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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울며 사랑하노라니…
-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 뒷이야기(8)
최 화 수
‘재동 재동 천재동(天才童)’에 물찬 ‘제비’
196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부산 원도심에서 열린 각종 문화행사의 현장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아마도 증곡 천재동曾谷 千在東이 아닌가 한다. 중요무형문화재(동래야류)인 그는 자신의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제명이 시사하듯 그 누구보다 건강하고 다양한 예술인의 삶을 구가했다. 증곡은 토우土偶, 동요민속화, 연극, 가면탈, 민속놀이 등 우리 전통민속예술에 일가를 이루었다.
2007년 그는 회고록 『아흔 고개…』 중 ‘회고록 들어가기’에서 부산 원도심에서 자주 어울렸던 문화예술계 인사들 이름을 열거했다. 향토연구가 박원표 선생을 필두로 연극인 한형석 이해랑, 소설가 이주홍 김정한, 문화전령사 김상수, 사진작가 허종배, 서양화가 우신출 김종식 한상돈 송혜수, 한국화가 이규옥 이석우, 미술평론가 이시우, 민속인 신우언 조성국, 사업가 곽영욱 김종필 박태윤 등등이다. 문화계의 마당발 증곡이 가까이 한 사람이 어찌 이들뿐이랴.
오후 5시경 교실에서 내일의 지도안을 작성하고 있으려니 똑똑똑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유리창을 통해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 이인영의 희고 길쭉한 얼굴이 오늘 따라 더 길게 느껴졌다. 얼마의 지폐를 집어주었더니 작은 쪽지를 건네주고 떠나갔다. 6시 30분까지 〇〇상점으로 오라면서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남포동 자갈치 입구 〇〇상점에 가니 시인 천상병, 강파월과 6~7명의 군상들이 진을 치고 모여 있었다. 진로 소주 여러 병을 찌그러진 커다란 주전자에 쏟아 넣은 후 코카콜라 여러 병을 추가로 쏟아 부었다. 연탄불에 구운 마른 오징어를 안주로 하여 잔을 돌려가면서 정답게….
- 천재동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증곡은 천부적으로 예인의 기질을 타고 났다. 그는 16세 때 고향 방어진에서 또래 친구들을 모아 연극공연을 얼마나 잘 했는지 ‘천재동(千在東)’이란 본명 대신 ‘천재동(天才童)’이란 이름을 얻었다. “재동 재동 천재동(天才童), 방어진의 천재동(天才童)”이란 노래 아닌 구호가 사람들의 입에서 넘쳐났다고 한다. 그는 운동신경이 빼어나 ‘제비’란 별명을 얻었는데 부산 대표축구, 야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일본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미술과 연극 공부도 줄기차게 했다.
증곡은 결혼하면서 교직에 투신, 울산과 부산에서 25년간 교사로 봉직하며 어린이 민속극단 공연과 민속길놀이 지도 등을 했고, 1970년부터는 교단을 떠나 민속예술문화에만 전념한다. 전통민속문화 발굴, 연구, 조사, 채록, 재연, 정립을 하면서 연극은 물론, 창작 탈, 민속풍속화, 토우 전시회 들을 개최하면서 자신의 모든 신명을 바쳐 예술세계를 승화시킨다. 그는 “제2 고향인 부산 동래민속예술이 나의 끼와 잘 접목되어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시회를 개최할 때면 가장 걱정거리는 개막할 때 초대한 손님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이다. 적은 경비로 좋은 먹을거리를 준비할 수 없을까? 나는 집사람과 궁리한 끝에 전시작품이 민속적이라는 것, 손님은 개성이 남다른 예술인이라는 것 등으로 분위기를 집약하여 놓고 보니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집사람이 적의(適宜)한 독에다 물김치를 담그고, 해장에 좋다는 시락국을 끓이고, 맛도 있고 씹기에도 좋은 비득비득하게 잘 말린 명태 한 상자, 고추장에 설탕을 버무려 함께 올려놓았다. 가장 중요한 막걸리를 단골 통술집에 부탁하여 세 말을 가져다가 술통 위에 쪽바가지를 동동 띄어놓았다.
- 천재동 회고록, ‘위의 책’
증곡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권하는 이가 없어도 축객들이 손수 막걸리를 퍼마시는가 하면, 너나할 것 없이 다투어 맨손이나 준비된 칼로 명태를 자르고 비틀어 찢고 하는 등 야단이었다. 달콤한 고추장을 직접 또는 손가락으로 찍어서 고기에 발라 한입에 넣어 맛있게 씹어 먹는 그 모습들이 너무 고맙고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증곡의 독창적인 멋과 천재적인 풍류는 자신의 금혼식을 작품발표회로 멋지게 장식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1994년 천재동 서정자 부부 결혼 50주년 기념일이다. 기념장소를 물색한 결과 전시장과 무대를 갖춘 곳은 대청동 부산가톨릭센터 한 곳 밖에 없었다. 전시장에는 식장 겸 작품을 전시키로 하고, 극장에서는 천재동 작 <중매소동> 단막극을 극단 도깨비 단원들의 공연으로 올리기로 했다.
먼저 기념식과 함께 많은 하객들로부터 축복을 받고, 다음 장소인 극장으로 옮겨 연극을 감상하게 했다. 다시 전시장으로 되돌아와 개전(開展)식을 하는데, 초대형 말뚝이 탈을 전시장 벽면에 걸고 하얀 천을 덮어씌워 하객 중 최연장자와 최연소자가 좌우 양편에서 천에 묶은 줄을 당기게 했다.
- 천재동 회고록, ‘위의 책’
‘광포동 신사’로 불리는 서양화가 단광 우신출丹光 禹新出은 천재동과 곧잘 어울리는 막역한 사이이다. 두 사람은 일찍이 부산 대표 축구선수로 함께 뛰었고, 대회를 앞두고 같이 합숙도 했던 깊은 인연이 있다. 부산 수정동 태생의 단광은 전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익혀 화가로 성공했다. 그는 소학교를 마치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10대 후반에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다 임응구林應九 화백을 만나 처음으로 ‘유화油畵’를 접했을 만큼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단광은 부산 토박이의 삶을 살아간 화가로 오직 부산에서 자신의 미술세계를 승화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1934년 수정사립보통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기장중학교장 등 평생을 교단에 서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단광은 신창호申昌鎬 화백과 1967년 출범한 부산일요화가회의 지도교수로 매월 1, 3주 야외스케치 활동을 줄곧 함께 했다. 단광은 술과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간판가, 혹은 영화관 마네킹 화가들이 주가 되어 미술전이 개최되던 시절이었다. 우신출 화백은 8절 백노지 다발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혹은 열차 속에서나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려버리는 속필로 하루에 수십 장씩 그려낸다. 마다리에 아교풀을 먹인 사제 캔버스에 유채로 그림을 그렸다.
우 화백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 그는 참 교육가로 취미로는 만돌린 연주가 일품이었다. 나와 만날 때면 차를 마시기보다는 간단한 요리를 먹었다. 남포동 ‘부산튀김’집에서 새우튀김을 먹고 나오는데 한 청년이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버리자 그는 말없이 그것을 주워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말없이 모범적 행동을 하는 그의 바지 주머니에는 담배꽁초가 한 주먹이나 들어있었다.
- 천재동 회고록, ‘위의 책’
2007년 6월 15일 크라운호텔에서 증곡 천재동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출판기념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평생을 한결같이 우리 시대의 참예술인으로 살아온 증곡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하객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 열하루만인 2007년 7월 26일, 증곡은 아흔 고개를 넘어 할 일이 더욱 많다는 그 ‘일’을 남겨놓은 채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떠나갔지만, ‘광포동’ 곳곳에 남겨놓은 예술혼과 낭만의 자취는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으리라.
“부산은 영화가 다 죽었는데, 왜 왔냐?”
2011년 9월 29일 개관한 센텀시티의 ‘영화의 전당’은 ‘아시아 영화 허브’를 지향하는 부산의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이기도 한 ‘영화의 전당’에서 최초로 상영된 영화는 1975년 김사겸金仕謙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창수의 전성시대>로 개관 다음날인 9월 30일 시네마테크관에서 선보였다. 이와 더불어 김사겸 감독이 각종 언론매체와 학술지에 실었던 영화평과 칼럼 등을 모은 책 『영화가 내게로 왔다』 출판기념회도 함께 열었다.
‘영화의 전당’ 개관 기념행사에서 이처럼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한 김사겸 감독은 영화인협회 부산지회장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장을 역임했고, 부산국제영화제 상임감사로 활동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 등의 글을 써왔다. 그의 영화 열정을 높이 산 당시 이용관李龍寬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개인적으로 경비를 지원하여 김 감독의 저서를 발간했고, 출판기념회에 김 감독의 영화 <창수…>를 불러낸 것이다.
김사겸 감독은 김동호金東虎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이 ‘부산영화계의 대부’라고 부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산 시민들 가운데는 “김사겸 감독이 누구냐?”며 그의 이름조차 생소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 왜소한 체격에 깡마른 인상의 그는 1977년 서울 충무로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으로 옮겨왔다. 처가가 있다는 한 가지를 빼면 부산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느닷없는 이주移住였다.
1935년 마산 태생의 김사겸은 영화감독이 되고자 상경하여 우여곡절 끝에 ‘유현목兪賢穆 사단’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 71년 첫 작품 <그대 가슴에 다시 한 번>을 찍었는데, 차범석車範錫의 <열대어>를 손수 각색하여 메가폰을 잡은 것. 하지만 개봉관 관객이 2,135명에 그친 처참한 흥행 참패작이었다. 75년 그는 <영자의 전성시대> 속편인 <창수의 전성시대>를 연출했지만, 3만171명의 관객 동원에 그쳤다. 서울에서의 ‘영화 실패’가 그를 영화 황무지 상태의 부산으로 옮겨오게 만들었다.
김사겸은 같은 ‘유현목 사단’의 하길종河吉鍾 김호선金鎬善 홍파洪波 정인엽鄭仁燁들을 충무로의 한 술집으로 불러내 ‘부산으로의 이주’ 폭탄선언을 했다.
“부산은 한국 최초의 영화제작사가 세워져 영화를 만들었던 영화의 고장이다. 미국의 영화 수도는 워싱턴이 아니라 LA가 아니냐. 내가 부산으로 가서 한국의 영화 본고장을 서울의 충무로가 아닌, 부산의 광복동으로 만드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겠다.”
1977년 당시 부산은 영화제작사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영화든 가요든 서울로 가지 않으면 입문할 길조차 없었으므로 그의 ‘부산 이주’ 선언은 아주 뜻밖이었고, 더구나 무일푼의 그의 처지를 아는 주변 인사들은 돈키호테식 발상이라며 극구 만류했다.
- 최화수 논픽션집 『양산박』. 1990년, 도서출판 지평.
“부산에는 영화가 다 죽었는데, 왜 왔느냐?” 부산으로 옮겨온 그가 박두석朴斗錫 예총 부산지부장으로부터 처음 듣게 된 말이었다. 당시 ‘부산영화인협회’가 있기는 했지만, 시나리오 작가 나소원羅昭苑, 16밀리 소형영화의 김응윤金應潤 이성훈李成勳 밖에는 활동하는 이가 없었다. 영화 제작이 없는 곳이다 보니 그는 신문에 영화평 등의 글을 썼다. 하지만 처음 그를 대한 부산의 기자들은 “실패한 영화 두 편 찍고는 그것도 감독이라고 할 수 있냐?”며 아주 냉소적이어서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김사겸은 부산 이주 이듬해인 78년 「주간 국제」 창간과 함께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다. 이 매체는 김사겸 감독과 손을 잡고 ‘전국 신인 남녀배우 선발대회’를 개최하여 공전의 성황을 거두었다. <겨울 여자> 등 문제작을 연출한 김호선, 하길종, 정인엽, 홍파 등 네 스타 감독이 영화 제명을 내걸고 주역 및 조연배우를 공개 선발, 일정 기간 ‘김사겸 배우예술학원’에서 연기수업을 받게 하는 조건이었다.
유현목 감독의 조연출을 거쳐 시나리오 창작, 평론, 연출을 종횡무진 넘나들다 서울생활을 접고 부산에 온 김사겸 감독을 잡지에 영입, 영화 콘텐츠를 강화한 것은 당시 국제신문 최화수 기자였다. 영화계 마당발을 영입한 덕분에 영화계 소식도 서울 충무로보다 먼저 전할 수 있었다. 1978년 7월, 「주간국제」는 김사겸 감독의 영화계 네트워크와 힘을 합해 ‘전국 신인 남녀배우 선발대회’를 열어 전국에서 1,0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다음해 열린 2회 선발대회는 무려 1,600명의 지망생이 몰렸다.
- ‘이지훈(필로아트랩 대표) 칼럼’, 국제신문 2015. 7. 16.
신인배우 선발대회 심사위원장은 당시 영화계의 대부 유현목 감독이 맡았고, 심사위원은 출연작품을 내건 네 감독을 비롯하여 신성일申星一 장미희張美姬 정윤희丁允姬 김추련金秋鍊 등의 배우와 작가 최인호崔仁浩, 영화평론가 변인식邊仁植 등 호화군단이 동원됐다. 선발된 배우들은 김사겸 감독의 배우예술학원에서 소정의 연기 수련을 쌓은 뒤 스크린 데뷔는 물론, 탤런트나 모델로 진출하는 등 그 성과가 빛났다.
사실 이 배우선발대회는 한국영화 발생지에서 영화를 일으켜 세우겠다며 ‘부산 이주’를 선언하고 실천에 옮긴 김사겸 감독을 돕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신인배우를 선발하자 부산 출신의 현진영화사 김원두金源斗 사장이 김사겸 감독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그는 당장 광복동 중심가의 큰 건물을 세내어 ‘김사겸 배우예술학원’ 겸 현진영화사 부산지사를 차려 카메라 테스트 등 일체의 지원을 뒷받침했다.
김사겸 감독을 친형처럼 모시고 따르던 김원두 사장은 신인배우 선발대회에서 뽑힌 이들이 네 감독의 작품에 기용되지 않을 경우 현진영화사 작품에 모두 출연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이장호李長浩 감독이 연출하는 <내일 또 내일>의 촬영을 100% 부산에서 하게 하여 모든 제작진을 부산에 상주시키면서 부산에서의 영화 붐 조성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김사겸 감독이 이렇게 부산에서 영화판을 만들자 그와 가까운 문여송文如松을 비롯한 영화감독, 남녀배우, 시나리오작가, 촬영기사들이 잇달아 부산으로 찾아왔다. 부산 ‘광포동’이 서울 충무로를 방불케 하는 듯했다.
- 최화수, ‘위의 책’
1978년부터 부산의 ‘광포동’은 서울의 ‘충무로’에 못지않을 만큼 영화인들로 넘쳐났다. 출연작품을 내건 4명의 감독이 번갈아 연기지도를 하러 부산을 찾는 것을 비롯, 인기배우와 시나리오 작가, 촬영기사 등 스텝진이 ‘광포동’ 찻집과 술집 등에 와글와글 들끓다시피 했다. 갑자기 부산에서 벌어진 영화판의 이야기들은 당시 36만부까지 발행하던 「주간 국제」 지면을 통해 서울로 전파됐다. 김사겸 감독의 부산 이주와 「주간 국제」 창간이 ‘찰떡궁합’으로 만든 한편의 드라마(?)였다.
“진실로, 진실로! 공부 좀 하라구!”
영화는 시나리오에서 촬영, 녹음, 편집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종합예술이다. 출연 배우에서부터 여러 기술 부문 스텝진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인 역할과 기능을 한다. 연출을 맡은 감독은 그 전체 과정에 간여를 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영화감독은 그 누구 못지않게 두뇌를 많이 쓰고, 그래서인지 대부분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다. 하길종, 김호선, 정인엽, 홍파 감독도 부산에 오기가 무섭게 ‘광포동’ 술집에 진을 치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김사겸은 서라벌예대 재학생일 때부터 「영화예술」 잡지에 영화평론을 썼고 「일간스포츠」 문화부기자로 영화 관련 기사를 많이 다루었다. 하길종, 김호선, 정인엽, 홍파 등의 지성파와 ‘유현목 사단’에서 조감독으로 함께 일한 것도 서로 호흡이 잘 맞아서였다. 이들은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광포동’에서도 만나기만 하면 술집에 앉아 영화 이야기로 갑론을박하느라 정신이 팔려 날밤을 새다시피 했다.
서울 영화인들은 광복동의 맥주집 ‘큰바다’, 자갈치의 횟집, 동광동 일식집 등을 주로 찾았다. 다만 하길종은 남포동 골목의 오래된 술집 ‘수복센터’와 ‘백광상회’가 단골이다시피 했다. 김사겸은 UCLA 출신의 엘리트 하길종과 죽이 맞아 술집에서 ‘영화 논쟁’을 하느라 열을 올렸다. 부산 출신의 하길종은 자신의 고향을 미국 LA처럼 한국영화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김사겸의 큰소리에 맞장구를 치고는 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태어나기 전 부산은 영화의 불모지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부산의 역사를 모르는 말이다. (중략) 허창許彰 평론가를 비롯한 7명이 1958년 국내 최초로 영화평론가협회를 결성했고, 장갑상張甲相 부산대교수가 1970년 한국 최초의 영화평론 이론서인 『영화와 비평』을 펴낸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주간 국제」는 어떤 언론도, 어떤 평론가 집단도 생각지 못한 일에 성공했다. 서울 제작사와 전국의 인재를 끌어들여 부산의 약점인 생산(제작) 부문을 보완한 것이다. 문자 매체가 영화의 생산, 매개, 향유를 하나로 묶는 고리가 되었다.
- ‘이지훈(필로 아트랩 대표) 칼럼’, 위의 신문.
문화예술의 서울 집중화가 두드러진 탓인지 한국 첫 영화제작회사가 부산에서 탄생됐고, 한국영화계의 개척자적 인물들이 경향 각지에서 부산으로 몰려들었던 사실은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부산은 한국영화의 발상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연배우 역시 부산 사람이었다. 1924년 6월 현재의 중구청 자리에 촬영소를 정식으로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조선 키네마를 설립한 이는 부산의 큰 사찰 주지로 있던 다카사란 일본인이었고, 주주들 역시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로 의사, 변호사, 상인들의 대다수가 참여했다. 일본인들이 영화사를 만든 것이기는 해도 다카사 감독을 제외하면 조감독과 출연배우는 모두 한국인이었고, 첫 작품 <해海의 비곡秘曲>의 내용도 우리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주연배우는 부산 토박이인 이주경李周璟이란 청년인네, 1900년 초량에서 태어난 그는 특이한 인물로, 그의 생애 자체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 최화수, 『부산문화 이면사』, 출판기획 한나라, 1991년.
이주경은 부산공립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로 부산에 본사를 둔 경남은행 출납계 고원雇員으로 일했다. 그는 야구에 재질이 있어 전부산군 투수로 활약했고, 당구 솜씨가 당시 인구 10만 명의 부산에서 첫손가락에 꼽혔다. 호남형인 그는 달변가達辯家에 대주가大酒家, 대식가大食家였다. 명함을 아예 ‘李周璟, 李酒鯨(술고래)’로 찍어 다닌 그는 청주 3병을 즉석에서 마시면 1병을 선물하는 대회에서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통과했고, 10전짜리 통국수 13그릇을 단숨에 먹어치우기도 했다.
호방하고 열정적인 이주경은 배우 출연 교섭을 받자 즉석에서 응낙하고 은행에는 사표를 냈다. 이 영화의 부산 개봉이 가까워졌을 무렵 조선키네마를 찾아와 영화배우로 기용해 달라고 애원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훗날 한국영화계의 귀재로 떠오른 나운규羅雲奎였다. 조선키네마의 제2탄 작품은 <운영전雲英傳>이었는데, 주인공 ‘특이’ 역에는 이주경을 내세우고 나운규는 고작 가마꾼의 단역으로 잠시 얼굴만 비췄을 뿐이다. 하지만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작품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 최화수, ‘위의 책’
이주경은 자신이 세 번째 작품을 제작하고자 시나리오까지 썼으나 자금사정으로 좌절됐고, 부산극장에서 소인극素人劇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주호색 기질이 두드러졌던 그는 기생방 출입이 잦았고, 경화라는 이름의 기생과 동거를 하던 중 간염에 걸려 38세의 아까운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이미 재정적으로 파탄에 직면했던 그는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요절했는데, 본처와의 사이에 딸 1명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일치할 수도 있는가? 한국 배우 1호 이주경과 지성파 감독 하길종은 똑같이 부산 초량동 태생이고, 하길종도 뇌졸중으로 이주경처럼 38세에 세상을 등졌다. 하 감독의 요절에 그의 절친 소설가 최인호는 “신은 미쳤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이 광기에 헐떡이고 있으니 신마저 미쳤다”고 격앙했고, 시인 정현종도 「시비를 거시는 하느님께」 라는 시에서 ‘구정물이나 한 사발 들이키고 싶게 하는 은총을 심심찮게 내리시는 하느님…’이라며 ‘미남 H'의 승천에 분개했다.
하길종을 불의에 떠나보낸 김사겸 감독의 상실감은 엄청났다. 서울 영화인들이 찾아오면 술자리에서 호통을 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진실로, 질실로!” 취기가 오르면 그의 입에서 이 “진실로!”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진실로’란 말을 신호로 “그 따위를 영화라고 만들어? 임마, 너희들은 아직 멀었어. 진실로 공부 좀 하라구!” 공부를 하라고 단말마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이같은 포효에는 절친인 학구파 영화감독 하길종을 잃어버린 안타까움과 통절함이 절절하게 담겨 있는 것이었다.
“진실로, 진실로! 진실로 공부 좀 하라구!” - 김사겸이 악을 쓰며 내지르는 질책에 술자리 일행은 숨소리마저 죽인다. 다음 순간 그는 언제 무슨 일이 있기나 했냐는 듯이 한없이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지붕 위에 핀 하이얀 박꽃은…’의 자작 가곡 <달밤>을 열창한다. 김사겸은 <광복동의 밤>, <환상> 등 60여 가곡을 만든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가 술자리에서 애창하는 노래는 <달밤>으로, 영화인들은 워낙 많이 들어 귀에 익어 김사겸이 그 노래를 시작하면 모두들 합창으로 따라 불렀다.
‘부처님의 비서실장’, ‘급시우及時雨’ 만혁卍赫
1968년 연초, 남포동의 한 대폿집에서 시인 임수생林秀生이 만취, “천하의 천재시인 임수생이 술을 마셨는데, 뭐 어쨌단 말이고!” 라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의 기벽을 익히 아는 일행은 모두 달아나고 박응석朴應奭 시인만 남았는데, 이미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박 시인은 임 시인을 어르고 달래면서 남포동 지하도를 건넜다. 그런데 임수생은 지하도에서 나오면서 딱 마주친 양과자점의 대형 벽유리를 사정없는 발길질로 와장창 박살을 내버렸다.
양과자점 주인이 뛰어나오고 경찰관을 부르고 하는 소동 끝에 두 시인은 남포파출소로 연행돼 갔다. 파출소에 끌려가서도 임수생은 ‘대한민국 최고 천재시인’ 운운 하며 계속 주정을 부려 경찰관들이 골머리를 싸맸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박응석은 이 낭패 상황을 모면하고자 고민하다 불현듯 ‘급시우及時雨’ 박기찬朴基贊을 떠올렸다. 자갈치시장에 집이 있는 박기찬이 총알처럼 달려 나와 깨어진 벽유리 변상과 함께 합의를 한 뒤 경찰관을 설득하여 사건을 해결했다.
임수생의 유리창 격파 다음날, 고향 울주군 서생면의 친척 한 분이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박기찬에게 집안 대표로 문상을 다녀오라며 부산의 집안간 부의금 20만 원을 모아 건네주었다. 당시 공무원 서기 월급이 2~3만 원 정도였으니 큰돈이었다. 그런데 박기찬은 어제 저녁 전쟁을 치른 임수생과 내가 몽롱하게 자고 있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하고 “임마, 네놈들 부산에 있어봐야 백해무익이니 나를 따라 나서라”며 서생행 열차를 타게 했다. 그 부조금을 얼마나 호기롭게 썼는지, 차마 일일이 적지를 못하겠다.
- 박응석, ‘급시우’, 박기찬 예순기념문집 『부처님의 비서실장』
박기찬은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도 아니고, 무용가 연극인 서예가 언론인도 아니다. 그런데도 부산의 문화예술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가까이 있었다. 더불어 문화예술인들은 그를 가리켜 모두가 ‘급시우’라고 불렀다. ‘때맞춰 내리는 비’라는 말뜻처럼 그는 부산 문화예술인들이 고난에 처할 때마다 『수호지』의 송강松江 두령처럼 나타나 어려움을 벗어나게 해주는 천사 역할을 해냈다. 그래서 그의 별호도 ‘문화계의 마당발’, ‘약방의 감초’, ‘금강역사’, ‘급시우’, ‘해결사’ 등으로 다양하다.
미술전시회가 열리는 언저리의 허름한 술집이나 문학 출판기념회, 아니면 연극공연장에 가면 언제나 그를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의 그는 항상 손님이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는 그렇게 문화예술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가 또 그렇게 사라져 버린다. 그곳에서 그는 문화예술의 이론을 펼치는 허장성세를 부린다거나, 그날의 주인공과의 관계를 자랑하며 어깨를 으쓱댄다거나 하는 법이 없다. 예술을 하면서도 그 예술판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는 오탁汚濁의 그 문화판을 썩지 않게 정화시키는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 김문홍, ‘부산문화예술의 아름다운 사람’, (위의 책)
1988년 부산연극제 개막식 뒤풀이를 끝내고 귀가하던 당시 연극협회 강용길 부지부장이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담벼락 모래더미 옆에서 숨을 거두었다. 부산 연극판의 화합을 위해서 무던히도 애쓰다 마흔세 살의 짧은 삶을 마감한 그의 죽음을 연극인장으로 애도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한 시민이 부의금 20만 원을 내고 사라졌는데, 주인공은 박기찬이었다. 그는 셋방살이의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남의 공짜술을 마시지 않는 결벽증에다 연극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고인을 그렇게 애도한 것이다.
만혁 박기찬은 1950년 김대월 스님이 부산 대각사에 계실 때 스님의 영향으로 불교청년회 일을 했다. 중학생 때였다. 이후 청년시절을 지나면서 청소년 계몽운동, 농촌진흥운동에 힘을 쏟았고, 이때의 멤버들이 나중에 ‘녹화회 綠火會, Green Fire 운동’으로 발전하여 불교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172㎝의 키, 72㎏의 듬직한 체구의 그는 요즘 심성의 결이 삭아 매사에 소이부답笑而不答의 경지를 보이고 있다. 성철 스님은 종교인의 기본자세는 나를 잊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라 했다. 만혁이 살아 있다는 것은 불자만이 갖는 흥복이 아닐 것이다.
- 이진두, ‘부처님의 비서실장’, 불교신문 2003. 6. 11.
1993년 8월 동래 금강공원에서 독배 허종배의 사진작가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부산 문화계 인사들이 계파를 초월해서 합심하여 참석한 최초의 일이기도 한데, 이를 주도한 이가 바로 박기찬이다. 그는 이에 앞서 아동문학가 강기홍, 판화가 주정이 등과 함께 독배 선생의 병원 치료비 모금활동을 벌여 성금을 전달했다. 사진비 제막을 계기로 그 이듬해 부산원로문화회 전신 삼고문화회가 탄생했다.
자신에게 득이 없고 성가신 일이면 되도록 멀리 하려는 세태며 인정인데 그는 원로예술인이나 벗들의 궂은 일, 성가신 일에는 꼭 나타나 마치 자신의 집안일 보살피듯 꼼꼼히 챙겨서 동분서주한다. 누가 그런 일을 시킨다고 해서 자청해 나서겠는가. 그래서 부산 문화계에서는 만혁 박기찬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한다. 그러니 만혁을 모르면 부산의 문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뒤집어서 부산에서 얼굴을 내밀고 행세께나 하려면 만혁을 알아야 한다를 거꾸로 강조한 말이겠다.
- 박기찬 이순기념문집 『부처님의 비서실장』 머리말.
1998년, 열혈 청년 만혁 박기찬의 들끓던 뜨거운 피도 이순을 맞이했다. 이제는 부산원로문화회 회장인 그의 평생에 걸친 베풂에 보답하고자 부산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만혁 박기찬 이순기념문집’을 펴내기로 뜻을 모았다. 강기홍, 강남주, 김동규, 김상훈, 김석규, 신창호, 이해웅, 임명수, 정진채, 정순영, 주정이, 최상윤 등 내로라하는 인사 100여 명이 참여했고, 김사겸 영화감독과 김영준, 박응석, 이상개, 임수생 시인이 편집위원으로 궂은일을 도맡았다.
하지만 만혁이 갑자기 대학병원에 입원, 병치료를 하느라 책 발간은 5년이 늦어져 2003년 봄에 이루어졌다. 시인은 시로, 화가는 그림으로, 서예인은 묵필로, 그리고 문필가는 회고담이나 서간문 형식으로 만혁의 면모를 되살렸다. 무엇보다 책의 제목이 만혁의 진정한 면모를 가장 잘 되살려 준다. 바로 『부처님의 비서실장』이다. 이 책의 출판기념회에는 부산 문화예술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 대성황을 이루었다.
돌아보면 엊그제처럼 손에 잡힐 듯한 세월인데 허망하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세월 속에 만혁에 있어서 언제나 행복한 세상, 즐거웠던 한 세상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때만 해도 오늘날처럼 위아래도 모르고 마구 치닫는 물질주의 개인주의가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더러는 어렵게 살다가 지치고 더러는 망가지기도 했어도 우리들이 헤매었던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 뒷골목의 추억과 자갈치 해발 1m의 낭만도 있었다. 훈훈한 미담과 인정이 살아있었고, 더욱 거기에 만혁이 있어서 아름다운 세월이었다.
- 박기찬 이순기념문집 ‘위의 책’ 머리말.
- <월간 문학도시>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