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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문무왕(文武王)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대왕이 설인귀에게 답서를 보내다 (671년 7월 26일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대왕이〔설인귀(薛仁貴)의〕편지에 답하여 말하였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譯註 001] 22년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문황제 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 [譯註 002] 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신라 백성들은 모두 은혜로운 칙명을 듣고서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큰 일이 끝나기 전에 문제 (文帝)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셔서 [譯註 003] 지난날의 은혜를 계속 이어나가셨는데, 자못 인자함을 자주 입어 지난날보다 지나침이 있었습니다. 저희 형제와 아들들이 금인(金印)을 품고 자주색 인끈을 달게 되어 [註 001] 영예와 은총의 지극함이 전에 없었던 것이라서 몸이 부스러지고 뼈가 잘게 부셔져도 모두 부리시는데 쓰임이 되기를 바랐으며, 간과 뇌를 들판에 발라서라도 [譯註 004]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현경(顯慶) [譯註 005] 5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끝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에 남겨둔 실마리를 풀고자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군(水軍)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힘이 쇠약해져서 군사를 이끌기 어려웠으나 이전의 은혜를 좇아 생각하셔서 힘써 국경에 이르러서 저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가 서로 화합하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나아갔습니다. 수군(水軍)이 겨우 백강(白江) [註 002]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뜨려서 두 부대가 같이 [백제의] 왕도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평정한 뒤에 선왕께서는 드디어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 [譯註 006] 과 의논하여 중국 군사 1만 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 (仁泰) [譯註 007] 를 보내 군사 7천 명을 이끌고서 함께 웅진 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대군이 돌아간 뒤 적신(賊臣)인 복신 (福信) [譯註 008] 이 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웅진도독부성(熊津都督府城)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깨뜨려서 군량을 모두 빼앗아가고 다시 부성(府城)을 공격하여 얼마 안되어 함락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부성의 가까운 네 곳에 성을 쌓고 둘러싸고 지켰으므로, 이에 부성은 거의 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깨뜨려서 먼저 그 위급함을 구하였습니다. 다시 식량을 날라서 마침내 1만 명의 중국 병사들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위기를 벗어나도록 하였으며, 머물러 지키고 있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바꿔서 서로 잡아먹는 일 [譯註 009] 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현경] 6년에 이르러서는 복신 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지고 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았으므로, 웅진 의 중국 군사 1천 명이 적의 무리들을 치러 갔다가 적에게 깨뜨림을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싸움에 패한 뒤부터 웅진 에서 군사를 요청함이 밤낮동안 계속되었는데, 신라에는 많은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요청하는 것을 어기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주류성(周留城) [註 003] 을 포위하러 갔습니다. 적이 [우리]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와서 공격하여 군사와 말을 크게 잃고서 이득없이 돌아오게 되자 남쪽의 여러 성들이 한꺼번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 에게 속하였습니다. 복신 은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을 둘러쌓으므로, 이 때문에 웅진 은 길이 끊겨서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건장한 남자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곤경을 구원하였습니다. 6월에 이르러서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는 겨우 끝났으나 상복(喪服)을 벗지도 못하였으므로 [구원 요청에] 응하여 달려갈 수 없었지만, 칙명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함자도 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 (劉德敏) 등이 이르러서 칙명을 받드니 ‘신라를 보내 평양 에 군량을 나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웅진 에서는 사람을 보내와 부성이 고립되고 위태로운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유총관 이 저와 상의하였는데, 제가 ‘만약 먼저 평양 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 으로 통하는 길이 끊어질까 두렵다. 만약 웅진 으로 가는 길이 끊어진다면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는 곧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유총관 이 마침내 저와 함께 좇아서 먼저 옹산성(甕山城) [譯註 010] 을 쳐서 옹산을 빼앗고 웅진 에 성을 쌓아 웅진 으로 가는 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12월에 이르러 웅진 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 에 양식을 나르자니 황제의 뜻을 어길까 두렵고, 만약 평양 으로 [군량을] 수송한다면 웅진 의 양식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늙고 약한 자를 뽑아 보내 웅진 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 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 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들은 가는 길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백 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용삭(龍朔) [譯註 011] 2년 정월에 이르러서 유총관 은 신라의 양하도 (兩河道) 총관 김유신 [譯註 012] 등과 함께 평양 으로 군량을 운송했습니다. 당시는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이어지고 눈보라가 치는 등 날씨가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이 얼어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을 모두 보낼 수 없었습니다. 평양 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고 하였고 신라 병사와 말의 양식도 다 떨어졌으므로 또한 돌아왔습니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해서 길에서 죽은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호로하 (瓠瀘河) [註 004] 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와 말이 막 뒤를 쫓아와서 강 언덕에 군영을 나란히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서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싸웠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 적의 무리가 무너져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이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웅진 부성에서 자주 곡식을 요구하였는데, 그 이전과 이후에 보낸 것이 수만 섬입니다. 남으로는 웅진 으로 나르고 북으로는 평양 에 공급하였으니, 조그마한 신라가 두 곳으로 나눠 공급하느라 인력의 피로함이 극에 달하였고 소와 말이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때를 놓쳐 곡식이 잘 익지 못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날라주느라 모두 써버려서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지만, 웅진 의 중국 군사는 군량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한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들은 집을 떠나온 지가 오래되어 의복이 풀어 떨어져 몸에 걸칠 만한 온전한 옷이 없었으므로, 신라는 백성들에게 권하고 매겨서 철에 맞는 옷을 지어 보냈습니다. 도호(都護) 유인원 (劉仁願)이 멀리서 고립된 성을 지킬 때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공격과 포위를 당하였는데 늘 신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1만 명의 중국 군사는 4년 동안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유인원 이하의 군사는 뼈와 가죽은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피와 살은 모두 이곳 신라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의 은혜와 혜택이 비록 끝이 없다 하더라도 신라가 충성을 바친 것 역시 가엽게 여길 만한 것입니다. 용삭 3년에 이르러서 총관(摠管) 손인사 (孫仁師)가 군사를 이끌고 부성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의 병사와 말도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가서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倭) 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譯註 013] 왜 의 배 1천 척이 백강(白江) 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군영을 깨뜨리자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잃고서 곧바로 항복하였습니다. 남쪽이 이미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쪽을 정벌하였는데, 임존성(任存城) [譯註 014] 한 성만이 헛되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하여 함께 하나의 성을 쳤지만 굳게 지키고 대항하였으므로 깨뜨려 얻을 수 없었습니다. 신라가 곧 돌아오려 할 때 두대부(杜大夫) [註 005] 가 ‘칙명에 따르면 평정을 마친 뒤에 함께 모여 맹서의 모임을 가지라고 하였으니, 임존성 한 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라는 ‘칙명에 따르면 이미 평정한 뒤에 서로 함께 맹세를 맺으라고 하였는데, 임존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고, 또한 백제는 간사하고 속임수가 끝이 없어서 이랬다 저랬다 함이 언제나 변하지 않으니, 지금 비록 함께 맹세를 맺는다 하여도 뒷날 반드시 배꼽을 깨물 [譯註 015] 근심이 생길 것이다.’고 하여 맹세를 맺는 일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인덕(麟德) [譯註 016] 원년에 이르러 다시 엄한 칙명을 내려 맹세를 맺지 않은 것을 꾸짖었으므로 곧 웅령 (熊嶺)에 사람을 보내 제단(祭壇)을 쌓고 함께 서로 맹세하고, 이내 맹세를 맺은 곳을 드디어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모여 맹세한 일은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명을 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취리산 (就利山) [註 006] 에 제단을 쌓고 칙사(勅使) 유인원 을 맞아 피를 마시고 서로 맹세하여 산과 강으로 서약하였고,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영원히 국경으로 삼아 백성을 머물러 살게 하고 각각 생업을 꾸려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건봉(乾封) [譯註 017] 2년에 이르러서는 대총관 영국공 (英國公) [譯註 018] 이 요동 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서〔나는〕 한성주 (漢城州)에 가서 군사를 보내 국경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와 말이 홀로 쳐들어가서는 안되었으므로 먼저 간자(間者)를 세 번이나 보내고 배를 계속해서 띄워 대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간자가 돌아와서 모두 ‘대군이 아직 평양 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길을 뚫고 대군이 이르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 이 보낸 강심 (江深)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사와 말은 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빨리 평양 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 [註 007] 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사와 말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 건봉 3년에 이르러서는 대감(大監) [譯註 019] 김보가 (金寶嘉)를 보내 바닷길로 들어가 영공 (英公)에게 이르렀더니 신라 병사와 말은 평양 으로 와서 모이라는 처분을 받아왔습니다. 5월에 유우상(劉右相) [譯註 020] 이 와서 신라의 병사와 말을 징발하여 함께 평양 으로 갔는데 나도 또한 한성주 에 가서 군사들을 사열하였습니다. 이때 번방(蕃方)과 [譯註 021] 중국 의 여러 군대가 모두 사수(蛇水) 에 모여 있었는데, 남건 (男建) [譯註 022] 이 군사를 내어 한 번 싸움으로 결판내려고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영을 깨뜨리니 평양성 안은 강한 기세가 꺾이고 사기가 위축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영공 이 신라의 용맹한 기병 5백 명을 뽑아서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 을 깨뜨리고 큰 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라 병사는 모두 ‘정벌을 시작한 이래 이미 9년이 지나서 사람의 힘이 모두 다하였지만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여러 대를 두고 가졌던 오랜 희망이 오늘에야 이루어졌다. 반드시 우리 나라는 충성을 다한 것에 대한 은혜을 입을 것이요, 사람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영공 이 비밀리 ‘신라는 이전에 군대 동원의 약속을 어겼으니, [譯註 023] 또한 그것을 헤아려 정할 것이다.’라고 하자 신라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두려움이 더했습니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이미 당나라에 들어갔는데, [譯註 024] 당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곧 ‘지금 신라는 아무도 공이 없다.’고 하여 군장(軍將)들이 되돌아오니 백성들이 더욱 두려움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열성(卑列城) [註 008] 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譯註 025] 그런데 [당나라가]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부터 고구려 평정을 끝낼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당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 아침에 버려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더라도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총장(總章) [譯註 026] 원년에 이르러 백제가 함께 맹세했던 곳에서 국경을 옮기고 푯말을 바꿔 농토를 빼앗았으며 우리 노비를 달래고 우리 백성들을 꾀어 자기 나라 안에 감추고서 여러 번 찾아도 마침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소식을 들으니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는 것은 겉으로는 왜국 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이다.’고 하여,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서 불안해 하였습니다. 또한 백제의 여자를 데려다 신라의 한성 (漢城) 도독(都督) [譯註 027] 박도유 (朴都儒)에게 시집을 보내고 함께 모의하여 몰래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한 주(州)의 땅을 갑자기 치기로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발각되어 도유 의 목을 베어서 꾀하였던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함형(咸亨) [譯註 028] 원년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습니다.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여 먼저 웅진 에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과 우리쪽은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함께 흉악한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모름지기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므로, 바라건대 관리를 이곳에 보내 함께 계획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사마(司馬) [譯註 029] 예군(禰軍)이 이곳에 와서 함께 의논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그쪽과 우리쪽은 서로 의심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두 곳의 관인(官人)을 서로 바꾸어서 인질로 삼자’고 하였으므로, 곧 김유돈(金儒敦) [譯註 030] 과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 (首彌)와 장귀 (長貴) 등을 보내〔웅진〕부로 향하게 하여 인질 교환을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록 인질 교환을 허락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군사와 말을 모아 그 성 아래 도착하여 밤이면 와서 공격하였습니다.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 [譯註 031]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 (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泰山) 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譯註 032] 3∼4년 사이에 한 번은 주었다 한 번은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모두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자면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뒤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므로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날의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에 이러한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아뢰게 하였지만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되돌아왔으므로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역시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뒤에는 바람이 차고 파도가 세어 미처 아뢸 수 없었는데, 백제가 거짓을 꾸며 ‘신라가 배반하였다.’고 아뢰었습니다. 신라는 앞서는 [당나라] 높은 지위에 있는 신하의 뜻을 잃었고 뒤에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감에 모두 허물을 입게 되어 충성스러운 마음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중상모략이 날마다 황제의 귀에 들리니 두 마음 없는 충성심을 일찍이 한 번도 이를 수 없었습니다. 사인(使人) 임윤 (琳潤)이 영광스러운 편지를 가지고 이르러서야 총관께서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하여야 할 것이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살기에 예를 다하지 못하고 때에 미처 영접을 못하였으니 부디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총관이 보내온 편지를 펴서 읽어보니, 전적으로 신라가 이미 배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본래의 마음이 아니어서 두렵고 놀라울 뿐입니다. 스스로 공로를 헤아린다면 욕된 비방을 받을까 두렵지만 입을 다물고 꾸짖음을 받는다면 또한 불행한 운수에 빠지게 될 것이므로, 지금 억울하고 잘못된 것을 간략히 쓰고 반역한 사실이 없음을 함께 기록하였습니다. 당나라는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일의 근본과 까닭을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수 만의 무리를 보내 저희 나라를 뒤엎으려고 누선(樓船)들이 푸른 바다에 가득하고 배들이 강어귀에 줄지어 있으면서 저 웅진 을 헤아려 신라를 공격하는 것입니까? 오호라!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입더니 [譯註 033] 들에 짐승이 모두 없어지자 오히려 요리하는 이의 습격과 핍박을 받는 꼴 [譯註 034] 이며, 잔악한 적 백제는 오히려 옹치(雍齒)의 상(賞) [譯註 035] 을 받고 [註 009] 중국 을 위하여 죽은 신라는 정공 (丁公)의 죽음 [譯註 036] 을 당하고 있습니다. [註 010] 태양의 빛이 비록 빛을 비춰주지 않지만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총관께서는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타고났고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자질을 품고 있으며 일곱 가지 덕 [譯註 037] 을 두루 갖추었고 아홉 가지 학문 [譯註 038] 을 섭렵하였으니, 황제의 벌을 집행함에 죄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자의 군대를 출동시키기 전에 먼저 일의 근본과 까닭을 묻는 서신을 보내왔으니, 이에 배반하지 않았음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바라건대 총관께서는 스스로 살피고 헤아려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아뢰어 주십시오. 계림주 대도독(雞林州大都督)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신라왕 김법민(金法敏) 이 말합니다.”
註 001 재물과 관작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6판, 을유문화사, 1986 , 111쪽). 註 002 충남 부여군을 흐르는 금강(금강)을 일컫는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28쪽).註 003 백제의 부흥군이 주둔했던 성으로, 충남 서천군의 건지산성(乾芝山城) , 충남 연기군 당산성(唐山城),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 전북 부안군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등 여러 곳에 비정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에 대해서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7쪽 참조.註 004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을 말한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6판, 을유문화사, 1986 , 121쪽). 註 005 문무왕 3년(663)에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였던 두상(杜爽)을 말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29쪽).註 006 지금의 충남 공주시 연미산(鷰尾山)을 가리킨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6판, 을유문화사, 1986 , 95쪽 주6).註 007 지금의 신계 지역에 있었던 고구려의 성으로 해곡(海谷)이라고도 한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6판, 을유문화사, 1986 , 99쪽 주2).註 008 함남 안변에 있었던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6판, 을유문화사, 1986 , 115쪽). 註 009 한나라 고조(高祖)의 장군으로 처음에는 배반하였다가 돌아와 전공을 세웠는데, 고조가 여러 장수를 탄복시키기 위해 미워하였지만 후(侯)를 봉하였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6판, 을유문화사, 1986 , 117쪽). 註 010 항우(項羽)의 장군으로 일찍이 한나라 고조(高祖)를 잡았다가 풀어주고 항우가 망한 뒤에 고조를 만났지만 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6판, 을유문화사, 1986 , 117쪽). 譯註 001 당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627~649년에 해당된다. 진평왕 49년에서 진덕여왕 3년까지이다. 譯註 002 옛날에 제후들이 會盟하거나 朝聘할 때 가지고 간 예물로, ‘玉’은 圭璋에 속하는 것이고, ‘帛’은 束帛에 속하는 것으로 모두 고대의 귀중한 물건이다.譯註 003 옛날 궁전에는 중간 계단이 없고 東西 양쪽 계단만 있었는데, 祚階 즉 동쪽 계단은 天子의 位인 까닭에 새로운 임금이 처음 등극하는 것을 踐祚라 하였다(《禮記》 曲禮 下).譯註 004 肝과 腦가 흩어져 땅에 칠해진다는 것은 전쟁의 처참한 상황 혹은 장렬한 죽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충성심을 표현하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譯註 005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56~660년에 해당한다. 신라 태종무열왕 3년부터 7년까지이다. 譯註 006 본명은 열(烈)이고 정방은 자(字)이다. 생몰연도는 592~667으로, 당나라의 장군이다. 태종(太宗)과 고종(高宗) 때 동돌궐과 서돌궐을 물리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키는 공을 세웠다. 태종무열왕 7년(660) 3월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으로 당나라 군사 13만명을 이끌고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의 의자왕 과 태자 부여융(扶餘隆) 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보냈다. 다음해에 역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譯註 007 태종무열왕 의 아들이자 문무왕 의 동생인 김인태(金仁泰) 를 말한다.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각찬(角粲)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7천 명의 군사로 사비성(泗泌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문무왕 8년(6688)에는 비열도총관(比列道摠管)으로 고구려 공략에 나서, 이적(李勣) 이 고구려의 보장왕과 왕자 등을 데리고 당나라고 돌아갈 때, 김인문(金仁問) 을 수행하여 함께 당나라에 들어 갔다. 譯註 008 백제 의자왕 의 사촌동생이자 장군으로 생몰연도는 ?~663이다. 의자왕 20년(660)에 좌평으로 임존성(任存城) 에서 신라와 당나라 군사와 맞서 싸웠고,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도침(道琛) 과 함께 왕자 부여풍(扶餘豊) 을 옹립하여 대항하였다. 백제 부흥군의 내분으로 도침을 살해한 뒤 부여풍도 죽이려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譯註 009 몹시 굶주리는 상황을 형용하는 말로, 《春秋左氏傳》 宣公 15년조에 "易子而食 析骸而炊之"라 하여 사람이 차마 자기 자식은 잡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바꾸어 먹고 시체의 뼈를 장작 대신 땐다고 하였다.譯註 010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에 있는 6세기경 백제의 석성으로 계족산성(鷄足山城) 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사적 제355호로 지정되었는데, 길이는 약 1,650m이고 성 내부의 면적 5만 2896㎡이다. 대전의 진산(鎭山)인 계족산(424m)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지봉정상(420m)에 자리하고 있는데 산정상부를 따라 태뫼식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은 주로 내탁(內托)공법에 의하여 쌓였다. 譯註 011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61~663년에 해당한다. 신라 문무왕 1년에서 3년까지이다. 譯註 012 문무왕 의 외삼촌으로 생몰연도는 595~673이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 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 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 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 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 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 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 과 염종(廉宗) 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 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 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 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 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 에 제향되었다.譯註 013 《日本書紀》 권27 天智 2년 8월조에 의하면, 이때 백제를 도우러 왔던 왜의 수군은 廬原君臣 등 1만 명이었다고 한다.譯註 014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산성으로 현재 사적 제90호로 지정되었다. 봉수산성 이라고도 불리는 성은 둘레 2,450m로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는 한산(韓山)의 건지산성(乾芝山城) 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다. 譯註 015 배꼽을 깨문다는 것은 하려고 하여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후회하여도 이를 수 없다는 의미이다.譯註 016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64~665년에 해당한다. 신라 문무왕 4년에서 5년까지이다. 譯註 017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66~667년에 해당한다. 신라 문무왕 6년에서 7년까지이다. 譯註 018 당나라 장수 李勣을 말한다. 李勣은 정관 11년(637)에 英國公에 봉해졌으므로(《구당서》 권67, 열전 李勣傳) 그를 英公 혹은 英國公이라 칭하였다.譯註 019 신라의 6정(停)과 9서당(誓幢)에서 장군을 보좌하였던 무관(武官)으로, 진흥왕 10년(549)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본래 대대감(隊大監)과 함께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진골인 경우는 아찬(阿飡)에서 사지(舍知)까지, 6두품인 경우는 사중아찬(四重阿飡)에서 나마(奈麻)까지가 주로 임명되었다. 대당(大幢) ·귀당(貴幢)에는 각 5명이 두어졌으며, 9서당의 각 부대에는 4명씩이 있었다. 譯註 020 당시 遼東道按撫副大使 遼東行軍副大摠管이었던 劉仁軌를 지칭한다. 유인궤는 汴州 尉氏人으로 당나라 초기에 息州參軍으로 入仕하여 659년에 靑州刺史가 되었다가 이듬해 고구려 정벌시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으나 기일을 어김으로써 면직되었다. 후에 유인궤는 檢校帶方州刺史가 되어 웅진에 주둔하며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다. 665년에 大司憲, 666년에 右相 兼 檢校太子左中護에 임명되고 동시에 樂城縣男으로 봉해졌다. 668년에 熊津道安撫大使 兼 浿江道摠管이 되어 고구려 토벌에 참여하고, 674년에는 雞林道大摠管이 되어 신라를 침입하였다. 그 후 尙書左僕射, 監修國史, 太子太傅 등을 역임하고 685년에 죽었다. 《구당서》 권84 열전 劉仁軌傳 참조.譯註 021 契苾何力이 거느린 말갈 군사를 말한다. 《구당서》 권110 열전 契苾何力傳에 의하면, 668년의 고구려 정벌 당시 契苾何力은 말갈인 50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앞장서 공격했다고 한다.譯註 022 고구려 말기에 활동하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 의 둘째아들인 연남건(淵男建) 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맏아들인 남생(男生) 이 대막리지(大莫離支)로 실권을 장악하자 동생 남산(男産) 과 함께 지방 순시길에 오른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 을 죽이고 정국을 장악하였다. 남생이 대항하며 당나라에 투항한 뒤 당나라 군사가 남생의 세력과 연결하여 침공해 오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성문을 열고 나간 보장왕 과 남산과는 달리 끝까지 항전하였다가 패배하였다. 그 뒤 휘하의 대장인 신성(信誠) 이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군사에 사로 잡혔고, 당나라에 끌려간 뒤 금주(黔州)에 유배되었다. 譯註 023 태종무열왕 7년(660) 7월 10일에 신라 군사가 황산에서 계백(階伯) 과 싸우다가 늦은 것을 말한다. 譯註 024 문무왕 8년 9월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李勣이 당으로 돌아갈 때 함께 간 仁泰, 義服, 藪世, 天光, 興元 등이 공을 세운 장군 이른바 ‘立功軍將’들이다.譯註 025 비열성은 比列城 혹은 比烈忽과 동일 지명으로 현재의 함경남도 안변지방이다. 신라는 진흥왕 17년(556)에 이 지역에 州를 설치하여 군주를 두었다가 진흥왕 29년(568)에 比烈忽州를 폐지하고 達忽州를 설치하였다. 그 후 文武王 8년(668) 3월에 比烈忽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본문에서 고구려가 이 지역을 빼앗은 지 30년 만에 신라가 다시 되찾았다고 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이 땅을 번갈아 가며 점령했던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다.譯註 026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668~669년에 사용하였다. 문무왕 8년에서 9년에 해당한다.譯註 027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인 주(州)를 다스렸던 장관으로 군주(軍主)·총관(摠管)을 바꾸어 부른 것이다. 《삼국사기》권40, 잡지9, 직관지하 에는 문무왕 1년(661)에 총관(摠官)으로 불렀던 것을 원성왕 1년(785)에 도독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급찬(級湌)에서 이찬(伊湌)까지인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 譯註 028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670년~673년에 사용되었다. 문무왕 10년에서 12년에 해당한다.譯註 029 漢代에 大將軍營에 5部를 두고 部마다 軍司馬 1인을 두었다. 魏晉시대 이후에 사마는 장군의 아래 있으면서 1府의 일을 총괄하고 군사계획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였다. 唐代에는 도독부와 州의 속관이었는데, 관품은 從6品下에서 從4品下까지였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百濟의 司馬’는 아마 웅진도독부에 소속된 司馬였을 것이다.譯註 030 신라의 관리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김인문(金仁問) 과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김인문을 보좌하며 숙위(宿衛)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김인문과 함께 귀국하여 당나라의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 뒤 문무왕 10년(670)에는 백제의 유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신으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들어가 강화를 요청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譯註 031 신라의 장군으로 김서현(金舒玄) 의 아들이자 김유신(金庾信) 의 동생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김흠춘(金欽春) 이라고도 한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 품일(品日)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 과 싸웠는데, 이때 아들인 화랑 반굴(盤屈) 을 불러 힘써 싸우도록 격려하여 몸을 바쳐 승전을 이끌게 하였다. 문무왕 3년(663)에는 백제 부흥군이 머물렀던 여러 성을 공격하였고, 문무왕 8년(668)에는 대당(大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669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황제에게 백제의 영토와 유민을 함부로 한 사실을 사죄하고 다음해 돌아왔다. 譯註 032 《史記》 권18 高祖功臣侯者 年表에 "封爵之誓曰 使河如帶 泰山若礪"에서 나온 말로 서로의 맹세가 영원하다는 뜻이다.譯註 033 ‘指蹤’은 《發蹤指示》의 준말인데 蹤은 縱과 같은 의미이다. 즉 사냥꾼이 개를 풀어 놓아 짐승을 잡는다는 뜻으로, 전쟁을 지휘하여 싸우게 하는 일에 비유된다. 《史記》 권53 蕭相國世家에 "夫獵 追殺獸兎者狗也 而發蹤指示獸處者人也"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당나라의 지휘를 받아 개가 짐승을 쫓듯 힘껏 달려서 적국을 멸망시킨 신라의 공로를 형용한 것이다.譯註 034 ‘烹宰’는 짐승을 삶아 요리한다는 뜻으로, 천하를 통일한 후 공신들이 필요치 않을 때에는 그들을 잡아 죽인다는 비유이다. 漢 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후 韓信의 처지를 가리켜 "立功成名身死亡 野獸已盡獵狗烹"이라고 충고한 대목을 典據로 하고 있다(《史記》 권92, 淮陰侯列傳). 여기서는 공이 있는 신라가 공을 이룬 후 이롭지 못한 침해를 받는다는 뜻이다.譯註 035 雍齒는 처음 漢나라 高祖와 함께 義擧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끝내는 한 高祖의 미움을 사서 배반하고 떠났다. 그 후 다시 돌아왔는데, 한 고조가 즉위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封功行賞에서 제외될까 염려하여 모반하려고 하였다. 이에 고조는 장량의 말에 따라 가장 미워하던 雍齒를 봉하여 십방후로 삼으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옹치도 侯가 되었으니 우리는 걱정이 없다라고 하며 반란을 도모하지 않았다고 한다(《史記》 권55, 留侯世家).譯註 036 季布의 母弟인 丁公은 項羽의 장수로서 일찍이 한 고조 劉邦을 彭城의 서쪽으로 추격하여 막다른 곳까지 이르렀다. 이때 고조가 돌아보며 《어찌 이리도 곤욕을 주는가》 하자 丁公은 군사를 거두고 물러갔다. 후에 漢이 천하를 통일한 후 丁公이 고조를 찾아가자 고조를 즉시 그를 斬刑에 처하고 그의 시체를 군중에 돌리면서, "丁公은 항우의 신하로서 매우 불충하였다. 항우가 천하를 잃게 한 것은 바로 이 丁公 때문이다"라 하였다(《史記》 권100, 季布列傳). 이는 곧 생명의 은인에게 해를 입힌 것을 말한다이다.譯註 037 《春秋左氏傳》 宣公 12년조에 나오는 武人의 7가지 덕목으로 禁暴, 戢兵, 保大, 定功, 安民, 和衆, 豊財이 그것이다.譯註 038 《漢書》 권30 藝文志에 분류된 아홉 가지 학문의 분야로 儒家, 道家, 陰陽家, 法家, 名家, 墨家, 縱橫家, 雜家, 農家 등이다.주제분류정치>외교>문서>내용색인어<이름> 태종문황제, 문제, 소정방(蘇定方), 인태, 복신, 복신, 복신, 복신, 유덕민, 유총관, 유총관, 유총관, 김유신, 유인원, 유인원, 손인사, 두대부(杜大夫), 유인원, 영국공, 영공, 강심, 김보가, 영공, 남건, 영공, 영공, 박도유, 도유, 김유돈(金儒敦), 수미, 장귀, 김흠순(金欽純), 임윤, 정공, 김법민(金法敏) <지명> 평양, 웅진, 웅진, 웅진, 웅진, 함자도, 평양, 웅진, 평양, 웅진, 웅진, 웅진, 웅진, 웅진, 웅진, 평양, 웅진, 웅진, 평양, 웅진, 양하도, 평양, 평양, 호로하, 웅진, 웅진, 평양, 웅진, 백강(白江), 웅령, 취리산, 요동, 한성주, 평양, 평양, 평양, 평양, 한성주, 사수(蛇水), 평양성, 평양, 비열성(卑列城), 한성, 웅진, 황하, 태산(泰山), 웅진, 계림주 <국명> 중국, 중국, 중국, 중국, 중국, 중국, 중국, 중국, 왜(倭), 왜, 중국, 중국, 왜국, 중국, 중국Copyright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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