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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유기농업과 생명의 영성 / 의성 효천교회 김영환 장로님
한결 추천 0 조회 31 06.03.24 21: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기농업과 생명의 영성(靈性)

 

 

                        김 영 원 (장로, 전 기독교농민회장)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흘러드는 종교적인 체험이 있다. 이 체험이 농사일에나 사회적인 활동에서 책임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영성이라고 표현한다면, 유기농업은 크리스천 농민의 생활신앙으로 고백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유기농업과 영성은 추상적인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영성 그 자체라고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른 또 실천되는 유기농업은 대단히 왜곡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자본의 논리로 추구되는 유기농업은 그 농산물 자체가 목적이 되어 고부가가치를 추구하고 또 안전성을 보장하는 상품으로 둔갑시켜 반영성적(反靈性的)인 시장경제의 상품화로 전락시켜 버렸다.(오늘의 생협도 이념과 현실이 괴리되고 있다.)

  우리는 전통적인 민간 농법에서 국내외를 망라하고 농법에 있어 영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유기농업에 스며있는 영성은 우주적인 것이어서 나라와 민족의 차별이 없다. 생명과 삶(生). 이 공생의 질서는 조물주의 창조질서이며 생명존속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나의 유기농업 실천은 올해로 22년째를 맞는다(1978년부터). 그간의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생각이나 이치를 나는 내 나름대로 유기농법의 이념으로 또 철학으로써 기초를 이루어야 된다고 여겨왔는데, 유기농업은 영성 그 자체라고 여기게 된 것은 근래의 변화이다. 예를 들어  유기농업에는 퇴비가 가장 소중한 자원인데  흙재를 모으고 퇴구비, 산풀, 농산물의 부산물, 생활 쓰레기, 인분뇨 등 이런 것을 잘 모아 수분과 공기(산소)를 잘 조절하면 좋은 퇴비가 된다. 전에는 이 퇴비를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 착각을 깨닫게 된 것이 나의 영성에 대한 각성이었다.

  내가 아무리 퇴비재료를 많이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이것을 발효시키는 미생물이 없으면 퇴비가 안 된다. 생태계에 충만한 그 미생물들은 생명을 창조하는 인자들인데 지금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생명창조역사의 숨결이다. 생명의 낟알 하나 채소 한잎 과일 한 개가 만들어지기까지 이 자연의 인자들(우로, 바람, 햇볕, 번개, 곤충, 원생동물, 미생물 등)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다. 비율로 90%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불과 1%가 인위적인 인자(농부의 몫)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긴급히 요청되는 것은 생태적 영성의 각성이다. 그 각성이란 우리의 기진맥진한 지구가 괴로워하는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하고 동시에 우리의 개인적 삶의 길잡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유기농업적 영성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런 오늘의 상황, 즉 생태계의 파괴, 공해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생태적 영성이 깨어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성서는 이들을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했다. 같은 피조물인 인간들이 스스로 오만해져서 모든 피조물 위에 군림하면서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며 공생해야 할 책무를 망각하고 지배와 이용의 대상으로 삼은 데서 오늘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초래되었다. 이 점에서는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학은 공범자라고 생각된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로마서 8장 19절-22절/공동번역)

  이렇게 쓴 바울 사도는 2,000년 뒤에 전개될 오늘의 생활을 미리 꿰뚫어 보았는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우주에서 홀로 우월적인 존재일까? 저 하찮은 것, 들풀, 나무, 동물, 곤충들과 인간은 교감을 한다. 또 그들 자신들의 생명을 인간에게 기꺼이 줌으로 인간의 생명은 지탱된다.

  일본의 농민 가와구찌씨는 자신이 실천하는 자연농(유기농)에서 이제까지의 물질적, 체험론적인 견해에서 영적인, 관계론적인 견해를 대담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 밖에도 식물파(植物波) 농법, 그리고 독일의 슈다이너의 농업강좌에서 갖는 영적 측면에 주목하면서 식물파 농법에서 생태적 영성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여기 한 농부의 체험으로 고백하는 것을 정리해 본다.

  자연계의 동, 식물이나 전답에 심어진 작물을 이제까지의 같은 물질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또는 정신세계 속에서 감각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먹을거리로서 몸 속에 들어간 식물의 마음의 파동성을, 우리들의 뇌나 신경조직 속에서 우주로부터 온 마음의 파동성으로 포착하여 먹을거리로서 생명을 제공해 주고 있는 채소들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그 채소들의 삶과 함께 자신도 또한 이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인식을 길러 가는 일이 소중하다. 우주나 자연의 진리 속에서 식물들과 더불어 살며 자신의 삶을 누리게 해 준다는 기쁨의 참 의미를 모색하면서 현대인간이 잃어버린 우주의 리듬을 식물들과 함께 들이킨다. 이것이 본래의 농업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한 농부의 언어 속에서  파동이나 영계, 우주, 파동의 공진(共振) 등 이제까지의 농학에서는 전혀 배제되었던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금 이 부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 또는 실천을 하고 있다. 어떤 형태이건 21세기는 의(의), 식(食), 농(農)을 에워싼 대전환이 예상된다. 필자도 4년동안 슈다이너의 바이오 다이나믹 농법을 활용하면서 느낀 점이 있어 그 농법에 대해서 간단히 여기에 언급해둔다.

  정농회에서 지난 4년동안 독일의 루돌프 슈다이너의 '바이오 다이나믹 농법'(생명역동농법)의 농사력(農事曆)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우주에 충만한 에너지와 그 파동, 상호간의 교감을 통해 생명이 자라나는 신비를 감지하게 된다. 영성은 물질과 상대된다는 개념에서 나 중심은 물질주의이고(죽임) 우리 중심 속에는 영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살림).

  그 원리를 요약하면 우리가 재배하는 채소나 곡물은 대지 속에 깊이 뿌리를 박는다. 그 흙 속에서는 멀리 우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너지)에 물이나 암석의 미네랄이 공명(共鳴)하여 미생물이 그 공진(共振) 속에서 활성화하여 그 물과 미네랄의 진동형태를 전달될 수 있는 정도까지 흙을 분해하고 있다. 이것을 빨아올리는 식물들은 태고의 기억을 소생시킴과 함께 우주를 감지하여 식물에 의해서 제각기 공진하고 싶은 별의 파동에 합하여 스스로 진동형태를 바꾸어 가는 것이다(植物波). 이것이 진정한 채소나 곡물의 모습이며 그것을 먹는 사람도 또한 모든 우주파동이다. 그 정보를 채소나 곡물로부터 받아 스스로의 혼을 공진시켜 보다 높은 진동형태로 이행되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슈다이너가 추구하고 있는 농업의 모습이며 또한 우리 인간과 식물과의 관계이다.

  정농회원 중 전남 벌교의 강 대인은 벼농사의 일가견을 가진 독농가이다. 그는 벼와 대화도 하고 교감하며 농사를 짓는다. 이른 아침 논으로 나가다 벼들을 보며 박수를 치면서 간밤에 잘 잤느냐는 인사로 시작하여 벼들의 생태를 살피며 중얼거리며 교감한다. 그의 말이 "벼는 주인 농부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생명, 영성의 동질성

  영성은 온전한 생명을 뜻한다. 영이란 생명의 숨결이니까 우리의 영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 살아 내쉬는 숨결이다. 우리가 진정 온전한 생명력으로 깨어있고 매순간 민첩하게 반응한다면 그것은 바로 영성의 삶을 사는 것이다. 유기농업을 생명의 농업이라고 말하게 되는 이유는 유기농업 안의 충만한 영성 때문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데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1) 자신의 생명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의 생명이 소중하기에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 생명을 아무리 소중히 여겨도 그것만으로는 자기의 생명이 보전될 수 없다. 다른 생명과 관계없이는 불가능하다.

  (2) 타인의 생명

  타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때 자기 생명의 존엄이 지켜진다. 자기만 좋으면 되고 타인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차별사상으로 인해 이제는 자기의 생명이 위태로운 시대가 된 것이 현대사회의 실태이다. 그 실례로써 공해문제가 있는데 그 근본원인은 자신 생명만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는 데 있다.

  (3) 동식물의 생명

  생명의 양식을 단순 물건으로, 상품으로 취급하고 또 포식하고 낭비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생명에 대한 횡포이다.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먹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 톨의 쌀, 한 장의 채소 잎이라 할지라도 하늘로부터 주어진 소중한 생명으로서 감사하며 경건하게 결코 이것을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 한다. 우리 생명이 생명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식, 포식, 미식, 육식을 지양하고 사랑과 자비의 행위인 소식을 실천하는 식문화로 전환해야 한다.

  (4) 미생물의 생명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기에 농업이나 의학에서 생명의 원천으로 여기는 미생물을 이다지도 무참히 살생할 수 있단 말인가! 세균, 미생물의 생명을 마구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농업에서도 의학에 있어서도 미생물, 세균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죽여버리고 있다. "필요치 않는 것은 죽여라"라는 식으로 병해충을 모두 죽여야 된다는 것으로 전답에 가득 농약을 뿌려 모든 생명들을 사멸시키고 잡초마저 고사시켜 버려 죽은 땅을 만들어 버린 오늘의 농업은 내일이 없다.

  또 감염중의 치료와 예방이라는 구실 하에 항생물질을 남용해 온 현대의학은 국민의 체질을 얼마나 열악하게 만들었던가! 이와 같이 "유해한 것, 지장이 되는 것은 죽여라"라는 식의 차별사상에 지배된 농업이나 의학이 과연 우리 민족의 장래를 책임질 수 있는가? 오늘 청소년의 오줌이나 똥에 비상재성(非常在性) 곰팡이나 균이 우글거리고 있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항생물질의 해독이 깊게 넓게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된다. 우리는 농의(農醫)는 일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5) 종-의(宗-醫) 일체

  식사를 한다는 것은 동물과 식물의 생명을 하느님으로부터 하사 받는 것이다. 동물이나 식물들도 할 수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보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그 생명을 지금 우리에게 바쳐 죽는 것이다. 본래 우리들과 같은 생명을 말이다. 그 생명을 우리들에게 바친 동물과 식물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 먹는 이 생명은 6시간 후면 우리의 생명으로 변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생명을 보다 보람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농민 영성의 회복을 위하여

  오늘날의 농민은 본래 하느님이 주신 신령한 품성을 다 상실 하고 말았다. 이것은 농민을 피지배자로, 피수탈자로 만든 체제의 산물이다. 농민의 영성회복은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으로써 이것은 농민 자신과 모두의 구원이다. 이것을 농심의 부활이라고 표현해 본다. 그러면 본래의 농심과 황폐화된 농심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본래의 농심은 땅과 자연을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가 소중한 이웃으로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농민이 도구로 취급받으면서 농민들 역시 자연을 자신의 도구로 여기게 되었다. 농민이 수탈의 대상이 되면서 농민들은 자연을 수탈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웃들도 더 이상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히 경쟁자 이상의 의미를 두지 못하게 되었다.

  서로가 어울린 축제의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여 조화를 이루는 경종(耕種)방식으로, 심을 때와 거둘 때를 어기지 않고 자연과도 일체를 이루었다. 농가월령가는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심은대로 거두고 일한 만큼 되돌려 받으며, 수확한 것으로 자족하는 가난한 마음은 감사와 더불어 내년을 준비하는 희망에 살게 했으며,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삶의 덕목으로 돈과 무관한 추수는 정말 기쁨이 넘쳤다. 또 길흉사 때 상부상조하면서 기쁨도 어려움도 서로 나누어 가졌다. 이렇던 농민의 영성이 왜 혼미해져 가는가? 아니 영악해지고 있을까? 그 원인은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체제와 문명으로 치장한 맘몬과 바알의 유혹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황폐화된 농심의 메마른 영성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고도의 화장기술로 오히려 미화되고 숭앙받는 현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 농심의 현주소를 한번 찾아가 보자.

  (1) 돈이 되는 군것질 작물로 집중하고 삶의 절대가치를 지니고 있는 곡물은 기피한다.

  (2) 상품성을 높여 소득을 올리기 위해 살생약탈농법을 고도로 발전시켜 독으로 저려진 식물을 생산해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관행이다.

  (3) 전 생태계를 마구 파괴해도 책임을 지는 이가 없고 행정에 의해 농업을 통한 환경파괴가 진행중이다.

  (4) 따라서 땅은 생산력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이 돈이 주인이 되고 인간은 그 수단이 되어버린 그 사회는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고 따라서 인간도 상품도 그 무엇도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만연되어 속이고 또 속으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삶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것이다. 여기서 농민 속에 깃든 영성과 기성종교가 말하는 영성의 차이는 무엇인지, 이것은 농민신학이 규명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니카라과의 농민들이 말하는 농민의 영성을 정리해 보면서 소위 영성시대라고 말하는 시대를 살면서 또 맞이하면서 참 영성에 대한 이해와 우리 삶 속에 살아 움직이는 영성을 위해 조그만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말을 맺고자 한다.(참고: 가르디날의 『민중의 복음』 이현주 역) 

   ①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영
   ② 남을 섬기는 영
   ③ 미래 사회의 영
   ④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영
   ⑤ 평등과 풍요한 사회의 영
   ⑥ 혁명의 영
   ⑦ 사랑의 영 

  이들이 말하는 농민의 영성은 민중지향적임을 느낀다. 농민의 영성은 농사하는 일터에서 또 모든 삶 속에서 살아 있는 영성이다. 구도자 니고데모가 예수께 영생의 진리를 물었을 때,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가르쳤다. 거듭남 - 이것은 한 개인의 품성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것이 삶의 양식을 바꾸어 놓는다. 이와 같이 농민의 영성은 먼저 개인적이다.

  두번째는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따라 공생하는 삶이다.(자연, 인간) 하느님의 창조질서는 서로 먹이사슬로 얽힌 공생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삶의 현장에 살아있는 영성이 아니면 공생은 불가능하다. 인간과 자연의 공생이 인간끼리의 공생을 가능케 한다. 이런 관계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 정상화이다.(공동체)

  세번째  마지막 심판 때 심판주께서 심문하시는 내용이 "네 이웃에게 네가 어떻게 했느냐?"(마태 복음 25장 참조)라고 물으신다. 그 이웃은 기득권자가 아닌 소외되고 배우지 못하고 억압당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이들은 성서의 표현대로 지극히 작은 소자이다. 이들은 민중이다. 백성(百姓)이다. 그래서 농민의 영성의 세번째는 민중지향적이다.

  21세기를 말하는 미래학자들의 말은 황홀하다. 이것을 주도하는 것은 과학이라는 신흥종교이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또한 그 결과를 그 누구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무책임하고 불확실한 사안들이다. 살아있는 영성의 소유자가 영성의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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