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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인간이 천지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창세 역사 시대인 ‘환단 시대 이래
한민족의 역사 이야기책’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31 번한 왕 기箕씨의 가계를 밝혀 준다!
壬午(임오)에 燕(연)이 倍道入寇(배도입구)하야 攻安寸忽(공안촌홀)하고
又入險瀆(우입험독)이어늘
須臾人箕詡(수유인기후)가 以子弟五千人(이자제오천인)으로
來助戰事(내조전사)하니 於是(어시)에 軍勢稍振(군세초진)이라
乃與眞番二韓之兵(내여진번이한지병)으로 夾擊大破之(협격대파지)하니라.
임오(단기 1995, BCE 339)년에 연나라가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쳐들어와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하고 험독險瀆까지 쳐들어왔다.
이때 수유 사람[須臾人] 기후가 젊은 청년[子弟]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전쟁을 도우니 군세가 조금 진작되었다. 이에 진한⋅번한의 군사와 함께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
戊戌(무술)에 水韓(수한)이 薨(훙)하니 無嗣(무사)라
於是(어시)에 箕詡(기후)가 以命(이명)으로 代行軍令(대행군령)하니
燕(연)이 遣使賀之(견사하지)하니라.
是歲(시세)에 燕(연)이 稱王(칭왕)하고 將來侵(장래침)이라가 未果(미 과)하고
箕詡(기후)도 亦承命正號(역승명정호)하야 爲番朝鮮王(위번조선왕)하니라.
무술(단기 2011, BCE 323)년에 수한이 세상을 떠나니 후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기후가 명을 받들어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하례하였다.
이해에 연이 왕이라 칭하고 장차 침범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기후도 명을 받들어 왕호를 써서 (70세) 번조선 왕이 되었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환단고기』에서는 번한 왕 기씨箕氏의 가계도를 밝혀 준다. 기씨가 중요한 것은 중화사관에서 주장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 문제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또 기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씨 청주 한씨淸州韓氏와도 연관된다.
일반적으로 청주 한씨의 조상은 기후箕詡의 후손 기준箕準인데, 위만衛滿의 공격으로 나라가 멸망하자 바닷길로 도망쳐 서해를 타고 내려와 ‘한지韓地’(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금마군)에 정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준왕은 이곳에서 ’한왕韓王‘을 자처하여, 나중에 한韓으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이 사실은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중화사관을 최초로 정립한 사마천司馬遷의 역사 사기극이다.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한 역사책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외에도 BCE 2세기경 복생이 쓴 『상서대전尙書大全』 후한 시대 반고가 쓴 『한서漢書』 등이 있다. 모두 중화사관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한漢나라 이후 편찬된 사서들이다.
반면 『환단고기』에서는 ‘기자조선’에 대해 간단한 문장을 통하여 근거 없음으로 일축하고 있다.
己卯(기묘)에 殷(은)이 滅(멸)하니 後三年辛巳(후삼년신사)에 子胥餘(자서여)가
避居太行山西北地(피거태항산서북지)이어늘
莫朝鮮(막조선)이 聞之(문지)하고 巡審諸州郡(순심제주군)하야
閱兵而還(열병이환)하니라.
기묘(단기 1212, BCE 1122)년에 은나라가 멸망하였다. 3년이 지난 신사(단기 1214, BCE 1120)년에, 자서여子胥餘(기자)가 태항산太行山 서북 땅에 피하여 사는데, 막조선莫朝鮮 왕(22대 아도왕)이 전해 듣고 모든 주군州郡을 순행하여 살피고 군대를 사열하고 돌아왔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丁亥三十七年(정해삼십칠년)이라 箕子(기자)가 徙居西華(사거서화)하야 謝絶人事하(사절인사)니라.
재위 37년 정해(단기 1220, BCE 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살면서 인사를 사절하였다. (『단군세기檀君世紀』 25세 솔나 단군 조)#]
먼저 『사기색은史記索隱』을 보면 “기자는 상商나라의 왕족으로, 기자箕子의 기箕는 국명國名이고 자子는 작위의 명칭이며 기자의 이름은 서여胥餘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기자는 기국箕國의 통치 계급에 속하는 인물로 높게는 기국의 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상나라의 왕족이었으니 동이족 계열의 사람임은 불문가지다.
기자에 관한 이야기는 『환단고기』에서 두 번 등장한다. 그 내용의 요지는 ‘상나라의 왕족으로 기국箕國의 제후였던 기자는 상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등장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태항산에 은거하여 살다가 그 후에는 고향 땅 서화에 돌아가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자조선’이니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느니 하는 망발은 꺼내지도 말라는 뉘앙스다. 지금도 허난성 서화현에는 기자 독서대가 있고, 인근 산둥성 조현에는 기자의 무덤이 있다. 이런 역사 현실만 봐도 기자조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날조인지 잘 알 수 있지 않는가.
계속해서 『환단고기』는 기후의 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밝혀 준다.
箕詡(기후)가 薨(훙)하니 丙午(병오)에 子箕煜(자기욱)이 立(입)하니라
薨(훙)하니 辛未(신 미)에 子箕釋(자기석)이 立(입)하니라
是歲(시세)에 命州郡(명주군)하야 擧賢良(거현량)하니
一時被選者(일시피선자)가 二百七十人(이백칠십인)이라
己卯(기묘)에 番韓(번한)이 親耕于郊(친경우교)하고
乙酉(을 유)에 燕(연)이 遣使納貢(견사납공)하니라.
箕釋(기석)이 薨(훙)하니 庚戌(경술)에 子箕潤(자기윤)이 立(입)하니라
薨(훙)하니 己巳(기사)에 子箕丕(자기비)가 立(입)하니라.
기후가 세상을 뜨자 병오(단기 2019, BCE 315)년에 아들 기욱箕煜(71세 왕)이 즉위하였다. 기욱이 세상을 떠나고 신미(단기 2044, BCE 290)년에 아들 기석箕釋(72세 왕)이 즉위하였다. 이해에 각 주와 군에 명하여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일시에 선발된 자가 270명이었다.
기묘(단기 2052, BCE 282)년에 번한 왕이 친히 교외에서 밭을 갈았다.
을유(단기 2058, BCE 276)년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기석이 세상을 떠나고 경술(단기 2083, BCE 251)년에 아들 기윤箕潤(73세 왕)이 즉위하였다. 기윤이 세상을 뜨자 기사(단기 2102, BCE 232)년에 아들 기비箕丕(74세 왕)가 즉위하였다.
初(초)에 箕丕(기비)가 與宗室解慕漱(여종실해모수)로
密有易璽之約(밀유역새지약)하고 勤贊佐命(근찬좌명)하니
使解慕漱(사해모수)로 能握大權者(능악대권자)는 惟箕丕其人也(유기비기인야)라.
箕丕(기비)가 薨(훙)하니 庚辰(경진)에 子箕準(자기준)이 立(입)하니라
丁未(정미)에 爲流賊衛滿所誘敗(위유적위만소유패)하야
遂入海而不還(수입해이불환)하니라.
일찍이 기비가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와 함께 몰래 옥새를 바꿔 치우려는 (새 나라를 열자는) 약속을 하고, 힘을 다해 천왕天王이 되는 것을 도와주었다.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잡을 수 있게 한 사람은 오직 기비 그 사람이었다.
기비가 세상을 떠나고 경진(단기 2113, BCE 221)년에 아들 기준箕準(75세 왕)이 즉위하였다. 정미(단기 2140, BCE 194)년에 떠돌이 도적[流賊] 위만에게 속아 패하여 마침내 배를 타고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먼저 『환단고기』에서는 기후가 번조선 왕으로 등극한 이후 그 후손 대에 벌어졌던 중요한 사건들을 밝혀 준다. 물론 다른 역사서에는 없는 내용들이다. 특히 74세 기비箕丕 대에 와서 해모수解慕漱와 새로운 나라를 열자는 밀약을 했다는 사실은 해모수 등장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알려 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역사는 끊임없는 인과관계의 연속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단고기』는 대부여大夫餘(단군조선)에서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 건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인과 고리를 채워 주는 책이다.
그런데 번조선 왕으로 처음 등장하는 기후箕詡는 ‘수유인須臾人 기후箕詡’라고 했다. 수유는 고조선의 제후국이다. 고조선은 동북아의 대국으로서 70여 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을 거느렸다.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비롯하여 『제왕운기帝王韻紀』,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응제시주應製詩註』, 『규원사화揆園史話』 같은 국내 문헌뿐 아니라 중국 사서들에 그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역사책에 기록된 제후국만 해도 시라尸羅(길림), 고례高禮(고구려) 즉 고리국稾離國, 옥저, 부여, 예濊, 맥貊, 남국藍國(북경 부근), 숙신肅愼, 청구靑邱, 낙랑樂浪, 여黎, 임둔臨屯, 현도玄菟, 고죽孤竹, 영지令支, 수유須臾, 엄奄(산둥성 곡부), 서徐, 회淮, 추追, 양이良夷, 양주楊州, 유兪, 진번眞番, 졸본卒本, 비류沸流, 해두海頭, 개마蓋馬, 구다句茶, 송양松壤, 조나藻那, 주나朱那, 행인荇人 등으로 30개국이 넘는다.
그런데 수유는 기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유주집柳州集」에서는 ‘기자의 이름은 수유須臾’라고 하였다. 고대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이름이 곧 나라의 이름이기도 했다. 때문에 수유국須臾國은 기국箕國과 같은 나라다.
기국의 존재는 1973년, 요령성 객좌현에서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솥[방정方鼎]이 발굴되면서 증명되었다. 이 유물은 기자가 살던 상말⋅주초에 해당하는 BCE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보다 앞서 1951년에는 산둥성 황현에서 8점의 기기箕器가, 1969년에는 산동성 연대시에서 기후정箕侯鼎이 출토되었다.
이것들은 기자가 죽고 수백 년이 지난 주나라 후기, 춘추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발견된 유물의 수준으로 볼 때, 기자와 그 후손들은 상당한 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권력의 힘이 단군조선 때도 그대로 이어졌고 마침내 기후 대에 와서 번조선 왕이 되는 것으로 열매 맺었다고 볼 수 있다.
32 동명왕 고두막한의 존재를 밝혀 준다! 고두막한은 한 무제의 침입을 물리친 북부여 구국의 영웅이다.
癸酉元年(계유원년)은 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시위단군고우루십삼년)이라.
帝爲人豪俊(제위인호준)하시고 善用兵(선용병)이러시니
嘗見北夫餘衰(상견북부여쇠)하고 漢寇熾盛(한구치성)하사
慨然有濟世之志(개연유제세지지)러시니
至是(지시)하야 卽位於卒本(즉위어졸본)하시고
自號東明(자호동명)하시니 或云高列加之後也(혹운고열가지후야)라.
고두막단군의 재위 원년은 계유(환기 7090, 신시개천 3790, 단기 2226, BCE 108)년이다. 이때는 북부여 고우루 단군 13년이다. 임금께서는 사람됨이 호방하고 영준하며 용병用兵을 잘 하셨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하면서 한나라 도적이 불길처럼 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개연히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셨다. 이에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고열가(고조선의 마지막 47세 단군)의 후예라 말한다. (『북부여기北夫餘紀 하下』)
至癸酉漢武時(지계유한무시)하야 漢(한)이 移兵(이병)하야 滅右渠(멸우거)할새
西鴨綠人高豆莫汗(서압록인고두막한)이 倡義興兵(창의흥병)하사
亦稱檀君(역칭단군)하시고
乙未漢昭時(을미한소시)에 進據夫餘故都(진거부여고도)하사
稱國東明(칭국동명)하시니 是乃新羅故壤也(시내신라고양야)라.
이때 서압록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또한 단군이라 칭하였다. 을미(단기 2248, BCE 86)년 한나라 소제昭帝 때 고두막한이 부여의 옛 도읍을 점령하고 나라를 동명東明이라 칭하시니, 이곳은 곧 신라의 옛 땅이다. (『삼성기三聖紀 상上』)
『북부여기北夫餘紀』에서는 고두막한高豆莫汗의 혈통에 대해 단군조선의 마지막 고열가高列加 단군의 후손이라고 밝혀 준다. 고두막한은 우리 상고사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의 역사서들이 668년 평양성 전투에서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에 의해 모조리 불태워진 사건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고두막한을 철저히 숨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그가 중화민족이 최고의 정복 군주 중의 한 명으로 치켜세우는 한 무제를 패배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동명왕 고두막한을 주몽 설화와 유사하게 묘사하여 주몽과 같은 인물로 둔갑시켜 버렸다. 당연히 고두막한의 전쟁 승리나 북부여 5세 단군으로의 등극 내용은 누락시켰다. 이것은 중화사관의 대표적인 곡필曲筆로 우리의 나라 이름 바꿔치기에 이어 역사 인물 감추기 수법이다. 그리하여 동명왕 고두막한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그 실체가 숨겨져 있고, 고주몽이 곧 동명왕으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동명이 고두막한의 자호自號이자 그가 세운 나라 이름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甲午三十四年(갑오삼십사년)이라 十月(시월)에 東明國高豆莫汗(동명국고두막한
)이 使人來告(사인래고)하야 曰(왈) 我是天帝子(아시천제자)라
將欲都之(장욕도지)하노니 王其避之(왕기피지)하라 한대
帝難之(제난지)러시니 是月(시월)에 帝憂患成疾而崩(제우환성질이붕)하시고
皇弟解夫婁(황제해부루)가 立(입)하시니라.
재위 34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로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하셨다. 이달에 고우루 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解夫婁가 즉위하였다. (『북부여기北夫餘紀 상上』)
이렇게 한漢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고두막한은 북부여北夫餘를 압박하여 나라를 옮기게 한다. 역사적인 공덕을 쌓았고 큰 병권兵權을 거느리며 수많은 인권人權을 확보하게 되자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역사의 중심 무대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이로써 역사의 지각 변동이 또 한 번 일어나게 되는데 해부루解夫婁 단군이 도읍을 가섭원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이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또는 동부여東夫餘라고 한다. 이 동부여에서 다시 갈사부여曷思夫餘가 나오고 서부여西夫餘(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가 갈라지게 된다. 우리는 『환단고기』를 통해 복잡하게 얽힌 부여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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