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곤명(昆明)지방의 소수민족 생활문화 탐방
나는 1993년 여름방학 때 중국 서남지방의 깊숙한 오지 운남성(雲南省)의 곤명(昆明)일대로 학술교류 및 답사여행을 갔었는데 이것이 두 번째 중국 나들이다. 8월 3일부터 13일까지 곤명의 사회과학원의 초청으로 한중학술발표회를 갖기 위한 것이었지만 27개 소수민족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는 운남성 일대를 답사하여 그들의 생활문화(민속)를 직접 접해 보기 위한 기회였다. 모두 36명이 갔었는데 일부 동반하는 교수의 부인들로 탈춤반을 급조하여 소수민족들과 어울려 춤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택규, 성병희, 이수봉, 지춘상, 최래옥, 윤광봉, 김상홍, 강재철, 임재해, 박진태, 김용덕, 구장회, 김영, 김명자, 김태연, 서혜경, 하수경, 박영선, 신월균, 변종현 교수 등이었는데 이수봉, 구장회 교수는 상해에서 합류하였다. 구장회 교수는 세계적인 언어학자로 알래스카 주립대학에 있다가 이때 미국 본토로 옮긴 직후였는데, 마침 중국에 와 있다가 우리 일행이 온다니까 합류한 것이다. 이 분은 1980년 경부터 나와 알게 되어 부안에도 두 번 연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왔었고 이때 부안여고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연구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을 한 일도 있어 나와는 친숙한 처지다.
일행은 탈춤반의 교수들 부인까지 모두 36명이었고 최인학 교수가 인솔 책임자였다. 첫날 상해(上海)의 은하(銀河)호텔에 투숙하고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였으며 박물관과 번화가로 유명한 남경로(南京路)와 거대한 입불과 와불이 모두 아름다운 옥으로 조성, 안치된 옥불사(玉佛寺)를 구경하였다.
임시정부의 청사는 골목길가에 있었는데 아무리 가난한 망명정부의 청사라지만 너무나 초라하였으며 김구(金九) 선생을 위시한 임정의 요인들이 이곳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잔악한 일제와 싸우며 나라의 명맥을 지켜왔음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웠다. 목조 건물 3층으로 1층이 회의실, 2층은 집무실, 3층은 숙소로 되어 있다. 나라를 되찾은 지 반세기가 되도록 이 역사적인 기념물이 이렇게 초라하게 방치되고 있는 것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이 숙청되지 않고 정부 내의 요직에 잠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분강개함을 삼키며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좌상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고는 돌아섰다. 이번 여행에서는 시종 전남대학의 지춘상(池春相) 교수와 함께 숙식을 하며 즐겁게 지냈다.
8월 4일 아침 8시 15분 곤명행 상해항공기로 출발했는데 끝없는 대륙의 광야와 홍수로 범람하고 있는 양자강의 긴 강줄기를 굽어보며 30분쯤 날아가니 첩첩한 산들이 나타나 끝없는 운해에 잠겼다 떴다 하며 11시쯤에 곤명공항에 도착하였다. 해발 2,000m 고원지대에 있는 곤명시는 인구 330만, 연평균 기온이 18도여서 항시 봄 같은 도시라 하여 춘성(春城)이라고도 한다. 곤명대세계반점(昆明大世界飯店)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이 붙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음식이 매워 목구멍이 얼얼하였으나 맛은 좋았다. 중국 남서부지방의 음식은 매운 것이 특징이라 한다.
오후에 곤명박물관을 보고 샤니족(撤泥族)이 많이 살고 있는 석림(石林)으로 갔다. 석림이란 기암괴석이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5~10여m 씩 솟아 돌숲을 이룬 것을 말하는데, 1만 5천 년 전에 지각의 변동으로 해저(海底)가 융기되면서 형성된 현상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돌숲은 조물주의 조화로 조성된 경이로운 경관이었다. 나는 이 돌숲에 매료되어 돌숲길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일행을 놓치고 언어불통으로 고생하다가 기념품상의 주인과 서툰 일본어를 사용하여 간신히 샤니족 마을방문을 하고 있는 일행과 뒤늦게 합류할 수 있었다. 샤니족들은 뛰어난 솜씨의 수예품과 관광안내로 살아가고 있었다. 석림빈관(石林賓館)에서 저녁을 먹고 밤 10시 경에 곤명으로 돌아와 금룡(金龍)호텔에 투숙하였다.
아침 8시 반 운남성사회과학원(雲南省社會科學院)에 도착하니 하진화(何振華) 원장 이하 직원들이 현관 앞에서 우리 일행을 맞았다. 회의장에서 이곳 학자들과 상호 인사와 선물을 교환한 후 김택규, 최인학, 지춘상, 김용덕, 박진태 교수 등의 발표와 중국 측에서 5명의 학자들이 발표하였으며 통역은 북경대학의 갈진가(葛振家) 교수가 맡았다. 발표가 끝난 뒤에 좌담을 겸한 다과회를 가졌으며 남원반점(南園飯店)의 민족무악찬청(民族舞樂餐廳)에서 점심접대를 받았는데 미모의 가수와 피리수들이 노래와 연주로 환대하였다. 오후에는 우리측 여교수들과 교수 부인들로 편성된 탈춤 연희가 있었고 이곳 사회과학원 여직원들로 구성된 샤니족 전통무용연희가 있었으며 막판에 모두가 한데 어울려 샤니족 무용으로 신명풀이를 하였다. 그리고 운남사회과학원, 서남민족학회의 간부들과 운주대주점(雲酒大酒店)에서 만찬을 하였었다. 우리 일행은 밤 10시 특급침대열차로 귀주성(貴州省) 안순시(安順市)로 출발하였다. 안순시는 인구 60만의 관광도시며 열 두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그중 묘족(猫族)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아침 7시 안순역 도착. 차에서 내리는데 10대 소년 두어 명이 우리의 주변에 접근하여 맴돌다가 그곳 공안원(경찰)에게 잡혀갔는데 그 아이들이 모두 소매치기라고 한다. 안순민족반점호텔에서 물만두, 쌀죽, 삶은 계란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곧 버스로 채관둔(蔡官屯)이라는 묘족마을을 방문하여 20명으로 구성된 묘족들의 탈춤과 연극을 보았으며 마을 안 집집에 들어가 가옥의 구조며 생활상과 연모 등을 살펴 보았는데 마을의 입구에는 마을수호신을 모신 동제당(洞祭堂)이 있었다. 우리나라 마을 지킴이 수호신을 섬기는 당집이나 당산과 같은 것이다. 당의 안에는 한 쌍의 부부주신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들딸 동자신상을 가족신으로 모셨고 닭털로 장식된 ‘有求必應’ 네 글자가 주신상의 뒤에 붙어 있었다.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인 듯 하다. 또 벽에는 ‘感神靈無災無難 佑衆生五穀豊登’의 재난을 없애고 풍년을 비는 주술적 보우축원문이 붙어 있어 우리나라 마을수호 당산의 기능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집집의 대문 정면 위에는 거울 하나씩을 걸었는데, 이는 병마와 사악한 잡귀들의 침입을 퇴치하는 주술적인 신물(神物)로 우리 궁궐안의 드므와 그 기능이 같다.
채관둔 마을에서 10km쯤에 용굴폭포와 수중용굴이 있어 배를 타고 들어가 그 장엄한 수중의 경관을 구경하였으며 오후에 포의족(布依族)들이 살고 있는 황과수폭포(黃果樹瀑布)로 가서 구경을 하였다. 용굴폭포나 황과수폭포는 포의족들이 원래 이곳에 살며 그들의 수호신을 모시는 성지(守護神聖地)로 받들며 제사 지내던 곳이었다 하는데 지금은 모두 관광지가 되어버려 쫓겨나 관광객 안내나 하고 비닐 우의(雨衣)나 팔면서 살고 있다. 폭포의 폭이 80여m, 높이 70여m의 초대형의 폭포로 그 주변이 온통 물보라요, 이리저리 무지개가 걸쳐 있으며 우의를 입지 않고는 접근하기 힘들었다. 나는 지춘상, 이수봉 교수와 셋이서 포의족 우의장사 소년에게 안내 비 2원을 주고 그 장엄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80m 폭포 안으로 들어가 암벽길을 간신히 통과하고 나왔는데 일행 36명중 이를 감행한 사람은 겨우 8명뿐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밤에 묘족들의 경쾌하고도 현란한 무용을 관람하였다.
8월 7일 호텔에서 쌀죽과 땅콩국수, 삶은 계란 2개, 두유에 커피를 타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11시쯤에 안순지구 이패현(二竣縣)에 있는 관구묘족촌(關口猫族村)에 도착하였다. 이 마을은 소수민족들의 관광마을이다. 미리 연락이 되었던지 마을 입구에 전통의상을 한 주민들이 모여 환영을 뜻하는 폭죽을 터뜨리면서 노생(蘆笙)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며 환영하는 입촌의식(入村儀式)을 행했는데 촌장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들의 전통술을 소뿔 술잔(牛角盃)에 따라주면 이를 받아 마셔야만 마을에 들어갈 수 있는 의식이었다. 노생이라는 악기는 생황(笙篁)과 비슷하나 소리가 청아하고 은은한데 얼마나 정겹고 듣고 싶은 소리면 ‘묘족들 어머니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소리라고 하였을까 싶었다. 이어서 30여 명의 남녀가 두 명의 노생연주 가락에 맞추어 차분하고 단조로운 묘족 전통춤을 한바탕 추었다. 다음은 노생 3명, 피리 2명, 풀잎피리 1명, 작은 피리 2명 등 8명의 기악연주가 있었으며 이어서 우리나라의 새납과 비슷한 악기 연주자 2명, 바라 1명, 북 1명의 합주가 있었고 다섯 명의 처녀들이 나와 춤을 추고 2명의 노생 연주에 맞추어 서로 한발을 걸고 외발로 추는 발걸이 춤을 추었는데 흥겹고 역동적이었다. 50대의 노년 남녀가 각기 5명씩 나와 여자들이 노래하면 남자들은 짧은 소리로 응답하는 형식의 노래 한마당이 있었고 4인의 여인들이 나와 탁구채 모양의 채로 깃 공을 쳐올리는 놀이 한마당을 끝으로 묘족들의 연희놀이를 끝내고 우리 학회의 탈춤반 탈춤 공연에 이어 묘족들과 우리 일행이 함께 어울려 신명나는 춤판을 벌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떡치기 놀이를 하였는데 떡판이 소 구시 형태였으며 메는 우리나라 것과 비슷하였고 두 사람이 나와 떡을 쳐서 곤장 모양의 긴 주걱으로 떡을 떠서 우리 일행에게 나누어 주고 마을 사람들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출촌(出村)의 의례에 따라 마을을 나왔는데 출촌의 의례도 입촌 때처럼 마을 사람들이 출구에 모여 폭죽을 터뜨리며 술을 한 잔씩 권하고 붉은 물감을 들인 삶은 계란 한 개씩을 끈에 매어 목에 걸어주면 1원 50전씩을 내고 마을을 나오는 의식이었다. 이패현의 관구묘족촌 방문 답사는 매우 인상적이고도 유익한 중국 소수민족들 생활문화 체험이었다. 마을의 7~8세 어린이들이 아무런 스스럼없이 담배를 꼬나물고 피우고 있었으며 옆에 있는 어른들과도 과자나 떡을 나누어 먹듯이 담배를 나누어 함께 피우고 있는 흡연 문화를 보고는 놀랍고도 다소는 당황스러웠다.
우리 일행은 동족(今族)들이 살고 있다는 홍풍호(紅楓湖)의 섬 동족촌을 향하여 청진시(淸鎭市) 옆의 홍풍호로 떠났다. 바다인지 호수인지 구분이 안되는 홍풍호의 넓이는 5만 2천 ㎢ 라고 한다. 배를 타고 30분쯤 호수 안으로 들어가니 섬이 나오고 섬에 오르니 동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 안에 수예박물관이 있었다. 동족들은 수예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강택민(江澤民)이 쓴 비문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는 이내 귀양시(貴陽市)로 돌아왔다.
귀양시는 인구 120만으로 귀주성(貴州省)의 수도며 중국 최대 술의 명산지다. 귀주반점(貴州飯店)호텔에 짐을 풀고 마침 국제술문화제절(國際술文化祭節) 행사의 전날이어서 축제가 열리고 있는 귀양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의 유물들을 치우고 그 자리에 각종 술들을 전시하고는 묘족들의 춤과 노래로 축제의 분위기를 높이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마오타이주(茅台酒)도 이곳 마오타이 마을이 원산지라고 한다. 모택동이 장개석과의 내전을 승리로 끝내고 그 축하연의 축배를 이 마오타이주로 했다 하여 더 유명해진 술이다. 나는 마오타이주 한 병을 220원(한국돈 약 3만원)을 주고 샀는데 호텔 측에서는 술 문화 축제기간이라고 신주(神酒) 한 병씩을 선물로 주었다.
8월 8일 아침 8시 반 서안행(西安行) 비행기를 탔는데 탑승객의 짐 검사가 까다로웠다. 국내선 비행기에서 이렇게 여행객의 짐 검사가 까다로운 이유가 무엇일까? 10시에 서안에 도착. 서안은 옛 이름이 장안(長安)이다. 1,100년 이상이나 여러 나라들의 수도였으니 중국 역사의 흥망이 이루어진 도시이기도 하다. 인구는 360만이라고 한다. 왕릉만도 73기가 남아 있으며 왕자, 공주, 왕족과 귀족들의 능침과 분묘 2만여 기가 남아 있다고 하며 한무제(漢武帝)의 무덤과 중국의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무문자비(無文字碑) 무덤도 이곳에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서안에 오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나고 간다’는 속담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진시황(秦始皇)과 양귀비(楊貴妃)를 만난다는 말이다. 두 사람의 묘가 이곳에 있고 이 두 사람의 유적만 보고가도 본전은 뽑는다는 뜻일 것이다. 건국호텔에 투숙, 점심 후 자은사(慈恩寺)에 갔는데, 이 절은 당나라 삼장법사(三藏法師)의 불심으로 세워진 절이라 하며 높이 64m의 거대한 대안탑(大雁塔)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또 절의 벽화에는 신라의 원측스님과 지장스님의 화상이 그려져 있어서 지난 날 나당(羅唐)의 교류가 범상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서점에 들려 책 구경을 하고 밤엔 인민극장에서 당대(唐代)의 고전가무(古典歌舞)를 구경하였으나 말도 못알아 듣고 뜻도 모르니 흥미없이 보았을 뿐이다.
8월 9일, 오늘은 여산(廬山)의 진시황릉 병마용(兵馬俑)과 화청지(華淸池 :양귀비의 목욕탕)가 있는 양귀비 별궁을 보러가는 날이다. 여산은 서안시에서 24km 쯤에 있었다. 진시황은 BC 290년 경 출생, 강력한 독재 제왕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하(中國)를 통일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皇)과 제(帝) 두자를 취하여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였으며 70만명을 동원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성하였고, 700개의 궁궐을 짓고 도교를 믿으며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을 구하여 먹었고, 수정으로 지은 아방궁(阿房宮)에서 절대군왕으로 영생불사 하고자 하였으나 겨우 49세를 살았을 뿐이다. 진시황의 능은 아직은 발굴하지 않고 있었는데 겨우 1호 갱(坑)과 3호 갱만을 발굴하는데도 20년 이상이 걸리고 한 해에 60만명 이상의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스스로 이곳에 와서 돈을 쏟아 붓고 간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다.
진시황의 능은 여산의 땅 밑으로 50m 깊이에 지하궁궐로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내성이 4km이고 외성은 6km라 하며 병마용(兵馬俑)은 외성의 1.5km 지점에서 지하궁을 수호하는 흙으로 빚은 실물 크기의 군인과 군마들인데 이것들만 발굴하는데도 얼마의 세월이 걸릴지 모르며 병마용이 몇 만개일지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언제쯤 이 지하의 진시황 능을 발굴하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또 한 번 중국의 불가사의한 옛 문화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1호 갱은 지금도 느긋하게 발굴하고 있었는데 일본과 미국에서 발굴을 돕겠다고 하여도 모두 거절하고 하대명년 만만디로 서두르지 않는다.
화청지는 천하제일의 미인 양귀비의 별궁에 있는 그녀의 욕탕의 이름이다. 낮에는 동궁에서 놀고 밤에는 현종(玄宗)과 더불어 청화지 온천수에서 목욕을 하고 서궁에서 즐겼다 하는데 안록산(安祿山)의 난에 쫓겨 신발 한 짝만 남기고 행방불명 된 이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절세미인은 지금은 그때 그녀가 사용한 목욕탕만을 남겼으니 격석화(擊石火 :매우 짧은 시간) 같은 삶이요 꿈같은 영화였다. 우리 일행은 화청지의 자운누식당(紫雲樓食堂)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서안시의 변두리에 있는 대명궁향(大明宮鄕)이라는 시골마을을 방문하였다. 중국의 농촌 문화촌 마을로 관광객들에게 공개하는 마을이라고 한다. 잘 정돈 되었고 유치원도 있었으며 깨끗하였으나 화장실은 여전히 문이 없는 개방 형태요 수세식이 아니었다.
덕발장주(德發長酒)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청나라 말의 여걸 서태후(西太后)가 아편전쟁으로 피난을 와서 먹었다는 공작연(孔雀宴)이라는 21종의 만두국을 먹었는데 과연 세계적인 음식문화국답게 놀랍고도 희한하였다. 가지각색의 만두가 한 가지씩 스물한 번이 나오는 식사로 만두의 크기나 형태, 재료, 빚은 솜씨 등이 모두 다르다. 서태후는 입맛이 매우 까다로워 전속 요리사들의 정성이 조금만 부실하거나 맛이 없으면 곧장 그 목을 베었다는데 갑자기 피난을 오느라 요리사가 따라오지 못하여 서안의 일급 요리사들이 모여 연구와 고심을 거듭하여 개발한 음식이 이 공작연 만두국이라 하며 덕발장주 식당이 바로 그 원조였다고 한다. 그 스물 한가지의 만두 이름은 다음과 같다.
貴妃鷗 魚傅眺友門 燒殼元 芝麻鴨子 姜汁蒸餃 飽魚蒸餃 一品三色 茄汁筍丁 烏龍臥雪 三丁蒸餃 素食錦 魚燕蒸餃 滿載而歸 海食錦 魚蒸餃 彩蝶飛舞 恭喜發財 三鮮水餃 侯王入宮 太后大蝸 珍珠饅頭.
공작연 만두요리는 원래는 25종이었다고 하며 맨 마지막의 진주만두(珍珠饅頭)는 그 크기가 녹두알만하여 국물 속을 휘저어서 겨우 찾아내어 먹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쉽게 찾아 먹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온다고 한다.
8월 10일. 아침 식사 후 협서성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불교문화재와 실크로드에 관한 자료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비림(碑林)에는 고대의 귀중한 비석 1,000개가 보존되어 있었다. 당의 현종이 지은 효경서문비(孝經序文碑), 안진경(安眞卿)의 해서비(楷書碑),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敍) 글씨비 등의 진귀한 금석문들이 눈길을 끌었다. 서안비행장으로 와서 공항식당에서 점심. 2시 반 비행기로 북경공항에 도착. 북경대학의 갈진가(葛振家) 교수가 영접을 나왔다. 갈교수는 북한의 김일성대학(金日成大學)에서 근무한 일도 있어 북한 말씨의 조선말을 할 줄 알고 우리나라 성종(成宗) 때의 나주 학자 금남(錦南) 최부(崔溥)가 쓴 <표해록(漂海錄)>을 처음 역주(譯註)한 분으로 우리문화에도 관심이 많은 학자다. 아시안게임 선수촌에 있는 오주대주점(五洲大酒店) 호텔에 투숙했다. 이 호텔은 지난 아시안게임 때 각국 임원들의 숙소여서 규모와 시설이 좋았다. 밤에 일본인 학자 다께다(竹田) 교수라는 분이 숙소로 찾아와서 지춘상 교수와 셋이서 늦게까지 환담하였다.
오늘은 북경 시내와 그 주변 문화유적지를 관광할 예정이어서 지교수와 나는 재작년에 모두 보았기 때문에 만리장성과 북경대학만 동참하기로 하고 둘이서 유리창(琉璃廠) 거리를 방문하였다. 유리창거리는 서울 인사동(仁寺洞)과 비슷한 거리로 학자들이나 문화인이면 중국에 와서 반드시 찾는 거리다. 이곳을 둘러보지 않고는 중국문화의 정수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할 만하다. 온갖 진귀한 골동품과 고서화 그리고 희귀본, 고전적(古典籍) 등은 이곳에 다 모여 있다. 서점에 들러 중국 소수민족에 관한 책 8권을 샀으며 그 유명한 영보당(榮寶堂)에 들러선 수준 높은 서화들이 너무나 고가여서 실컷 눈요기만 하고 나왔다.
만리장성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쌓기 시작하여 역대 국가들이 개축하고 보강한 것으로 처음에는 토성(土城)에서 출발하여 석성(石城)으로 했다가 명대(明代)에 이르러 지금의 전성(塼城 :벽돌성)으로 완성한 것이라 한다. 6,000km에 이르는 이 장성은 지금도 곳곳에서 계속하여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강재철, 김상홍, 이수봉 교수 등과 성위에 올라 멀리 첩첩한 산협을 타고 침공하여 왔을 북방민족들을 이야기 하면서 한국에서 가지고 온 소주를 나누어 마시고 기념사진 한 장 찍고 내려왔다.
오후에는 북경대학을 방문하였다. 중년의 여직원 한 분이 나와서 안내하였다. 이 대학은 1898년에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으로 개교한 이래 동양 학문의 본산지로 발전하여 학생수 14,000여명, 교직원 수 1,400명, 캠퍼스 60만 평에 고색이 창연한 낡은 강의실들은 대학의 규모와 역사를 말하여 주고 있었으며(古典籍) 도서관의 장서가 480만여 권에 희귀본의 고전적(古典籍)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세계 학문의 임천(林泉)임을 말하여 준다. 방학 중인데도 도서관에는 학생들로 가득하였고 깊은 삼림 속같이 조용하였는데(古典籍) 이곳에서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학자 곽말약(郭沫若)이 명강의를 한 곳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컸다. 기숙사 앞 민주광장의 게시판들은 온통 대자보(大字報)로 도배되어 있었다. 북경대학 뱃지 하나씩을 기념으로 받고 나오면서 그 옆 서점에 들러 책 세 권을 샀다.
청말(淸末)의 여걸 서태후(西太后)의 별장 이화원(蓬和園)으로 갔다. 이곳은 항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서태후는 청말(淸末) 함풍제(咸豊帝)의 황후로 함풍제가 일찍 죽자 나이 5세인 아들 동치제(同治帝)를 즉위시켜 놓고 모후로서 정권을 쥐었으며 병약한 동치제 또한 곧 죽자 세 살 된 어린 조카를 강제로 황제에 세우고는 계속하여 정권을 농단한 권력의 화신이었는데,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파괴된 그녀의 별장을 복원하기 위하여 해군의 군함을 건조할 예산까지도 몽땅 이곳에 투입하였다고 하며, 300만평의 땅을 파서 바다같은 인공호수 곤명호를 만들었고, 그 파낸 흙을 쌓아서 만수산(萬壽山)을 만들어 거기에 호화로운 별궁을 지은 것이 바로 이화원이다. 이 별궁에서 사치와 호화를 극한 생활과 함께 온갖 음모와 암투 그리고 옮겨 말하기도 민망한 별별 해괴한 음행을 행하였다는 비화들은 그녀가 죽은지 100년 여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 북경 오리고기 요리로 유명하다는 <장정반장일동천(長征飯庄一洞天)>이라는 긴 이름의 식당에서 오리고기 요리로 저녁을 먹었다. 부침개같이 생긴 넓은 손바닥만한 판에 요리된 오리고기를 양념장을 쳐 생파와 곁들여 먹었는데 맛이 좋은지는 모르겠고 곁들여 나온 새우요리가 더 일미였다.
아침 8시 호텔 출발. 옛 국자감(國子監)의 가로수 정연한 학문의 거리를 지나 공자묘(孔子廟)에 도착 참배를 하였는데 이곳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의 조상(彫像)은 없고 위패로만 모셨으며 좌우로 72 제자상을 조성, 배치하였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좌측으로 5~6명의 제례악 연주자들이 전통의상을 하고 늘어서서 우리 일행을 위하여 연주를 하여 주었다. 생황(笙篁), 경(磬), 비파(琵琶), 복숭아같이 생긴 순(邵)이라는 악기가 전부인데 음률이 매우 장중, 청아하여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였다. 정원에는 아름드리 향나무들이 울울하고 대성전의 옆으로는 십삼경비림(十三經碑林)이 눈길을 끈다. 중국 역사상 유명한 경서(經書) 13종을 빗돌에 새겨 후세에 길이 보전하고 있었는데 7척의 큰 빗돌 190개에 63만자를 새겨놓은 엄청난 분량의 금석문 도서관이다. 이 글들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장형(蔣衡)이란 사람이 써서 새긴 것이라 한다. 정원의 좌우로는 원대(元代)에서 명대(明代), 청대(淸代)까지 세 왕조의 과거 급제자들 이름을 새긴 방명비(芳名碑)가 서 있는데 연대별로 성명과 출신지를 새겨 학문 높은 사람을 길이 잊지 않으려 하였으니 학문하는 사람을 아끼고 위해줌이 이러하니 문화의 꽃이 피어나지 않으랴 싶었다.
옛날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신들이 드나들었다는 조양문(朝陽門)의 조양교 거리를 지나면 천단공원이며 그 안에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냈던 천단(天壇)이 있고 천단의 남문으로 들어가면 하느님의 위패를 모신 천궁우(天穹宇)가 우뚝하다. 천궁우의 좌우로는 하느님이 거느린 자연신들이 즐비한데 북두칠성을 비롯한 28수의 수신장(宿神將)을 비롯하여 야명신(夜明神), 우사(雨師), 운사(雲師), 뇌사(雷師), 풍사신(風師神) 등이 그것이다. 천궁우를 뒤로 돌아가면 확 트인 긴 단육교(丹陸橋)를 지나 그 끝에 기년전(祈年殿)이 있다. 임금이 하느님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신전이다. 중앙에 하느님의 위패가 있고 그 좌우에는 하늘에 제물로 바치는 희생(犧牲)의 소 세 마리씩이 있다. 중국에서는 천신을 모시는 건물의 기와 색은 모두 청색이며 사람이 사는 건물 기와의 색은 땅을 의미하는 황색으로 되어 있다.
8월 13일, 오늘은 귀국하는 날이다. 북경과 천진(天津)간의 고속도로를 달려 천진에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탔다. 옥수수 등이 무성하게 자란 끝없는 푸른 광야와 농촌의 마을들을 뒤로 하면서 버스로 두 시간쯤 달렸다. 흙벽돌로 지은 말집 모양의 맛배집의 농가들은 창문이 모두 남쪽으로만 나 있다. 마을 앞 농수로의 좌우로는 버드나무나 포프라 나무가 늘어선 조용한 마을들, 공동으로 사용하는 한마을에 하나뿐인 기다란 공동칙소(共同厠所 :변소)가 있는 마을들을 뒤로 하면서 달렸다.
천진공항의 유별나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했는데 한중항공협정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곧장 서울로 가지 못하고 비행기가 남쪽 상해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상 제주도 상공을 지나 김포에 착륙하는 이상한 항로를 따라 날아온 것이다. 기내에서 신문을 보니 김영삼 대통령이 내린 긴급조치로 금융실명제가 오늘부터 실시된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로 실려 있었다. 금융거래를 투명하게 하여 뇌물성의 금융거래와 부정부패를 막겠다는 조치라고 하나 글쎄 효과가 있을까.
최인학 교수의 치밀한 사전 계획과 준비에 의한 답사여행은 언제나 내용이 충실하고 일호의 차질이 없었다. 이번 운남성 소수민족 민속답사여행도 조금 강행군이긴 하였어도 무사히 잘 마쳤다. 특히 엄용희 사모님의 친절하고도 꼼꼼한 실무적 협조의 힘이 컸음에 감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