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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증전도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Stephan
1.
김성수 목사 칼럼 1(2013년 3월 11일)
보고 싶은 서머나 가족 여러분께...
김성수 목사입니다.
저는 지금 치료를 잘 받고 있고 좋은 컨디션으로
서울 서머나 교회 설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이 여러분에게 전해질 때쯤이면
저는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바다를 보고 있을 겁니다.
거기서는 바다가 설교를 하고 목사가 설교를 듣는다고 하지요...
거기 서서 한없이 바다를 보고 싶습니다.
그 바다의 그림과 어울리는 요요마와 엔리오 모리꼬네의 앨범을 들을 겁니다.
그 또한 제게 설교가 되겠지요.
지난 8년간, 아니 목사가 되어 설교를 시작한 지 딱 10년이 되었네요.
그 10년 동안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습니다.
거의 천 여 편이 넘는 설교 원고를 쓰고 열 두 권이나 되는 책을 쓰면서
저의 에너지는 거의 소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복음을 상의할 만한 멘토 하나 없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적들의 공격을 받아내며 홀로 달렸습니다.
물론 그 뒤엔 여러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고요.
그렇게 믿음으로 계속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만 몸이 고장이 나더군요.
치료를 받으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진짜 동지는 너무 드물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길을 가고 있다는 수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의 메일을 받았지만
정작 그들과의 대화는 편지 두 장을 넘어갈 수 없는 일천한 것이었고
철저한 인본주의와 율법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은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자꾸 혼자만의 공간으로 숨어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숨어서 대적들과 세상을 향해 휘둘러야 했던 분노의 칼을
저에게 들이대었던 것입니다. 그게 병이 된다고 하더군요.
여러분을 만나러 가고 싶었습니다.
잠시지만 작별의 인사를 씩씩하게 하고 서울 서머나 교회로 향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치료가 늦어지면서 여러분의 얼굴을 웃는 낯으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렇게 인사를 대신 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저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저에게도 여러분이 너무 소중합니다.
우리 서로 기도 많이 하자구요.
저도 여러분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서울 서머나 교회를 위해 기도 많이 해 주세요.
곧 뵐 겁니다.
그때까지 건강하게 행복한 신앙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할 겁니다.
목회자의 설교는 말과 함께 목회자의 삶이 동시에 전달이 되는 것임을
오래도록 잊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여러분에게 그 행복과 당당함이 함께 전해질 수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렇게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성수 목사
2.
김성수 목사 칼럼 2
지난 며칠간, 설교 준비라는 중압감에서 해방이 되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상고해 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삶의 길목마다에 세워져 있는 에벤에셀의 돌탑들이
내겐 너무나 은혜로운 전환점들이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신앙생활은 열심 그 자체였다.
열심이 특심이라는 말은 꼭 내게 어울리는 그런 말이었다.
난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줄 알았다.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다보면
하늘도 감동하여 천국에 보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생활의 내용이겠거니 살았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한국 개혁주의 진영의 독보적 목사님들 몇 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난 한국교회 전반에 퍼져 있는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의 허상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신비적인 경험을 허다하게 해왔던 내게 그러한 신학의 스승들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용한 목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개혁신학의 틀 위에서 나의 신학이 정립이 되어갈 즈음
난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다.
친정이 미국인 아내를 만나 그것도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난 그곳에서 침례교 신학과 감리교 신학과 장로교 신학을 각 2년씩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스승들을 또 붙여 주셨다.
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스승들을 만나면 귀찮을 정도로 그들을 달달 볶아대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이고 낮이고 난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거머리 같은 사람으로 살았다.
처음에는 그러한 학문적 욕구 충족의 차원에서 선생들을 못살게 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난 기독교의 실체를 하나하나 정립해 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내 좌우명이 ‘스승을 만나면 반드시 그 스승을 뛰어 넘자’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난 길게는 2-3년, 짧게는 수개월 만에 그 스승들이 갖고 있는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었다.
난 하루에 서너 시간 잠자는 시간 외엔 책상 앞에서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 목회에도 신경을 쓸 수가 없었을 터.
난 목회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여 놓고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관리하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솔직히 말해 ‘나의 구원’이었다.
이렇게 죽도록 공부를 해서 정립하고 가르치고 믿었던 것이
‘아니요’에 해당하는 것이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서 정말 죽도록 공부를 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내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진짜 어떤 분이신가?’였다.
그 선생들로부터 소개받은 개혁주의 신학의 교과서라 해도 과언이 아닌
로이드 존스나 아더 핑크, 존 오웬, 바빙크,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게할더스 보스, 클라인 등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 지식의 교집합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중세 종교 개혁 이전의 엉터리 율법주의로 회귀를 한 듯한
왜곡된 개혁주의 신학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신학자들 각자가 서로 어긋난 소리를 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만했다.
그런데 신학자 자신의 일관성 없음이나
한 책 안에서의 삐걱대는 논리는 그야말로 억지다 싶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서성이고 있을 때 난 원어 성경에 눈을 돌렸다.
그런데 미국에는 원어 성경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많이 없었다.
아니, 전문적인 언어학자들이나 문자 고고학자들은 아예 날 상대도 해주지 않았기에
주변에 있던 목회자들을 돌아보았을 때의 내 판단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신학교 때부터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재미있게 공부했던 나는 혼자서 사전을 가지고 씨름을 했었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부터 설교에 원어를 너무 많이 섞어서 쓰는 설교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부족했다. 신학교 몇 년 동안에 배운 일천한 원어 실력으로는 성경의 진의 파악이 많이 힘들었다.
그렇게 밀려서 한국에 입성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도 나에게 좋은 스승들을 붙여 주셨다.
하나님은 라틴어와 아람어, 그리고 수메르어를 수십 년 간 연구를 해오셨다는 교수님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
어떤 분은 40년 가까이 아람어만을 연구해 오신 분도 계셨다.
그런데 그 분들 모두가 나를 참 귀하게 대해주셨다.
그런 거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목회자가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원어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는 선배 목사님과 후배 아이도 만나게 되었다.
난 예의 그 오기가 발동해서 몇 개월 안에 그들의 울타리를 넘으리라 결심을 하고
밤잠을 설치며 원어 연구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그 분들로부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수님들이 추천해 주신 프랑스와 영국의 문자 고고학자들의 책들을 하나하나 탐독해 들어가면서
난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흐르는 문자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고네의 글자와 도상, 넬슨 굿맨의 예술의 언어, 폴 리쾨르의 상징이론에의 접근, 모리스 블랑쇼 끝없는 대담,
벤베니스트 알파벳은 시나이 반도에서 탄생했다, 등등 많은 책을 샅샅이 읽었다.
그러고 나니 우가리트어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상형문자, 그리고 가나안의 패니키아 문자와 원 시나이어,
그리고 아람어와 고 히브리어, 그리고 거기서 흐르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지금의 알파벳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난 이제 성경을 문자로 곡해케 하는 마소라 문법에서도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 알파벳(알렙+베잍, 알파+베타, 하나님의 성전)이
원 시나이어(BC1,500년경 모세 때)에서 발출되고 생성되었다는 것도
언어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그림문자에 가까운 원시나이어와
그것과 섞여서 하나님의 역사 속 택한 백성들에게 사용되었던
아람어와 히브리 고어들의 연관성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열심을 다시 한 번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원 시나이어의 그 그림문자로 내 이름 석 자뿐 아니라
간단한 의사소통의 언어도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연구를 하고 당시의 고문서들을 열심히 읽어 보아도
그 문자들의 원의 추적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파자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생경하여 그 작업에 푹 젖어 있었다.
그런데 고문서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문자의 내용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자음 알파벳 일곱 번째 글자인 ‘자인’은
‘무기, 대립, 갈등’ 등의 의미를 담은 문자로 히브리어 성경 해석자들은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고문서를 찾아 읽어 보니 그 문자는 혁명, 파괴, 활성화, 가운데, 재검토, 장식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나를 가르쳤던 아람어 선생은 무기, 대립, 갈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문자를 억지로 끼워 맞추어 주고는 ‘이게 정답이다’라며 일보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성경에서 찾아 읽어본 그 문자는 그런 의미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만일 그러한 기초적 의미 몇 개에 묶여서 성경의 그 무궁무진한 내용을
그 안에서만 정형화시켜 읽어내야 한다면 우리가 게마트리아(Gematria)나,
노타리콘(Notarikon)의 카발라들과 뭐가 다른 게 있겠는가?
그들은 중세 시대에 나타난 유대 신비주의자들이다.
그들도 지금 원어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가슴에 품고 있는
히브리 자음 값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으로 토라를 해석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러한 히브리 자음 값만을 가지고 파자라는 형식을 통해
성경을 그 틀 안에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이 ‘타로 점’을 만들어 낸 유대 신비주의자, 카발라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내게 문자를 가르쳐 주는 스승들에게 그 의미 값을 배우면서
반드시 성경의 모세 오경이나 선지서들이나 시가서의 어절들을 갖다 대 준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문자로 이해를 하는지를 자주 시험해 본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에게 문자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정리된 신학이 없다.
그래서 문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후배 아이는
하나님의 창세 전 언약이나 예정이나 선택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는 김성수 목사와 자기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문자를 공부하고 율법주의를 배격한다고 해서
절대 목적지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람어를 40년간 연구했다는 교수님은 불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묶어서 이해를 하고 있었다.
내 안에 이미 하나님이 있었는데 내가 그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란다.
그리고는 무슨 이상한 다단계 화장품 선전을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는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그들에게 건전한 신학적 바탕에 세워지지 않는 문자의 집이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 일갈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비주의에 대하여
“경험을 통하여 신을 인식함(cognitio deo experimentalis)”이라고 간단히 정의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문자 고고학에 빠진 그들은 그들보다 더 유치하고 얕다.
그러면서 자유, 자유 하는데 정말 밥맛없다. 무슨 놈의 자유가 그런 자유가 다 있나?
술에 취해 스승을 욕하고 다단계 화장품 판매를 독려하면서도
‘난 진리를 아니까 뭐든지 해도 돼’라고 하면 용서가 되는 건가?
좋은 동지들을 만났는가 싶었는데 또 난 그들과 다른 길로 홀로 접어들었다.
그러한 지적 허영심과 지적 호기심 충족을 ‘은혜 받음’과 혼동하고 있는
우리 서머나 식구들이 혹 있을까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진리 탐구에의 길은 참 길고도 험한 여정이다.
그래도 난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 더 열심히 파고 들어갈 것이다.
진리의 맥 안에서는 모든 게 하나인 것을 확실하게 알았으므로...
3.
서머나 교인들에게 전하는 한 성도의 고언
김성수 목사님 설교에서 한 발 넘어가 보십시다
지난 기간 동안 얼마 동안이나 들었는지 나는 내 시간적 개념이 망가질 정도로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반복하여 들었고 정말 많은 시간 많은 양을 들었던 것 같다. 내 지병으로 인해 나는 심각하게 기억이 사라지는 증상들이 있어서 지금은 기억의 형태가 아니라 무슨 몸으로 체득의 형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뭔 소리냐라고 하시겠지만 그냥 많이 들었다는 뜻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와는 별개로 그 목사님의 설교에 대하여 폄하하거나 추종하거나 그러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리고 니가 뭔데 설교에 대하여 의견을 말하느냐라고 하시는 입장이시라면 딱 여기까지만 보고 닫기를 누르시기 바란다.
난 논쟁을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그 해박하고 논리적이며 비판적이며 강력하며 통찰적인 김성수 목사님 설교에 대하여 그것에 꽉 묶여서 은혜로 넘어가셔야 하는데 못 넘어가시는 분들이 거의 대부분인 것을 발견하였고 말씀을 살아야 아는 것에 대하여 배움에 머물러버린 늘 부족한 학생의 상태만 고집하는 분들이 많은 것에 대하여 그 다음으로 넘어가시라는 손가락의 역할을 할 생각이다.
우선적으로 이해하실 것은 김성수 목사님은 진리로의 여정, 즉 과정 속에서 여러분들께 그 진리를 설명해 오신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이나 저나 김성수 목사님이나 다른 여타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살아나가는 그 여정 안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여러분은 목사님이 걸어간 신앙의 여정에 대하여 그저 배움을 자처해 버렸다는 점이다. 당연히 목사라는 지위와 성도라는 지위 사이에서의 성경지식의 불평등은 반드시 존재하였고 더구나 목사님은 더 많이 노력하였고 더 심도있게 공부하시느라 어쩌면 점점 그 격차가 커졌으며 소위 목사님이 진리라는 것을 찾기 위해 타종교에까지 관심을 가지며 습득한 정보들은 어쩌면 그는 그 진리의 여정을 살았지만 그것을 듣는 청자는 그저 그 지식에 매료되어 배우기에 급급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일방적인 설교를 통한 배움의 장이 되어버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지 아주 집요한 김성수 연구가 그 설교를 들으신 분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그 배움과 연구와 노력은 그들이 영적 교만의 상태로 이르게 하는 데 일조를 했으며 보통사람이 들으면 뭔 말인지도 모를 것들을 떠들며 뭔가 깨달은 도사마냥 지껄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마치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을 알아차린 듯한 그들의 어조와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자기성찰과 결부시켜 정말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그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 이 역사를 풀어놓으신 여정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데에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며 우리가 삶을 통해 알아나가는 것을 그 과정에 있으셨던 목사님의 여정의 내용을 배우고 암기하고 연구하여 머리에 담고는 그것으로 알았다라고 자부해버린 것이다. 과연 무엇을 알았을까.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끌려가는 것과 진리를 깨닫는다라는 의미가 서로 상충되어 받아들여져 버렸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공간을 넘어 진리라는 완성의 형태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경륜은 이 시공간 안에 있음을 자꾸 놓치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이 시공간을 자기가 넘어가지 못함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진리를 알면 이 시공간 따위는 소용이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진리가 되어 벗어났다든지 하면서 사실 뭐가 뭔지를 모르는 상황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정리해 보겠다.
첫째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경륜을 통한 진리로의 여정, 바로 진리라는 완성의 개념 속과 여정으로서의 시공간 안의 개념의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하시고 균형을 맞추셔야 한다.
김성수 목사님은 사셨지만 여러분들은 고작 들은 것이다. 개인의 삶을 목사님의 삶에 오버랩시키고 설교에 오버랩시키고 맞군요라고 장단 맞추는 것을 두고 말씀을 산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포인트가 중요한 이유는 여러분이 이 역사를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그 말씀과 삶이 무시간적이고 움직이지 않고 변개하지 않는 개념이 아니라 진리로 완성된 개념이지만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경륜이 우리에게 동적이며 역사하시며 살아 숨쉬는 개념의 은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말씀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고 무덤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해하실 것은 본인의 신학적 기반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보통은 이 교회 저 교회에 다니시면서 다 똑같아 보이는 것을 설교나 교회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습득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사실 요즘 목사들은 어디서 본인이 출발하였고 자신의 신학적 한계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하물며 성도들에게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일 수 있으나 이렇게 알아들으시면 좋을 것 같다. 단순히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과 같은 교파를 말함이 아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어휘들과 단어들의 이해의 근간 자체가 그 신학적 용어들의 정의의 한계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목사님 설교에서 여러분들이 처음 봉착하는 어려움이 어휘와 단어들일 것이다. 내가 은혜라고 말하는 것과 여러분이 알아듣는 은혜가 다름이다. 목사님이 은혜라고 말하는 것과 여러분이 받아먹으신 은혜는 다르다는 의미이다. 분명 목사님도 그 은혜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많았다. 은혜는 설명으로도 경험으로도 설명되어지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개개별의 착각과 오해가 반드시 존재하므로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로 다루어야 하는데 사실 나도 일 년 가까이 이 은혜만을 설명하는데 은혜가 아닌 게 없어서 설명불가에 빠질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당연한 것을 은혜라고 하면 여러분은 미친 놈이라고 말할 것이며 또한 왜 그게 은혜인지 설명하는 것이 생각보다 매우 어렵다.
여러분의 신앙의 시초에서부터 오해된 개념을 하나 둘씩 체크하시면서 그것으로 남들 비판하라는 말이 아니고 본인이 잘못 자리잡힌 신앙관과 단어, 어휘들을 검증해 나가셔야 한다. 이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다. 누구의 설교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소리다. 내가 여러분이 뭘 모르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한참 얘기했는데 딴소리하면 그것으로 조금은 알아차릴까. 그 순간 설명해준들 알아먹을 수 있느냐는 소리다.
세 번째로 이 땅의 역사들이 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로 오히려 하나님 차원으로 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이해하시면 된다. 하나님 차원의 하늘과 하나님 영광과 하나님 주권과 예정을 우리가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아버지 집으로 가겠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닌 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의 고백으로 그 소망과 기다림이 이 역사 속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으로 살아나가시는 데 초점을 맞추셔야 한다. 이 역사 속 모든 섬김과 봉사, 교회 생활에 대하여 온통 부정적인 인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차원으로써 이해하는 기틀이 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구원, 재림, 천국 등과 같이 생각 없이 사용되는 하나님 차원에서의 일을 두고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삶을 살자라고 입으로는 읊조리지만 사실 어렵다. 그래서 말로 떠드는게 아니라 살라는 말이다. 그런 삶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종국에는 그러하겠지만 그것을 아는 것은 그 전부의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삶이 여러분께 은혜로 다가와야 끝난 것이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역사니까 대충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먼저 알고 살면 여러분이 그것을 정확히 그 의미를 아는 것이겠는가.
네 번째로 성화론에 관한 것이다.
목사님이 성화론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처럼 다들 들리셨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논제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변화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기존 교회에서 말하는 멋대로의 성화론과 은혜로의 거룩을 의미하는 그 성화론과 성령을 통한 사랑의 온전함으로의 변화적 성화론에 대하여는 목사님은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성화론에 대한 기본 입장들을 비판을 하셨지만 명쾌한 설명은 없으셨다. 이 역사 속에 감내하거나 견뎌내는 등의 모습으로 묘사하였고 나도 그것을 설명하려 해도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나도 그 설명의 과정 속에는 있지만 기존에 교회에서 말하는 성화론이나 그동안의 성화론에 대한 설명은 모두 입바른 말들뿐이고 실제를 설명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오히려 성화의 개념을 우리의 육적 자아의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서 그것이 보이지 않은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설명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풀어서 접근하였다. 오히려 보다 근본적인 질문의 답이 되지 않을까 한다.
정의를 내리자면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던 자가 하나님 백성으로 여김을 받은 상태를 알았을 때를 나는 성화라고 본다. 이것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어디 논문 쓰려고 설명하는 것도 아니므로 딴지를 삼가시기 바란다. 그 성화가 기존의 설명과 다른 이유는 나는 구원이라는 자각에 대하여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이다. 내가 여러분들께 넘어가시라고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은혜를 알아가시는 데 그 삶 전체를 사용하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시작이 여러분 전부가 그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하셨으면 좋겠다.
다섯 번째 히브리어, 헬라어, 문자파자, 그리고 구약의 사건들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점철되는 것으로 이해한 부분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좀더 깊이 연구하시기 바란다는 당부밖에는 드릴 것이 없다. 이건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다. 조금만 틀어서 생각하면 곧바로 이단 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정도만으로도, 그리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시도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이긴 하다. 그런데 그것에 기준을 두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우선 원어적 성경해석과 문자파자에 대하여는 코멘트를 달지 않겠다. 나도 접근하는 단계라 무분별하게 목사님의 설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다만 굉장히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면 누구를 가르치려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또 이 부분인 것 같다.
나는 은혜로 풀어내지 못한다면 이 원어적 접근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단순히 번역의 문제나 뉘앙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정말 올바로 해석되려면 뉘앙스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알아야 정확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여러분들이 다른 분들의 번역이나 가르침을 계속해서 따라가셔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구약의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으로 이해한 부분은 상당히 탁월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얽매이지는 않으셔도 된다. 논리나 수사학적으로 접근하시다보면 성경을 도해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우린 무슨 암호집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먼저 내용을 보시길 바란다. 그것이 예수로 이해되셨다면 그렇게 알아먹으시면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여러분이 자랑할 것은 없다. 누구를 가르치려 들지 말고 이해한 것을 검증받아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섯 번째 율법은 은혜이다.
목사님의 설교를 잘못 이해하면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집착적 성향으로 인하여 오히려 인간 자체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율법이라는 자체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로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무율법주의로 오해할 수 있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과 무개입을 강조하면서 율법이 전통교회에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어떤 것으로 자기 의와 인본을 구축하는 데 악용되어졌음을 설명하였고 타인에 대한 선악판단과 정죄를 야기시켰다는 것을 중점으로 다루었었다.
그러나 깊이 있는 설명이 뒤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약해보이고 넘어가는 식으로 설명하였던 것이 바로 율법 그 자체가 은혜임을 다룬 것이다. 여러분은 이 부분이 더욱 중점이 되어야 한다. 율법이 은혜가 아니면 율법의 완성도 은혜가 아닌 것이다. 이 율법이 은혜로 이해되어지는 부분에 대하여는 내가 다른 포스트들을 통해서 다루어 왔으나 나도 역부족이다. 그러나 이 율법의 이해는 바로 자유의 개념이 여기서부터 도출된다는 점을 이해하셨으면 좋겠다.
일곱 번째 자유.
예수 십자가 자유! Only by Grace!
사실 이 표어와도 같은 이것은 목사님의 생각을 다 담은 신학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그 많은 설교 속에서 그렇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껏 살아계셨다면 그 로마서 강해가 은혜로 끝나는 방대한 양의 은혜 이야기로 갔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숙제처럼 나도 이 은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러분들이 바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넘어가야 할, 지향하여야 할 방향이자 손가락이 바로 은혜이다.
자유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오로지 은혜 안에 있어야 한다.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자유함을 마치 방종으로 오인하는 게 안타깝다. 여러분들 중에는 목사님의 생전의 설교에 붙들려 무한반복으로 가시고 계실지 모르겠다. 나는 그 다음, 주 안에 있을 자유에 여러분을 초대하는 바이다.
나는 한동안 목사님이 이 자유 안에 있는 정점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었다. 그러나 목사님도 이 자유에 대하여 이해는 하셨지만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한계점이 그 자유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게 함을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그 자유로의 열망을 예수 그리스도로 꿈꾸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역사 속에서의 성도는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아주 몇 번만 그 자유를 만끽하기도 할 수 있겠지만 이내 그 느낌이 사라져 버리는 것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속성을 완전히 벗어낼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이것을 죽음의 향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란 존재가 어찌할 수 없음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것은 반대로 은혜로의 의탁을 그만큼 가능하게 한다. 내 것을 비워내어 예수의 것으로 채워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내 그릇을 깨뜨리시고 예수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다. 여러분이 그 하나님께 가져갈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는 것이다. 자유란 바로 이런 의미인 것이다.
여덟 번째 은혜의 잣대.
나는 여러분이 성경을 보실 때 은혜의 잣대를 가지게 되시리라 여긴다. 이건 누군가의 설교를 통해 알아먹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관점의 전환이 여지껏 나란 존재에 집중하던 성경 해석이 오로지 하나님이 일하시고 경륜해가시는 관점을 옆에서 지켜본다라는 제3자적 입장에서의 관점이다. 내가 뭘 하는 건 없어진다. 이 역사 속에 개입되는 것이 없는 순수한 경륜의 상태를 보시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하시고 완성해 가시는지를 명확히 보실 수 있게 된다.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안 나타난 것이 없다. 악을 사용하시어 선을 드러내심은 물론이며 죄를 사용하여 의를 깨닫게 하심은 늘상 있는 일이다.
만약 여러분의 입장이 이 악이나 선의 입장에 서 계시다면 절대 알아볼 수 없다. 여러분이 스스로 의의 자리를 쟁취한다면 반대로 여러분은 의가 되고 나머지는 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느끼는 은혜는 여러분의 착각인 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절대 의가 될 수 없다. 그건 진리를 전하다 가신 목사님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것을 곡해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이 은혜의 잣대가 사실 내가 굉장히 여러 포스트들을 통해 설명해온 것이다. 나에게 있어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았다면 그 율법도 은혜요 죄도 은혜인 것이다. 오로지 이 하나님이 경륜해 가시는 은혜의 지평에 오로지 그 길에 참예하여 가는 여정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자주 그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느니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의 것이 아닌데 여러분의 것인 양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목사님은 분명 이 은혜의 잣대를 가지고 있으셨으면서도 반대로 땅의 것을 들어 하늘의 것을 설명하려고 수많은 땅의 것을 사용하셔왔다. 그것에 여러분이 매몰되지 않으셨으면 한다. 명백히 그런 것은 몰라도 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설명한 내용은 그 무엇을 알아차리면 그 설명은 무의미해진다. 여기서 그 무엇이 중요한 것이지 그 설명이 중요한 게 아니란 의미이다. 간혹 억지추측이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그 설명이 세상이 보기에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 되었고 그 설교가 지탄받는 일이 된 것이다.
관점이란 이래서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을 볼 수는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려면 먼저 여러분이 의의 자리건 악의 자리건 죄인의 자리건 선악과의 자리건 그 자리의 의미를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 보실 수 있으셔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홉 번째 그 사랑.
여러분들이 궁극적으로 알게 될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은 정적인 완성의 개념이기도 하고 이 역사 속에서는 진행형의 개념이기도 하다. 차원의 개념에서 여러분이 여러 가능성을 이해하셨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차원마저도 모형들이다. 결국 그 사랑 안에 계시된 것들이다.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로 그 사랑의 힌트를 발견하였다. 문자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진리로도 모두 하나를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이 이 요한복음 3장 16절과 계시록의 내용이 여러분과 무관하면 그 사랑과도 무관한 것이다.
성경은 당신의 사랑을 표현한 덩어리이다. 덩어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게 여러분께 무슨 의미이겠는가. 그 사랑 안에 매몰되어가는 여러분이 그 사랑을 받은 자들 아니신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데 있어 성경을 많이 인용하지 않는 이유는 이젠 내게는 그 성경의 내용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넘어가면 성경도 역사도 묵시도 그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성경 속 내용이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그 사랑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여러분의 삶이 성경이 뜻하는 바, 당신의 사랑으로 전달되지 아니한다면 그 성경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그 사랑의 내용과 그 사랑이 지향하시는 방향과 그 사랑과의 연합과 그 사랑의 완성으로 가는 여정에 여러분이 함께 있으신 것을 알고 가시면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구원에 초점을 맞추시면 그 구원이라는 완성점에 사랑을 이용해먹기 급급한 것이다. 그건 그 사랑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잣대를 통해 여러분들은 그 사랑을 배워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 자체가 주체이고 그 사랑의 이유도 그 사랑의 선택도 그 사랑의 결과도 그 사랑이 주체이며 이유이다. 여러분들이 늘상 하나님 마음대로이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성경은 그 사랑의 내용이며 표현이며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그 성경을 당신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신다면 그 사랑과 무관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 사랑의 내용을 알아 그 사랑으로 매몰되어 가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열 번째로 그만 돌아다니시길 바란다.
사람들이 평가하고 비판하고 폄하하고 비아냥거리는 글들과 질문과 답변들이 난무하는 이 인터넷 공간에 여러분이 그토록 추구하시는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탐심이다. 그래도 말린다고 안 돌아다니겠는가. 여러분들이 어딜 가서 공부를 하시든 누구의 설교를 들으시든 누구의 가르침을 받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진리는 그런 곳에서 학습한 것으로 여러분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글에서 어떤 분들이 성경을 도통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윽박지르시는 분들이 꽤 많았다. 나는 그분들이 알고 있는 성경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김 목사님도 여러 곳에 올려지고 카피되어진 글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어릿광대들의 글들에 대하여 별로 대꾸를 자제하셨었다. 그러다가 다 삭제하시기도 하셨지만 나도 내 글이 이리저리 카피되어 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못 읽게 하는 것도 아니고 카피해가서 평가받는 것도 뭐하는 짓일까라고 생각이 든다.
나는 여러 성경교사들이 알고 있는 그 성경은 잘 모른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해박한 성경지식에 대하여 나는 고한다. 그 성경과 무슨 상관이 있으신가.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그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으신가. 왜 성경교사가 되셨는가. 그리고 그 성경이 당신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결국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을 신앙 초기에 했었고 그 답을 받았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은혜를 말하는 자가 되었고 나는 그 은혜로 끌려가는 자가 되었다. 나에게 있어 여러 인터넷의 글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별로 없었다. 나의 글도 사실 여러분께 무슨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사실 나의 글의 제일 청자는 나다. 댓글의 형태가 아니라 누군가의 글을 비판하는 그런 글이 아니라 그대가 깨닫고 알아가는 은혜를 자신만을 위해 글을 남겨 보심이 어떠신가. 그래야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스스로가 가늠해 가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쓰고 이렇게 정리하는 글 자체가 나의 기도이자 찬양이다.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를 한 발 넘어가보자는 이 글의 포스트는 참 오랜 시간 전에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서머나 교인들이 영상예배로 무한 반복하고 있음을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였었지만 한편으로 답답함이 있었다. 그건 내가 알고 있는 김성수 목사님의 의도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인의 참 많은 시도들을 밟고 다음으로 넘어가시라는 겸손을 나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내가 가는 이 길이 옳은가라고 늘 되새기셨는데 성도들은 배움에 묶여버렸다.
뭐 상관은 않겠다. 배움이 모자라다고 여기는 분들은 그 배움에 목을 맬 것이고 그것이 싫다라고 하시는 분들은 그 마음대로 하시겠지만 나는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의 잣대를 품고 진리로 나아가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은혜를 모르면 그 성경이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역사 동안에 힘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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