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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조사전 나옹선사 영정 |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은 고려 말의 불교를 중흥시킨 선사이다. 경상북도 영덕 사람으로 아버지는 선관서령 벼슬을 지낸 아서구(牙瑞具)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속명은 원혜(元慧)이고 호가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인데 지금 전탑 아래 여강 가에 지은 정자 ‘강월헌’은 바로 나옹 스님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 선사에게 출가하였다. 4, 5년간 명산을 찾아다니다가 1344년(고려 충혜왕 5)에 경기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 동안 정진하여 득도하였다.
1347년(고려 충목왕 3) 7월에 원나라 서울 연경 법원사(法原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指空)에게 4년 동안 불도를 배웠다. 이때 원나라 임금의 청을 받고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주지로 머물며 법회를 크게 열기도 하였다. 그 뒤 정자사(淨慈寺)로 가서 임제종 18대손인 평산처림(平山處林)의 법을 전수받았으며, 명주의 보타낙가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렀다. 공민왕과 태후의 청으로 황해도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1363년에는 구월산 금강암(金剛庵)에, 3년 뒤인 1366년에는 금강산 정양암(正陽庵)에, 그리고 청평사(淸平寺)에 차례로 머물렀다.
그 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를 돌아본 후,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고 10년 후인 1371년(공민왕 20)에는 왕사가 되었다. 이후 송광사에 잠시 머물다가 회암사를 중창하여 낙성식을 열었다. 1376년(우왕 2) 왕명으로 경북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신륵사에서 열반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행적이 대개 널리 알려진 생애이다. 곧 신륵사와 그가 관련 있는 부분은 다만 이곳에서 입적하였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는 입적하기 이전에 한 신륵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또 다른 호가 강월헌(江月軒)인데, 이색의 『보제존자석종비』에는 강월헌은 나옹선사가 거주하던 곳이라 하였고, 또 ‘신륵사는 보제께서 크게 도를 펴던 곳으로 장차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하였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선각탑명』에는 나옹선사가 영원사로 가면서도, ‘내가 가는 길은 여흥에서 그칠 것이다.’ 라고 하였다는데 이 점도 나옹이 신륵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던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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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화암사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 그런데 나옹선사의 생애에 있어서 의문이 남는 것은 왜 무엇 때문에 갑자기 신륵사에서 입적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는 1375년(공민왕 19)에 고려의 마지막 승과시험을 실시하였고, 이듬해인 1376년에는 회암사를 중창하여 낙성식에서 문수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때 선비와 여인들이 주야로 왕래하였고, 그들은 생업까지 포기하면서 회암사에 몰려들어 조정에서는 명을 내려 나옹을 영원사로 떠나게 하였다. 그는 이 무렵 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열반문을 통하여 길을 떠나 7일만에 여주에 도착하여 신륵사에 머물다가 입적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열반문을 통해서 나가라고 했다는 점이다. 이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의심스럽게 여기고 소리쳐 울자 이에 나옹은, "힘쓰라! 힘쓰라! 나로 인해서 중단하지 말라. 내가 가는 길은 마땅히 여흥에서 그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무엇을 힘쓰라고 한 것일까 의문이 남는다.
한편 그가 입적했을 때, 오색의 구름이 산마루를 덮었고 유골을 싣자 구름도 없는 맑은 날씨에 유독 그곳에만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후 유골을 회암사로 옮기는 과정에서 갑자기 여강의 강물이 불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영이로움을 듣고 조정에서는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하고 이색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제자들이 신륵사에 영정을 모시고 석종부도를 조성하여 사리를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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