 흘겨보며) 막상 싸워야 할 땐 입 딱 닫고 있는 사람이 계집애들한테는 도깨비장군이시구먼 그래.
두 섭 : 이씨도 좀 가만 계쇼. 도대체 이씨가 오늘 잘한 게 뭐가 있어서 여기까지 와서 큰소리쇼? 나 같은 것들 모가지 나가게 만들어 놓구선.
강 춘 : 내가? 원, 별소릴 다 듣겠네. 빌빌하는 놈들 모아서 사무실로 끌고 간 것도 나고 끝까지 불어서 얘기한 것도 나야.
두 섭 : 들고패긴 왜 패요?
강 춘 : 주먹이 왜 있는데? 그런 놈들 패주라고 있는 거란다.
두 섭 : 십장을 패 놨으니 어떻게 여기서 일을 해? 앞장섰던 사람들은 다 떠나야지. 주먹 들면 손해 보는 건 우리들이예요. 사람들 얘기도 그거 아뇨? 얘기하는 데에는 얼마든지 같이 서있겠다, 그러나 사람 패는 데는 같이 서있을 수 없다. 노가달 그렇게 하고도 아직 몰라요?
강 춘 : 객지생활 10여년에 다 썩어버리고 남은 건 밸 하나다. 그 밸 마저 썩어 버리면 난 산송장이야.
두 섭 : 우리가 분풀이하자고 모인 거요? 누군 밸이 없는 줄 아쇼?
강 춘 : 밸 없는 놈들 많더라. (성환을 손가락질하며) 이런 놈들, 그리고 분풀이하러 갔 었다면 니가 어쩔래? 응? 왜?
양 순 : 이젠 둘이서 싸워요?
두 섭 : 싸우긴 누가 싸워? 한 잔 하쇼, 이씨. (막걸리를 권한다. 강춘, 마신다) 성환아, 여기 오면서 기차 속에서 내가 한말 생각 나냐?
성 환 : …
두 섭 : 여기서 한 일년 견뎌서 장가 밑천이나 마련할까 했는데…
양 순 : 여잔 있구?
두 섭 : 우선 벽이 문제지. 바람 막을 벽. 엉덩이 붙일 구들.
강 춘 : 정희야, 노래 하나 뽑아라.
두 섭 : 이씨, 내 아버지가 왜정시대에 인천에서 부두 짐을 날랐대요. 해방 뒤에도 그 비 슷한 일을 했고, 내 아버지가 좋아하던 걸로 해봐.
정 희 : (노래한다) 사공의 뱃노래, 아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양순,정희 : (모두 다같이)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성자,강춘,두섭 : 이별의 눈물이야, 목포의 설움
(그들이 노래를 다 끝마치기까지 성환은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다)
두 섭 : 빌어먹을, 나도 이 노래가 좋다, 나도 이 노래가 좋아.
정 희 : 나 술 한잔 줘요.
두 섭 : 마셔라, 마셔. 밤새도록 퍼먹어 보자.
성 자 : 이씨, 혹시 읍내 안 나갔었수?
강 춘 : 어제 나갔었지, 왜?
성 자 : 우리 영감 못봤수?
강 춘 : 가는데 10분도 안 걸리는 읍내, 영감이 그렇게 장하면 직접 가서 찾아봐.
양 순 : 안 찾아도 돈 떨어지면 돌아와요.
성 자 : 돈 좀 모아 놓기가 바쁘게 노상 그 짓이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강 춘 : 요맘때 농촌에서 뭘 하는지 아나? 올기쌀 쪄먹지. 옥수수에 감자에, 상추, 호박… 입 다실게 참 많아.
두 섭 : 손바닥만한 거라도 땅이나 있으면 농사나 짓고 살지.
강 춘 : 헛소리 말아.
두 섭 : 뭘 해도 노가다보다야 못할까,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 해봐야 항상 남의 일…
강 춘 : 쌀값은 그대론데, 다른 물간 하루가 다르니 무슨 수로 견뎌?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비룐 사 대야지, 수리조합비도 내야지…
정 희 : 도회지에서 사는 게 제일이예요. 돈이 흔하니까, 편 하구, 구경 다닐 거두 많잖아 요.
강 춘 : 그 좋은 서울생활 10여년에 생긴 게 뭔지 아냐? 절단 난 몸뚱이 하구 마누라 무 덤이다. 또 하나, 이놈의 빈 손. (손을 들여다보며 웃는다) 손톱 깎아 본지도 오 래야. 노가달 하다보니 손톱도 안 자라 다 닳아 버리거든. 그래도 말이다 이손으 로 마누라 배를 슬슬 만져주면 마누라가 몸살을 했단다.
양 순 : 오씨, 서울 구경 좀 시켜 줘요.
두 섭 : 텔레비에 나오는 서울인 줄 아냐? (코웃음) 거기두 서울은 서울이지. 내가 서울 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아직 한 발도 들여놓아 본적이 없는 서울. 나도 모른다, 그놈의 서울이 어딘지.
성 환 : 서울 가봐야 너희들이야 몸 팔고 술 파는 거 말고 더있냐?
양 순 : 내가 한마디 하니까 또 시작이야, 이 문둥이 같은 사람.
정 희 : … (웃어댄다, 백치처럼)
양 순 : 뭐가 좋아서 웃어대, 넌?
정 희 : (또 웃는다. 소주병을 기울이다가) 비었네. 술 안 줘요, 네?
강 춘 : 술 좀 더 갖다주슈, 과숫댁.
성 자 : 어이구 큰일이다, 이놈의 영감쟁이… (막걸리를 준비한다)
양 순 : 몸 팔기는 당신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야.
성 자 : 아, 닥치지 못해!
성 환 : 내가? 난 땀 흘려서 벌었어.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은 적 없어. 너 같은 것들 하 군 비교가 안돼.
양 순 : 팔뚝 팔아먹고 사는 게 우리들 사는 거하구 크게 다른 줄 알아? 거기서 거기야, 이 골빈 아저씨야, 이거 왜 이래?
성 자 : (막걸리 따위를 갖다 놓으며) 이게 어째 이리 말이 많아? (출입구로 가서 길을 지켜본다)
강 춘 : 허기야 우리신세가 얘들 보다 나을 거 뭐냐? 고속도로, 다리, 아파트… 숱하게 들었지만 남은 건 피곤 뿐인데…
(사이)
성 자 : 이놈의 영감쟁이, 오기만 해봐라.
두 섭 : 성환아, 너 남궁털보 알지?
성 환 : …
정 희 : 남궁털보? 나두 성이 두 자였음 좋겠다. 선우? 선우 정희? 어떠니, 양순아?
두 섭 : 반포에서 노가다 할 때 같이 하던 놈 말이야.
성 환 : …
두 섭 : 영등포에서 전에 만났는데, 양복을 턱 걸치고 있더라. 싸롱인지 비어홀인지에서 맥주를 사주더구만, 노가단 인제 안 한대. 장살 잘 한 댔거든. 그 장사가 뭐였는 지 아냐? (사이) 도둑질이였어. 지금은 감옥소에 몇 번씩이나 드나들고 있대. 빵 잽이가 돼버린거야.
양 순 : 다리공산 언제 끝난 대요?
두 섭 : 내년 겨울에, 왜?
정 희 : 한 번 건너 볼려구요. 저렇게 엄청난 다린 처음이거든요. 한강다리보다 더 크죠? 한강다린 나 많이 지나다녔어요. 서울에서 몇 년 살았거든요.
강 춘 : 너희 다니라고 만드는 줄 아냐? 화물차들 빨리빨리 달려서 돈 많이 벌으라고 만 드는 거야.
두 섭 : 화물차 몰고 다닐 때가 좋았어, 피곤하긴 했지만.
양 순 : 운전도 했어?
두 섭 : 옛날 얘기다. (막걸리를 마신다)
강 춘 : 좋은 기술 둑 왜 사서 고생인가?
(사이)
두 섭 : 사람을 죽였어.
양 순 : 어머, 왜?
정 희 : 몇 명이나요?
(사이)
두 섭 : 열 여덟 시간을 계속해서 차를 모는 중이었어. 새벽 2시쯤 속초로 가는 국도에서 할머니 하나를… 빌어먹을… 내가 좀 졸았던 건지, 큰집에 좀 들어갔다가 나왔 지, 참 싱겁더군 목숨이라는 거. 그런 목숨 때문에 이 발버둥, 저 몸부림.
강 춘 : 한두 번 사고는 운전사들한테는 다 있게 마련이라던데?
양 순 : 그때 곧 다시 시작하지 그랬어?
(기적소리와 함께 기차, 가까워졌다가 멀어져 간다)
두 섭 : 손이 떨려, 핸들을 잡으면. 사람이 눈에 띄면 무섭구. (성환에게) 너 운전 배우면 좋을 거다, 애가 조용하니까.
성 환 : …
강 춘 : 지금이라도 안 늦지. 자네들 나이만 된다면 나도 뭐든지 하나 붙들어 보겠는데, 우라질 놈의 세월이 너무 무정하게 흘러버렸어. 가끔 가다간 세월이 채찍 같은 기분이 든다니까. 정신없이 후려 맞기만 하다보니까 벌써 60고개에 쫓겨와 있는 꼴이야. 몇 차례만 더 채찍질 당하면 황천길까지 몰려나는 게지.
두 섭 : 아직 2, 30년은 더 살 양반이…
강 춘 : 2, 300년은 더 산 대두 허구헌날 채찍질만 당하며 살 바에야 일찌감치 두 다리 쭉 뻗고 칠성판에 누워서 잠이나 자는 게 낫지.
양 순 : 오씨도 참, 그렇다고 운전 그만두구 노가달 해?
두 섭 : 차만 몰고 나가면 사골 내는 놈을 누가 쓰겠나? 가로술 들이받고 논바닥에 고꾸 라지고.
정 희 : 아, 차 한 번 타고 달려봤음 좋겠다. 무지 빠르게, 영화에서처럼. 끝까지 아무 데 로나.
성 자 : 뭣하고 다니느라고 이리 못 와…
강 춘 : 그놈의 늙은이 팔자가 늘어져서 그 짓이야.
두 섭 : 그렇게 지내기도 힘들걸, 맨날 술판 아니면 노름판이니.
성 자 : 그런 소리 말아요, 그 양반이 가진 기술만 해도 열댓갠 될 거요. 2년전만 해도 저 강에서 물고길 낚았어. 팔뚝만한 고기를 열댓 마리씩이나 시장에 갖다 팔기 도 하고, 술안주로 내기도 하고, 벌이가 괜찮았는데…
두 섭 : 저 썩은 물에서 낚실 해요?
성 자 : 다 저놈의 공장 때문이지 뭐겠수?
정 희 : 사진 필름을 만든 대요. 천연색 필름요. 난 카메랄 가졌댔어요. 사진은 세 번밖에 못 찍었지만. 그래도 천연색이었어요.
성 자 : 고기가 없어졌어, 싹 자취를 감췄다니까. 저 물에서 고기가 몰려다녔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어?
정 희 : 멋진 풍경을 골라가며 찍은 적도 있어요. 돌아다니면서.
두 섭 : 강을 썩이면서 만든 필름으로 멋진 풍경을 찍었어? (웃는다)
성 자 : 그때부터야, 돈 들고 나가선 술에, 노름에, 집에 안 들어오는 버릇이 생긴 게.
왼편으로부터 일우와 병노, 어깨동무를 하고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일우는 빨간 넥타이까지 맨 정장차림이지만 그것이 그에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외팔이로, 왼편 팔의 소맷자락이 비어서 아무렇게나 흔들린다. 20대 후반,
병노는 21세의 젊은이로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었고, 검정운동화를, 뒤축을 구겨 신었다. 그들은 노래를 하고 있다.
일우,병노: …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잔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 다…
병 노 : 형님, 형님, 달 보여요? (강을 내려다보며)
일 우 : 더러운 달이로구나, 깨어진 플라스틱 바가지 같애. 크윽, 냄새 고약타!
병 노 : 코도 좋수, 형님. 달 냄샐 다 맡다니.
일 우 : 달이 강물에 빠져 자살을 하는구나. (강을 들여다보며) 먼저 가있거라. 내 곧 뒤 따라갈게.
병 노 : 강이 아니라 하수도예요. (강에 대고 소변을 본다)
일 우 : (상체를 느리게 흔들어서 텅 빈 소맷자락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본다) 없구나, 없 어. (사이) 시원하다, 시원해. (킬킬거린다)
병 노 : 먹을 때하고, 쏟을 때가 제일 시원하죠, 형님.
일 우 : 없어진 뒤에도 시원하다.
병 노 : 뭐가 없어져요?
일 우 : 남의 무덤자리에다 오줌을 갈긴 기분이 어떠냐?
병 노 : 누가 저런데다 묏자릴 쓴답니까, 형님?
(그들 술집으로 들어선다)
일 우 : 내 깔치야아!
정 희 : 내 덮치야아!
일 우 : 맥주를 다오, 부족하면 말 새끼 오줌을 섞어도 좋다.
성 자 : 우리 사위 먹는 맥주에 누가 오줌을 섞어?
정 희 : 오늘도 안준 적당한 게 없는데 어쩌나?
일 우 : 안주야 니 앵도같은 입술도 있고, 니 가슴 위에 붙은 썩은 대추도 있잖냐.
정 희 : 또 내 루즈 다 빨아먹으려구? (맥주를 갖다 놓는다)
일 우 : 병, 병… ? 야, 니 이름이 뭐랬지?
병 노 : 병노요, 병노. 병명은 황달병.
일 우 : 그래, 병노. 밤새도록 마시는 거야. 어둠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걸레조각 같은 햇 빛이 나올 때까지 말이다.
병 노 : 절대로 안돼요. 10시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야 하니까요.
일 우 : 송충이 씨름하는 소리하구 자빠졌네, 이 자식. 절대로 안되는 일이란 세상에 없 단다. 절대로 안되어야 할 일이 흔하디 흔하고 절대로 되어야 할 일은 쥐뿔도 안 되는 게 세상이야.
정 희 : 밤새도록 마신다구? 어느 입으루, 응?
일 우 : 너한테 달린 것도 입이냐? 그건 주둥아리다. 내가 가진 건 아가리구 저놈한테 달 린 건 아구창이구.
성 환 : 야! (그들, 성환을 바라본다) 술 없는 거 눈에 안보이냐?
성 자 : 드려야지, 드린다구, 김씨. (술을 준비한다)
일 우 : 어허, 그 아저씨 목청 크다. 기차화통을 삶아 드셨는지 말 대가릴 볶아 잡쉈는지.
성 환 : …
정 희 : (병노를 가리키며) 이 분은 누구신가?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일 우 : 음, 병… (또 이름을 잊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마시자, (두사람, 마신다) 근 데, 니 이름이 뭐야, 도대체?
병 노 : 병노, 황병노!
일 우 : 그래, 황병노, 밤새우는 거야, 오늘. 이놈의 더러운 밤이 산산조각이 나서 저 썩 은 강물에 쑤셔 박힐 때까지 마셔!
성 자 : (소주와 막걸리를 노무자들이 있는 탁자로 들고가며) 밤새우는 사람 많네, 오늘. 오씨도 밤새운다며?
일 우 : 그래요? 형씨들, 같이 합시다. 술하고 친구는 모아야 맛이요, 계집하구 돈은 써야 맛이라고 합디다. (잔과 맥주병을 들고 그들에게 가서) 한 잔하쇼, 형씨.
두 섭 : (잠깐 망설이다가 받는다) 고맙소.
일 우 : 맥주 더! 병, 병, 병, 야, 니 이름이 뭐지?
두 섭 : 병노라고 합디다 황병노.
일 우 : 그래, 병노. 너두 이리와. 근데 형씬 이름을 어찌 아쇼?
두 섭 : 귀가 두 개 달려 있어서 아는 거요. 한 잔하쇼. (막걸리를 권한다)
일 우 : (받는다) 난 팔목아지가 하나뿐이어서 미안하우, 형씨. 부처님이 와서 술을 권해 도 한 손으로 받는 수밖에 없게돼 버렸소이다. (킬킬거린다)
두 섭 : 예, 괜찮습니다.
일 우 : 뭐가 괜찮다는 거요? 팔목아지가 하나 없어도 괜찮다는 거요?
두 섭 : 그런 뜻은 아니었고…
일 우 : (성환에게) 기차화통 아저씨도 한 잔 드쇼.
성 환 : (받지 않는다. 소주를 마실 뿐이다)
일 우 : (무안하여 잔을 슬그머니 강춘에게 돌린다) 한 잔 드쇼, 형님. (맥주를 따르며 두 섭에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게 뭐요, 형씨? 내가 팔 병신이 아니라는 뜻이요? 원, 염병을 헐, 팔 병신을 팔 병신이라 하지 뭐라겠소, 형씨? 다리병신이랄 순 없 는 노릇 아뇨?
강 춘 : (병노에게) 한 잔 받게.
병 노 : (받으며) 형님 덕분에 이 술, 저 술, 다 먹는구나. 양주에 소주에 맥주에다, 이제 는 막걸리까지. 내일 제대로 일어나기나 할지 모르겠는데.
일 우 : 오늘 안자면 된다. 그럼 내일 일어날 걱정이 소용없으니까.
두 섭 : 성환아, 어디서 냄새 안 나냐?
성 환 : …
일 우 : 좋은 냄새요, 형씨. 이 동네 생긴 거 하고 딱 어울리는 냄새.
강 춘 : 돈 냄새 말요. 당신에게서 풍기는.
일 우 : (킬킬거린다) 돈 냄새가 어떻소, 형씨?
두 섭 : 저 강냄새 비슷하지. 거들먹거리는 냄새, 오만불손한 냄새.
강 춘 : 건방진 냄새까지!
일 우 : 무서운 냄샌 안 납니까? (킬킬거린다) 난 무서워서 소름이 끼쳐요. 밤마다 돈이 란 놈들이 귀신들처럼 머릴 풀고 나타나선 내 목을 조르려 하거든요.
병 노 : 전 황병놉니다. 여기 형님은 박일우구요.
두 섭 : 난 오두섭이오, 여긴 김성환, 이 사람은 이강춘, 저기 다리 만드는데서 다들 품을 팔죠. 아니, 팔았죠, 오늘까지.
병 노 : (반갑다) 아, 그러세요? 전 저 위 공장에 있어요.
정 희 : 어머! 필름 만드는 공장요? 천연색 필름?
병 노 : 우라지게 크고 복잡한 공장이지. 무슨 거창한 짐승의 내장처럼 복잡해. 난 툭하 면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곤 해.
정 희 : 천연색 사진 많이 찍겠네요. 요다음에요, 사진 찍을 기회가 생기면 나도 좀 같이 찍어줘요, 네?
병 노 :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부럽습니다.
강 춘 : 부러울 것도 없던가 보다, 내려다볼 거라 군 거지밖에 없는 노가다가 부럽다니.
병 노 : 공장은 규칙이 너무 엄해요. 군대생활 이상이랍디다. 노래라곤 맨날 “좋아졌네, 좋아졌어, 몰라보게 좋아졌어” 하는 거밖엔 안 들려주고. 일 밀리면 잠 한잠 못 자요. 어디서 가끔 대학 교수니 정신 어쩌구 강사니 하는 사람들이 와선 한다는 소리라곤 “일 해라, 일 해라, 열심히 일 해라” 내 별명이 어째서 황달병인지 알 아요?
일 우 : 낯짝이 참외처럼 노리끼리하구나. (웃는다)
정 희 : (덩달아 웃는다) 호박처럼.
두 섭 : 당신들은 한 달에 한 번 제날짜에 꼬박꼬박 월급 나오지.
강 춘 : 우린 비오면 공쳐. 밥값 술값만 깨지는 거야.
두 섭 : 겨울엔 그나마 일도 없구.
병 노 : 훨씬 자유롭잖아요. 햇빛 아래서 일하고 싶어요. 흙이나 연장을 주무르면서. 기계 에 매달려서 조바심 치고 지붕, 형광등, 호루라기 소리에 억눌려서 일하는 건 지 겨워요. 자다가도 가끔 호루라기 소릴 들어요, 벌떡 일어나곤 하죠.
일 우 : 그만 둬버려, 그놈의 공장.
병 노 : 형님 같이 하루 밤 술값을 1, 20만원을 뿌리는 사람하곤 얘기가 안돼.
일 우 : 내가 뿌려? (킬킬거린다) 도망 다니는 거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똥줄이 빠 지게 내빼는 꼬라지가 내 꼬라지다, 임마.
강 춘 : 뭐해서 먹고사쇼?
일 우 : 나 말요? (킬킬거린다)
강 춘 : (기분이 상하여) 그 사람, 대답은 않고 웃긴…
병 노 : 장사한데요, 서울에서요. 가게가 세 개나 되구요, 가전제품 대리점이래요.
일 우 : (더욱 더 심하게 킬킬거린다)
두 섭 : 여긴 웬일로 왔소?
병 노 : 마누라가 바가지 긁는 게 싫어서 왔대요.
강 춘 : (비난하듯) 바람을 피우신 모양이지?
성 자 : (한숨) 집에서 얼마나 기다리겠수? 어서 어서 돌아가요.
일 우 : 악담을 하시는구먼. 아주머니나 먼저 돌아가시지. 내가 부조금은 잔뜩 얹어드릴 테니까.
정 희 : … (희미하게 웃는다)
강 춘 : 돈 번 사람들 보면 신기해. 이놈의 팔잔 열댓 살부터 시작해서 이 나이 되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이 훑었는데도 빈 손 뿐인데, 어떻게들 돈을 버는지…
일 우 : (웃어대다가) 돈을 벌다뇨? 천만 에요. 요즘은 날아다니는 돈을 움켜쥐기만 하면 돼요. 물불 가릴 것 없어요. 그러다 걸리면 병보석인데 뭐.
두 섭 : 모를 소리구나. 양순아, 너도 뜰 준비해둬. 저놈의 공사장하고도 끝이다, 이제.
양 순 : 난 안가요.
두 섭 : (놀란다) 무슨 소리야?
병 노 : 내일… 그만두신다구요?
두 섭 : (아직 의아스런 눈으로 양순을 보며) …네. (사이)
성 환 : (두섭에게) 너 산파냐?
두 섭 : 산파라니?
성 환 : 양순이 한테 물어봐.
두 섭 : (양순을 바라본다)
성 자 : (반짝 생각이 났다) 너 애기 뱄어?
양 순 : (파랗게 경악하는 두섭의 얼굴을 똑바로 지켜보다가 외면하며) 그래요.
성 자 : 에이구, 또 돈 들어가게 생겼구나.
두 섭 : 빌어먹을, 재수 없는 놈은 재채기 좀 크게 하면 꼭 가래침이 튄다니까.
성 자 : 영감 찾으면 곧 병원에 가자.
양 순 : (두섭의 얼굴을 바라보며) 낳을 거예요.
성 자 : 넋빠진 소리 말아!
일 우 : 딸만 네 쌍둥일 낳아. 그래서 술집 차려라 딸들은 작부로 들어 앉히고. 온갖 잡 놈들이 꾀어들게끔 (킬킬거린다) 똥 주위엔 파리가 꼬이게 마련이거든.
병 노 : 내가 단골이 돼주지. (웃는다)
강 춘 : 애빈 누구냐?
성 환 : 나룻배 손님 하나하나 기억해 두는 사공 있나, 어디?
일 우 : 기록이 몇 명이었냐? 하룻밤에 말야. (킬킬거린다)
두 섭 : (포기하는 듯) 너 알아서 해라. 빌어먹을 입때껏 혼자 살아온 놈인데, 앞으로라고 못 살겠냐? 빌어먹을. 낳든 말든 내 알바 아니다, 우라질.
성 환 : 낳긴, 술 퍼먹고 치맛자락 걷어올리는 것 말군 아는 게 없는 것들인데, 애가 배 고프다고 울어대면 막걸릴 퍼 먹일 걸.
일 우 : 일찍부터 교육을 시켜둬야 장사가 잘되겠지. (웃어댄다)
성 자 : 미친소리 더 말고 병원에 가는 거야.
양 순 : 여자가 애 낳겠다는 게 왜 미친소리예요?
성 환 : 니가 여자냐? 작부지.
양 순 : 니가 남자냐? 잡놈이지.
정 희 : (깔깔거린다)
성 자 : 이런 말버릇! (혀를 찬다)
성 환 : 그것들 말버릇 보다 나쁜 게 몸버릇이야.
양 순 : 잡일을 하니까 잡놈이지, 뭐.
두 섭 : 이게 왜이리 말을 함부로 해!
성 자 : 당장 내일 병원에 가. 싫거든 빚돈 내놓고 나가. 없어져!
양 순 :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온다) 왜 남의 애길 갖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당신 들이 뭔데, 도대체? 낳을 거야. 세상사람이 다 못하게 해도 소용없어!
성 환 : (벌떡 일어서서) 니가 뭐하러 애길 낳아? 너 같은 게 왜? 계집앨 낳으면 너같은 작부가 되라고 낳아? 썩은 게 썩어빠진 소리 다하네. (자리를 박차고 술집을 나 간다)
일 우 : 출발하기 전에 우렁차게 한번 외치는 게 기차화통이라는 거렸다. (킬킬거린다)
정 희 : (깔깔거리고)
두 섭 : (성환을 따라 나간다) 야, 성환아. (왼편으로 나가려는 성환을 붙든다) 내일 떠날 거지?
성 환 : …
두 섭 : 여기 있어봐야 눈밖에 난 놈들 견디긴 글렀어. 읍내에 나갔던 사람들한테 들었는 데, 서울에서 곧 노가다들이 떼로 몰려들 거래.
성 환 : … (왼편 출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섭 : (성환의 등뒤에 대고) 어떻게든 양순일 데려갈 거야.
성 환 : (멈춰 선다) …
두 섭 : (하늘을 본다) 달 좋다.
성 환 : (하늘을 본다)
두 섭 : (쪼그려 앉으며) 서울에서 쉽게 노가다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성 환 : 썩은 달걀 같은 달이군.
두 섭 : 짜아식, 참. (웃는다)
성 환 : (그 웃음에 칼을 들이대듯) 양순이 뱃속에 들은 것 같은. (두섭의 웃음이 끊긴다)
(사이)
(두섭의 대꾸를 기다리지만 아무런 대꾸가 없자 왼편으로 나간다)
두 섭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술집으로 들어간다)
성 자 : 김씨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낳아봐야 에미 고생, 새끼 고생이야.
양 순 : 그 고생, 아줌마가 대신 해 주기라도 할거유?
두 섭 : (짜증스레) 듣기 싫다. 술이나 따러. (양순, 막걸리를 따른다)
정 희 : 작분, 술이나 따러. 애기 같은 거 낳을 생각 말고. (웃어댄다)
병 노 : 내일 공사장 그만두시는 게 확실해요?
두 섭 : 벌써 그만뒀소이다, 오늘로.
병 노 : 저, 말이죠… (주저한다) 그러니까… 내가 형님 일자릴… 대신… 대신 맡을 수 없을까 해서요. 미안한데요, 꼭 남의 일자릴 뺏는 거 같고…
두 섭 : 내일 십장녀석한테 가서 얘기해 보쇼. 일손이 부족하니까 될 거요.
병 노 : (기쁘다) 그래요! (일우에게) 됐어요, 형님! 밤새웁시다! (공장 쪽을 향하여) 끝장 이다, 이 개자식들아아! (이 주머니 저 주머니에서 여러 장의 마스크를 꺼낸다) 이놈의 마스크도 이젠 소용없다! (찢어 팽개친다) 해방이다, 해방이다! (웃어 제 친다) 밤새웁시다, 형님들! (술을 벌컥벌컥)
강 춘 : 별 망측한 소리 다 듣겠네, 노가다가 해방이야?
(일우는 쓸쓸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잘 살피면 이제껏 그의 얼굴에 가로질러져 있던 일그러진 웃음과 방향을 상실한 증오가 이제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으로 우리는 그의 참 얼굴을, 솔직한 얼굴을 보게된다.)
병 노 : (일우에게) 왜 그래요, 형님?
일 우 : 부러워서.
병 노 : 그런 소리 마쇼, 형님. 형님 같은 사람이 내가 부럽단말요?
강 춘 : 뿌리 없는 일이 노가다야. 우린 공사판만 있다면 어디라도 가야해. 그러다 보니 집구석 하날 제대로 꾸리겠나, 한 군데 마음붙여 정착을 하겠나.
두 섭 : 외상으로 살아가는 거지. 장마철엔 물론이고 일이 잠깐 중단될 때도 외상밥 먹고 외상잠 자는 거야. 물론 나중엔 다 돈을 주는 거지만 그놈의 짓이 내 돈 내고 밥 먹으면서도 꼭 구걸하는 꼬락서니거든.
강 춘 : 세상에 기술 없는 놈들, 험한 놈들은 다 몰려드니까 일꾼은 얼마든지 있겄다, 허 니 십장녀석은 멋대로지. 노임도 올렸다 내렸다, 주는 날짜도 멋대로 연기, 그렇 다 하여 불평 한마디하면 며칠씩 대기…
두 섭 : 에휴, 하루빨리 이놈의 노릇을 그만둬야 하는데…
강 춘 : 말이 좋아 그만뒀다는 거지, 당장 입에 들어갈게 안타깝구 일자리 마련이 없는데 그만두긴? 쫓겨난 거지. 밟는 대로 밟히지 않구 좀 꿈틀거렸대서 말야. 생각 잘 해 봐, 아무래도 공장이 나을 테니까.
병 노 : 기술 배울 만하면 쫓아내요. 회사사정이 이러저러해서 감원해야겠다. 경제가 어 쩌구, GNP가 어쩌구 하면 우리 같은 놈들이 알아듣기나 합니까? 그런가 부다 하 고 보따리 싸는 거지. 게다가 그놈의 간섭, 오전 내내 쉬는 시간은 10분, 점심시 간도 10분! 이 생활 계속하다간 난 미쳐나고 말아요.
일 우 : (이미 그의 솔직하던 얼굴은 사라졌다. 가식적이고 일그러진 얼굴로 킬킬거리며) 저 늙어빠진 친구가 공장생활이나 좀 해보고 저런 소릴 떠벌이는건가?
강 춘 : 뭐야? 이 사람, 이거 보자보자 하니까…
병 노 : (놀라서 일우에게) 왜 이래요, 형님?
일 우 : 화나셨소, 형씨? 어쩌나? 난 하나도 미안하질 않은데. 듣다보니까 너무나 얼빠진 소리여서 나도 모르게 그런 얘기가 나갔으니. (킬킬거린다)
강 춘 : 생각 같으면 한 주먹에 입을 다물게 하고 싶다만 그 병신 팔이 불쌍해서 이 늙 은 놈이 참는다.
일 우 : 늙은 놈은 참으쇼. 이 젊은 놈은 참기 싫으니 안 참겠소이다. 게다가 늙은 놈 팔 뚝은 병신도 아니니 마요. (킬킬거리다가) 내 병신 팔이 불쌍하다구? 난 일년내 내 발버둥쳐 봐야 막걸리도 제대로 마실 수 없는 형편에 몰리게 만드는 늙은 놈 멀쩡한 두 팔목아지가 불쌍한데?
강 춘 : 허, 그 놈 참!
병 노 : 왜 이래요, 글쎄? 너무 취했구나, 이거 큰일인데.
두 섭 : 그 친구 재워야겠군. 나머지 성한 팔까지 누구한테 걸려 곰배팔 되기 전에 갑시 다, 이형. 양순아, 나 좀 보자. (술집을 나간다)
강 춘 : 데려가서 재워. (술집을 나간다)
(양순, 술집에서 나간다)
일 우 : 야아, 애 떼러가냐? 나도 가서 구경 좀 하자. (일어선다)
병 노 : 왜 이래요? (끌어안으면 두사람 같이 쓰러진다)
성 자 : 허어, 이 사람들 좀 봐!
두 섭 : 이형, 먼저 가쇼. 난 좀 있다 갈 테니까.
강 춘 : 그래, 함바에서 보세 (왼편으로 나간다)
(사이)
두 섭 : (어색한 헛기침)
양 순 : (한숨)
두 섭 : 어… 몇 개월 째냐?
양 순 : 넉달째야.
두 섭 : 내가 여기 온건 석 달 전이니까…
양 순 : …
두 섭 : 나랑 같이 뜨지.
양 순 : 빚이 있어.
두 섭 : 내가 갚아 (사이) 애긴 지워버리면 되구.
양 순 : 싫어.
두 섭 : 내 애길 낳아, 나중에.
양 순 : 이 애길 지우면 하나님 애기라도 가질 수 없게 돼. (아카시아 나무로 간다)
두 섭 : 그럼 안 낳아두 그만이야.
양 순 : 이 나무처럼 크지 못하는 게 한인데 왜 내 애길 내가 죽여?
두 섭 : 어떤 후레아들놈 새낀지도 모르는걸 왜 낳아?
양 순 : 내 애기. (사이) 내 애기야.
두 섭 : 잔말 말고 없애. (왼편으로 움직인다) 떠날 준비나 해둬.
양 순 : 보통 여자들이 하는 일은 다 해보고 싶어.
두 섭 : 니가 보통 여자냐?
양 순 : 그래, 난 술집 여자다.
두 섭 : 애까지 생겨봐, 널 쳐다보는 놈이나 있을 것 같으냐?
양 순 : 없으면 그만이야.
두 섭 : 잘해 봐라.
양 순 : 상관 마, 남이야 잘하건 못하건. (술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두 섭 : 빌어먹을!
(기적소리와 함께 기차 달리는 소리가 무대를 뒤덮으면서)
================================= 막 =====================================
제 2 막
다음날 저녁
같은 곳
양순과 정희가 편한 옷차림으로 탁자에 앉아있다.
정희는 함부로 부채질을 해 댄다.
정 희 : 준비 해 뒀니?
양 순 : 언젠 우리가 준비해 가며 살았니?
정 희 : (웃는다. 백치처럼)
양 순 : 짐이 있어야 가방을 꾸리고 돈이 있어야 여비를 마련하지.
정 희 : 오씨하군 어떻게 되는 거니?
양 순 : …
정 희 : 물이야 흔해야 목물이라도 하지.
양 순 : 넌 언제나 이렇게 살거니?
정 희 : (그냥 웃는다)
양 순 : 나랑 같이 가자.
정 희 : (웃는다) 도망도 다녔었지, 옛날엔. (웃는다)
양 순 : 준비해.
정 희 : 다른 데로 가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웃는다) 참 열심히 도망 다녔어. (한숨) 마찬가지더라, 어디서나 비슷한 술집, 비슷한 사람들, 비슷한 여관. (사이) 이젠… 지쳤어, 도망 다니기에도, 살기에도, 닳고, 닳은 양말 밑바닥 꼴이 된 기분이야
양 순 : 나일 생각해 봐.
정 희 : 이렇게 되기도 힘들 거야. 어딜 가고 싶다,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이라는 게 아예 없어.
양 순 : 술꾼들이 이젠 우리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럼 쫓겨나는 거야.
정 희 : 가끔은… (웃는다) 벌써 죽어 버린 기분이야.
양 순 : 나에겐 이게 마지막 기회야.
정 희 : 너 애기 한두 번 없앤 것도 아닌데 왜 새삼스레 야단이니?
양 순 : 이 애길 낳으면… 우스운 얘기지만… 내가, 내가 꼭… 처녀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 희 : 애길 낳고 처녀가 돼?
양 순 : 더럽혀진 내 몸이 깨끗해질 것 같애.
정 희 : 오씨 같은 사람 만나기 힘들어.
양 순 : 안돼, 이 애길 없애면 난 죽을 때까지 창녀로 남아 있게 되고 말아.
정 희 : 수박 하나 먹었으면 좋겠다.
양 순 : 아줌마 나간지 얼마나 됐지?
정 희 : 한시간 쯤.
양 순 : (일어선다) 가야지.
정 희 : 어딜?
(양순, 쪽문을 통해 사라진다.
혼자 남겨진 정희, 잦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무표정한 얼굴에 더위로 땀을 흘리며 노래의 리듬에도 곡조에도 전혀 나무토막처럼 반응하지 않는 그녀의 표정과 몸.
“엄마 앞에서 짝짝꿍
아빠 앞에서 짝짝꿍
엄마 한숨은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
다시 그 노래를 반복한다.
흥얼흥얼 가끔 머리를 긁적이며, 땀을 닦으며 부채질을 해대며, 양순이 나올 때까지.
양순은 작은 보퉁이를 안고 있다.)
정 희 : 지금… 지금 가?
양 순 : 잘 있어.
정 희 : 어디로 가는데?
양 순 : 기찰 탈 거야 읍내로 나가서.
정 희 : 돈도 없이.
양 순 : 120원만 내면 우선 기찬 탈수 있어. 어디까지든지 가면 돼. 들키면 내렸다가 또 타고.
성환, 왼편으로부터 들어와 술집에 들어선다.
제법 깔끔한 차림에 가방을 들었다.
보퉁이를 든 양순을 발견한다.
잠깐동안 그녀를 위 아래로 훑어보다가 자리에 앉는다.
성 환 : 내 빼는 거냐?
양 순 : 그만 둬야겠네, 김씨가 봤으니.
(사이)
(성환 무언가 생각한다)
성 환 : 가라 방해 안할테니까.
양 순 : …
성 환 : 어디로 가냐?
양 순 : 알 거 없어요.
성 환 :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한 장 지폐를 꺼내 탁자 위에 놓는다) 어디로 가는지 말 을 하면 이걸 주지.
정 희 : 말하지 마!
성 환 : (지폐를 한 장 더 꺼내 탁자 위에 놓는다)
양 순 : 강을 건너서 시외 버스를 탈 거야 (지폐를 집는다)
성 환 : 어딜 가봐야 작부밖에 더 되겠냐.
양 순 : 정희야, 부탁한다. 아줌마가 찾으면…
정 희 : 알았어. 너나 잘 가.
(양순, 술집을 나가 왼편으로 사라진다)
성 환 : (멍청히 서 있는 정희에게) 소주 갖구 와. (정희, 준비한다) 넌 작부가 딱 좋은 모양이구나. (무감각한 정희, 소주 따위를 성환 앞에 놓는다) 좋겠지, 누워서 속 옷만 끌어내리면 뜨끈뜨끈한 구정물과 함께 돈이 들어오니.
(정희는 양순이 나간 쪽을 바라볼 따름이다.)
병노, 왼편에서 혼자 들어와 곧장 술집으로 들어선다)
정 희 : (기계적으로) 어서 오세요.
병 노 : (성환에게) 형님도 떠나세요?
성 환 : … (소주를 삼킬 뿐)
병 노 : 어제 여기 있던 사람들은 다 떠나는 모양이죠?
성 환 : …
정 희 : 공장은 그만뒀어요?
병 노 : (통쾌한 듯 웃어 제치다가) 오늘 낮 12시가 지나서야. 공장에 들어갔거든, 감독자 식이 잔소릴 늘어놓는 거야, 맞대놓고 나도 욕설을 퍼부어 댔지. 자식, 입 딱 벌 리고 놀라는 꼴이란… 그 낯짝에다가 걸레를 팽개쳐 주고 나와 버렸어. (웃어댄 다) 통쾌하더군. 기계에다가 모래를 퍼부어 버릴까 하다가 그건 차마 못하겠어서 그만두고.
정 희 : 공사판에서 받아준대요?
병 노 : 대환영이지, 뭐. 이따 쌍과부집으로 오래, 십장이 말야. 술 한잔 산다구. 속 편해 서 좋아. 공장… (머리를 짤짤 흔든다) 어, 지겨워.
정 희 : 나도 옛날에 공장에 다녔댔어요, 영등포에서.
병 노 : 공장? 무슨 공장?
정 희 : 감독이랑 사귀었댔어요. 옷이랑, 구두랑, 빽이랑, 나한테 사주곤 했어요. 근데 갑 자기 다른 공장으로 옮겨가 버렸어요. 카메라를 한 대 사주고는요.
병 노 : 나쁜 놈들. 우리 주정뱅이 형님은 어디 갔냐?
정 희 : 같이 안 잤어요?
병 노 : 뭐야? 어젯밤에 여관에서 너 있는 방으로 들어갔잖아.
정 희 : 새벽에 일어나 보니까 없던데요? 난 다시 그 방으로 건너간줄 알았는데.
병 노 : 난 너랑 같이 여기로 온 줄 알았어.
정 희 : 말도 말아요. 12시가 넘었는데 술을 내라고 아우성이예요. 할 수 없이 여관에서 빈 소주병을 얻어서 물을 담아다 줬죠. 그랬더니 글쎄, 구두짝에다 부어 마시고 있는 거예요.
병 노 : 약과다 그건. 돈으로 코를 풀어서 아무 데나 팽개치는 거야. 돈을 들여다보면서 요건 내 손톱이구나, 요건 내 손목이구나, 하면서 웃어대고.
정 희 : 어디 갔을까…
병 노 : 뻔해. 술 퍼먹고 있을걸. 어제 처음 만났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까고 있는데 나 타나선 이차를 가자고 잡아끌더구만. 왜? 보고싶어?
(사이)
정 희 : 혹시 자살한 거 아닌지…
병 노 : 재수 없는 소리 말아. 막걸리나 하나 줘.
정 희 : (멍하니 생각에 잠겨) … 전에 저 더러운 강에서 자살한 사람이 있었어요. 농사 짓는 사람이었는데 강이 썩어서 농사가 안된다구 논을 팔았는데, 서울 가봤더니 그 돈으론 방 하나 못 얻겠더라구 죽었어요. (사이) 강에서, (사이) 혼자서.
병 노 : 막걸리 하나 달라니까.
(정희, 막걸리와 사발 따위를 준비하여 놓는다.
왼편에서 두섭과 강춘, 들어온다.
제법 깨끗한 차림에 각각 작고 누추한 가방을 하나씩 들었다.
그들 술집으로 들어선다.)
두 섭 : (성환에게) 니 표까지 샀다.
성 환 : …
두 섭 : 정희야, 양순이 어디 갔냐?
정 희 : (막걸리 따위를 가져다 놓는다) 바람 쏘이러 나갔어요.
(기차 달리는 소리, 가까워졌다가 이윽고 사라진다)
정 희 : 잠깐이면 저 기찰 타고 가시겠네요, 서울로. 나도 갔음.
강 춘 : 저건 우등 열차다. 우리 같은 놈들 하군 상관이 없어. (웃는다) 혹시 모르지, 저 열찰 만드는 데까진 상관이 있을지도.
병 노 : 형님, 일이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끝나는 거예요?
(두섭과 강춘, 찔린 듯 병노를 바라본다)
강 춘 : 아침 7시에서 저녁 7시까지.
병 노 : 12시간이나!
정 희 : 8시가 넘도록 하잖아요. (들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아직도 일하고 있는데요.
두 섭 : 매일이지.
병 노 : 잔업인가요? 그럼 돈이 더 나오겠군요.
두 섭 : (웃는다) 없어.
강 춘 : 눈앞에 보고 있잖아.
병 노 : 당장에 뿌릴 뽑아 버려야지. (두섭, 웃어댄다) 못 할 줄 아세요? 두구 봐요.
정 희 : 댁도 여기 오래 붙어있긴 틀렸군.
두 섭 : 할 수도 있겠지. (웃는다)
강 춘 : (진지하게) 할 수 있어. 우리야 못난 놈들이니까 그냥 떠나지만.
두 섭 : 한 3, 40년쯤 뒤에 응, 성환아?
성 환 : …
병 노 : 공장엔 감독이구, 노가다엔 십장이로구먼. 일을 못하게 만들어 버리든지…
두 섭 : (빈 사발을 병노에게 권하여 술을 따르며) 몇 년 전부터 한두 달에 한 번씩 꾸는 똑 같은 꿈이 있어. 내가 망치질을 하는데, 못을 벽에 대고 망치로 못대가릴 딱 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사이) 망치가 흙덩이처럼 부서지고 말아. 다른 망치 로 또 해봐도 마찬가지. 이젠 그 꿈이 시작되기만 하면 꿈을 꾸면서도 알지, 또 그 꿈이라는 걸. 그래서 아예 망치질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맥이 풀려 버려.
강 춘 : 십장이 자넬 따로 좀 보자고 안 하던가?
병 노 : 술 한 잔 사겠대요. 아차 시간이 다 됐겠는데. (강춘과 두섭, 웃어댄다) 왜요?
두 섭 : 등치고 배 만지는 짓이야.
강 춘 : 잘 해 보라구, 잘만하면 자기가 아주 잘 밀어 주겠다고 할거야.
병 노 : 뭐, 안가고 말죠, 까짓 거.
두 섭 : 가봐, 뭐라든지 잘 들어둬. 쓸데가 있을 거야.
강 춘 : 속은 함부로 주지 말구.
병 노 : (정희에게) 우리 형님 오면 나, 이따 온다구 기다리라구 해. (나간다)
(오른편에서 성자와 은걸, 들어온다.
은걸은 50대의 장대한 몸집을 가진 사내로 얼굴을 뒤덮은 수염에는 흰빛이 드문드문하다.
그는 술에 취했다)
은 걸 : 저놈의 하늘이 왜 저리 시뻘겋냐? 마누라, 이사갑시다.
성 자 : 겨우 자리 잡았는데 이산 무슨 이사? 들어와요, 어서. (술집으로 들어선다)
은 걸 : 으휴, 이놈의 냄새. 머리가 지끈거려. (들어선다)
강 춘 : 장가로구나. 여긴 노름방 아니다, 다른 데루 가봐라.
은 걸 : 내가 며칠 없는 사이에 불한당들이 모여들었구나.
강 춘 : 한 잔 퍼먹어라 이놈 장가야. (막걸리를 권한다)
정 희 : 이번엔 어디서 찾았어요?
성 자 : 오라는데 없는 늙은이가 술집 아니면 갈데가 있겠냐?
은 걸 : 웬 가방은 하나씩 꿰어찼냐?
정 희 : 서울 간 대요.
강 춘 : 너 처럼 과부 꿰어차는 재준 아직 없으니까 가방이라두 꿰어차야지.
은 걸 : 마누라, 우리도 이사갑시다.
성 자 : 양순인 어디 갔어? 또 허리 부러진 것처럼 드러누웠어?
정 희 : 아니예요. 저…
성 자 : 나만 없으면 게으름이라니까. (안채로 들어간다)
두 섭 : (성환에게) 너도 봤냐, 양순이 나가는 거?
성 환 : …
두 섭 : 왜 이리 안 와?
성 환 : 안 올걸.
두 섭 : 안 와? 바람 쏘이러 나갔다며?
성 환 : 바람. (사이) 바람도 쏘이겠지.
(성자, 다시 나온다)
성 자 : 정희야, 양순이 지 동생 사진이 왜 없냐?
정 희 : 몰라요, 치웠겠죠.
성 자 : 또 옷도 없어진 것 같고, 어디 갔어, 도대체?
정 희 : 난 몰라요.
두 섭 : (예감이 있다) 옷… 사진이…
성 환 : 아니예요, 금방 올 거예요!
두 섭 : 뭐라구!
성 자 : 아이고, 아이고, 이년이! 10만원이나 되는 빚을 떼어먹고!
성 환 : 벌써 수십린 갔을걸.
성 자 : (정희에게) 너 요년! (성환에게) 어디로 간답디까?
성 환 : …
성 자 : 갈데라군 두 길 뿐이야, 강 건너 가서 버스를 탄대, 아니면 기차를 탄대?
성 환 : …
성 자 : 내, 오늘 술값 안 받을게, 응? 김씨.
성 환 : 기차 정거장.
정 희 : (깜짝 놀라) 아니예요, 아니예요, 아줌마!
성 자 : 요 년! (급히 뛰쳐나가 왼편으로 사라진다)
은 걸 : (그 뒤에 대고) 마누라, 우리도 이사갑시다!
(두섭, 성환을 쏘아보고 있고, 성환은 정희를 쏘아보고 있다)
성 환 : 아니라니?
정 희 : 붙잡혔어요 이제, 양순인.
성 환 : (웃어댄다) 속았군.
(두섭은 여전히 성환을 노려보고 있다)
강 춘 : 그만큼 부려먹었으면 됐지, 빚은 무슨 빚이야?
은 걸 : 저 여편네 돈에 미쳐서.
강 춘 : 넌 노름에 미치구?
은 걸 : 사내자식이 세상 사는데엔 딱 두 가지 길뿐이니라. 돈 벌어 마누라 호강시키면서 살거나, 아니면 말썽꾸러기가 되거나, 홍길동이나 임꺽정이 같이.
강 춘 : 그래서 넌 말썽꾸러기가 되기로 작정을 했구나.
은 걸 : 이놈이 말썽꾸러길 구경도 못한 놈이로구나. 내가 말썽꾸러기나 되면 다행이게? 난 무골 호인이다. 세상에 해 될 것도 없고 득 될 것도 없지. 세상에 나한테 해 될 것도 득 될 것도 없으니 말이다. 노름하고 술 퍼먹는 게 어디 말썽 축에나 끼나? 미친 짓이지. 아가야, 술 떨어졌다.
정 희 : (막걸리를 준비한다)
은 걸 : 6․25사변 끝나고 한참 동안은 나두 돈 버느라 머릴 싸맸었단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려구 애쓰구. 헌데, 가만 보니까 세상이 나 같은 놈은 내팽개쳐 두고 지 멋대로 굴러가더란 말씀이야. 그래서 나두 세상 같은 놈은 내팽개쳐 두고 내 멋 대로 살기로 했지. (너털웃음)
두 섭 : (성환을 쏘아보며) 이 자식, 다 알고 있으면서…
성 환 : …
두 섭 : 응큼하게 입 딱 다물고…
성 환 : …
강 춘 : 본 마누라도 아니라면서? 저 과부댁 말야.
은 걸 : 구두도 고치고, 우산도 고치고, 아궁이도 고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지. 좀 좋냐? 너 같은 놈은 그런 멋 모를 거다.
강 춘 : 먹고살기 바쁜 놈들한테 멋이라는 게 당키나 허냐?
은 걸 : 이런 썩어 비틀어진 놈. 돈 있는 것들 멋이 어디 그놈들 멋이냐? 돈의 멋이지. 그저 그럴 듯 해 뵈는 거야. 가난한 것들 멋이 진짜란다. 이놈아, 봉이 김선달이 어디 돈이 있어서 멋있냐? 사람의 멋이거든, 진짜지. 서울에서 출발해서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루다 경상도, 강원도 해서 다시 서울… 이렇게 한 바퀴 돌 면 한 2, 3년 걸리느니라. 그러다가 여기서 저 여편넬 만났지. 막걸리 몇 되 먹고 술값 대신 칼을 갈아줬겄다?
강 춘 : 칼만 갈아줬냐? 밭도 갈아줬지, 이놈아.
은 걸 : (웃는다) 그래, 그것 참. (입맛을 다시고) 강물 색이 변해요, 하루가 달라. 하면서 고기가 안 잡히기 시작하는데 환장하겠더구만.
두 섭 : (여전히 쏘아보다가) 개자식!
성 환 : 내 어머니 띠가 개띠다. (정희에게) 야, 소주!
은 걸 : 그놈의 고기 잡는 재미에 여기 눌러 앉았는데 피래미 하날 올릴 때도 세상을 통 째로 낚아 올리는 기분이었단 말이다. 이놈, 아무리 얘기해 봐야 낚실 해봤어야 알지.
강 춘 : 나도 고향에 있을 때 삼태기로 고무신으로 고기 꽤 잡으신 어른이야.
은 걸 : 저놈의 물… 우라질, 고기 안 노는 강이 어디 강인가? 애 못 낳는 계집이나 같 지. 둘 다 쓰레기통이야.
성 환 : (정희에게) 들었냐? 쓰레기통이란다.
정 희 : (웃는다. 백치처럼)
강 춘 : 세상에 어디 그런 게 하나 둘인가? 세상이 몽땅 그 꼴로 돼 가는 모양인데.
은 걸 : 허니, 노름이나 하고 술이나 퍼먹는 게지. (웃음을 터뜨린다)
정 희 : 그래요, 아저씨. (덩달아 웃어댄다. 막걸리와 소주를 탁자 위에 놓는다)
강 춘 : 정희야, 니 노래 하나 듣자.
정 희 : 술은 안 주구 노래만 하래요?
은 걸 : 좋아, 한 잔 해라. (따라 준다. 정희는 마신다)
두 섭 : 나쁜 자식.
성 환 : … (소주병 뚜껑을 이빨로 따서 마실 뿐이다)
정 희 : (노래한다) 못 올 줄 알면서도 보내야 옳으냐.
(두섭과 성환을 제외한 사람들, 노래에 합세한다)
속는 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잔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노래가 계속 되는 동안, 성환은 두섭에게 소주잔을 권한다. 두섭은 그 손을 쳐서 잔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성 환 : 야, 잔.
(정희, 잔을 준다)
강 춘 : 왜들이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사람들이.
두 섭 : 사람 같지도 않은 자식.
정 희 : 간 사람은 간 사람이예요. 잊어버려요.
두 섭 : 붙들기 싫었거든 나한테 얘기라도 해줬어야 할 거 아냐, 임마.
성 환 : 돈까지 줬다, 내가. 그 우등열찰 타고 벌써 떠버렸는지도 모르지. 너 같은 건 발 뒤꿈치로 뭉개버리고.
두 섭 : (성환의 멱살을 틀어쥔다) 이 새끼!
은 걸 : 이 사람들, 혈기가 왕성한데. 부럽다. 음, 부러워. (강춘에게) 넌 나랑 팔씨름이나 한 번 할까?
강 춘 : (두섭에게) 놔, 이거, 이 사람아!
(두섭, 성환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긴다. 성환은 나가떨어진다.
사이
성환, 일어선다. 두섭에겐 주지 않고 다시 걸상에 앉는다. 소주를 따라 꿀꺽 삼킨다)
강 춘 : 그래, 자네가 참아.
두 섭 : (막걸리를 벌컥벌컥) 친구라는 자식이.
은 걸 : 참기는, 젊은것들이란 참는 것보다는 싸우는걸 배워야 해. 요즘 젊은것들은 통 싸울 줄을 몰라. 말로만 어쩌구저쩌구 계집들 같이 원, 싱거워서.
(사이)
성 환 : 도망가 봤냐?
두 섭 : …?
성 환 : 도망이라는 걸 해 본적이 없는 놈이 양순일 이해할 리 없지.
두 섭 : 이해한다는 놈이 맨날 욕설만 퍼부었냐?
성 환 : …
은 걸 : 도망이야 내가 많이 다녔지.
정 희 : 항상 마찬가지였지만 나도 다녀봤어요.
두 섭 : 내가 마지막으로 붙든 지푸라기야 임마, 왜 방해야?
성 환 : 도망이야말로 양순이의 마지막 지푸라기다.
은 걸 : 사람이라는 게 미련을 버리고 나면 참 살기가 수월해지는 게야. 가고 오는 게 쉽 거든 이놈의 데에도 미련을 갖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정 희 : 지푸라기? (웃는다) 내 지푸라긴 없나?
은 걸 : 2년 전이었나? 처음에 저 여편네가 꿍쳐둔 돈을 들고 나섰을 땐 돌아올 생각이 란 전혀 없었어. 역으로 갔지. 그것참 뭔지 모를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들데. 술을 퍼먹었어, 술김에 뜰려구 말야. 그래두 안돼. 며칠 동안 술만 퍼먹었지. 누 가 날 불러서 돌아보니까 저 여편네가 서있더구만.
(사이)
그 뒤에도 그랬어. 표를 미리 사놓고 역 근처 술집에서 술을 먹기 시작했는데 시 간이 됐는데도 도저히 일어나지질 않아. 그대로 앉아서 기차 떠나는 소릴 고스란 히 보내고 말았어. 이번에도 가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발이 안 움직여.
(술을 마신다. 사이. 웃는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훌훌 털고 가버리게 될 거야. 굴뚝청소나 하면서 다니는 게 지. 또 칼도 갈아주구…
강 춘 : 밭도 갈아야지. (웃는다)
(은걸이 얘기하는 동안
일우, 어제와 같은 차림으로, 그러나 훨씬 옷차림이 흩어져서 들어온다.
술이 취했다.
강가에서 서서 몸을 앞뒤로 흔들고 팔이 없는 왼편의 빈 소매가 흔들리는 것을 지켜본다.
오래도록 흔들고 오래도록 지켜보다가 갑자기 삐꺽삐꺽 웃으며 바위 위에 앉는다.
오래도록 웃는데 그 웃음은 차츰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되어간다.)
성 환 : 난 열살 때 처음 도망을 했어. (사이) 집에서 (사이) 집? (웃는다) 집은 집이지.
벽이 있고, 지붕이 있고, 때묻은 이불이 있었으니까. (소주병을 기울인다)
(사이)
(일우가 술집으로 들어선다)
일 우 : (떠들썩하게) 정희야아, 너 덮치가 왔는데 뭐 하고 있는 거냐? 야아, 이젠 아는 체도 않는구나, 이거.
정 희 : 어서 오세요. 왜 이제야 와요?
강 춘 : 니 하는 수작이 꼭 마누라 같구나.
성 환 : 걔들이야 삼천만의 마누라니까.
일 우 : 형님들도 오셨군요. 어젯밤 재우기로 하고는 모두 내뺐죠? 오늘은 그렇게 안됩니 다. 내가 안 놓아드려요. 술 어서 가져와 목 탄다.
정 희 : 뭘루 하실 거예요?
일 우 : 모라서 묻냐? 뚝, 하면 처녀 고쟁이 고무줄 떨어지는 소리고, 쿵 하면 과붓집 담 뛰어넘는 홀애비 소리지.
정 희 : (맥주를 준비한다. 웃어대며)
강 춘 : (은걸에게) 이 사람도 도망꾼이야. 마누라한테서 도망쳤대.
일 우 : 내 마누라가 저기 정희 말구 또 누가 있다고 그러세요?
정 희 : 서방보다는 지푸라기가 필요해요. (맥주를 가져다 놓으며 웃는다)
일 우 : (두섭에게 권하며) 자, 밤새웁시다!
정 희 : 그 아저씨들은 오늘 떠나요.
일 우 : 떠나? 어디루?
강 춘 : 어이쿠, 몇 시냐, 장가야?
은 걸 : 오시 15분이다, 이가야.
강 춘 : 벌써? (두섭에게) 가세. (일어난다)
(성환도, 두섭도 일어서지 않는다)
강 춘 : 뭐 해? 가자니까. 그놈의 완행열차 미리 기다려야 하잖아.
은 걸 : 마누라도 없는 놈이 서두르기는…. 내일 가면 안되냐?
두 섭 : (기차표를 꺼낸다. 한 장을 강춘에게 준다) 가쇼, 이형.
강 춘 : 어서들 일어나! 10분밖에 안 남았어.
두 섭 : (또 한 장을 성환에게) 너두 꺼져, 임마.
성 환 : (받지 않는다. 소주를 마신다)
두 섭 : (성환에게 표를 내던진다. 나머지 두 장의 표도 찢어버린다)
정 희 : 어머! 왜 찢어요, 아깝게?
두 섭 : (막걸리를 벌컥벌컥) …
강 춘 : 술은 기차 안에서도 먹을 수 있잖아, 이 사람아!
(사이)
두 섭 : 안 가. (막걸리를 벌컥벌컥) (사이) 기다리겠어.
성 환 : 누굴? (웃는다)
두 섭 : 닥쳐, 이 자식아!
강 춘 : 뭘 기다려?
두 섭 : …
성 환 : 해골이 썩었냐? 도망간 애가 돌아오게?
두 섭 : 꺼져, 이 새끼야.
성 환 : (빙글거리며) 내기할까? 난 양순이가 돌아오지 않는 쪽에 걸지, 도망에 성공하는 쪽에.
두 섭 : 저 자식이 근데…
정 희 : 걘 애기 안 떼려고 작정한 애예요.
일 우 : 알구보니 창녀 얘기요? (웃어댄다) 도망가셨다구? 이 집 주인 아주머니 안됐네. 새끼 밴 암퇘지가 도망을 갔으니.
두 섭 : 닥쳐!
일 우 : 나랑 같이 갑시다., 형씨. 내가 하나 붙여 드릴 테니까 밤새도록 퍼부어 봅시다, 형씨. 하나로 부족하다면 뭐, 열쯤은 자신 있으쇼? (킬킬거린다)
성 환 : 양순인 탈출 한 거야. 그런데 넌 걔가 다시 이 더러운 소굴로 굴러 떨어지길 바 란다는 거냐?
일 우 : 작부한테 바치는 순정치곤 지나친데, 잡놈이어서 그런가?
두 섭 : 그 따위로 아가리 놀리면 너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어.
일 우 : 팔 없는 병신은 있어도 머리통 없는 병신은 없지, 아마? 그래도 팔아치우지, 뭐. 얼마 주시겠수, 형씨? 머리통 하나에? (정신없이 웃어대며) 난 사실은 장사꾼이 야, 몸뚱일 떼어 팔거든. (웃음에 휘말려 버린다)
강 춘 : 가잔 말야. 이 사람아 나중에 와보면 될 거 아냐?
은 걸 : 나인 제일 많이 잡살 거린 놈이 왜 이리 촐싹거려?
두 섭 : 먼저 가쇼. (성환에게) 어서 꺼져, 이 자식아. 보기 싫으니까.
(기적 소리, 멀리서부터)
강 춘 : 제길 헐, 놓쳤네, 놓쳤어.
(기차 달리는 소리, 아주 가까워졌다가 멀어져 간다)
두 섭 : 빌어먹을 남궁 털보 놈이 한 탕 하자더라, 언제든지 찾아오라구. 이제 서울로 돌 아가면 난 틀림없이 빵잽이가 되고 말 거다. 그것두 나쁘진 않을지도 몰라. 지쳤 어. 혼자 허깨비처럼 개새끼처럼 여기저기 기웃기웃 흘러다니는게 신물난다, 이 새끼야.
일 우 : (정희에게) 너 우는 거냐?
정 희 : 아뇨, 울긴. 왜요? (눈물 닦는다. 웃는다, 백치처럼. 그리고 그것이 웃음이 아닐지 도 모른다는 의혹이 우리는 처음 갖는다) 나에겐 지푸라기도 하나 없나?
은 걸 : 이제 차는 떠났겠다. 밤새워도 되겠네요, 아저씨들.
일 우 : 그렇구 말구! (잔을 모두에게 돌린다. 성환만이 거절한다. 맥주를 따르며) 한 창 녀의 장도를 빌며! 이 세상의 모든 도망자, 탈주자, 쫓기는 자에게 건배!
(그들 마신다)
일 우 : 자, 다시 한 번요. (모두에게 다시 맥주를 따른다) 이 세상의 모든 추적자, 수색 자, 탐색자, 사냥꾼들에게 저주를 보내며! (마신다)
(왼편에서 골이난 양순이 발을 함부로 내딛으며 들어선다. 뒤따라 성자도)
성 자 : 니가 가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너 가는 거 안 말린다. 나두 지긋지긋해.
(양순과 성자, 술집으로 들어온다. 양순은 보퉁이를 빈 탁자에 내던지고 걸상에 앉는다)
정 희 : 아직 안 가구 뭐했니?
(두섭, 움직이지도 않고, 양순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사이)
성 자 : 빚돈만 내, 빚돈만.
그 뒤엔 서울 아니라 지옥을 간 대두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니까.
일 우 : 무슨 빚이오, 도대체?
성 자 : 옷 해 입혀, 밥 멕여, 큰방에서 불때고 잠 자, 애기 생기면 병원비 대… 그 돈을 홀랑 떼어먹고 달아날려구? (성환에게) 고맙소, 김씨. 오늘 술값 안 받으리다.
성 환 : (웃어댄다. 오래도록) 끝까지 나에게 사길 치셨군, 이 늙은 작부가.
두 섭 : 닥쳐, 이 쥐새끼야!
성 환 : (성자에게) 그거야, 당신이 애들 부려먹으려고 들인 돈 아뇨?
성 자 : 이것들이 없었으면 안들인 생돈이야.
일 우 : 당신이 얘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먹구 산 거 아뇨? 빚은 당신이 애들한테 진 것 같은데.
성 자 : 이건 어디서 굴러 들어온 말뼉다귀야? 너 정체가 뭐냐, 도대체? 어디서 툭 불거 져서 돈 함부로 쓰구, 인심쓰는 체하구, 이거 어디 간첩 아냐? 너 뭐야, 도대체?
은 걸 : 이놈의 여편네가 왜 이래? 옳은 말하는데. (일우에게) 내 술 한 잔 받게.
성 자 : 아니, 당신은 또 뭐야?
은 걸 : 붙잡아 왔으면 가만있어. 입 나불거리지 말구.
성 자 : 나가! 너두 나가! 필요 없어!
은 걸 : 오냐, 나가마. 잘됐다. 우라질. 지금부턴 그럼 나두 손님이다.
성 자 : 손님이구 뭐구 소용없어. (두섭과 강춘, 성환에게) 댁들한테 이러는 거 아니예요, 미안해요, 떠들어서.
두 섭 : (양순이 앉은 탁자로 가서 앉는다. 말없이 그녀를 지켜본다. 양순은 시선을 피하 려고 애쓰지만 할 수 없이 올려다본다. 사이) 일어나, 가게.
양 순 : …
성 자 : 가긴 어딜 가! 못 가!
두 섭 : 돈주면 될 거 아뇨! (양순에게) 일어나, 어서!
양 순 : 애긴 낳을 거예요.
두 섭 : 미친소리 집어치워!
강 춘 : 떼라, 양순아.
두 섭 : 아니, 날더러 어떤 놈의 새낀지도 모르는걸 평생 기르란 말이냐? 빌어먹을 그렇 겐 못하겠다 (화가 치민다) 그렇겐 못하겠어! 목을 눌러 죽이고 말지!
성 환 : 그래? (웃는다) 그렇군.
두 섭 : 시끄러워, 이 자식아!
(사이)
성 환 : 어떤 놈의 자식인지도 모르는걸 친구 삼는 건 괜찮으냐?
두 섭 : …
성 환 : 김성환. 어머니한테서 받은 성이지, 아버진 모르니까, 어떤 놈인지, 녀석인지, 자 식인지, (사이) 10살 때 육성회빌 가져오라구 학교에서 집으로 돌려보냈던 적이 있어. 방문을 열었다가 (웃어댄다) 어떤 놈하구 붙어서 희롱을 하고 있는 어머닐 봤어.
그리구 그 술집 - 밤마다 욕설, 싸움, 어머니까지 어울린 여자들의 웃음소리들. (사이) 형하고 같이 집을 나와 버렸지.
일 우 : (킬킬거리며) 지금 고백하시는 거요, 형씨?
성 환 : (두섭에게) 내 목까지 눌러 죽여 버리시지, 응? (웃는다)
은 걸 : 그 뒤론 한 번도 안 찾아가 봤나?
일 우 : 뭐 하러 돌아갑니까, 형씨? 안 그렇소?
성 환 : 잊어버리고 싶은데.
일 우 : 뭐 하러 지금 그 얘길 하는 거요? 재미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 (웃는다)
성 환 : 만난 적은 있지. 극장 앞에서 구두를 닦을 땐데, 찾아 왔더구만. 귀신처럼 화장을 해 가지군.
일 우 : (킬킬거리며) 작부처럼 이겠지.
성 환 : 이미 형은 싸움을 하다가 사람 팔을 부러뜨려서 감옥소로 끌려간 뒤였어.
일 우 : 아하, 형은 또 감방에 드나드시구? (킬킬거린다)
성 환 : (웃는다. 고통스럽게) 미친 여자 취급을 해 줬지. 사람들 오가는 큰길에서. 이 여 자 날 유괴한다구 고함을 치면서. (사이) 그런 낯짝들 하지 마시지. 난 남들 하구 주먹다짐, 말다툼도 한 번 안 했어. 작부들 하구 살을 섞은 일도 없구. 깨끗해. 이 세상 어느 사람보다도.
일 우 : 후련하슈? (웃는다) 고백하고 나니까 뭐가 달라져요? 작부 어머니가 졸지에 여 자 국회의원이라도 됐수?
성 환 : …
일 우 : 뭐 하러 하쇼, 그런 얘긴? 속에다 꽉 처박아 둬야 하는 건데. 죽을 때 무덤 속으 로나 끌고 들어가서 같이 파묻혀 버려야 하는 얘기라는 게 있단 말요.
성 환 : (고통스럽게 웃어댄다)
일 우 : 형씨가 작부 아들이라니, 염병을 헐, 오래 살다보니 별의별 잡종을 만나네 그래.
성 환 : (웃는다) 잡종이지. 잡종이야.
은 걸 : 그 뒤론 어머니 소식 못 들었나?
성 환 : 시장에서 목판 놓고 떡장사 한답디다.
일 우 : (킬킬거린다) 작부보다는 좀 나아진 셈인가?
성 환 : (고통스레 웃는다. 또한 후회스럽기도 하다)
일 우 : (야유한다) 좋다는데? (킬킬거린다)
두 섭 : (일우에게 달려간다. 갈긴다. 비실거리는 일우)
일 우 : 치려면 이빨 몇 개씩 부러지게 치쇼, 돈 좀 벌게스리.
두 섭 :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시고 양순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사이) (여전히 양순을 노려보다가) 안 갈 거야?
양 순 : 싫어.
은 걸 : 잡종이지, 양순이 뱃속에 든 거나, 저 젊은이나. 나나. 우리들 모두가 잡종이야. 안 그런가? 다 마찬가지지. 우리 같은 놈들이니까 양순이 뱃속에 씨를 떨어 뜨 리는 거 아닌가, 이 사람들아?
두 섭 : 시끄럽수다, 아저씨. 너 정말 안가?
양 순 : 안 가.
은 걸 : 양순아, 애길 낳아서 날 다오. 내가 기르는 것까지 싫다진 않겠지.
일 우 : 고아원 차릴 셈요, 아저씨? 구호물자 어떻게 해 볼려구? 동업합시다.
강 춘 : (은걸에게) 이놈 미친놈 아냐? 낳긴 왜 낳아?
양 순 : 내가 기를 거예요.
성 자 : 미친 소리 하구 있네.
두 섭 : 빌어먹을, 낳아 봤자 고생보따리, 그 지겨운 놈의 굶주림, 멸시에다가 외롭기는 겨울바람에 나뭇가지 꼴이구.
양 순 : 거짓말이야. 우리 같은 것들은 애기도 못 낳게 해서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는 속 임수야. 우리들이 죽으면 살았던 흔적도, 기억도 없애 버리려는 짓이야. 고생스러 울수록 낳아야 해. 그게 우리 재산이야. 끈덕지게 목숨을 이어나가야 하는 거야. 두섭 좋겠다. 에미랑 새끼랑 나란히 술상에 나앉아 넌 목포의 눈물이나 부르구, 새끼는 앙앙 울어제끼구, 잘해 봐.
양 순 : 천만에 (사이) 도망가면 돼.
성 자 : 뭐야? 이걸. 발모가질 부러뜨려서 앉혀 놓든지 해야지 안되겠네.
양 순 : 도망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어. 역전에서 망설이구 있었어. 먼저 오씨를 만 나구, 오씨가 떠난 뒤에 내가 가는 게 순서가 아닌가, 하구. 난 갈 거야. 도망 갈 거야. 내 다리가 허리 아래 붙어 있는 한 어디라두 갈 거야.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 난 갈 거야. 가야 해.
성 자 : 너 손님 술시중 안 들어? 보따리 놓구 냉큼 나와!
(양순, 힘없이 쪽문을 향해 간다)
두 섭 : 기다려.
(양순, 멈춰선다. 두섭은 지폐들을 꺼내 성자에게 건넨다)
성 자 : 뭐요, 이게?
두 섭 : 빚이 얼마요?
성 자 : 11만원. (지폐를 센다) 이거 7만원인데.
두 섭 : 나머진 내일 와서 계산합시다.
성 자 : 안 돼요. (지폐를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일 우 : 싸구려! 막 팝니다! 작부가 한 마리에 11만원! 바겐세일. 대매출이요!
(킬킬거린다) 애 잘 낳고 술 잘 따르는 작부가 하나에 11만원!
두 섭 : 닥쳐, 이 자식아! (성자에게) 얜 여기 두고 가면 될 거 아뇨? 대신 술상에 앉히 진 마쇼.
성 자 : 암, 암, 손님처럼 방에 딱 모셔 놓을께. (지폐를 고의춤에 쑤셔 넣는다)
양 순 : 쓸데없는 짓 말아, 오씨.
두 섭 : 안 일어나? 기서 애 낳고 퍼지르구 살 거야?
은 걸 : 낳아. 에미가 새낄 낳겠다는 데 누가 못 하게 해? 낳아서 날 줘.
그거라도 안고 다니면 훨씬 덜 쓸쓸하겠지.
두 섭 : 왜 아까부터 장씬 남의 애길 빼앗으려고 난리쇼?
(사람들, 놀라서 두섭을 바라본다)
양 순 :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얼굴이다) 오씨…
두 섭 : 복도 많은 놈이지. 마누라에 자식새끼까지 한꺼번에 생기다니.
(놀라움으로 팽팽한 잠깐의 사이. 그러다가 강춘과 은걸의 웃음이 터져나온다)
강 춘 : 요새 젊은것들이란 알 수가 없어!
은 걸 : 늘그막에 자식 하나 점지 받나 했더니… (그러나 역시 흐뭇하다)
정 희 : (감격하여) 양순아!
일 우 : 골이 비었군. 머리통이 딱 붙은 괴물단지가 들어앉아 있을지 어찌 알아서.
(킬킬거린다)
양 순 : (보퉁이에서 지폐를 꺼낸다) 나한테두 2만원 있어요.
성 자 : 어디서 났지? (받아 챈다)
양 순 : 김씨가 아까 준거예요.
성 자 : 김씨가? 왜?
두 섭 : 필요 없어. 내일 내가 갖다 줄거야. (그러나 이미 성자가 받아 챘다)
은 걸 : 저런 여편네 하구 살을 섞구 몇 년 동안을 살았으니…
성 자 : 이러지 않았음 벌써 길바닥에서 굶어 죽었어.
두 섭 : (벌떡 일어선다) 갑시다. (양순, 보퉁이를 들고 일어서면) 이리 줘. (보퉁이를 받 아 제 가방에 넣는다)
강 춘 : 기차도 떠나 버렸는데 술이나 더 하지.
일 우 : 요셉의 마누라는 하나님이 먼저 가로채더니… 그 애긴 아마 예수그리스도겠네, 그래? (킬킬거린다)
양 순 : 10시 차도 있어요.
두 섭 : (양순을 보며) 나갑시다. 여기선 술이구 뭐구 싫으니까.
양 순 : 안녕히 계세요, 아줌마.
성 자 : 손님 안 붙들고 무슨… (그제야 양순의 새로운 위치를 의식한다) 으, 응. 잘 가 라. 날 원망 말고. 돈이 원수니까.
정 희 : 양순아, 잘 살아. 응? 저 아카시아처럼. 잘 살아야 해.
양 순 : 정희야, 너두… (술집에서 나간다)
은 걸 : (나가며 성자에게) 그 동안 신세 많이 졌네. 잘 있게.
성 자 : (설마 하는 기대를 품고 대답 없이 외면한다)
강 춘 : (술집에서 나간다) 장가야, 너두 서울로 가자.
은 걸 : 난 저 남쪽으로 더 내려갈 테다. (술집을 돌아본다)
성 자 : (그와 동시에 털썩 무너져 내리며) 망할 놈의 영감, 말 한 마디에 몇 년 동안의 연을…
두 섭 : (성환에게) 고맙다.
성 환 : …
두 섭 : 서울 가서 곧 갚지.
양 순 : 고마워요, 김씨.
성 환 : (냉랭하게) 고마울 거 없어, 내기를 해서 졌을 뿐이니까.
두 섭 : (흐뭇하게 웃으며) 임마, 내긴 무슨…
성 환 : (또렷하고 냉정하게) 늙은 작부의 거짓말 때문에.
강 춘 : (얼른 화제를 바꾸어) 자네 말대로 넷이 됐네 그려.
은 걸 : 이놈은 셈본도 모르는 놈이로구나. 다섯이지, 어째 넷이야?
강 춘 : 넌 남쪽으루 간다며?
은 걸 : 이런 멍청하다 머리가 찌그러질 놈.
성 환 : 어떤 썩은 녀석 새낀지도 모르는 뱃속엣 거까지 다섯이지. 잡놈이나, 빵잽이, 아 니면 작부가 될 그것까지.
강 춘 : (급히 화제를 바꾼다) 서울엔 몇 시에 닿나?
양 순 : 새벽 6시요.
강 춘 : 우리 이렇게 하세. 내일 서울에 닿거든 뿔뿔이 흩어져서 노가달 찾아보는 거야. 그래선 저녁에 다시 모여서 모레부턴 일을 해야 먹구 살 거 아닌가? 만일 두섭 이 자네가 도둑질루다, 빵잽이루다 나서기로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말야.
두 섭 : (웃는다) 그럽시다. (성환에게) 너두 그렇게 할 거지?
성 환 : …
두 섭 : 내일 이씨가 말한 대루.
성 환 : 갈 데가 있어.
두 섭 : 갈 데가 있어.
두 섭 : 어디?
성 환 : 늙은 작부한테.
두 섭 : (화가 나서) 이 자식이 끝까지…
(사이)
성 환 : 내 어머니 말이다.
은 걸 : 잘 생각했네. 혼자서 얼마나 외롭겠나?
(그들, 왼편으로 빠져나간다.
술집 안에는 남겨진 사람들 - 일우, 정희, 성자, 따로따로 떨어져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납처럼 무겁고 긴 침묵)
정 희 : (일어선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아줌마, 아까 손톱 깎기 쓰고 어디 뒀어요?
성 자 : 망할 영감…
정 희 : 아줌마, 손톱 깎기요.
성 자 : 찬장에 봐라.
정 희 : ( 찬장으로 간다)
성 자 : 이놈의 영감, 찾아다 놨더니 금방 또…
정 희 : (손톱 깎기를 찾아 손톱을 깎기 시작한다)
성 자 : 왜 밤에 손톱을 깎는다구 난리니? 재수 없게. 내일 밝은 날 깎아.
정 희 : (대꾸하지 않고 계속 손톱을 깎는다)
성 자 : 아, 말이 안 들려? 손님 술 먹는데 건방지게…
일 우 : 끝낸 뒤에 나두 좀 깎아 줘. 손톱도 못 깎겠구나. 팔이 하나 없어지고 나니까.
성 자 : 왜 그렇게 되셨수?
일 우 :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사이) 특히 당신 같은 늙은이한텐. (킬킬거린다)
성 자 : 내가 어때서?
일 우 : 송충이 본 적 있으쇼? 아마 돈 벌레도 그렇게 생겼을 거야. (사이) 당신같이.
성 자 : (무안해서) 아니… 내가, 뭐…
(사이)
정 희 : (손톱을 깎으며) 수박 먹고 싶다.
일 우 : (사이. 킬킬거린다) 내가 사주지. 뭐든지 다. 복숭아, 참외, 토마토.
정 희 : 지금요?
일 우 : 이따 자러 가면서.
정 희 : (단호하게) 안돼요. (손톱을 깎는다)
성 자 : 나쁜 영감… 내가 뭘 잘못 했다는 거야? 오지랍 넓은 영감 같으니…
(사이)
정 희 : 목욕도 하고 싶은데. (사이) (웃는다) 내가 쓰레기통이래요. (사이) (혼자 웃는다) 난 왜 지푸라기도 없지?
일 우 : (하품, 커다랗게)
정 희 : (일어선다. 손톱 깎기를 치우고 잠시 홀 안을 둘러본다. 그 얼굴에 짙은 그늘이 있다. (사이) 나, 양순이 배웅하구 올께요. (술집을 나간다)
성 자 : (쫓아나가며) 정희야, 아저씨 보거든, 내가, 내가… 좀… 보자구… 응? 보자고 하 더라구… 응? 알았니?
정 희 : (웃는다) 보면 그럴께요.
성 자 : 잊지 말구 꼭, 응?
정 희 : 보면요. (웃는다)
(성자는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정희, 허공을 향하여 웃는다.
아카시아 밑으로 간다.
고개를 꺾어 그 나무를 올려다본다.
나무둥치를 만진다.
천천히 나무 주위를 한 바퀴쯤 돈다)
정 희 : 내 목숨이 있는 곳은… (왼편으로 천천히 걸어나간다)
성 자 : 에휴, 저건 어디다 쓰나. 내 쫓을 수도 없구. 반찬 하날 제대로 만들길 하나, 말 을 제대로 알아듣길 하나, 얘기 한마디 알아 들어먹게 지껄일 줄을 아나… 툭하 면 ‘헤’ 웃기나 하구, 술이나 퍼먹을 줄 알지… 어디서 누가 데려간다는 놈도 없 구… 골치로군. 늙어빠져서 손님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데… (사이) 이놈의 영감쟁 인… 내가 미친년이지. 그런 늙은이한테 그 정성을 다…
일 우 : 내가, 정희 빚 갚아 드리리까?
성 자 : 엥? 그래요, 좋지. (일우는 킬킬거린다) 쟤가 그래두 괜찮은 애예요. 고분고분하 구, 말 잘 듣구. 인물도 저만하면 빠지지야 않지. 나인 좀 들었지만 나이보다야 훨씬 젊어 보이잖아. 아직 싱싱해. 옷만 그럴 듯하게 입혀 놓으면 애가 귀티가 나요. 이런데 있기 아까운 애야.
일 우 : 숨이 넘어 가는군. (킬킬거린다)
성 자 : 빚이 12만원인데 10만원만 내요. 술도 많이 팔아 줬으니까.
일 우 : (지폐를 센다. 5장씩 세어 네 묶음을 만들어 탁자 위에 늘어놓는다)
성 자 : 10만원이면 되는데. (손을 뻗는다)
일 우 : (웃는다. 그 손을 떼어내며) 정희 보다는 말야, 난 아주머닐 사고 싶은데.
성 자 : 아주머니?
일 우 : 당신.
성 자 : 엥? 날? 사? 사다니?
일 우 : (킬킬거리며) 난 어린애들보다는 아주머니 같이 늙수그레한 사람이 좋거든.
성 자 : 쓸데없는 소리 말아.
일 우 : 하루 밤에 20만원.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지. 배 한 번 젓구 20만원이야.
성 자 : 아니 아니, 이거 정신 나간 사람 아냐?
일 우 : (한 묶음, 5장의 지폐를 주머니에 넣는다) 15만원. 어때?
성 자 : 이놈이 실성한 놈일세!
일 우 : (또 한 묶음을) 10만원. (킬킬거린다)
성 자 : 썩 나가! 발모가질 부러뜨리기 전에!
일 우 : (또 한 묶음을) 5만원. 당신 같은 거한테야 5만원도 비싸지. (킬킬거린다)
성 자 : 이런 돼 먹잖은 놈 있나. 가서 니 에미한테 그따위 수작을 해, 이놈아.
일 우 : (킬킬거리며 한 장만을 남긴다) 만원, 소주가 서른 병이야.
성 자 : 나가! 나가! 이 썩을 놈아, 잡놈아!
일 우 : (그걸 주머니에 넣고 동전을 하나 꺼내 탁자에 놓는다) 백원. (킬킬거린다)
성 자 : (일우의 멱살을 틀어쥐고) 이 병신자식이 어디 대고 미친 수작이야? 응?
일 우 : (다시 마지막으로 진지하고 솔직한 얼굴이 된다) 아주머니, 다 거짓말이예요.
성 자 : 뭐야, 이놈아?
일 우 : 가게도 마누라도 다 거짓말이예요.
성 자 : …
일 우 : 공장에서 일하다가 피대에 감겨 팔이 부러졌어요. 80만원을 주더군요. 내 10달 월급이죠. 팔 하날 판 거예요. 팔로 먹고 살아왔는데, 염병을 헐.
(먼데서 기차 소리, 가까워 졌다가 무대를 뒤흔들어 놓고는 멀어져 간다)
성 자 : 못된 놈의 영감, 이놈의 영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찍어낸다) 4년 세월을 말 한 마디에…
(은걸, 왼편으로부터 뛰쳐 들어온다)
은 걸 : (모래사장에서) 마누라, 이사 갑시다!
성 자 : (당황하여 벌떡 일어서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행주를 들어 탁자를 닦는 척한다. 은걸 술집으로 들어오면) 이산 무슨 놈의 이사! 정신 나간 늙은이 아냐?
은 걸 : 그럼, 저 놈의 강물에 고기들이 되살아날 때까지 여기 버티고, 눈 딱 부릅뜨고 있어 봐?
성 자 : 발이나 씻고 어서 들어가 자요.
은 걸 : 발?… 내일 닦지, 뭐.
성 자 : 안돼요. 어디 지저분한데서 며칠씩이나 뒹굴고 와선 그냥 자?
은 걸 : 괜찮다니까.
성 자 : 몸에서 땀내가 물씬거리는데 괜찮아? 세수나 하구 다녔수? 이는 닦구?
은 걸 : (일우에게) 자네, 아직 안 갔나? 술이나 같이하세.
성 자 : (갑자기 우뚝 멈춰 선다) 영감.
은 걸 : 왜?
성 자 : 왜 혼자 와요?
은 걸 : 그럼 누구하구 와?
성 자 : 정희는요?
은 걸 : 정희? 정희가 어째서?
성 자 : 역에, 역에 안 갔습디까?
은 걸 : 아니, 난 그 친구들 개찰하는 거 보군, 막 뛰어왔어. 정흰 못 봤어.
성 자 : 이년이! 도망이다! (뛰쳐나가 왼편으로 사라진다)
은 걸 : 저런 저런 여편네 하군… (혀를 찬다) 술이나 하세. (맥주를 권한다)
일 우 : (마신다. 이미 진지하거나 솔직한 얼굴이 아니다. 일그러진 웃음이 떠오른다)
은 걸 : 저게 어디 사람이 돈을 쓰구, 사람이 돈을 벌어들이는 꼴인가? 돈이 사람을 쓰 구, 돈이 사람을 벌어들이는 꼴이지. 미친 짓들이야. 사실 사람한테 필요한 건 쌀 한 되, 배추 한 포기면 되는 거 아닌가?
일 우 : (킬킬거리며) 공자 볼기치는 소리하시네.
은 걸 : 무서워서들 저 꼴들이야. 세상에 아무리 쌀이나 배추가 썩어난다 해도 자기한테 없으면 굶어죽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불안한 거지.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꼴로 허덕허덕 살려는지… 불쌍한 사람들이야.
일 우 : 예수 따귀도 치시는군. (삐꺽삐꺽 웃어댄다)
은 걸 : (코를 막고) 어이구, 이놈의 냄새! 바람이 또 왜 이쪽으로 불어? 하루 빨리 이살 가야겠는데… 자넨 언제 뜰 생각인가?
일 우 : 지금요.
은 걸 : 밝은 날 가. 이 사람아. 술이나 더 하구.
일 우 : 댁이나 과부댁 끼구 술을 하건 밤새도록 헐떡거리건 알아서 하쇼. (일어선다)
은 걸 : 왜 하필 이런 놈의 델 찾아왔나? 경치 좋구 물 맑은 데두 많은데.
일 우 : 나에게 어울리는 곳인 것 같아서, 나무도 없는 벌거숭이산들, 군데군데 시뻘건 흙더미, 시멘트 사이로 튀어져 나온 녹슨 철근, 썩어 가는 초가지붕… (킬킬거 린다) 그리고 저놈의 더러운 강, (삐꺽 이며 웃는다) 지폐를 꺼내 탁자 위에 놓 는다) 남은 건 정희 수박이나 사줘요. (술집에서 나간다)
은 걸 : (따라나간다) 아직 차시간도 멀었어. 마지막 찬데 11시 20분이라던가?
일 우 : (강물 - 즉, 객석을, 그리하여 한 관객의 얼굴을 지켜보며 마치 그 얼굴에게, 또 는 그 얼굴에 대하여 얘기하는 양 - 가리킨다) 보쇼, 형씨. 보여요?
은 걸 : 달 말인가? 더러운 물에라고 달이야 안 비치겠나? 사람이 저놈의 달에 못 살게 돼 있기 망정이지,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면 저 달도 벌써 요놈의 강물 꼬락서니 됐을 거야.
일 우 : (역시 강물을, 즉 한 관객의 얼굴을 지켜보며) 달이 투신 자살하고 있단 말요.
썩은 강물에. (삐꺽삐꺽 웃어댄다)
은 걸 : 굴뚝청소를 다니다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네. 세상의 더러운 것들은 말야, 모두 청소를 하느라구 그렇게 된 거라구 말일세. 걸레, 행주, 쓰레기통, 그리고 이 강물. 모두 더러운 것들을 청소해 내고 있거든. 그런 것들이 있으니까 깨끗한 것들이 깨끗한 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야. 이 집에 두 여자 애들두 그래. 사 내 녀석들의 욕망들을 청소해 내는 거 아닌가?… 이 강이나 그 여자 애들이나 남을 청소하면서 스스로는 썩어 가는 거지.
일 우 : (킬킬거린다) 이번엔 부처님 정강일 걷어찰 생각이쇼? 가겠소, 형씨.
은 걸 : 음, 또 보세.
일 우 : (웃어댄다) 또 봐? 묏자리 봐 두셨소?
은 걸 : (웃는다) 봐 둘 때도 됐지. 벌써 50년을 살았으니. 이제 살날도 한… 950년밖에 안 남았어. (웃는다)
(그때, 병노가 왼편에서 헐레벌떡 뛰어 들어 온다)
병 노 : 혀, 형님!
일 우 : … 너한테도 돈이라는 놈들이 쫓아다니냐? (킬킬거린다)
병 노 : 가, 강물, 강물에…
은 걸 : 왜? 물고기라두 살아났나?
병 노 : 사, 사, 사람이…
은 걸 : 사람?
병 노 : 여기 있는 여자… 형님, 저, 정희, 정희가…
일 우 : …
은 걸 : (혀를 찬다) 죽었나?
병 노 : 건져는, 건져는 놨는데… 숨은 안 쉬어요.
은 걸 : 가세.
병 노 : 혀, 형님!
일 우 : (움직이지 않는다)
은 걸 : (병노에게) 어서 와!
(은걸과 병노, 왼편으로 뛰어나간다)
(사이)
일 우 : (삐꺽이며 웃어댄다. 그이 내장이 한 줄기 독스러운 삐꺽임이 되어 그의 허파를 관통하여 찢고 삐져 나오는 듯한 웃음이다)
수박을 안 사 주니까 내 묏자릴 빼앗아 버렸군.
(성자가 숨이 턱에 닿아 왼편에서 뛰어들어온다)
성 자 : 이년 아직 안 왔어?
일 우 : (삐꺽삐꺽 웃어댄다)
성 자 : 이 못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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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퍼가요~ 잘 읽겠습니다.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