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의 주된 기여자가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이해당사자일 수 있습니다. 위키백과는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곳이 아니며, 모든 콘텐츠는 위키백과의 정책 중 하나인 중립적 시각을 따라야 합니다. 이해당사자가 편집한 내용이 중립적으로 보일지라도 제3자에 의한 확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선원선계(璿源先系)에 의하면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 이한(李翰)은 전주(全州)에 토착해 온 집안 태생이다. 이한(李翰)의 휘(諱)는 한(翰), 호는 견성(甄城)이다. 이한은 전주 출신으로, 신라 태종무열왕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고, 문성왕(文聖王)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고 한다.[1] 시조 이한의 선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불명확하다. 전주 이씨의 분파는 이안사(李安社) 선계에서 갈라진 파와 그 이후 갈라진 파를 합해 모두 123파이다. 조선의 건국자인 이성계는 전주 이씨의 제21대손(제22세손)이다.
전주 이씨는 전주에서 살아온 토착 성씨(土姓)이다. 시조 이한의 선대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밝혀지고 있진 않으나, 조선 초기까지도 백성의 90%가 성씨가 없었고, 성이 없던 백성들이 신라 말이나 고려 조에 들어와 중국의 성명 제도를 모방하여 성을 만들어서 쓰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과정을 볼 때 이한(李翰)에서부터 처음으로 이씨 성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에 연대 작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 의하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이시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런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들어오시니 그 때가 18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우리 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안되어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 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분이 바로 경주김씨이다.' 중국전래설은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성씨 득성 과정을 보면, 인물을 신격화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에 기초하여, 어떻게든 황실과 연관지어 위상을 높이기위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부여받기 힘든 것 같다. 즉 중국전래설을 주장하는 성씨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한림원" 학사, 또는 "황실" 성씨 등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 이씨(陜川 李氏) 족보에 의하면, '이알평(李謁平)의 34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翰)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 이씨(完山 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 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계보가 갑자기 발견된 점이나,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 그리고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당시 족보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주장에 대한 신뢰성은 애매한 것이 많아 합당하지 않다.[2][3][1] 결국, 두 가지 설 모두 근거가 없고 믿을 수 없으며, 전주의 토성(土姓)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황현 저술한 역사책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전주 이씨가 많아진 이유로, 흥선대원군이 전주 이씨를 원하는 자들을 대동보에 올려주어 전주 이씨를 의도적으로 늘렸다고 쓰여 있다. 병인년(1866년, 고종 3년) 이후 성씨가 없던 천민들 중에서 전주 이씨를 자처하는 자들을 모두 대동보에 이름을 올려주어 대동보에 오른 자가 잇달았다고 한다. 종친부에서 화수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참가한 자만 7만이라 했다. 전주 이씨의 인구를 늘린 흥선군이 "내가 나라를 위해 십만 정병을 얻었다."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을 겪으며 보고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기술한 비사(祕史)라는 점에서 기록의 특성상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 300년 동안 효종, 헌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의 왕들이 어릴 때 죽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거나 외동 아들만 남겼음에도 조선 후기 전주 이씨의 인구가 급증한 것은 민적법 시행 전후 성씨가 없던 천민들이 족보를 위조하거나 성씨를 차용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이씨와 완산이씨의 다른 점은 전혀 없다.(참고 : 전주의 역사) 파별(派別), 문중의 집안이나 개인의 기호(嗜好.어떤 사물을 즐기고 좋아함)에 따라 '전주 이씨'라 하기도 하고 '완산 이씨'라 하기도 하며, 또한 '리씨'나 '이씨'도 전혀 다른 것이 아니고 역시 파별(派別).문중의 집안이나 개인의 기호에 따라 혹은 파별(派別).문중의 자존심으로 인하여 '리씨'라 하기도 하고 '이씨'라 하기도 한다. 특히 '리씨'는 두음법칙(頭音法則.우리말에서, 단어의 첫소리에 어떤 소리가 오는 것을 꺼리는 현상, ㉠‘ㄹ’이 오는 것을 꺼림. 량심(良心)→양심 따위, ㉡중모음 앞에서 ‘ㄴ’이 첫소리로 오는 것을 꺼림. 녀자(女子)→여자 따위)을 따르지 않는 선택일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리씨'를 즐겨썼다 한다. 한때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도 다른 이씨와 차별성을 두기 위하여 '리씨' 사용을 권장한 적도 있다. 북한에서는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고 '리씨'라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한국이 한자문화권에 속하긴 하나, 우리만 쓰는 독특한 한자 용어가 있다.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든지, 임금님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어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하는 표현 등은 모두 우리의 독특한 용어다. 또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는 '군왕불감기조(君王不敢其祖)'라고도 하여 제왕 또는 임금은 감히 그 임금을 시조로 하는 종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임금님은 모든 백성 공동의 부모, 곧 국부이므로 한 파의 시조 또는 중시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님을 1세로 하여 세대를 따지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기어 왔다.
그래서 아래의 용어가 나오게 되었다.
선원선계(璿源先系): 시조로부터 태조이성계의 직계 조상인 목조 이안사 이전에 갈라진 계통. 직계와 시중공파(侍中公派)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 주부공파(主簿公派) 등의 3계 방계가 있다.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 왕통(王統)인 이안사 이후부터 순종까지의 계통.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 왕자, 왕자군에서 갈라진 계통. 총합 125파이나 계통이 끊어진 것이 있어 105파가 되고, 2012년 현재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등록된 것은 86개 파라고 한다.
전주 이씨 사람들은 대군의 4대손, 왕자군의 3대손까지만 왕족이었다. 그 이후는 다른 양반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조선 왕족의 친척들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받은 혜택은 없다. 양반이면 다 받는 병역면제와 세금면제 정도로 원래는 관리가 되어야 병역이나 세금 면제였지만, 조선후기에 양천제가 반상제로 바뀌어 가면서 되면서 다 빠져나가긴 했다. 오히려 왕손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전주이씨 출신의 서얼들은 양반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렇게 전주 이씨가 많아진 것은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고자 전국적으로 전주 이씨를 발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봤자 김해 김씨의 숫자에 비하면 전주 이씨는 상대도 안 되긴 하지만. 사실 대한민국에서 성씨만 가지고 혈통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긴 하다.
과거 합격자의 수가 상당히 많아서 생원과 진사과, 문과를 합쳐서 최다 합격자를 배출했다. 그 다음 순위인 안동 김씨, 파평 윤씨도 전주 이씨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어쨌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전주 이씨다. 다만 조선왕조 직계는 아니고 양녕대군계 방계 후손. 양녕대군의 다섯째아들 장평도정 이흔의 큰아들 부림령 이순의 후손이다. 무의공 이순신도 이승만의 조상이다.
전주이씨 종친회인 대동종약원은 왕실 제사 관련으로, 종묘와 사직대제 기능보유단체로 지정돼 있다. 쉽게 말해서 문화체육관광부가 공인한 무형문화재 보유 단체. 집안이 집안이라 종묘나 사직대제 준비현장에 가면 전주 이씨 소속 노인들이 제사 관련으로 논의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웃사이더 명문가) 대제학을 3명 내었는데, 이 중 2명은 부자 대제학이다. 여간 학문이 깊고 명성이 있지않고서야 오르기 힘든 최고 영예의 관직인데 부자가 대를 이어 맡은 유일한 케이스. 또한 영의정 1명을 배출한 명문가인데 소론으로써 노론한테 심하게 까이고 제거당하다시피 하였다. 강화도로 귀양가서 백 여년 넘게 집안이 살아오면서 학문을 세우고 민심을 사로잡고 다시 정계에 복귀한 특이한 예시. (집안의 아웃사이더 기질은 애초에 정종의 후손이라 더 말할 것도 없다).
[6] 이휘재뿐만 아니라 이혁재, 이성재, 이정재도 항렬은 경규옹에게 할아버지가 되나 나이는 경규옹보다 한참 아래다.
[7] 동명이인인 은혁도 李赫宰인걸로 보아 은혁도 전주 이씨 효령 20세손, 시조 43세손일 가능성이 높다. 가만..걔하고 동성동본이라는 건데?
[8]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의 넷째 아우 이영습의 가계로, 선원선계에 속한다.
[9] 아버지 성함이 "이진국" 씨인데, 진자 항렬은 효령 27세, 시조 50세손에 있다. 만약 아버지가 효령대군파의 "진"자 항렬이면 아이유는 효령 28세, 시조 51세로, 항렬이 굉장히 낮은 편에 속한다. 남동생의 이름으로 추측할 경우 양녕대군파 20세손, 시조 44세손일 가능성도 있다.
최종 확인 버전:
Supported by Veda
엔하위키 미러는 엔하위키의 컨텐츠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사이트입니다. (자세히 알아보기)
var focused=null; window.[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xxonkeypress=k; $().ready(function () { $('#keyword').autocomplete('/suggest/', { selectFirst: false, max: 30, scroll: false }); if (window.screen.width < 480) { $('object,embed,iframe').each(function(i, e) { var f = $(e), w = $('#wikiContent').width(); if (f.width() > w) f.height(f.height() * w / f.width()).width(w); }); } }); $('img.lazyload').lazyload({ threshold: 200}); (function(i,s,o,g,r,a,m){i['GoogleAnalyticsObject']=r;i[r]=i[r]||function(){ (i[r].q=i[r].q||[]).push(arguments)},i[r].l=1*new Date();a=s.createElement(o), m=s.getElementsByTagName(o)[0];a.async=1;a.src=g;m.parentNode.insertBefore(a,m) })(window,document,'script','//www.google-analytics.com/analytics.js','ga'); ga('create', 'UA-10437829-3', 'enha.kr'); ga('require', 'displayfeatures'); ga('set', 'dimension1', 'standard'); ga('set', 'dimension2', 'standard'); ga('set', 'dimension3', ''); ga('send', 'pageview');
전주이씨는 어디서 출발했는가요 시조라던지 원래 살던곳이라던지요..궁금해서요
원래 전주이씨는 이성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들하는데 왕이 처음됐으니 그리 생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닐듯 합니다.
그러나 그 위의 선대도 있었을테고 많이궁금하군요
중국에서 왔다 신라때부터 있었다..말들이 많은데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문헌상 밝혀진것이 없을까요?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翰)이다. 태조 이성계(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이한(翰)의 21대손이다. 그러나 이성계(成桂)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이안사(安社)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그곳 지주(知州, 지금의 지사(知事))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지주(知州)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지방으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地方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이행리(行里, 이성계의 증조부), 또 그 아들 탁조(度祖) 이춘(椿, 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고, 춘의 아들 환조(桓祖) 이자춘(子春)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 영흥(永興))의 천호를 지냈다. 자춘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雙城) 함락에 결정적인 공(功)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이성계는 영흥(永興)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倭寇) 토벌에 공(功)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 때부터 고려 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였다.
[ 분파(分派), 계파(系派) ]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분파(分派)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 嫡)과 왕자군(王子君, 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安社)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李太祖)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安社, 18世)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安社, 18世)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령(咸寧) ·함창(咸昌) ·함원(咸原) ·함천(咸川) ·함릉(咸陵) ·함양(咸陽) ·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완원(完原) ·완천(完川) ·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 ·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 ·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인 왕족(王親 ·宗親)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 ·왕비 ·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 외척(外戚))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 ·유지되어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계속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즉, 상신(相臣, 三議政) 22명, 문형(文衡, 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 %를 차지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 琛, 세종(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대 대제학(大提學, 홍문관, 예문관, 정2품 벼슬)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 厚生, 정종의 아들)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여(璵), 세종의 다섯째 아들),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무생(茂生), 정종의 아들), 정승 1명과 많은 문 ·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보(補), 태종의 둘째 아들)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 선생(善生), 정종의 아들)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초 , 선조의 생부(生父))는 무관(武官)의 집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측에서는 대략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다.
전주이씨 시중공파 홈페이지(http://dansinlee.com.ne.kr/menu_main.html)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네요.
전주이씨의 유래
우리 나라의 이씨는 한국 자생(自生)의 이씨와 외국에서 귀화한 외래(外來)의 이씨로 나눌 수가 있다. 우리 나라는 처음에 성이 없다가 통치자 곧 귀족부터 성이 있게 되었는데, 문자가 없었으므로 자연 중국 한자(漢字)로 표기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이씨는 본관이 237본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우리 전주리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리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전주임니다.다른 말을 할려고 이글을 적습니다.태조이성계전하는 1392년 고려국의 마지막 국왕으로 즉위 함니다.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바꿈니다.그리고 1394년 고려 태조 왕건 폐하의 후손들을 멸족시킴니다.
전주이씨들은 개성왕씨들에게 사죄해야 함니다.독일군이 유태인들을 학살하드시 태조 이성계 전하는 왕씨가족들을 학살 했습니다.단지 왕씨가족이라는 이유로 남녀노소 임산부 갓난아이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참살 했습니다.누가 조선 태조 이성계 전하와 정도전 대감의 작품임니다.역사는 승자의 산물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