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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본지역의 조선인아나키즘운동
鄭惠瓊(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전문연구원)
목 차
1. 머리말
2. 재일조선인 아나키즘운동의 태동(1921-1923)
3. 재일조선인 아나키즘운동의 발전(1924-1930)
4. 재일조선인 아나키즘운동의 지역적 특성 - 오사카지역
5. 맺음말
1. 머리말
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의 사회운동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 전개되었다. 특히 1920년대는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이다. 사회운동의 모든 부문운동이 재일조선인 독자적인 조직체를 구심점으로 민족해방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재일조선인운동의 특징은 다양한 사조와 계층, 그리고 운동세력이 융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운동사에서 아나키즘운동은 큰 비중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아나키즘운동은 재일조선인운동사의 근간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재일조선인아나키즘운동은 국내운동과 다른 특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지역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1)
본고는 1920년대 재일조선인운동사 속에서 아나키즘운동을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지역적인 특성을 규명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 먼저 1921년에 결성된 黑燾會를 비롯한 1920년대 주요 아나키즘운동단체의 주요 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서 오사카지역에서 전개된 아나키즘운동의 성격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전자가 주로 토오쿄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재일조선인운동사에서 토오쿄오와 대비되는 지역인 오사카지역의 아나키즘운동사를 살펴보는 것은 기초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2. 재일조선인 아나키즘운동의 태동(1921-1923)
1) 흑도회 결성
1920년대초 일본지역에서 아나키즘은 이론적 심화가 선행되지 않은 채 민족운동의 수단으로서 채용되었다.2) 3.1운동 이후 유학생 가운데 일부는 만세운동만으로 독립을 이룬다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다양한 사조를 받아들이며, 관심의 폭을 사회․노동문제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白南薰, 卞熙鎔, 金俊淵, 崔承萬 등이 吉野作造와 福田狂二가 주도하는 여명회에 출입하였고, 元鍾麟, 鄭泰成, 權熙國, 李增林, 金鴻基, 林世熙 등이 堺利彦이 주도하는 코스모스 구락부와 高津正道의 효민회, 加藤一夫의 자유연맹에 출입하면서 사회주의사상과 접촉하게 되었다. 朴烈, 원종린, 金若水 등은 大杉榮, 岩佐作太郞과 자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에 영향을 받았다.3)
1921년 원종린은 사상단체4)인 신인연맹 결성을 계획하고 사회주의사상을 고취하는 취지서를 만들어 발표했다. 이 때 동지 10여명을 규합한 원종린은 林澤龍과 제휴하여 신인연맹의 자매적 행동단체인 黑洋會를 결성하려다가 김약수, 박열, 白武 등이 비슷한 성격의 단체결성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岩佐作太郞의 주선 아래 金判權, 권희국, 정태성, 曺奉岩, 김약수, 박열, 임택룡, 張貴壽, 金思國, 백무 등 20여명이 모여 1921년 11월 黑濤會를 창립한 것이다.5)
이 시기에는 아직 사회주의와 아나키즘간의 명확한 구분없이 두 사조가 식민지해방논리를 담고 있는 혁신적인 신진사조라는 점에서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었다.6) 흑도회도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아나키즘, 민족주의 등 각 사상조류가 합류하고 있었는데7), ‘혹도회’라는 명칭으로 보아 아나키즘이 우세한 것으로 보여진다.8)
흑도회는 ‘한국의 현실을 양심적인 일본인에게 전달하는 것, 국가적 편견과 민족적 증오가 없는 세계융합을 실현하는 것’ 등을 취지로 결성되었다. 흑도회의 주요 활동은 新潟縣조선인노동자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항의투쟁 및 기관지 발간이었다. 1922년 7월 일본 新潟縣 信濃川댐 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100여명이 살해당한 집단 학살사건이 일어나자9) 토오쿄오에 있는 유학생 간부들과 함께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조사활동을 벌이는 한편10), 규탄대회를 준비했다. 1922년 9월 7일 토오쿄오 YMCA강당에서 열린 합동규탄대회에서 박열이 중심이 된 흑도회원들은 일본인 사회주의자의 응원을 얻어 경과보고와 함께 연설을 하고 규탄했다. 이 대회의 특색은 민족적 차별과 박해에 대한 민족해방투쟁을 피압박계급해방투쟁의 형태로, 국적을 초월한 연대성 아래 전개하여 대중적 기반을 확보했다는 점이다.11) 흑도회는 1922년 7월과 8월에 박열이 주관하여 기관지 黑濤를 발간했다.
그러나 이 新潟縣사건을 둘러싼 활동을 계기로 흑도회내 사상적 분화현상은 분명해져서 해체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미 조선고학생동우회가 1922년 2월 조선일보를 통해 「전국 노동자제군에게 檄함」이라는 동우회선언을 발표하여 최초로 계급투쟁을 선언했다.12) 여기에 다시 新潟縣사건에 대한 규탄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간의 그 차별성이 농후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흑도회는 아나키스트 大杉榮과 岩佐作太郞의 영향을 받은 박열, 李允熙 등 아나키스트와 堺利彦의 영향을 받은 원종린 등 사회주의자로 사상적 경향성이 나뉘어지게 되어 1922년 12월 해체되었다.13)
흑도회가 해체된 후 박열, 이윤희는 1923년 2월에 黑友會를 창립했고14), 김약수, 김종범, 안광천은 1923년 1월 北星會를 결성했다. 흑우회는 박열이 중심이 되어 기관지 不逞鮮人을 발간했다.15) 불령선인이란 일본 경찰이 반일민족운동가를 모욕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다가 일반화된 경멸어이다. 不逞鮮人은 1호와 2호를 발행했으나 당국이 題號 사용을 금지하자 太い鮮人16)으로 바꾸었다가 당국이 다시 太い鮮人의 사용을 금지하자 現社會로 개칭했다.
박열은 太い鮮人 제2호에서 「아세아몬로주의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일본의 권력자를 위시해 아세아협회, 아세아청년회 등이 “아시아 인종은 아시아 인종으로 단결하고 ․․․백색인종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소로운 이야기’라고 비판하고, ‘조선에 동정적인 中野, 植原, 佐藤, 吉野, 松本도 모두 같은 입장이다. 우리들 조선인은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는 안된다’고 촉구했다.17) 즉 그는 당시 일본의 민본주의자들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2) ‘박열사건’18)
일본지역 조선인아나키스트 가운데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은 박열이다. 그는 일반인들에게 아나키스트로서보다 ‘박열사건’을 일으킨 독립운동가와 아내 金子文子와의 사랑으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다. 박열은 일왕폭살사건으로 검거된 이후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아나키스트임과 동시에 독립운동가로서의 기개를 날렸다. 이러한 모습은 수용 초기 한국 아나키즘의 특성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즉 한국아나키즘은 식민지적 억압과 그에 대한 저항에서 출현했으므로 민족독립운동과 동일시되었던 것이다.19) 여기에서 당시 신문기사와 재판기록을 이용해 박열의 개인사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박열의 가문은 전통적인 유학자집안으로 일본에 강제합병당시에는 지주계급에 속했으나 박열이 태어날 무렵에는 자소작농이었다. 5세때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180번지로 이사하여 7세부터 9세까지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과 동몽선습, 자치통감을 배우고 10세에 일본정부가 설립한 함창공립보통학교(4년제)에 입학하여 14세때인 1916년 3월 24일에 졸업했다.20)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했으나 9세때에 부친을 잃은 후 가세가 기울어 학비조달이 여의치 않자 道長官의 추천을 받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관비)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박열은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가담하고 지하신문을 발행하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사상이 건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3학년때에 퇴학을 당했다.
박열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에 젊은 일본인 교사로부터 幸德秋水의 대역사건(1911년) 이야기를 듣고 아나키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또한 3.1운동 당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고문이 가혹하다는 사실을 알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국내보다 일본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1919년 10월 도일했다.21) 토오쿄오에 도착한 박열은 신문배달, 막노동꾼, 우체부 등의 일을 하면서 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 1921년에 정태성, 金天海, 崔甲春과 함께 조선고학생동우회에 참가했다. 박열은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일본 아나키스트인 大杉榮, 岩佐作太郞과 접촉하면서 아나키즘에 공명하게 되었고, ‘자유연맹’에도 왕래했다.22) 1921년에 박열은 반민족행위자(조선인에게 있어서 조선민족을 파는 자, 예를 들면 친일파나 조선인을 모욕하는 일본인)를 응징하기 위해 血擧團을 조직했다.23) 혈거단은 비밀결사단체로서 義擧團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으나 곧 鐵擧團으로 고쳤고, 다시 혈거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24)
1923년 4월에는 아나키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不逞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박열이 흑우회를 운영하면서 별도로 불령사를 조직한 것은 일본공안당국의 감시가 심해서 흑우회와 같이 공개된 단체로는 혁명적인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공안당국도 불령사의 목적을 ‘무정부주의사회의 실현’으로 보고, 이를 위해 먼저 ‘다수 동지의 규합과 혁명기분을 촉진할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박열 등이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고 파악했다.25)
1923년 9월 1일 일본 칸토오(關東)와 시즈오카(靜岡), 야마나시(山梨)지방에서 진도 9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에 탔으며 34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이 지진이 일어난 직후, 박열은 이른바 ‘대역사건’을 일으킨 죄로 구속되었다.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예심재판을 거쳐 1926년 2월 26일부터 열린 공판 결과 3월 25일, 박열과 金子文子는 형법 제73조에 의거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26) 그날 오후에 열린 임시각의의 협의를 거친 후 무기징역의 특사를 받았다.27) 이들은 4월 5일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박열은 千葉형무소에, 金子文子는 宇都宮 형무소 도치키(檜木)지소에 각각 수용되었다.
이후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의 ‘정치범 즉시 석방’에 관한 포고령에 의해 秋田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11월 26일, 토오쿄오로 돌아온 박열은 1946년 1월 20일에 열린 ‘新朝鮮建設同盟’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8) 신조선건설동맹은 그해 가을에 우파단체를 통합하여 재일조선인거류민단으로 발족했는데, 여기에서 박열은 단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박열은 대한민국정부수립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일시 귀국한 후 다시 도일했다가 1950년 4월초에 영주 귀국했다. 박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장충동에서 납북되어 1974년 1월 18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직을 맡았다.29) 식민지 시대 수형기간을 제외한 박열의 일생은 합법단체와 비밀결사의 조직, 인쇄물을 통한 반일운동의 전개로 이어졌다.
1920년대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열사건은 무엇인가. 일본당국 발표에 의하면, 이 사건은 박열과 金子文子 등이 공모하여 황태자인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져 황태자와 일본정부 고관을 암살하고자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를 보면 다음과 같다.
폭탄을 던져 일본고관을 살해하고자 하는 박열의 계획은 1921년부터 준비되었다. 이를 위해 박열은 1921년 11월경부터 일본 외항선원 杉本貞一을 통해 폭탄을 구하고자 했으나 구하지 못했다. 1922년 9월에 다시 金翰을 통해 폭탄을 입수하고자 했으나 이 계획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30)
1923년 5월 27일 불령사에 金重漢이 가입하자 박열은 가을에 황태자 결혼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김중한에게 폭탄을 구하는 일을 맡겼다. 그러나 김중한과 박열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박열의 거사계획은 김중한의 애인이자 불령사 회원인 新山初代를 통해 일본공안당국에 알려지게 되었다.31) 그 결과 폭탄입수는 논의단계에서 좌절되었고, 박열 검거를 필두로 金子文子, 陸洪均, 崔圭悰, 金重漢, 徐東星, 정태성, 張祥重, 河一(일명 河世明), 徐相庚, 洪鎭祐, 한예상32), 新山初代, 野口品二, 栗原一男, 小川茂 등 불령사 회원 16명이 9월 3일까지 모두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1925년 11월에 예심이 종결되면서 박열과 金子文子만이 대역죄, 폭발물취체규칙위반의 죄명으로 송치되고 김중한을 제외한 나머지는 방면되었다.33)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박열의 거사계획을 일본공안당국에 알렸던 新山初代는 市谷형무소에서 사망했다.34)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과 국내에서 지원이 잇달았다. 흑우회는 박열이 검거되자 정태성과 장상중이 박열을 위하여 물품을 차입하는 한편, 삼월회·일월회·학우회 등 재일조선인단체와 함께 기부금을 모금하여 박열과 金子文子의 한복 제작과 공판경비에 충당했다.35)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布施辰治는 사건이 공표되자 자진하여 변호계를 제출하고 공판에 임하는 한편, 변호사수임료를 거부함은 물론이고, 공판에 필요한 각종 비용 전부를 자비로 부담하였다.
박열사건은 폭탄의 준비과정에서 차질을 빚고, 정보가 누설되어 검거됨으로써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발각된 미수사건이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이 사건을 칸토오지진의 와중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대역사건으로 포장하고 무기징역이라는 중징계에 처했다.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 2일동안이라는 긴 수형생활을 했다.
3. 재일조선인 아나키즘운동의 발전(1924-1930)
1) 1920년대 조선인아나키즘 단체의 결성
박열사건 이후 일본지역의 조선인 아나키즘운동세력은 변천을 거듭했다. 이는 이 사건 이후 조선인아나키스트에 대한 당국의 탄압이 강해진데다가 조선인아나키스트들도 자신들의 운동방향을 모색하고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한 과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박열사건 이후 석방된 불령사 회원들이 대부분 복귀했으나 흑우회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1924년과 이듬해는 흑우회가 박열사건의 공판지원에 주력한 시기였다. 장상중, 정태성, 정연규, 한예상 등이 물품 차입과 공판을 방청하기 위한 박정식(박열의 형)의 여비마련을 위해 조선인단체에서 기부금을 모금했다. 그외 변호사선임, 공판 참석, 박열 면회 등 공판지원이 활동상의 전부라고 할 정도였다.36) 그러나 1926년에 들어와 다시 최규종, 장상중, 정태성 등이 일본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한 후 이를 계기로 흑우회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활발해졌다. 1926년 2월 10일, 흑우회는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동지의 규합과 주의 선전에 관해 협의한 후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했다. 이 때 주요 구성원은 元心昌, 李弘根, 張祥重, 崔奎東, 陸洪均, 鄭泰成, 崔圭悰, 韓睍相, 李元世, 朴芒, 車鼓東, 金鍵, 李允熙, 朴熙春, 李圭錫 등이다.37)
흑우회의 주요 활동은 일본 아나키즘단체와 연계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참석하고, 기관지를 발간하는 것이었다. 주요 활동내용을 살펴보자.
1926년 2월 21일에는 흑색청년연맹이 주최한 강연회에 최규종이 참석하였고, 이홍근도 東京인쇄공조합대회에 출석하여 강경발언을 하다가 검속되었다. 또한 일본 아나키즘단체인 自我人社와 野蠻人聯盟과도 관련을 갖었다. 3월 29일에 흑우회는 흑색청년연맹 후원으로 조선문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500여명의 청중이 참석하여 岩佐作太郞, 近藤憲二, 八太舟三, 掠本運雄, 武良二, 平野小劍, 望月桂의 강연을 들었다. 주요한 내용은 ‘조선문제의 해결은 정치적, 교육적, 종교적으로도 절대 불가능하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조선인을 착취하였으나 한일병합에 의해서 우리들 무산계급 근로대중은 하등의 얻은 바가 없이 오직 얻은 것은 일본의 특권계급으로부터 우월감을 배웠을 뿐’이라는 등이다.38) 7월 7일에 열린 흑색청년연맹 위원회에 육홍균과 金正根이 참석하였고, 이튿날 개최된 高尾平兵衛 3주기 추도회에도 尹周協 외 7명이 출석했다.
흑우회의 기관지인 흑우와 팜플렛 소작농은 7월에 발행했는데, 내용이 모두 아나키즘을 선전 고취하는 것이라 하여 당국에 의해 발매와 반포가 금지되었다.
흑우회의 활동 가운데 또 다른 것은 金子文子 옥사사건의 진상규명이다. 1926년 7월 23일, 金子文子가 형무소에서 자살했다는 발표가 나오자 흑우회는 원심창, 최규종, 육홍균 등 7~8명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옥사사건이 1925년 12월 옥중결혼식 이후 金子文子의 옥중 임신을 무마하고자 한 교살사건이라고 단정하고 7월 27일 목검을 휴대하고 지소장집에 몰려가 사건의 경위를 확인했다. 이들은 형무소지소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유해를 발굴하였으나 사망기일이 결과하여 원인을 확인할 수 없게 되자 화장한 후 토오쿄오를 거쳐 박열의 선산에 안치했다.39)
그러나 이러한 활동으로 흑우회는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어 활동의 영역이 제약되자 조직 개편이 불가피해졌다. 1926년 5월, 장상중, 육홍균, 한현상, 최규종 등은 원심창, 이홍근, 최규동, 이원세와 함께 흑색운동사(東京府 雜司谷 소재)를 결성했고, 다시 11월에는 육홍균, 원심창이 흑색전선연맹을 결성했다. 흑색전선연맹은 일본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하여 한일공동투쟁체제를 갖추었다. 노동자 조직화의 일환으로 1926년 9월 10일 최낙종, 최상열 등은 小石川區의 조선인 위생인부를 조직화하여 동흥노동동맹을 조직했다. 이 때 원심창, 이홍근, 장상중 등은 선전대를 편성하여 조선인노동자들의 숙소인 함바를 순방하면서 자유사회를 배부하기도 했다. 동흥노동동맹은 지부로 高田부와 千住부를 두었다.
또한 그 해 12월 12일, 장상중, 원심창, 이홍근, 박망, 차고동, 김건, 박희서 등은 불령사를 재조직하고 기관지 흑우를 발행했다. 불령사는 1927년 2월 당국의 탄압으로 흑풍회로 개칭되었고, 흑우도 자유사회로 바뀌었다. 이들은 또한 1927년 2월 흑풍회 사무실에서 조선자유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동흥노동동맹을 산하단체로 두었다. 여기에는 일본인 아나키즘 八太舟三, 新居格, 望月桂 등이 좌담회와 강연회에 참석하여 운동을 지도했다.40) 1927년 6월에는 신문배달인조합을 결성했다. 이 조합은 노동자와 학생세력을 부식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직한 단체이다.41) 1927년 현재 흑풍회는 우의단체로서 조선자유노동조합 江東부(회원 160명)와 山手부(140명), 조선인신문배달조합(75명), 조선동흥노동동맹회(560명), 大崎조선인일반노동조합(95명)을 두고 있었다.42)
1926년 5월 24일에 일본아나키즘단체인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창립대회 당시 참가조합은 4연합회 산하 23조합에 北海道지방 2조합을 합한 25조합이고 참가한 대의원은 400명이었다. 결성대회 이후 朝鮮자유노동조합도 여타 13개 조합과 함께 추가로 가입했다.43)
1928년 1월 15일, 흑풍회 조직은 흑우연맹으로 강화되었다. 주요 인물은 원심창, 장상중, 韓何然, 李時雨, 河璟尙, 吳致燮, 이윤희, 金亨潤, 宋暎運, 洪性煥, 李東淳, 金今順, 이시우의 아내, 최낙종, 정태성, 洪亨義, 朴基鴻, 김건, 崔仲憲 등이다. 흑우연맹은 기관지 互助運動을 발행했다.44) 1929년 1월 30일 진철이 극동자유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극동자유노동조합은 전선 강화를 위해 결성한 단체였으나 활동은 활발하지 않았다.45)
여기에서 잠시 조선인아나키즘단체의 계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흑도회(1921년 11월) → 흑우회(1923년 2월), 불령사(1923년 4월) → 흑색운동사(1926년 5월), 동흥노동동맹(1926년 9월), 흑색전선연맹(1926년 11월) → 불령사 재조직(1926년 12월) → 흑풍회(1927년 2월) → 조선자유노동조합(1927년 2월), 조선인신문배달조합(1927년 6월) → 흑우연맹(1928년 1월), 극동자유노동조합(1929년 1월).
아나키즘단체로 출발한 것은 아니지만 아나키스트들의 거점으로 이용된 곳은 鷄林莊이었다. 사회주의계가 학우회를 기반으로 활동한 데 비해 아나키스트들은 계림장을 근거지로 고학생에게도 세력을 펼쳤다. 계림장은 1924년 7월 본래 조선총독부의 유화정책의 하나로 만들어진 고학생寮(기숙사)였는데, 아나키스트들이 들어온 후 성격이 달라졌다. 鷄林莊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각 계열의 학생들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계가 독자적 단체를 만들어 분리된 이후에 민족계는 상애회 학생회관으로 흡수되고, 일부는 아나키즘계인 동흥노동동맹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鷄林莊이 아나키스트들의 거점이 된 과정을 살펴보자.46)
아나키즘계 학생들은 1927년 6월 鷄林莊을 汗愛寮라 개칭하고 장내 학생생활을 고학생 중심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료장인 松浦가 아나키스트학생들의 추방을 상애회에 청탁을 한 결과 1928년 2월에는 상애회의 습격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후 鷄林莊의 관리자측은 1929년 조선노동공조회라는 반공단체를 조직하여 합숙소를 통제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아나키즘계 학생들은 丁贊鎭을 중심으로 수차 모임을 갖고 대책을 강구한 끝에 1930년 6월 14일 흑색운동자연맹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38년 1월 31일 해체되었다.
2) 흑우연맹의 활동
1928년 1월 흑우연맹으로 강화된 흑풍회 조직은 조직과 선전을 강화하는 한편, 격문을 발표하고 반대파를 습격하는 등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다. 그 첫 번째가 상애회에 대한 반격이다. 1927년 상애회원들이 아나키즘단체인 本所자유노동조합 회원들의 일터에서 폭력을 행사하고, 납치하여 린치를 가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오우영, 변영우, 한하연 등 등 간부들도 구타를 당했다. 이에 흑우연맹은 상애회 행동대장 河古奉에게 반격을 가하게 된다. 상애회는 경찰에 후원을 호소하고, 1928년 2월 새벽 경찰과 함께 권총, 일본도, 단도, 목검 등으로 무장한 후 흑우회, 흑우연맹, 계림장 등을 습격했다. 그러나 흑우연맹을 습격한 이들은 잠복중이던 한하연의 반격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47)
1928년 8월에는 흑우연맹원 한하연이 친일융화단체 대동협회를 습격했고, 1929년 5월 1일에 흑우연맹은 메이데이시위를 주도하고 동흥노동동맹과공동으로 ‘흑기 아래 참가하라’는 책자를 인쇄 살포하면서 300명이 흑기를 앞세우고 시위하다가 다수가 체포되었다.
또한 국치기념 20주년 행사때에는 “백의노동자는 게으른 자도 못난 자도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빈털털이가 되도록 착취당한 것이다. 감옥에 초만원을 이룬 二萬이 넘는 정치범은 무엇을 말하는가” 는 내용이 담긴 격문을 발표했다.48)
이와 같은 반제국주의적인 활동 외에 신간회나 재일노총에 대한 습격사건도 흑우연맹이 주체였다. 1928년 5월, 흑우연맹원인 원심창, 이혁이 재일노총 東京노동조합 습격사건으로 체포되었다.49) 1928년 6월 7일에는 학우회가 좌우연합으로 춘계대운동회를 개최하고자 신간회 東京지회 사무실에서 협의하던 중 흑우연맹원(원심창, 김병운, 이시우, 하경상, 한하연, 양상기, 최복선)이 습격하여 흑우연맹원 權尙瑾이 사망하고 신간회측의 柳元祐, 金基石 등 5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50) 이 사건으로 원심창(元勳) 등 7명이 체포되어 원심창, 최복선, 한하연, 白炳蓮, 丁鎭模, 丁贊鎭 등이 예심에 회부되었다. 흑우연맹측이 습격한 이유는 당시 본국에서 일어난 旱災구호에 관심없이 운동회개최에 열중하는 비민족적 자세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에 대한 공판은 9월 8일, 10일, 13일, 12월 1일 등 4회에 걸쳐 열렸는데, 검거자 가운데 河銀波는 12월 31일 옥중에서 병사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은 1929년 4월 19일에 보석으로 출옥했다.51) 1929년 7월 하은파에 대한 추도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다시 17명의 동지가 검속되었다.52)
또한 1929년 2월 9일에는 토오쿄오 鞠町區 소재 공사장에서 작업중이던 조선인노동자 200여명과 흑색청년연맹원 20여명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수십명의 중상자가 발생했고53), 3월 23일에는 토오쿄오시내 本所區 거리에서 아나키즘 노동단체원과 재일노총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재일노총회원 朴萬益과 朴踏波가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54) 이러한 대결양상은 단지 운동가들 사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에게 까지 확산되어 있었다.
아나키즘단체가 사회주의운동단체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이전에도 볼 수 있는 양상이었다. 1926년 3월, 토오쿄오에서 일월회 주체로 열린 강연회에 흑우회원들이 참석하여 강연회 진행을 방해했고,55) 신간회 일본지회 결성대회에 참석해 회의 진행을 방해하는 일도 있었다. 흑우회를 비롯해 흑풍회나 흑우연맹 등 아나키즘단체들은 민족해방운동을 제외하고는 사회주의를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56)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대립은 조선인운동세력의 파벌 양상의 하나가 아니라 이론체계의 차이에 기인하는 일반적인 양상이다.57) 아나키즘은 혁명방법에 따라 단계별 차이는 있으나 근본적인 이론에서는 통치적 권력행사를 수단으로 사회변혁을 규제하려는 사상에 기초한 일체의 제도와 정당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프로레타리아독재체제의 국가도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58)
4. 재일조선인 아나키즘운동의 지역적 특성 - 오사카지역
1) 오사카지역의 아나키스트 - 고순흠
오사카지역의 아나키즘 운동은 竹岩 高順欽, 최선명, 金泰燁의 활동이 중심을 이룬다. 이 가운데 최선명은 동양대학 철학과를 나온 후59) 南興黎明社를 조직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소련국경을 넘어 함북지방으로 돌아오다가 피체된 이후 소식이 없고,60) 김태엽은 오사카를 비롯해 토오쿄오, 나고야 등 일본 각지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가이다.
오사카에는 다수의 제주도출신 조선인이 밀집하고 있었다. 1922년에 제주도와 오사카간 정기항로가 개설됨으로써 제주도민의 오사카행은 손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항로가 개설되기 전에 제주도민이 도일을 하고자 할 때는 여수나 목포까지 나온 후 다시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직항로의 개설로 제주도 각항에서 오사카까지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다.61) 제주도와 오사카간 직항로에 투입된 배는 러일전쟁때 참전했다가 일본에 전리품으로 빼앗긴 1,000톤 규모의 배이다. 특히 제주도는 보리, 콩, 조 등이 주 농작물이었는데, 자연조방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파종과 수확시기에 따라 도일과 귀환을 반복했다.62) 이들은 오사카내에서도 東成區(현재 生野區)에 밀집하고 있어서 동성구는 ‘일본 속의 제주’로 불리기도 했다.63) 이들은 현재에도 그 지역에서 그대로 밀집상태를 보이고 있는데, 오사카거주 한국인 19만명 가운데 生野區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제주도출신 한국인은 6만명에 달한다.64)
제주도 출신 거주 재일조선인은 1926년 23,584명, 1930년 31,786명이었는데,65)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오사카에 집주한 상태였다. 1923년 9월 현재 오사카거주 조선인 21,984명 가운데 전남 출신이 11,352명(51.5%)으로 최고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율은 시기가 지나도 변하지 않아 1928년 6월의 경우, 전남이 21,663명(47.9%)으로 가장 많고, 경남(10,113명) 전북(4,223명) 경북(3,638명) 충남(1,473명) 경기(1,261명) 충북(874명) 강원(417명) 평남 (415명) 황해(385명) 함남(306명) 함북(189명) 평북(176명)의 순이 된다.66) 이 당시는 행정구역상 제주가 전남에 속했으므로 전남출신 조선인수에는 제주출신까지 포괄된다. 1923년 전남출신 조선인 가운데 7,500명 정도를 제주도민으로 추정한다.67) 즉 전남출신 조선인의 2/3정도는 제주도출신이 점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와 같이 오사카지역은 제주도지역민의 도일이 많은 곳으로서, 제주도 출신 아나키스트 고순흠의 활동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고순흠이 오사카지역의 아나키즘운동에 미친 영향력은 적지 않다.
제주도 출신 최초의 아나키스트인 고순흠의 아나키즘은 소규모 공동체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체제를 꿈꾸는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뮤니즘과 제주도가 갖는 경제적 역사적 특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은 다년간의 동물과 시베리아 원시부족 관찰을 통해 상호부조의 원리를 발견하고 이를 인간 역사에 적용하여 아나키즘을 체계화하였다.68) 즉 동물계가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어서 동물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협동이 잔인한 경쟁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상호부조의 습성을 터득한 동물이 자연에 더 잘 적응하고 생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규모 공동체로 이루어진 자치적 사회조직을 이상적인 사회로 설정한 것이다. 이 사상은 고순흠의 개인 상황과 접목을 이루면서 제주도 아나키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69)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통적인 관습에 역행하면서 출생하게 된 고순흠70)은 7세때 부를 여의고 어머니로부터 정통 공맹의 도를 공부하였으나71) 17세때 성선, 성악 양설을 부정하고 ‘性本무색투명’을 깨달았다. 그 뒤 노장의 性素說을 믿어 治平之道로는 인위적인 것을 배격하는 것이 최고임을 확신하게 되었다.72) 이러한 무위자연사상에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접맥되면서 고순흠은 동양 노장사상에서 점차 근대적 아나키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여기에 제주도가 갖는 공동체 지향적인 성격이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이다. 제주도는 1920년대초부터 제주해녀조합이나 도민기업설립운동 등 소생산자층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한 지역이다. 전근대시대부터 중앙정부로부터 무시되고 중앙정부의 장악력이 미치지 못했던 제주도는 토지가 척박했고, 경지의 대부분이 국가 소유 아래 있었으므로73) 지주나 자본가로 성장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개항 이후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밀려오는 일본이나 육지자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제주도의 소생산자들이 결속할 수 밖에 없었다.74) 이러한 제주도의 역사적 경제적 특성은 고순흠의 아나키즘 내용에 중요한 비중을 갖게 되었다.
고순흠은 서울에서 1914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했다. 1919년 3월에는 朴重華, 朴耳圭와 함께 경성태화관에서 조선노동문제연구회를 개최했고, 1920년 2월 박중화, 徐延喜, 李恒發 등과 함께 서울에서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강령과 헌장을 기초했다.75) 회장인 박중화가 대한독립단 관계로 투옥되어 예심에 회부된 후76) 고순흠은 1922년 사기공산당 자금건을 빌미로 7월 9일에 열린 위원회에서 신백우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노동공제회를 탈퇴했다. 또한 11일에는 노동공제회 사무실에 가서 尹悳炳, 李遂榮 등 간부들을 폭행하여 중상을 입히고 관련서류와 간판에 석유를 부어 태웠다. 이 사건으로 고순흠은 2주간 구금되었다.77) 고순흠은 탈퇴 이유를 ‘민족운동을 위해 조직한 조선노동공제회가 ․․․점차 볼쉐비키계가 침투하게 되어 고질적인 사대주의가 발생되고 공산당선전비 쟁투에 민족적 추태가 노골화되어 창립책임감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부득이 파괴를 감행한 것’이라고 밝혔다.78) 즉 고순흠은 좌익세력의 침투로 인해 노동공제회가 창립 당시의 의의가 훼손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순흠은 중앙에서 활동하면서도 제주도를 대상으로 한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아 1920년에는 제주해녀조합 설립운동에 참가했고, 1923년 12월에 창립된 노동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79) 1924년 3월 오사카로 건너가 최선명, 김태엽이 결성한 南興여명사에 기식하면서 이들과 교류하고, 6월 2일 朝鮮人무산자사회연맹 결성에 참여했다.80) 고순흠은 조선일보 神戶지국장을 하면서 조선여공보호회를 조직하고 제주도출신 여공들의 권익옹호에 노력했으며, 堺조선자유노동자연맹, 大阪자유노동자연맹을 조직했다.81) 그 후 朝鮮人신진회 조직에 관계하고, 자아성민보사, 조선민중사 등 언론사업에 노력했다. 고순흠과 함께 활동한 동지는 최선명, 김태엽, 孫無, 金秉勳, 高民友, 金彰煥, 金宗鎬, 朴永徽, 이윤희, 金演秀, 高永禧, 康箕贊, 金時均, 金時星, 韓碩一, 韓明淑, 尹龍錫, 金時淑, 韓錫順, 金永才, 金昌喜 등이다.82) 고순흠의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제주도는 많은 아나키스트를 배출하고 활발한 아나키즘운동의 본산으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83)
그러나 고순흠의 활동은 제주도출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에 치우쳤으므로 오사카조선인운동이라는 시각에서 볼때 그 운동이 갖는 의미는 매우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이는 같은 고향 출신(북제주군 조천면)의 운동가 김문준이 지역적인 한계를 넘어서 오사카 조선인사회운동의 전체를 운동의 대상으로 확대한 것과 대비되면서 고순흠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84) 여기에는 고순흠 개인의 성향이나 역량보다 아나키즘운동이 갖는 특성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85)
아나키즘 자체는 사회운동으로서 방향성을 제시하고, 새로운 국가건설의 목표를 제시하는 데 취약한 이론구조를 갖고 있다. 1793년 윌리엄 고드윈이 「정치적 정의」를 통해 ‘권력에 의존하는 모든 사회제도를 거부’한 후 부루동과 바쿠닌, 크로포트킨을 거쳐 ‘자각적 이론체계’로 정착한 아나키즘은 자유와 자율, 자유의사와 자유연합을 공통적인 기본개념으로 한다. 이러한 개념은 계층구조적 조직의 거부를 의미하기 때문에 중앙집권적인 당조직의 체계 아래 움직이는 사회주의운동에 비해 조직력이 약한 것은 당연하다.86)
더구나 아나키즘 가운데에서도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격렬한 총파업이나 테러보다는 선진분자에 의한 선전 계몽, 소생산자의 상호부조를 통한 소비기관 및 생산기관의 장악이라는 실천노선을 취했다. 이 사상이 제주도의 경우에는 지역적인 상황과 일치했으나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는 적당한 운동 이론으로 자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고순흠의 활동은 오사카내에서도 제주도민을 위한 활동 이상으로 확대될 수 없었다.
2) 朝鮮人신진회
오사카 아나키즘단체 가운데 자료상 결성과정이 비교적 잘 알려진 단체에 朝鮮人신진회(이하 신진회)가 있다. 신진회는 1926년 1월 16일 此花區 孝(曉)구락부에서 회원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발회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회장(李春植)을 비롯한 임원선거가 있었고 선언과 강령을 통과시켰다. 임원은 회장외에도 高濟均(부회장), 尹赫濟, 金東仁, 玄斗錫, 金思鎰, 李元根, 梁達寬, 尹景圭, 康震七, 宋禹春, 尹應士(이상 이사), 康錫範, 金秉訓, 嚴載鎭(이상 감사), 金津紳, 金東仁(이상 회계), 金時贊(서기), 李元根, 金奉春, 金達三, 梁佑天, 宋迎春, 高基平, 申鍾殷, 朴泰善, 吳仁奉, 金尙洙, 李奉輝, 金命春, 金仁準, 安己煥, 文昌權, 金恒仁, 金季根, 成子鉉, 宋君和, 李元佑, 李順權, 曹德順, 金安奉, 李方泰, 李奉采, 林先春, 夫元化, 姜己生, 宋官石, 洪在平, 金斗錫, 金學寬, 梁主平, 尹奉柱, 尹首王, 高永熏, 金才有, 姜庚能, 朴宗律, 朴宗杓, 姜海珉, 金承平, 金汝贊, 許寬, 高漢範(이상 간사) 등이 선출되었다.87)
강령은 1) 우리들은 동포의 상호부조적 정신과 일치단결한 행동에 의하여 절대적 해방을 기한다. 2) 우리들은 민족적 특종지위에 서서 불합리한 환경을 타파하고 경제적 자유획득에 노력한다. 3) 우리들은 문맹적 지위로부터 신문화창조에 돌진한다 등이다. 결성 이후 신진회는 「회보」를 발행하고 회원 확보에 나섰다.88)
여기에서 간부의 면면을 살펴보면, 회장 이춘식은 朝鮮人협회 지부장으로 선우회 발회식에서 임시회장을 맡았고, 부회장 고제균과 이사 윤혁제는 선우회 발회식에서 일선융화를 고취하는 연설을 하던 인물로서, 윤혁제는 1927년 12월 신간회大阪지회 결성대회에서는 서기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89) 또한 고영희, 강기찬, 김시균, 김시숙 등은 제주출신으로 고순흠으로부터 지도를 받아 아나키스트가 된 인물이다.90)
일본공안당국은 1926년 5월 11일 새벽 4시에 自我聲社91)와 신진회 사무실을 포위하여 결의록과 關西흑기연맹선언서를 비롯한 중요서류를 압수하였다. 이 때 신진회 간부 윤혁제 등 60여명이 검거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춘식을 비롯한 신진회 간부 2명은 10일의 구류후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당국이 서류를 압수한 이유는 신진회가 오사카 조선인의 차가쟁의에 관여하여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92)
사건의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열리지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조직체계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회장 이춘식의 영향력이 실추되자 상무위원 윤혁제는 고순흠과 같이 아세아민족대회반대운동을 제창하고 조직을 위원제도로 바꾸었다. 이후 계속 「회보」를 발간하고, 합방과 자본주의 비판, 무산계급의 단결을 주장하면서 회원 확보에 노력했다.93)
신진회의 주요 활동은 순종황제를 추모한 것과 조선인중앙협의회에 참여한 것이다. 조선인중앙협의회는 關西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노동자대중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大阪자아성사, 京都白衣人社, 和歌山조선인자유노동조합, 大阪조선인신우회, 신진회, 大阪수평사본부, 大阪문명비판사 등이 조직한 단체이다. 여기에는 조선인아나키즘단체뿐만 아니라 수평사나 문명비평사와 같은 일본인단체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인중앙협의회는 결성 직후 상애회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습격사건을 조사하여 규탄하는 것을 활동목표로 삼았다.94)
상애회95)는 대표적인 동화단체로서 1921년 사회사업단체를 표방하면서 일본지역에서 결성되어 조선인노동자를 통제하고 억압하며 이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던 단체이다. 상애회는 결성 이후 줄곧 조선인노동자를 폭행하고, 노동쟁의를 해산하며 조선인노동조합을 습격했다. 이 가운데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925년 1월 9일 상애회원 20여명이 大阪府 기시와다 방적공장 직공 金秉瑗의 집을 습격해 김병원이 좌경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가족을 폭행하여 눈알이 빠지는 중상을 입혔다.96)
ⓑ 1926년 4월 25일에는 상애회가 회원 40여명을 동원하여 오사카 關西연합회와 勞動連珠會를 습격하고, 연주회의 宋南燮 등 4명과 關西연합회 金鏞泰를 상애회사무실로 끌고가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7) 상애회가 이들 단체를 습격한 이유는 상애회는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노총 제2회 대회에서 ‘異類단체박멸의 건’이 결의된 때문이다.
ⓒ 1926년 5월 濱松市에서 일어난 일본악기회사쟁의에 대해 상애회원들이 쟁의본부를 습격했다. 상애회원들은 쟁의현장에서 李範玖라는 조선인이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濱松市 소재 일본악기회사 쟁의본부를 습격하여 수십명의 중상자를 냈다.98)
ⓓ 1926년 6월 13일 상애회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사무실을 습격하여 朴泉 등 9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99) 이 사건으로 인해 재일조선인 사회운동단체와 상애회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 1926년 6월 14일에는 山梨縣에서 상애회에 입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로중인 조선인토공들을 습격하여 3명이 즉사하고 50명이 중상을 입었다.100)
ⓕ 1926년 6월에 大阪연합회 今福노동조합에 대한 상애회의 습격에서 발단이 되어 쟁투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金相求 등 9명이 검속되었다.101)
ⓖ 1927년 2월 하순에는 상애회원이 靜崗縣 金谷町에서 상애회 입회를 거절한 조선인노동자 십여명을 집단폭행하여 이 가운데 2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상을 입혔다.
이외에도 상애회의 만행은 무고한 동포를 폭행하거나 부녀를 유인하여 매매하는 등 단지 노동자에 국한하지 않았다. 1926년 5월에 白基衡, 金鎭哲 등 후쿠오카 소재 상애회 간부 5명이 조선인 소년 1명을 납치하여 옷을 벗긴 후 묶어놓고 폭행을 가하여 인사불성에 빠지게 하였다.102) 靜岡縣에서는 1926년 9월부터 상애회 간부 3명이 일선융화를 가장하고 부녀자를 유인하여 토오쿄오와 나고야 등지에 매매한 사실이 발각되기도 했다.103)
신진회는 1926년 5월 순종황제의 사망과 관련하여 신진회 간부는 自我聲 동인들과 함께 구한국융희황제 망곡식과 봉도회를 거행했다.104)
국내신문들은 신진회 탄생이 1926년 1월 3일에 있었던 善友會 발회식 소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105) 선우회 발회식 소동은 김태엽이 高永漢과 함께 조양회관 2층에서 5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열린 발회식에 참석하여 ‘일선융화’를 취지로 한 연설을 하던 이선홍에게 화로를 던져 발회식을 중단시킨 사건이다. 이 때 김태엽은 朝鮮人협회원에게 붙잡혀 5~6명으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106) 이날 참석자들은 선우회가 어떤 성격의 단체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신년회나 친목회인 줄 알고 모인 노동자들이었는데, 김태엽이 화로를 던져 단상에 불이 붙자 모두들 퇴장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임시회장으로 단상에 있던 이춘식은 회장을 사직하고107) 김태엽과 의논하여 朝鮮人협회가 시대에 역행하는 단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명실상부한 투쟁적으로 하여 민족을 위해 참된 이익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서 신진회를 결성했다.108)
신진회의 결성시기는 자료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강철의 재일조선인사연표에는 1924년 大阪朝鮮人新進會가 결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09) 그러나 국내 일간지를 통해 신진회 발회식 내용이 알려진 시기는 1926년이다. 또한 조선일보 기사는 1920년에 이춘식은 朝鮮人협회 野田지부장으로 있다가 그 후 此花區 吉野町에서 신진회라는 아나키즘단체를 조직하여 동지 수십명과 함께 아나키즘을 선전하다가 1923년에 당국에 의해 해산명령을 받은 후 다시 南大阪방면으로 근거지를 옮겨서 엿제조업을 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110)
이상의 여러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춘식은 朝鮮人협회와 관련속에서 1920년부터 1923년 사이에 신진회를 조직했고, 1926년 1월 선우회 발회식에서 의장을 맡아 보았다. 이것으로 보아, 신진회는 1923년 이 후에도 朝鮮人협회와 관련을 계속 유지한 듯 하다. 그러나 1926년 신진회 결성 이후에는 朝鮮人협회와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즉 1923년, 혹은 1924년에 결성된 신진회와 1926년의 신진회는 同名이기는 하지만 성격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11) 그 차이는 1926년에 결성된 신진회가 善友會 발회식을 무산시킨 산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선우회 발회식이 무산된 후 조선인협회와 단절한 상태에서 1926년에 탄생한 신진회는 결성 직후 이춘식이 탈락하면서 점차 조선인사회운동단체로서 자리하게 되었다.
3) 기타 단체
그 외 오사카조선인아나키즘단체는 남흥여명사를 비롯해 다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1925년에 조직된 朝鮮堺자유노동자조합(고순흠, 최선명, 김태엽 결성), 大阪자유노동자연맹(1925년, 고순흠, 최선명, 김태엽 결성), 계림무산청년동맹(김창호, 고천구 결성) 등이 그 예이다.112) 그러나 이 가운데에서 실제로 활동이 확인되는 단체는 조선무산자사회연맹과 조선공녀보호회 정도이다.
최선명과 김태엽이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은 1924년 6월 28일에 결성되었다.113)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은 ‘朝鮮人의 自力에 의해 현재 지위로부터 절대적으로 탈출하여 신문화 건설을 위한다’는 목적 아래 결성되었는데 결성 당시 회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木本正胤과 관련을 갖고, 大阪동맹회 간부인 송장복과도 연계하면서 오사카지역내 조선인사회운동단체들과 연대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114)
주요 활동내용으로 1924년 6월 28일 천왕사공회당에서 조선인차별문제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연설회에서는 최선명과 고순흠, 김태엽이 연설했다.115) 7월 20일에는 삼일청년회, 大阪조선유학생학우회, 조선무산자사회연맹, 大阪노동동맹회 공동주최로 조선인문제대회를 개최했다. 또한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은 8월 5일에도 학우회 大阪지회, 삼일청년회, 남흥여명사, 堺조선동지회 등과 함께 조선집회압박탄핵대회를 개최했는데, 일본노동총동맹 大阪연합회와 수평사 등이 응원하기도 했다.116)
조선공녀보호회(조선공녀보호연맹, 조선여공보호회)는 고순흠이 1925년 1월 6일에 결성하여(회원 50명) 1929년까지 활동한 단체로서 제주도 출신 여공을 대상으로 했다.117) 2월 10일에는 堺조선노동동지회 청년단 간부 張震이 조선공녀보호회의 분소를 세웠다(회원 30명). 조선공녀보호회는 여공의 대우개선과 그 권리 옹호를 목적으로 방적여공의 대우개선과 기타 분쟁문제의 해결에 힘써왔다. 관련자료에서 조선공녀보호회는 아나키스트인 고순흠이 중심인물이기 때문에 아나키즘 단체로 분류되는데118), 분소를 세운 장진이 재일노총에 소속된 堺조선노동동지회 청년단의 간부인 것으로 보아 결성 당시에는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119) 조선공녀보호회는 제주도여공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단체라는 지역적인 한계로 인해 소수의 회원을 조직화하는데 그쳤다.
4) 오사카지역 아나키즘운동의 성격
오사카지역도 토오쿄오지역에 못지 않게 많은 아나키즘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오사카지역에서 전개된 아나키즘단체의 활동상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이 조선인의 차별문제와 관련하여 연설회를 개최한 것을 비롯해 대부분 거주조선인의 당면문제해결을 활동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또한 오사카지역의 아나키즘운동은 토오쿄오지역과 몇가지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가장 뚜렷한 것은 아나키즘운동단체들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료상에서 식민지시대에 일반적으로 아나키즘단체를 분류할 경우, 그 기준은 매우 불분명하다.120) 이 때 아나키즘단체로 분류된 단체들은 강령이나 실천사항 등에 대중들에게 아나키즘을 전파하고 아나키즘이 이상시하는 사회를 구현함을 분명히 표방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있는 단체와 큰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제한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1920년대 중반까지 오사카지역의 조선인사회운동단체들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뚜렷한 운동방향에 구별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大阪동맹회 결성과정에서도 잘 나타난 사실인데, 아나키즘단체의 경우도 결성 당시에는 사회주의적 색체를 띠는 大阪동맹회나 재일노총 大阪연합회의 도움을 받거나 연대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아나키즘운동사나 현재적인 이데올로기 구분기준 아래에서 볼 때, 오사카지역 아나키즘운동의 성격이 불분명하게 비춰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아나키즘단체와 사회주의단체간의 충돌 양상도 오사카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토오쿄오지역이 재일노총이나 신간회가 아나키즘단체로부터 습격을 당하고 노동자대중들이 일터에서 충돌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는데 비해 오사카지역의 경우는 신간회 발회식에서 ‘신간회 타도’ 삐라를 뿌리는 정도에 그친다.121)
둘째, 활동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차이이다. 토오쿄오지역의 아나키즘단체들이 비록 맑스계 단체와 충돌을 빚으면서도 반일투쟁 전개에서는 연대투쟁의 모습을 보이는데 비해122) 오사카지역의 아나키즘단체들의 활동 모습은 거주 조선인의 당면문제에 치우치고 있었다. 물론 상애회 박멸운동에는 다른 조선인단체들과 함께 참여했으나 이도 역시 거주 조선인의 이익을 해치는 존재인 상애회에 대한 응징이라는 점에서 거주조선인의 당면이익과 거리를 둔 활동은 아니다.
5. 맺음말
본고는 일본지역의 조선인 아나키즘운동단체 활동내용의 변천과 지역적인 특성을 통해 1920년대 아나키즘운동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 글이다. 이러한 작업은 식민지시대 조선인이 전개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사에서 아나키즘운동이 차지하는 위치 및 타 운동과의 관계설정에서도 매우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시대에 조선인들의 아나키즘운동은 국내와 일본, 중국 등 조선인이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적인 특성이 종합적으로 고찰될 때, 비로소 식민지시대 조선인 아나키즘운동사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1921년 흑도회가 결성되면서 시작된 일본지역 아나키즘운동의 역사는 흑우회, 불령사, 흑색운동사 등으로 이어지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흑우연맹이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일본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운동도 동흥노동동맹(1926년), 조선자유노동조합, 조선인신문배달조합(1927년), 극동자유노동조합(1929년 1월)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토오쿄오에 결성된 아나키즘계열의 조선인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으로 인하여 1920년대 후반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토오쿄오지부보다 더 많은 조합원을 거느릴 정도로 활발한 활동상을 보였다. 이러한 번성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운동방향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즉 아나키즘계 노동조합의 활동에 자극받아 민족운동을 우선시하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운동방향이 더 이상 조선인노동자의 호응을 얻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음을 반성하고 민족운동과 아울러 일상투쟁을 동시에 전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123)
일본지역 조선인아나키즘운동의 특성은 국내에서 일어난 아나키즘운동과의 차이점이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지역의 아나키즘운동은 민족운동을 우선시하던 일본지역 조선인운동사의 성격과 큰 관련을 맺고 있었다. 반일민족투쟁에서 보여주는 아나키즘운동단체의 모습이 첫 번째 특성이다. 일본지역 재일조선인운동사의 주류를 점하던 볼셰비키단체와 아나키즘단체는 성격상 결코 함께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니었고, 충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노동자의 탄압이나 상애회 박멸은 물론이고 주요한 반일투쟁의 현장에는 연대투쟁으로 운동의 성과를 높이곤 했던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조선인노동자의 일상투쟁 전개이다. 이 점도 역시 국내운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다. 이러한 성격이 일본지역에서 조선인아나키즘운동의 생명력을 강화시키는데 기여를 한 점 가운데 한가지라고 생각된다. 즉 일본지역에서 일본인 아나키스트의 영향과 일본의 아나키즘운동의 조류 가운데 배태하였으나 민족적 특징을 간과하지 않고 운동의 방향을 주체적으로 설정한 것이다.
또한 지역사례로서 오사카의 경우도 두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아나키즘운동단체들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그 결과 볼셰비키단체와의 충돌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활동의 내용이 거주조선인의 당면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일본지역 재일조선인아나키즘운동사 연구는 아나키즘이론의 적용 확대라는 점에 국한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운동의 지역적 특성을 명확히 규명해내는 작업이 계속 요구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나키즘은 맑시즘을 비롯한 각종 이론이나 사조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배태된 이론이 아니다. 따라서 이론 자체에 대한 규명작업124)과 아울러 당시대를 살았던 조선인들이 어떻게 이 이론을 받아들였고, 자기화해나갔는가 하는 점을 밝히는 것은 식민지시대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가장 큰 연구방향이라고 생각한다.
☞ 출처 : < http://wednes.neti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