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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리틀분재 원문보기 글쓴이: 초이
옛 그림 속에서 나무를 훔치며
1. 혼자 놀기
분재로 인연을 맺어 사귀게 된 이가 있다. 그의 덕택에 옛 그림을 통해 분재 감상의 안목을 키우는 방식에 눈을 떴고,
또 오주석의 책 ‘우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책의 제목처럼 옛 그림 읽기는 꽤나 쏠쏠한 즐거움이
있어 필자는 곧 옛 그림과 함께 하는 ‘놀이삼매’에 빠져들게 되었다. 개그 프로에서였던가 ‘혼자 놀기’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옛 그림 속의 나무를 훔쳐 분올림 하는 것’이야말로 ‘혼자 놀기’의 진수였다. 그림 속의 나무를 유혹하여
분재의 세계로 끌어냄이 그림 읽는 즐거움보다 훨씬 짜릿하다.
컴퓨터와 포토샵 프로그램만 있다면, 나는 감독이 되어 구상과 연출을 홀로 펼쳐갈 수 있다. 자르고, 붙이고, 굵히고,
깎아내고… “NG!” 맘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 한 과정이 맘에 들면 일단 거기까지
‘저장’ … 십 여년 세월이 필요한 수형의 완성이 불과 한 두 시간 남짓에 끝나 버린다. 마지막 과정인 분올림, 제격의
분이 아니면 어떠한가?
‘혼자놀기’를 거듭하다 보니 그저 단순한 즐거움에 그치지 않았다. 실전 분재에서 겪게 되는 많은 고민들이 놀이
과정에서 똑 같은 양상으로 드러난다. 학습효과가 크다.
먼저 그림을 고르는 일은 분재원을 찾아 다니며 소재를 고르는 즐거움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림은 아무래도
화선지의 형태에 알맞은 구도로 그려지기 마련, 화폭 밖으로 대담하게 생략된 줄기와 가지는, 꼼꼼히 관찰하고
상상하여 복원해야 한다. 필요한 가지는1년차, 2년차, 3년차를 상상해가며 새로이 그려 넣고, 잘려진 밑동을 복원할
때는 고태의 표현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것은 곧 배양이다. 분올림 할 때 좌우 기울기를 살펴가며 중심을 잡는 것은
나무의 정면 정하기와 다름이 없다. 그림 속 나무는 그림의 규범과 화가의 관점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필자가 훔쳐
낸 그림 속의 나무는 더이상 그림의 구성 요소가 아니다. 분재가 되었으니 분재의 규범과 필자의 관점으로 다시
태어난다.
필자는 ‘옛 그림 속의 나무를 훔쳐 분에 올리는’ 놀이를 통해 그림 속 공간에서는 나무가 어떤 형태로 살아 숨쉬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지, 그림 속의 이웃들과는 어떤 관계와 정황을 이루며 상징의 세계로 점입하는지를 살핀다.
작가는 나무와 나무가 놓인 정경을 어떻게 관찰하였으며, 무엇을 담아내려 하였는지, 이를 위해 색의 농담과 선의
필치와 각 요소의 포치를 어찌 하였는지를 읽어 내려 한다. 어떤 그림에서는 작가가 처한 상황과 그 상황을 만든
역사와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까지 감상의 즐거움을 증폭시킨다. 가끔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림을 해체하고 기발한
재구성으로 덤을 얻어내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 크기에 몇 낱의 경험들을 소개하여 분우(盆友)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이다. 분우 중의 누군가가 나서서 더 크고, 더 짜릿한 즐거움을 소개해 준다면 이 같은 ‘흥겨운 나눔’이야말로
기쁘지 아니할소냐! (不易悅呼)
2. 탐매(探梅)와 탐매도(探 梅圖)
매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탐매를 위해 대문을 나서야 한다. 필자의 ‘혼자 놀기’는 문지방조차 넘을 필요가 없다.
후자는 매화 그림을 찾는 탐 매도(探 梅圖)요, 전자는 탐매(探梅)이니 두 여행은 애당초 찾는 대상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 속에 다르지 않음이 있으니, 양자 모두가 찾고자 하는 것은 일지(一枝)와 직지(直枝)를 아우르는
매화나무이다. ‘향이 없다, 그림이잖는가’ 따위의 폄하는 치졸하고 답답한 이들의 입에서나 나올 말이다. 적어도
분재하는 안목과 즐김의 태도를 갖추었다면 그림 속의 설중매를 휩싸고 있는 적설의 정경과, 눈발 속에서 오롯이
피어있는 매향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옛 그림의 전통이 매화를 즐긴 것은 두 말의 여지가 없다. 덕분에 ‘탐 매도’ 여행은 큰 돈 들이지 않아도 쉽사리
즐거움을 채워갈 수 있다. 여유가 생기면 해외로 나가듯 안목이 더해지면 일본과 중국의 옛 그림 속에서 매화나무를
찾는 일도 색다른 즐거움이 될 터이다.
매화에 관한 일련의 글들은(학고분재 창간호에 수록된 정관영의 글 참조) 한중일 삼국의 매화관과, 특히 중국과
일본의 현대 분매에 관해 좀 더 두터운 지식을 갖추기에 유익하다. 그는 한국이 고유의 매화 관상 전통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현대의 매화 분재에서는 그 전통을 담아내지 못할 뿐더러 이렇다 할 작품마저 발견하기 힘든 상황임을
지적한 바 있다. 정관영은 최근 ‘한국적 매화 분재 수형의 실제와 가능태’란 주제로 새로운 탐구를 진행하였고,
그 발표를 앞두고 있다. 옛 그림 속에서 나무를 들어내고, 그것을 다시 분에 올려 분매인척 만들어 보는 ‘시뮬레이
션’은 어쩌면 정관영이 말하는 ‘한국적 매화 분재 수형의 가능태’를 찾아내는 일일지 모른다.
자! 이제 여행을 시작해 보기로 하자. 옛 그림의 대상과 옛 그림을 찾아 내는 방법까지는 소개하지 않으려 한다.
즐거움은 게서부터 시작되기도 하거니와 유홍준의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를 손에 들고 답사 여행을 따라하면
즐거움이 유홍준의 손바닥을 벗어나기 힘든 법이다.
경험 상 <탐 매도> 놀이는 대략 다음으로 유형화 되지 싶다.
첫째, 그림 속의 매화를 수정하지 않거나 약간만 수정하여 바로 분매화 할 수 있는 경우
둘째, 줄기 또는 가지를 가감하거나 크게 변형하여 분매화 할 수 있는 경우
셋째, 화폭 밖의 생략된 부분을 복원하거나, 상당한 수정을 하여 분매화 할 수 있는 경우
넷째, 그림 속의 나무가 분재의 규범에서 너무 멀어 분매화가 곤란한 경우
다섯째, 여러 그림 속의 나무가 갖는 매력을 조합하여 새로운 분매를 창작하는 경우
3. 옛 그림 속으로 숨어 들어
1) 이한철의 홍매도
옆의 홍매도는 그림으로는 그다지 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여백은 많지만 시선이 어지럽다. 분방하되 세련되지
못한 구도 탓이리라. 다만 그림 속 나무가 오로지 매화 하나로 이루어져 분재인의 눈길을 붙잡는다.
일견 줄기와 가지가 고태를 품고, 흐름 또한 기굴하여 매화의 특성을 살핀 듯 하나, 그림을 확대하여 자세히 살피면
붓질이 매끄러워 그 질감이 고매의 수피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가지 뻗음 역시 기교의 흔적을 모두 지워내지 못해
자연스럽기 보다는 한결같다는 느낌이 더욱 진하다. 매화의 관찰이 집요하지 못했음이 엿보이는 대목들이다.
꽃이 탐스럽고 그 숫자가 많은 것 또한 성긂을 미학으로 삼아온 조선 선비들의 매화 관상 전통으로부터도 살짝
비켜간다. 그러나 꽃의 양감이야 탓할 필요는 없다. 외간 나들이가 순조롭지 않았을 여인들이야 이 그림을 안채에
두고 매향을 탐하며 재잘거리지 않았을까
이 그림에서 나무를 들어내어 분올림 하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가지에 장단을 만들어 한결같은 느낌을
덜어 낼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춘다. 중앙에서 왼쪽으로 뻗은 가지는 과감하게 잘라 줄이고, 밑동 좌측의 가는 줄기
하나를 제거하여 남겨진 부간의 애교적 역할을 조금 더 강조한다. 그 정도에서 마감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수형이다.
글을 정리하면서 또 한 번 수정한 것이 아래 오른쪽의 예상도이다. 소략하게 수정했지만 여전히 고개가 갸우뚱
거려진다. 줄기와 밑동의 곡이 줄기의 좌우를 반전시켜 보았지만 이번에는 부간이 장애가 된다. 아무래도 좋은
소재가 아닌 모양이다. 실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혼자놀기’에서는 거듭 고쳐가는 재미가 있다. 안목도 덩달아
고쳐질 것이니 일거양득이다.
예상도 수정도 1 수정도 2
2) 매상숙조도
230여 점의 중앙 박물관 그림 자료를 살펴 찾아 낸 매화 그림 중의 하나, 이 그림을 발견한 순간 흡사 ‘심본 듯’ 흥분
하였다.
필자가 실전에서 시도하고 있는 ‘가느다란 줄기(세간)의 아름다움’은 바로 저 그림 속 매화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짧은 직선들이 이어져 생성하는 곡선의 자연스러움, 곡선 속에 숨어있는 직선의 통렬한 묘미, 그것이 바로 한국적
선의 미학이 아니던가? 형상과 무관한 듯, 형상을 초월한 듯, 형상을 만들어도 절대 형상에 눌리지 않고 ‘선이
선대로 살아있는’ 한국적 선의 진수가 물씬 풍긴다.
작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매화를 관찰한 눈썰미가 여간 맵지 않다. 가느다란 줄기 몇 몇으로 매화의 생리를
이만큼 제대로 표현한 그림은 흔치가 않다. 저만한 굵기의 줄기가 가져야 할 수피의 질감이 농담의 강렬한 대비로
살아난다. 4~5년은 자랐을 줄기는 직선으로 뻗다가 꺾이고, 다시 이어져 마침내 한 곡선을 이루는 흐름이 지독스레
생생하다. 그 흐름은 하늘을 찌를 기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늘거려 연약한 자태도 없다. 그저 매화 줄기에 부딪혀
흐르는 꼭 그만큼의 바람만을 받고 또 견뎌냈음이 느껴지는 진하지도 엷지도 않은 혼연의 문인적 풍취다.
작가의 매화 관상은 더도 덜도 없이 조선 선비들이 갖고 있던 매화관 그대로다. 줄기와 가지는 성글고, 꽃은 조촐하다.
등걸이 갖는 묵직함이나 고태감 따위는(?) 좌하단 화폭 밖으로 살짝 밀쳐두었다. 필자의 천한 안목으로도 그 까닭을
알아 챌 수 있다. 졸고 있는 새를 향해 쏜살같이 강하하는 매의 모습과, 꽃잎인지 무엇인지? 후두둑 떨어지는 점,
점들에 익살이 넘친다. 흥겨웠을 한판 그림치기는 우측 중상부에 얇고 가지런한 품세로 화구(畵句)를 내림으로써
단정히 여미고 있다.
원님 덕에 나발 불 듯 필자 또한 <매상숙조도> 덕에 잠시라도 문인풍 나무를 가꾸는 재미에 푹 빠질 수 있었다. 그림
속에서는 표현되지 않았던 등걸의 볼륨감을 살려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 좌측 밑동에 사리가 두터울 듯한 등걸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하단 좌측의 가지는 살짝 구부리면 어떨까 시도했지만 에구구! 외마디 비명 속에 서둘러
원래의 모습을 살려낸다. 그저 화폭 밖에 있었을 줄기 2/3 지점에 왼쪽으로 짧은 가지 하나를 꾸밈 없이 덧붙였을
뿐이다. 더는 손댈 것이 없었다.
선에서 시작하여, 선을 기준으로 분할되는 공간과 그 공간을 어떻게 채우고 비워야 하는가? 그 가운데 ‘작가의 의
경’을 어찌 은밀하고 어찌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아름다움의 세계를 표출할 것인가? <매상숙조도>와의 대화는 이를
위해서라도 당분간 계속될 성 싶다.
3) 매창의 매화도
매창의 매화도 오달제의 묵매도
뿌연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달빛을 등지면 매화나무는 ‘월매’가 된다. 이를 그림으로 그려 관상하는 전통이
‘월매도’이다. 매창은 율곡의 동생이라고 한다. 저 그림 속 정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정면이 아니라 땅 바닥에
정좌하여 올려다 본 모습이다. 한없이 마음을 비워 무심에 이르러야 잡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쭉 뻗어 오른 두 가닥
줄기는 무슨 사연이길래 달빛마저 숨죽이게 만드는가?
옛 그림 속에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선비들의 ‘의경(意境)’은 주로 대나무로, 때로 하늘을 가르는 매화의 직지로
표출되었다. 위 오른쪽의 그림은 고려말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참살 당한 삼학사 중 하나인 오달제의 매화도이다.
기굴한 고매의 줄기가 고려의 역사를 그린 것이라면, 유독 곧게 뻗은 세 줄기의 매화로 오달제는 3인의 열사를 미리
예감하였던 것일까? 그리 생각하니 저 그림은 가늘게 직립한 세 가지가 다른 무엇보다도 커보인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매창의 매화도 속 나무가 과연 분매로 적당할 것인지 한참을 생각에 잠겼더랬다. 중국의 매화
분재 에서 더러 보기는 했지만 멋대로 비둔한 등걸, 걸맞지 않게 왜소한 몇 개의 직지만으로는 호평받지 못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놀이가 시작되고, 그림 속에서 나무를 들어내었을 뿐인 데, 스스로 놀라리만큼 분매로서의 독자적인 매력이 버티고
선다. 필자의 별 볼일 없는 안목이 부끄러워졌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다시 원본 그림을 세밀하게 관찰
하였다. 오리무중…. 에라! 무식이 용기를 부른다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차근 차근 풀어보았다. 가지의 위치를 변경
하고, 가지를 덧붙이고 덜어 보았다. 수없이 반복해도 결코 그림 속 나무의 조형성, 이미지와 동떨어질 뿐이다.
분석도1 분석도2
분석도1과 분석도2에서 보듯 매창의 그림 속 나무는 그 조형에 군더더기가 없다. 이른바 무결(無缺)의 완정성(完整性)을
갖추고 있다. 분석도 1의 부등변의 삼각형은 가지 하나 조차 가감할 여지가 없다. (의심스러우면 빼거나 넣어 보라) 분석
도2는 더욱 가관이다. 어느 줄기 하나를 골라 삭제하거나 새로운 줄기를 추가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분석도2의 화살표
가 말해주듯 굵고 가는 줄기가 교차하며 사방을 채우고 있으니 어느 것을 빼고, 어디에 넣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저러한 눈썰미와 손놀림을 갖춘 화가들을 유혹하여 분재를 만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미련과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4) 장승업의 화조도
오솔길인 듯 그림 하단에 나타난 꾸밈으로 보아 어느 양반 댁 정원일 듯 싶다. 매화의 굵은 등걸은 잘린 지 오래고
가느다란 줄기만 자라고 있다. 하나는 등걸 뒤로 뻗었다가 다시 앞으로 굽어 수심까지 이어지고, 하나는 좌에서
우로 줄기를 가로지르며 분방하게 뻗어있다. 그림 속의 대상 하나 하나를 선명한 농담(濃淡)으로 어루만져 존재감을
살려내고 우측 상단의 하늘도 시원하다. 매화가지로 날아온 두 마리의 새가 서로 다른 시선으로 사위를 살피고,
앉을 곳으로 작은 나무를 고른 또 한 마리의 새는 휘~청 휘어지는 나무에 놀라 그림 아래를 흐르고 있을 물살을
살핀다. 문득 꽃과 새가 노니는 정경이 있는 소산(疏散)한 정원이 갖고 싶어진다.
눈길이 그림 속의 매화를 떠나지 못한다. 비록 그림이지만 줄기에 서린 고태감이 압권이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림
속에서 나무를 들어낸다.
매화 등걸 앞뒤를 오가는 가는 줄기와, 좌에서 우로 그 등걸을 가로 질러 끝이 제멋대로 자란 또 하나의 가는 줄기,
시작은 했지만 놀이의 앞 길이 심란하다.
옛 그림 속 나무와 함께하는 놀이는 그 나무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 가상으로 배양하고 완성하는 데 본연의 즐거움이
있다. 그림 속 나무의 특성을 수목 생리에 어긋나게 변형하는 것은 놀이의 본연을 벗어나니 금기이다.
주간 뒤로, 흘러 우측 공간을 채운 줄기는 손댈 도리가 없다. 주간 앞을 가리며 우측으로 뻗은 줄기는 수년을 요량하고
잘라 다시 키우기로 한다.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그루솟음과 흐름이 좋은 고목 등걸에 가느다란 줄기 둘로 생명력과
운치를 물씬 풍겨내는 작품 하나가 창작되었다. 알면서도 채우지 않은 것 하나가 있다면 주간 끝에 짧더라도 가지를
달아 주간이 살아 있음을 주장했어야 함이다. 그 까닭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 모르고 있다면 공부를 더 해야
함이니….
5) 조희룡의 묵매도
옆의 그림은 함께 공부하는 이들에게 숙제로 제시한 조희룡의 묵매도이다. 숙제는 1) 그림 속 매화나무는 분매로
만들기에 적합한 특성을 지녔는가? 그렇지 않은가? 어느 쪽이든 그 근거를 달아 답하고 2) 분매로 만들기 적합하다
생각하면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독자 여러분들도 아래의 내용을 읽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 필자의 생각과 비교해 본다면 독서의
즐거움이 더욱 커질 것이다.
좌측과 위의 두 그림에서 보듯 조희룡이 남긴 매화 그림들은 조선의 다른 화가들이 그린 매화도와 색다르다. 그의
매화는 드물게 가지가 무성하고 꽃도 무성한 번매(繁梅)이다. 오직 위 그림만이 번매라 하기에는 뭣할 만큼 화폭의
여백이 널찍하다.
‘아따, 조희룡 이 사람이 또 뭔 짓을 한 게야?’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조희룡의 매화를 아는 사람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어떠하건 이 그림을 감상하는 포인트는 화폭 속이 안이라 화폭 밖을 어찌 상상하는가에 달려있다.
다시 첫번째 그림을 보기로 하자.
꺾여 오른 굵은 줄기는 진한 색으로 칠하여 그 세력이 보통 강하지 않다. 모름지기 그 줄기에 달린 가지는 무성하고,
꽃도 무성한 데 조희룡은 다만 한 줄기 가지를 따라 그의 붓끝을 흘려가며, ‘나 또한 화폭 밖이 무성할지라도 외따로
떨어져 나온 일지매의 미학도 즐길 줄 알거든’ 하며 그려낸 듯 싶다. 저 그림을 그린 날에 심정이 바뀔만한 무슨
일을 겪었을테지.
무슨 의도를 갖고 이 그림 속의 나무를 숙제로 냈던 것일까? 매우 제한된 단서만이 드러난 그림일진대 말이다.
수많은 원칙과 규칙과 기준을 알고 있다 하여도 정작 상상력이 부족하다면 수형 구상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
그림이야말로 숙제를 해야 하는 사람의 규범에 대한 이해와 수형에 대한 안목을 평가하기에 제격이다.
조희룡은 그림 속에서 매화나무의 전모를 그리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그의 미의식의 반영이다. 조선 미술사에서
조희룡이 차지하는 위상은 꽤 높은 경지에 있다. 우리는 비록 낯설더라도 경지에 이른 화가의 안목과 솜씨에
익숙해져야 한다.
분재가 무엇인가? 소재가 갖는 매력을 키우고, 결함을 없애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창작함이다. 도구와 대상이
다를 뿐 본질은 그림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좋은 그림을 남긴 화가의 안목과 솜씨를 배워 좋은 분재 만들기에
응용함은 유효한 학습 방식이 된다.
위 세 그림은 그림 속의 나무를 분에 올리기 위해 가지의 곡을 변경하고, 그림에서 생략되었던 화폭 밖의 요소를
복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래 매화 분재는 실전에서 상상하기 힘든 매우 독특한 존재감,
즉 강한 개성을 갖게 되었다. 이래도 놀이의 즐거움과 효용성을 찾지 못하겠는가?
6) 선암사 원통전의 고매
한 가지 놀이만 계속하면 곧 싫증이 난다.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배양 시뮬레이션은 그 대상에 제한이 없다.
선암사 원통전 앞 뜰에 심긴 고매는 잘 알려는 한국의 정매 중 하나이다. 이번에는 그 나무를 땅에서 파내어 분에
올려보기로 한다. 그림 속의 나무를 훔쳐내서 분에 올리는 일보다는 힘쓸 일이 무척 많으니 각오가 필요하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좀더 정교하게 분올림을 해야 하지만 그림 속 나무와 놀 때보다는 나무가 자라는 생리와 자연이
만드는 수형에 대한 관찰이 용이하고 그에 따른 학습 효과도 크다. 주의할 점은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복원하는
일이다. 수많은 줄기와 가지를 배경에서 분리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단순 노동’ 이다. 뚝심이 필요하다.
원본 사진이 맑지 못하여 뽑아 낸 나무도 선명함이 떨어진다. 그래도 가지의 흐름을 명확히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잔가지까지 너무 정밀하게 재현할 필요는 없다. 크기의 축소를 고려하면 적절한 수준의 잔가지 만으로 충분하다.
가상이라 할지라도 완성된 결과는 그림 속 나무로 창작한 결과와는 전혀 딴판이다. 이렇게 작법이 바뀜에 따라
수형의 세계는 다채롭게 펼쳐진다. 사람과 관점이 달라도 수형은 차이를 갖게 될 것이다. 필자가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일컬음이다. 누구도 홀로 해낼 수는 없다. 분재력이 일천하기에 나무를 배양,
관리하는 기술의 탐구는 후일로 미루고 한국 분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 토대 형성에 필요한 접근 방식을 먼저
탐구할 뿐이다.
온 세계의 분재인이 한국 분재를 쉽게 알아채는 그 날이 올 때까지… zero의 탐구와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2007. 1. 31. 병상에서 쓰고
2008. 6. 3. 수정
오 영택
7) 사족
다음의 그림을 감상하고 가상의 분올림에 적합한지, 적합하다면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해
보라.
첫댓글 원장님 옛날글 입니다.. 읽기 쉽게 웹문서로 편집 했습니다.. 매화 공부는 이어 집니다.. ^^
Good 자료~잘보고 갑니다.
제로님 쓰신 글중에 이런글이 있었군요?
단편적으로 매화나무시뮬레이션하는 그림은 강의시간에 봤던 기억이 있긴합니다만
천외천입니다요...
5개월여 수강하고 나니 이제 다섯줄 읽고도 체취를 느꼈습니다.
사람마다 숨길 수 없는 수형의 특징이랄까요.
특히 이글은 이미 제목에서 들켰습니다.
덕분에 매화 수형 복습 잘 하였습니다.
대단히 유익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