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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기기 더 컬렉터스
“자식 같던 331점 불태웠다” 서울미술관 만든 그의 고백
카드 발행 일시2024.08.08
에디터
이은주
더 컬렉터스
관심
석파정 서울미술관 설립한 안병광 유니온그룹 회장 ②
미술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작품 속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병광 유니온그룹 회장의 말이다. 사회 초년 시절 한 달 치 월급을 주고 이남호 화백의 그림을 산 데 이어 이중섭 ‘황소’ 그림 액자를 구매한 그는 88년 창업 후 어느새 그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서 있었다. 수집 생활이 이어지면서 그의 컬렉션엔 이중섭, 박수근, 이응노, 이인성, 나혜석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더해졌다.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 김기창이 한국화로 그린 ‘예수의 생애’ 30점도 소장했다.
미술품을 꾸준히 사들이며 수장고가 비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늘어가던 작품이 나중에 문제가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인터뷰에서 그는 “몇 년 전 자식 같은 그림 331점을 불태운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수집을 시작한 지 30년이 되던 해인 2017년의 일이다.
'햇빛은 찬란' 전시에서 박근호의 설치 작품을 보고 있는 안병광 유니온그룹 회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림을 불태웠다고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30년간 한 점 한 점 제 기쁨이 되었던 것들이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장고를 볼 때마다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어요. 사실 초기에 산 것 중에는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작품도 많았거든요. 양이 늘어나면서 작품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커졌고요. 작품값보다 유지 비용이 더 커지게 되니 그걸 다 계속 가지고 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됐죠.
그럼 판매하면 되지 않습니까.
당연히 팔았죠. 그거 아세요? 그림은 생각하는 것처럼 파는 게 쉽지 않아요. 소장품 680점 중 꼭 필요한 작품 몇 점을 빼고 500점을 골라냈죠. 그리고 미술관 주차장에 그걸 깔고 헐값에 판매했어요. 1만원 이상만 주고 가져가라고 했죠. 1만원부터 3만원, 5만원, 10만원을 내고 사람들이 가져갔죠. 그런데 사람들이 작은 건 사는데, 큰 건 오히려 꺼리는 거예요. 집에 가져가도 걸 데가 없다는 거죠. 그렇게 팔고 들어온 돈이 2600만원이었어요. 그건 상명대, 국민대, 청운 중·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다 나눠줬죠. 그렇게 하고도 331점이 남은 거예요.
듣기만 해도 너무 아깝습니다.
아깝죠. 마음 아프죠. 근데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그걸 어떻게 해요. 수십 억원 들여 산 것이 손에 2600만원만 남고 다 버려진 겁니다. 수집가로서 제가 잘못한 탓이죠. 처음부터 질적인 수집을 해야 했는데, 너무 양적인 수집을 했어요. 너무 잘못했죠. 제가 처음부터 좀 더 현명했으면 그런 일 겪지 않았겠죠.
미술품 보관에 대한 깊은 고민 끝에 그는 331점과 ‘생이별’을 하고 수장고의 절반을 비워냈다. 그렇게 보낸 작품 중 대다수가 한국화였다.
왜 한국화죠?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술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값나가는 작품은 거의 다 한국화였어요. 그 인기가 서양화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았죠. 저는 한국화를 정말 많이 소장하고 있었어요. 그게 곧 유지하기도, 팔기도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줄 몰랐죠.
그러면서 그는 “그동안 들으며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이 사람들이 ‘그림값 많이 올라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미술품 수집을 그런 눈으로만 봐요. 야, 돈 좀 벌었겠구나.”
좋은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계시니 하는 얘기죠.
그렇죠. 가격이 많이 올라간 것도 있지만, 규모가 크다 보니 오히려 내려간 작품이 더 많아요. 소장품의 90%는 오히려 내려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에요. 소장품 중 겨우 10%만 오른 거죠. 1990년대 1억원을 줘야 살 수 있었던 유명한 화백님 작품이 지금은 2000만원, 2500만원에 나와도 안 팔리잖아요.
그는 “그 사건 이후로 한국화는 특별히 아끼는 작품만 몇 점 갖고 있다. 그때부터 근현대 작품에 집중하고, 퀄리티에 더욱 중점을 둬 수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집은 마약이다”
기획전 '햇빛은 찬란' 전시장의 안병광 회장. 이상민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렇다면 약품 유통회사를 운영하며 컬렉터로 살아온 그가 2012년 미술관을 개관한 이유는 무엇일까. 개관 후의 삶은 그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줬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볼 차례다.
마침 지난 6월 12일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소장품전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인사말을 하던 안 회장은 갑자기 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석파정 서울미술관 고백’이었다.
그는 “내가 뼛속까지 영업사원인데, 해마다 적자만 보는 이 사업(미술관)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만 더해 갔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코로나 상황에도,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줄 서 있는 관람객들을 바라보며(···) 젊은이들의 놀이터가 된 이곳을 없애버리면 안 되겠구나! 정신이 퍼뜩 들었다”고 덧붙였다. 남모르게 겪은 10년의 갈등을 그는 이렇게 축약해 전했다.
이번 전시 제목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는 이중섭이 편지에 쓴 문구에서 따왔다. 그러나 이 말은 이중섭을 빌려 그가 세상에 털어놓은 현재 그의 마음인 듯했다. 2022년 개관 10주년 기념 전시 제목 ‘두려움일까, 사랑일까’도 그에겐 의미심장했다.
“그때 제 심정으론 제목을 ‘(미술관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하고 싶었어요(웃음). 아니면 ‘두려움일까, 아픔일까, 사랑일까’로 하든가. 가운데에 아픔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두려움, 아픔, 사랑, 그게 미술에 대한 제 진짜 마음이거든요.”
왜 ‘아픔’인가요?
왜냐하면 수집가의 삶이 그래요. 화랑에서 오늘 요만한 거 보여주죠, 그리고 다음 날 더 좋은 걸 가져와요. 며칠 후에 또 더 좋은 걸 가져오고요. 그럼 사고 또 사게 돼요. 그림은 마약 같은 것이에요. 정말 마약이에요. 마약인데 돈이 너무 많이 드는 마약! 계속 쫓아갈 수밖에 없어요. 이젠 갤러리에서 ‘만나자’ 연락 오면 두려울 정도에요(웃음). 보면 또 갖고 싶죠. 갈수록 좋은 게 눈에 들어오고, 화폐 단위도 갈수록 커지죠.
그래서 작품을 하나 결국 들여와요. 기쁘죠. 그런데 한 편으론 ‘내가 미쳤지’ 하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솔직히 10억 원짜리 작품 사고 마음 편한 사람이 어딨어요? 좋은 작품은 20억~30억, 100억도 하잖아요. ‘내가 미쳤지’ 하면서도 상황이 반복되는 거예요.
그는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돈이 넘쳐나서 수집하는 줄 알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큰 기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재산이 많지도 않다. 다 처절하게 발품 팔아서 샀다”고 했다.
“이건희 회장님이 생전에 수집하실 땐 사람들이 그분한테 좋은 걸 들고 가서 보여드렸죠. 그런데 저는 그분이 아니잖아요. 좋은 게 있다고 하면 제가 발품 팔아 직접 찾아가서 봐야 해요. 마음에 들어도 자금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몇 개월에 나눠 갚기로 하고 사고요. 다 그런 식으로 한 점 한 점 모은 거예요.”
안 회장은 “다행히도 저의 진심을 보고 응원해 주는 분들이 계셨다. 그 덕택에 이건희 회장님 부럽잖게 좋은 작품들을 소장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미술관은 가장 아픈 손가락”
서울 석파정 서울미술관의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시 전경. 이우환의 바람부터 정상화, 김환기, 서세옥, 김창열의 대작이 나란히 걸려 있다. 뉴시스
서울미술관 소장품전 '나는 잘 자내고 있습니다'에서 별도의 전시실에서 공개한 이우환 화백의 '대화'.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시 전경. 맨오른쪽 벽에 유영국의 회화가 걸려 있다. 서울미술관
하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미술관은 내 열 손가락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는 말을 수없이 했다. “작품 하나 내놓으면 ‘미술관이 이제 어려운가 보다’ 하고 바로 기사가 나와요. 사람들 관심은 크죠, 예산은 계속 들죠, 가족 간 갈등도 있죠. 이게 제 생인손이죠.”
그런데 어떻게 미술관까지 열게 됐습니까.
작품을 수집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토록 좋은 걸 혼자 보는 게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때만 해도 컬렉터들은 소장품을 잘 공개하지 않았잖아요. 근데 내 안의 소유욕이 어느 순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더라고요(웃음).
하지만 미술품을 모으는 것과 미술관을 운영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이죠.
그러니까요. 제가 미술관 연다고 하니 걱정하는 분이 정말 많았어요. 다들 하나같이 뜯어말렸어요. 세계 어느 나라의 미술관도 흑자를 내는 곳은 없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생각해라···. 그래도 저는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죠.
미술관 건물을 지을 때도 어려움이 많았다고요.
석파정이 등록 문화유산이라서 규제가 정말 많았거든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요. 여기 있는 게 통 바위잖아요. 미술관 건물을 지으려면 이 바위를 깨야 하는데, 민원 때문에 다이너마이트를 쓰지 못하게 하니 그걸 일일이 손으로 깨야 했어요. 2150㎡(650평) 정도를 파는 데 11개월이 걸렸으니 말 다했죠.
그래서 운영해보니 어떠셨어요.
염려가 현실이 됐죠. 그게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계속 물으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미술관은 계속 예산이 투입돼야 해요. 10년간 운영비만 약 100억원 정도 들었죠. 미술관 하는 사람들 영화나 드라마에선 멋있게 나오죠? 근데 그건 정말 모르니까 그러는 거죠.
그는 “그동안 미술관 팔라고 찾아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먼저 내놓고 싶을 때가 훨씬 더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10년이 지나 이제야 관람객이 늘었지만, 솔직히 정말 힘들 땐 하루 관람객이 일곱 명에 그친 날도 있다. 믿을 수 있겠나? 직원이 스무 명인데 관람객이 일곱 명…”이라며 웃었다.
그 정도면 정말 심각했을 것 같습니다.
개관하고 항상 갈림길에 있었어요. 그만둘 거냐 말 거냐 그 갈림길에. 자연스럽게 운영만 되어도 좋겠는데 그게 안 되니까. 그래서 10년만 하고 딱 그만두겠다고 다짐했어요. 진심이었어요. 그래서 10년 됐을 때 제가 말했죠. 봐라, 나 약속 지켰다. 2년 안에 문 안 닫았다. 그래, 내가 말한 것보다 다섯 배 했다···.
그런데 이미 10주년을 넘기셨습니다. 그만두지 않으셨고요.
2022년 개관 10주년 기획전 ‘두려움일까 사랑일까’를 열었는데, 관람객이 정말 많이 왔어요. 비가 오는데도 우산 쓰고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그리고 그해 12월 31일 전시 마감까지 누적 관람객 100만 명을 달성했어요. 개관 10년 만에 처음으로 그해 처음으로 2억4000만원 당기순이익이 났고요.
상황이 달라졌군요.
관람객을 보며 제가 너무 큰 위로를 받은 거예요. 정신도 퍼뜩 들었고요. 그래, 내가 해야 한다,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잊지 말자, 마음을 다잡았죠.
초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가 젊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됐으면 좋겠다 생각했죠. 우리 때는 이런 미술관이 없었거든요. 저는 미술관이야말로 감정을 감성으로 바꿔 주는 곳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만나고, 얘기하고, 보고, 느끼고, 소통하면 좋겠다 생각했죠. 무엇보다 돈 많은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편하게 찾아오는, 문턱 낮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죠.
그 바람이 이뤄졌나요?
어느 정도 성공은 했어요. 관람객 조사를 해보니, 지금 우리 미술관 관람객 중 80~85%가 젊은 사람이에요. 미술관이 젊은이들의 ‘핫플’이 된 거죠. 2022년 한 해 동안 관람객이 11만 명 넘게 들었고요. 지금까지 누적 관람객이 130만 명 정도 됩니다.
“이건희 회장이 도왔다”
안 회장은 느닷없이 “이게 다 이건희 회장님 덕분”이라고 말했다. 2021년 4월 고(故) 이건희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품 2만4000여 점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되면서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졌다는 의미다. 이건희컬렉션 효과다.
“저는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 기증으로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격이 한 단계가 아니라 두세 단계 올라갔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바꿔 놓으신 거예요. 기증 이후부터 분위기가 확 달라졌거든요. 사람들이 주말이면 ‘우리 미술관이나 한번 가볼까?’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됐죠. 저는 그 덕택에 저희가 10주년 기념전을 성공리에 마쳤다고 생각해요.”
가족들이 미술관 운영에 참여하셨죠.
미술관을 만들고 나서 사실은 제일 어려운 게 가족관계였어요. 저는 재벌도 아니고, 미술관을 여유 있게 끌고 가는 형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아내와 딸이 미술관 일에 참여했는데 갈등이 꽤 있었어요. 집에서도 자꾸 미술관 얘기를 꺼내니 ‘24시간 근무’가 따로 없고. 다 같이 마음고생을 한 시간이 꽤 됐습니다.
안 회장의 아내 서유진씨는 지난 11년 동안 석파문화원 이사장을 맡아왔고, 올부터 관장직을 맡고 있다. 한편 둘째 안진우씨가 이사장으로 취임해 미술관 운영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안 이사장은 개관부터 지금까지 전시 기획 등 실무에 참여하며 미술관에서 잔뼈가 굵었다. 안 회장은 “재단을 안 이사장에게 반강제로 넘겼다. 딸의 어깨에 무거운 바윗덩이를 얹어준 것 같다”고 했다.
현재 소장품전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와 별도로 기획전 ‘햇빛은 찬란’을 통해 젊은 작가들 작품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미술관이 옛날 작품만 보여주는 곳이어서는 안 되죠. 항상 소장품 전시와 함께 지금 미술 현장의 주역인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기획 전시를 병행해 왔습니다. 그것 또한 미술관이 해야 할 역할이고요. 전시 기획팀이 부지런히 젊은 작가들을 찾아서 소개해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울미술관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역사는 반복되지 않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역사는 반복될 것 같습니다(웃음). 갈등과 희열을 오가며 발전해 나가겠죠?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제 환경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건희 회장님 컬렉션 기증으로 미술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많이 높아졌어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안 회장은 마지막으로 “ ‘한 가정 한 작품 갖기’ 캠페인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 국민이 한 집에 한 그림 갖기 운동을 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집에 그림 한 점씩 걸고 보면서 예술가를 응원하고, 우리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모두가 경험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시에 나온 작품들
이우환, 바람과 함께, 캔버스에 안료, 227.3x181.3㎝
제가 즐겨 낭송하는 시 중에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하나’가 있습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 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저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이 시가 생각납니다. 많은 분이 이 화백의 ‘바람’ 연작 많이 좋아하시는데요, 제겐 완전히 흑백인 이 바람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이 ‘바람’안에 태풍, 천둥, 번개, 무서리, 땡볕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게 세상이고, 삶 그 자체인 것 같아요.
이중섭이 1954년 아들 태현에게 보낸 편지화(총 3개)
복숭아는 악한 기운을 막는 신선의 과일로 알려져 있고, 복숭아 나무가 무성한 곳은 ‘무릉도원’이라 불립니다. 이중섭은 1954년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부처와 같은 자태의 아내와 탐스러운 복숭아 위에서 놀고 있는 아들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에겐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곳이 천국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이중섭 작품 특유의 순수함이 전해집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족이 함께했던 제주도에서의 행복한 추억을 곱씹으며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중섭의 애틋한 마음이 보이는 듯합니다.
김환기, 섬 스케치,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80 x 99.6cm
섬 스케치는 흑백사진의 도판으로만 남아 있던 작품이 수십 년 만에 경매에 나오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습니다.
오래전 미국의 한 컬렉터가 김환기 화백에게 직접 구입해 평생을 거실에 걸어두고 본 작품이 2013년 9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오며 현존했다는 것이 국내에 알려졌지요.
김환기 화백의 초기 작품은 한국전쟁을 비롯한 여러 수난으로 인해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굉장한 가치가 있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에 역사적인 작품을 걸어두고, 더 많은 사람들과 향유할 수 있다는 것, 제가 작품 수집을 이어온 원동력이었습니다.
이응노, 수탉, 1960, 종이에 수묵 담채, 140 x 70cm
저는 이응노의 ‘수탉’을 저만의 제목인 ‘보무당당(步武堂堂)’으로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2005년 한 조간신문에서 닭띠 해를 기념하며 신문에 실은 이미지를 보고 그 당당한 기세에 반했죠. 그 길로 곧장 한 갤러리의 대표에게 부탁해 6개월 만에 이 작품을 소장할 수 있었습니다.
닭은 울음소리로 새벽을 깨우는 신비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는 수탉의 울음을 통해 죄를 깨닫지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여는 닭의 당당한 자세를 보고 어디든지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습니다.
석파정은 어떤 곳?
울창한 숲과 계곡, 한옥이 어우러진 석파정. 서울미술관은 이 석파정을 품고 있다. 중앙포토
석파정 사랑채 안에 앉아 있는 안병광 유니온그룹 회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부암동에 위치한 서울시 유형 문화유산 석파정(石坡亭)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별장이다. 조선 철종과 고종 때 세도가였던 김흥근(金興根)이 지은 별장이었는데,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이 집권한 뒤 이를 차지했다.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은 이곳에 별장을 지어 삼계동정자(三溪洞亭子)라 불렀다. 이곳은 작은 계곡과 오래된 소나무가 있어 절기에 따라 풍경이 아름답다. 소나무와 맞닿은 곳은 흥선대원군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사랑채다. 노송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계곡 속에 정자가 있다.
안병광 회장의 ‘미술관 드림’은 2000년 초까지만 해도 행복한 상상에 불과했지만, 2006년 석파정이 경매에 나오면서 그의 마음이 요동쳤다. 이미 두 차례 유찰을 거친 석파정이 감정가보다 수십억 원 낮은 가격에 나온 것. 안 회장은 경매에 참여했으나 당시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운명이었을까. 1년 반이 지나 그는 “석파정을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인수했다.
2010년부터 석파정 복원과 미술관 건립 공사를 거쳐 2012년 8월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개관됐다. 현재 이곳에선 소장품 전시와 기획전시가 나란히 열리고 있으며, 매주 월·화요일 휴관한다.
에디터
이은주
관심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9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