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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51코스
광양버스터미널 입구-월평마을-신촌마을-해창마을-삼성마을-세풍 생태습지-충무사-신성마을-순천왜성-율촌산단-용전천-호두마을-당두마을-율촌파출소 옆
1.광양만 장도(獐島, 노루섬)의 애끓는 충혼의 꽃들이여!
남파랑길 51코스는 광양에서 순천을 거쳐 여수에 이르는 과정이다. 세 개(광양, 순천, 여수)의 市 지역을 걷는다. 광양읍성이 있었던 옛 광양의 중심지를 벗어난다. 전남도립미술관은 아침이라 문을 열지 않았지만 문을 열었어도 시간 관계상 들어가 관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광양서천의 신도교를 건너 광양읍 도월리로 넘어가 광양역사와 신도마을을 바라보고서 곧 월평마을로 들어섰다. 의젓한 느티나무가 단정한 월평회관을 거쳐 월평마을을 벗어나 월평들을 걸었다. 아침의 월평들을 걸어가는 길손은 어린 시절 논둑길을 걷던 기억을 떠올렸다. 바짓가랑이를 적시던 이슬을 만난 듯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방도 863번 '해광로'로 나와서 인덕천의 세풍교를 건너 세풍리로 넘어가 신촌마을, 해창마을, 삼성마을을 지나간다. 해창마을 도로에는 이 지역이 광양쌀을 대표하는 듯 정미소가 두 곳, 떡방앗간이 있고 광양농협 종합미곡처리장도 있다. 멀리 보이는 현대제철 순천공장을 바라보며 광활한 매립농토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광양읍 세풍리 농촌마을을 지난다. 광대한 세풍 생태습지를 지나서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로 들어서 정유재란 때 순천왜성에서 죽은 왜구들의 원귀를 쫓아내기 위해 충무공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충무사를 들렀다. 왜성 정상부 천수기단에 있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기리는 고니시 유키나가碑가 충무사 경내에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성마을에서 잠시 남파랑길을 벗어나 이 마을 출신의 동화 작가 정채봉 생가를 들렀다. 생가 복원 공사를 시작하기 위함인지 대문은 잠겨 있고 집 지붕과 대문 지붕을 덮어 놓았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떠나 버려서 할머니 손에 자라났다고 한다. 결손가정 출신으로 아름다운 동화를 쓴 정채봉, 생전의 그를 인제 백담사 가는 길에서 꼭 한 번 만났다. 얼굴빛이 곱고 선한 자태를 지닌 자그마한 체구였다. 그의 작품 '오세암'을 읽고서 감동하기도 했었다.
신성마을 바깥쪽에 있는 순천왜성에 올라서 사방을 조망하며 역사의 상흔과 영광을 생각했다. 어제 걸으며 오르지 못한 광양의 구봉산과 광양만이 한 눈에 조망된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머물며 왜성을 공격한 광양만의 노루섬 장도(獐島)는 율촌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허물어지고 남은 일부 숲이 보인다. 임진왜란이 경상도를 유린한 전쟁이었다면, 정유재란은 전라도를 유린한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며 최후의 전투를 벌인 순천왜성과 장도 전투는 실질적으로 왜란을 끝내는 필사적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노량으로 쫓기던 왜군들의 총격에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노량해전 관음포 앞 바다는 순천왜성에서 가늠되는데 이 날은 미세먼지 탓에 부옇기만 하다. 1598년 11월의 추위 속에 이 지역민들은 얇은 옷을 입고 왜성전투와 장도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애끓는 충혼이, 무너져 일부가 남은 장도 섬에 수많은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왜성에서 내려와 현대제철 순천공장 정문 앞을 거쳐 율촌제1산업단지 앞 인덕로를 따라간다. 율촌 장도공원을 들러볼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그냥 통과한 것은 뒷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인덕로 산단교차로를 지나 율천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용전천 둑방길을 따라가다가 율천3교를 건너 순천시 해룡면 호두리 호두마을로 들어간다. 호두가 호랑이의 머리 虎頭인 줄 알았는데, 여우 머리인 狐頭였다. 호두마을을 거쳐 '여순로'로 나와 '여순로'를 따라서 순천시 해룡면 호두리 당두마을을 거쳐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율촌파출소 옆에서 51코스 걷기를 마친다.
51코스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가 지금도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51코스 안내도에 '유당공원'과 '광양와인동굴&광양에코파크'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50코스에 속한다. 광양 코스라고 하여 50코스와 51코스 안내도에서 '구봉산 전망대', '사라실예술촌', '유당공원', '광양와인동굴&광양에코파크', '전남도립미술관'만을 안내하고 있는데, 이는 편협한 지역이기주의에 속한다. 남파랑길은 대한민국 국토 둘레길이다. 대한민국 남파랑길 51코스 안내도에는 광양 지역에서 출발하여 순천 지역을 거친다. 그래서 '충무사'와 '순천왜성'을 소개하는 51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야 한다.
세풍일반산업단지 조성으로 세풍리 일대의 토지 보상 문제로 개발사업자와 마을 주민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세풍리 삼성마을에 현재의 보상가에 반대하는 현수막들이 길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토지의 현 거래가에 정당한 보상을 바라는 주민과 세풍일반산업단지에 입주하는 기업들을 유인하기 위한 사업자의 토지보상비 인하가 갈등인 것 같다. 또 하나 환경 문제가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광대한 세풍 생태습지에 한국전력이 송전탑을 건설하고 있는데 환경단체와 지역사랑단체들이 이를 반대하고 있다. 세풍일반산업단지에 전기 공급은 필수이고 이를 공급하는 송전탑 건설 또한 필수적이다. 그런데 송전탑을 어디에 건설할 것인가를 두고 마을 주민들과 충분한 협상이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이번 광양을 걸으면서 인덕천이라는 하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광양동천과 광양서천은 모두 인덕천에 합수한다. 인덕천은 광양만으로 흘러들며 주변에 광대한 습지를 형성했다. 광양만 세풍리에 광양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인덕천은 광양만 유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그 물이 더 광대한 습지를 형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역 버스정류소 시설이 조잡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터무니없이 낡았다. 지자체들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안락에 관심을 갖는다면 단순한 버스정류소 하나라도 안락하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시설해야 한다. 시설 뒤에도 끊임없는 피드백(되먹이기)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호두마을 버스정류소는 새로이 지어져서 아름다운 버스정류소로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지자체에 돈이 부족하여서일까? 지역의 쓸데없는 과장 광고와 거품 예산을 줄여서 각 마을을 아름답게 조성하는 데에 사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산업단지 조성에만 혈안이 되지 말고, 주민들의 안락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마을 풍경 조성을 제1순위로 둔다면 언제나 가능하다. 광양만의 율촌산업단지를 걸어가는 '인덕로', 가로수 먼나무의 붉은 열매들이 가슴을 물들였는데, 호두마을에서 '여순로'로 나와 길을 걸을 때 길손의 마음에 왜 폐허의 기분이 들었을까? 아름다움, 인간과 자연이 조화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길손은 붉게 물들고 싶다.
2.걸은 과정
광양터미널 입구 위쪽에 있다. 전남도립미술관 건물이 터미널교차로 건너편에 보인다.
남파랑길 51코스 안내도는 시작지점에서 조금 더 진행한 뒤 터미널교차로 도로변에 있다.
'유당공원'과 '광양와인동굴&광양에코파크'는 50코스에 속하는데, 다시 소개하고 있다. 충무사와 순천왜성을 소개하는 51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야 한다.
오른쪽 끝에 어제 그 아래를 걸었던 마로산과 마로산성이 분명히 보인다.
광양시 광양읍 인동리에서 광양서천의 신도교를 건너 광양읍 도월리로 넘어간다. 서천 방둑 건너편에 신도마을과 그 뒤 중앙에 둥근 쟁반 모양의 원통형 지붕이 있는 광양역사가 보인다.
왼쪽에는 광양농협 여성대학 농사체험장이 있다.
남파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월평회관 앞을 통과한다.
월평들을 가로질러 지방도 863번 '해광로'로 나간다.
남파랑길은 해광로를 따라 신촌마을로 진행
중앙에 마로산과 마로산성이 보인다. 그 왼쪽 아파트는 오데뜨아파트 단지이다.
인덕천에 놓인 세풍교를 건너 광양읍 도월리에서 세풍리로 넘어간다.
세풍 생태습지에 한국전력이 송전탑을 건설하는 공사를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건너편 태극기가 휘날리는 건물은 해창마을회관인 듯. 건물에 세풍발전협의회·세풍연합청년회 현판이 붙어 있다.
남파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해창마을 방향으로 직진한다. 삼성마을은 정면에 보이는 광양농협미곡종합처리장 방향으로 진입해야 하고 중앙 뒤쪽에 세풍산업(주) 건물이 보인다.
남파랑길은 해창마을을 빙 돌아서 국도 2번 '충무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삼성마을 앞으로 진행한다.
풍년정미소에서 해창마을을 거쳐 온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맨 왼쪽에 세풍초등학교도 보인다.
세풍일반산업단지가 개발되면서 토지소유자들이 현 거래 시세에 맞는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맨 뒤쪽에 호남정맥 산줄기와 백운산, 억불봉, 왼쪽에 세풍산단(주), 앞쪽의 삼성마을과 뒤쪽에 해창마을이 보인다.
맨 뒤 호남정맥 백운산 산줄기, 앞쪽 삼성마을과 그 앞 세풍일반산업단지가 보인다.
앞 오른쪽은 배수갑문시설, 왼쪽에 현대제철 순천공장, 맨 뒤 중앙에 순천왜성, 남파랑길은 지방도 865번 인덕로 신성1교 아래를 통과하여 충무사로 진행한다.
왼쪽에 현대제철 순천공장, 맨 뒤 중앙에 순천왜성, 남파랑길은 지방도 865번 인덕로 신성1교 아래를 통과하여 충무사로 진행한다.
왼쪽으로 돌아서 충무사 입구로 진행
일찍이 푸른 파도 이랑마다에/ 만복이 실려와서/ 비경 중의 비경을 이루고/
풀과 나무와 사람들을 늠름히 키운/ 신성리의 바다가 있었다./ 여기에
한 시절에는 왜적에게 볼모가 되어/ 축성에 피와 땀을 공출당하기도 하였으나
분기하고 분출하여/ 충무공의 깃발 아래서 되찾은 강산
오늘도 흠모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여기에
물 반 고기 반의 바다/ 뻘 반 조개 반의 갯벌에 의지하여
흰구름과 같은 소박과/ 갈대 같은 투혼의 후손들이 자랐다/ 여기에
공단의 새 물결이 밀려와/ 우리 사랑 신성리의 바다는
우리들의 눈물 속에 아득히/ 그리움만을 남긴 채 묻혀버렸다/ 여기에
지심 저 깊숙이/ 이 마을 사람들이/ 배 띄어 고기 건지던 평화와
정월 대보름날 줄다리던 함성과/ 문절이 짱뚱이 고막 석화 바지락들
꿈이 산호와 진주로 영글어 있으리/ 여기에
오 바람이여 신성리의 바람이여/ 잃어버린 우리의 바다를 노래하며
강강수월래 원무를 돌자/ 누가 여기 신성리의 터를/ 신성하지 않다 하랴
세세/ 손손/ 태평하라/ 번영하라/ 영광하라
역사의 마을 이곳 신성리는 순천 시내에서 2.5리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유재란 중 1597년 9월 초 왜(倭)는 이곳에 난공불락의 성을 쌓아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수성장으로 하여 본토귀환의 기회를 노렸으나 1598년 9월부터 11월 19일 60일간 육지와 바다에서 조명연합(朝明聯合)이 수차 격전을 전개하여 승전한 곳이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1663년경 소라면에서 달성 서씨 판서공파가 처음으로 예교(曳橋)로 개촌(開村)하였고 지명을 신장개로 바꿔 불렀다. 1670년경 순천 황전면에서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수년 후 김해 김씨 삼현파, 경파 파주 염씨, 광산 김씨, 수원 백씨, 밀양 박씨, 순천 김씨, 동성 이씨, 밀양 손씨, 순흥 안씨, 전주 이씨 양영대군파, 창원 정씨, 경주 이씨 등 많은 성씨들이 복합 입주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1893년경에는 마을 앞 포구에 외래어상선이 전국각처에서 입항하여 성시를 이루었고 고종 30년경 왕실명예궁에서 도여, 객주, 차정해서 포구에 세금거두고 좋은 고기는 진상 받았으며 대구, 청어, 갈치, 상어, 조기 등의 다양한 어물과 해삼, 전복 같은 패류까지 상장되어 순천, 구례, 광양, 남원, 전주 등의 수산물의 거점항이며 상장 수산물은 많은 인력으로 수송하였고 한일합방시는 전국에서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시장이 형성된 흔적이 남아 있다.
1889년경에 마을대표가 중심이 되어 주민들의 성금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하여 춘추로 제사를 지내오다가 성의가 해이(解弛)해지자 순천향교와 마을이 공동으로 제사를 받들어왔다.
한일합병 후 1914년 세부 측량 때 왜교성(倭橋城)을 배경 신성리(新城里)라는 지명으로 바꿔 오늘까지 전래하고 있다. 그 후 전라선 철도 여수 개통 후 포구는 한산해지고 말았다. 1930년 순천 남장로교는 전도사를 파송 신성교회를 설립하였다. 1944년경 일제는 마을 수호신 이충무공의 사당을 헐어 없애고 영정은 해룡주재소 순사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일제 해방 후 마을 대표가 순천 유지와 향교를 방문하여 충무사 복건 청원으로 향교와 경모회, 행정당국에서 후원으로 1948년 충무사를 재건하였다. 현재는 순천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와 향교가 공동으로 춘추로 제사를 모시고 있다.
1935년 재일경도거주 신성출향 청년들은 회장을 선임하여 고향 문맹퇴치에 성금을 모아 당시 마을대표에 전달 그 자금으로 28평 가량의 와가 4칸을 세워 신성간이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폐교 공가로 방치되었으나 1954년 7월 그 건물에 해룡초등학교 분교가 개교, 육성회장은 주민의 성금으로 학교 부지를 마련, 문교부에 예산 청원, 국고 지원받아 4교실 석조건물을 세워 충무국민학교로 승격하여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농촌 인구 감소로 아동 수 정원에 미달, 1999년 3월 31일(45회 차)로 해룡초등학교로 통합하여 충무학교는 폐교되었다.
1959년 광양농조는 마을 뒷바다를 간척하여 농지를 조성 분양하고 같은 해 마을 앞 일부 바다를 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가 간척 공사를 하여 농지를 조성하였다. 1964년 벌교수협은 신성어촌계를 구성케 하여 31만 평의 면허어장과 60만 평의 관행어장에 고막, 굴, 바지락 등 패류 양식을 권장하여 전국 모범어촌계로 성장하여 부촌이 되었으며, 1996년 전남도는 우리 마을 앞 바다를 율촌산단으로 지정함에 따라 우리 조상들의 얼과 숨결이 젖어있고 신성포인의 긍지와 꿈을 일구어가던 우리들의 황금생활터전인 바다가 산단부지로 조성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撰(찬) 신성노인회
2003년 5월 3일
충무사(忠武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2길 145)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뒤 약 100년 후 이곳에 이주해 온 주민들이 순천왜성 전투에서 많은 왜군이 죽어 그 왜귀가 밤이면 자주 출몰하여 몹시 불안해서 이곳에서 사당을 짓고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 뒤부터는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943년 가을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사당을 소각하였던 것을 1945년 조국 광복과 동시에 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가 설립되고 1947년 현 위치에 사당을 새로 건립하였다. 이후 군관 송희립 장군과 정운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같이 봉안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모시고 있다.
중앙에 충무사(忠武祀) 사당, 왼쪽은 재실, 오른쪽은 영당(영정을 모심)
정채봉(丁埰琫)(1946~2001)은 순천 출신으로 아버지 정용석과 어머니 허정순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마저 일본으로 이주하고 소식이 끊어졌다. 이후 할머니에 의해 어렵게 성장하였고 김순희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정채봉은 한국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로 딸 정리태 또한 동화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채봉은 결손 가정에서 성장해 어린 시절 내성적이고 심약한 성격으로 또래 친구들과 사귀기보다는 바다와 나무, 풀, 새들을 바라보며 자라났다. 광양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정채봉은 온실의 연탄난로를 꺼뜨려 관상식물을 죽게 만든 일로 학교 도서실 당번 일을 맡으면서 문학 창작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73년 동화 「꽃다발」이 당선되어 등단한 후 『물에서 나온 새』, 『오세암』, 『스무살 어머니』, 『생각하는 동화』[전 7권], 『초승달과 밤배』 등의 동화를 창작하였다. 1975년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8년 샘터사에 입사하여 편집부 기자와 주간, 편집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초등학교 교과서 집필 위원 및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계간 『문학아카데미』 편집위원,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겸임교수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디지털순천문화대전에서
이 앞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왜성으로 드나들게 했다. 지금은 매립되어 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순천왜성(倭城)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1만 4천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조·명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당시 남해안 26 왜성 중 하나이다. 기록에는 ‘왜교’, ‘예교’, ‘망해대’로 나타나고 있다.
정유재란(1597년) 때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 선봉장 우키타 희데이에(宇喜多秀家)와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호남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주도하에 1597년 9월부터 11월 말까지 3개월간에 걸쳐 쌓은 토석성이다. 순천 왜성은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1 일대로 광양만에 접한 나지막한 야산에 있다. 해상으로는 장도, 송도, 대륵도 등을 비롯한 여러 개의 섬이 있다. 조명연합군의 육군 3만 6천, 수군 1만 5천의 병력이 장도 등을 오가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순천 왜성 바로 남쪽의 장도는 이순신이 주둔한 곳이다. 이순신은 이 일대에서 27일간 머물면서 전사하기 하루 전 일본군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그 결과 유서 깊은 전적지로 남게 되었다." - 디지털순천문화대전에서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을 사진으로 찍어 표석에 붙였다. 이 그림은 1974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 교수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림 아래에 이름이 적힌, 일본인 '나카무라(中村仁實)'가 필사본을 그렸다. 당시의 군대 배치와 규모, 전투 상황이 그림 속에 담겨 있다.
"중앙의 본성은 해안선이 바다 쪽으로 돌출된 곳에 나지막하게 형성된 해발 57.2m 야산의 정상부 평탄면에 자리하고 있다. 산의 정상부에서 동쪽인 해안 쪽은 비교적 급한 경사이고 서쪽은 완만한 경사이다. 본성의 체성은 8부 능선 이상에 3단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북 방향으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운 부정형이다. 내부의 가장 높은 곳에는 천수대가 자리하고 있다. 본성은 산의 서쪽 사면 끝자락에서 북쪽으로 가는 능선 위에 있는데, 북쪽 해안선에서 남쪽 해안선까지 남-북 방향으로 장성을 이루고 있다." - 디지털순천문화대전에서
이 성터는 2006년부터 일본의 기술자를 불러 복원하기 시작했고, 아직도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성은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지만, 일본의 성은 기초 없이 바로 쌓아 올리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이곳은 천수각이 세워졌던 곳이다. '정왜기공도권'을 통해 5층 규모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천수 건물이 세워졌던 단으로 천수기단 앞에는 부속된 낮은 단이 있다. 천수(天守)는 성을 대표하는 권위와 상징의 건물이. 『정왜기공도권』에는 3층 팔작지붕의 천수대가 그려져 있으나 천수각 1층 아래에 '오층망해루'라고 쓰여져 있어 오층 건물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수기단은 오랜 세월 동안에 석축이 흐트러지고 일부가 무너져 200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축쌓기 방식은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이다. 모서리 돌은 쐐기질하여 쪼갠 돌을 사용하였고, 쐐기질 흔적이 잘 남아 있으며 위아래를 교차되게 쌓았다. 천수기단의 상부는 남아 있던 초석은 그대로 보존하고 기존 초석위에 새로운 초석을 놓아 건물의 규모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 5층의 천수각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중앙에는 삼각점이 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신성마을과 충무사, 그리고 오른쪽 넓은 들은 광양시 광양읍 세풍리 들판이다.
현대제철 순천공장과 멀리 호남정맥의 백운산 산줄기가 광양을 에워싸고 이어진다.
광양만을 전망할 수 있는 최적지 구봉산이 중앙 오른쪽에 들어온다.
광양만과 율촌제3산업단지, 그림 중앙에 이순신대교와 그 뒤쪽에 이순신 장군의 순국한 노량해협이 가늠된다.
율천산업단지 뒤쪽에 봉긋이 솟은 곳이 장도(獐島), 노루섬이다. 저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주둔하며 이곳 순천왜성에 머물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노량해협으로 유인하여 정유재란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순천왜성 바로 남쪽의 장도(獐島)는 이순신이 주둔한 곳이다. 이순신은 이 일대에서 27일간 머물면서 전사하기 하루 전 일본군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그 결과 유서 깊은 전적지로 남게 되었다." - 디지털순천문화대전에서
성곽의 본성과 외성 사이에 방어를 위해 인위적으로 넓은 물길을 설치하였다. 해자는 바닷물을 유입함으로써 본성을 섬처럼 요새화하였고, 다리를 만들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1598년 전쟁의 모습을 그린 <정왜기공도권>을 통해 해자, 천수각 등 주변 지형과 건물의 현황을 알 수 있다. 주변 지역이 공업단지 및 농경지화되면서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고, 지형이 변해 본래의 해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해자의 모습은 2007년 순천왜성 보수사업으로 일부 지역에 대해 북원이 이루어지 것이다.
이 성은 전라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왜성으로 1597년 9월 중순부터 11월말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쌓았다. 1597년(정유년) 9월에 왜군은 경기도 부근 전쟁에서 패한 뒤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각 지역의 요충지를 찾아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성을 축조하였던 것은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간에 걸쳐 이곳에서 펼쳐진 싸움이 왜교성(倭橋城)전투이며, 이는 조(朝)·명(明) 연합군과 왜의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였다. 당시 전재의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에 그려져 있다.
성곽의 구조는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성에는 별도의 내성이 있다. 내성과 본성의 성벽은 각각2겹으로 축조되어 있고, 외성은 1겹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곽내에는 천수기단, 문지, 해자 등의 주요 건물지가 남아 있어 성곽 축조 당시의 성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성곽내 주요 건물지에 관한 내용은 전쟁의 모습이 그려진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성교 다리기둥에는 조선의 판옥선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난간에는 관리의 청렴함을 상징하는 '팔마비(八馬碑)'의 말들이 조각되어 있다. 순천을 상징하는 팔마(八馬)의 유래는 이렇다.
'순천 팔마비'는 1281년(충렬왕 7) 이후에 승평부사 최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지금의 순천인 승평부에 건립한 비석이다.
<고려사>의 '열전(列傳)'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석은 승평부에서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자신이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고,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한다. '순천 팔마비'는 2021년 보물 제2122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면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어 다리를 통하여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왜교성(倭橋城)'이라 불렸었던 같다. 왜성 앞과 뒤 모두 매립되어 예전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산단교차로를 통과하여 해룡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용전천을 따라 진행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에서 율촌3교를 건너 호두리로 넘어간다.
이제는 봉건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그 옆에는 슈퍼맨 슈퍼마켓이 있는데 문이 닫혀 있다.
"2022년 근하신년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가까이/ 호랑이의 힘찬 기운을 받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호두마을청년회
검은호랑이의 해, 새해인사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다. '호두'가 '虎頭'인 줄 알았는데 '狐頭(여우머리)'였다.
"호두(狐頭)의 우리말 이름은 ‘여숫머리’이다. 마을 뒷산이 여우 머리 같다고 ‘여숫머리’라고 하였다. ‘여숫머리’의 ‘여수’는 여우의 전남 사투리인데, 이를 여우 ‘호(狐)’에 머리 ‘두(頭)’자로 한자로 표기하여 ‘호두(狐頭)’가 된 것이다." - 디지털순천문화대전에서
"순천시 해룡면 호두리는 호두마을 · 당두마을 · 구상마을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호두리 동쪽으로 펼쳐진 갯벌은 현재 매립되어 율촌제1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 디지털순천문화대전에서
여숫머리마을인 호두마을, 마을 뒷산이 여우 머리를 닮았을까?
여순로를 따라 순천시 해룡면 호두리 '당두마을'을 거쳐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로 넘어간다.
남파랑길 52코스 안내도는 율촌파출소 건너편 도로에 있고, 52코스 시작점 표지는 파출소 담 서쪽 옆 전봇대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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