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관술(李觀述)은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가이며, 남조선로동당의 간부였다.
그는 경상남도 울산에서 부농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청년시절 일본에 유학,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자치 및 교내경찰출입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순근(李舜根), 김도엽(金度燁), 이순금(李順今) 등과 일본 학생을 포함하여 조일반제공동투쟁동맹(朝日反帝共同鬪爭同盟)을 조직하여 일제의 만주출병을 반대하다 붙잡혀 복역하다가 병으로 보석되었다.
그 뒤 잡지 《적기(赤旗)》를 출간하여 반제동맹의 재건을 노렸으며, 노동자 조직활동을 영등포에서 벌이기도 하였다. 1939년에 그때까지 체포되지 않고 전향하지도 않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인 김삼룡(金三龍), 이순금, 장순명(張順明), 권오직, 이현상, 김단야 등과 비밀결사 조직인 경성 코뮤니스트 그룹(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1년 1월에 체포된 이관술은 1943년 12월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당시 이관술은 폐병이 걸린 몸을 이끌고 울산으로 돌아 올 때 책이 한 수레나 되었고 구두닦기와 수선 물품이며 냄비나 솥을 때우는 공구들이 가득했다고 그의 가족들은 회상한다. 1944년 3월 병보석이 만료될 때쯤에 이관술은 밤에 다시 집을 몰래 나선다. 아직 폐병이 다 낳지 않은 상황에서 이관술은 솥땜쟁이로 전국을 유랑한다. 일경의 감시하에서 이관술은 예전처럼 자전거를 타고 솥을 떼우며 강원도와 남부지역을 떠돌았다 한다. 1945년 8월 15일에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서 이관술(李觀述)은 박헌영의 2인자로 불리며 공산당의 안살림을 총괄하는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을 맡는다. 1945년 9월 6일에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및 선전부장 대리에 선출되었으며, 또한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2월 좌익단체 총연합체인 민족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고, 1946년 7월 정판사위조지폐사건 주범으로 붙잡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7월 상순 한국전쟁 발발후 인민군이 남하하자 이관술은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에서 총살당한다.
남북 양쪽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아 이관술(李觀述)의 일생은 끝없는 도주였다고 한다. 대전으로 가고 대구로 갔다. 전라도로 가고 경기도로 갔다. 솥땜쟁이, 엿장수, 넝마주이, 풍각쟁이, 동냥아치로 변장만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런 사람들과 한몸 되어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며 노동자 조직을 만들고 트로이카 식으로 작은 동아리들을 만들어 반제반전 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이관술은 해방 직후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 지도자 5인 가운데 든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992년 이관술의 친척들은 무덤도 없는 이관술을 기리기 위한 울산땅에다 빗돌을 세웠는데, 보수성향의 우익단체들이 뽑아버렸다. 평양 근교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도 이관술 이름은 없다.
이관술(李觀述)은 남북 양쪽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내세로 들어가지 못한 상태로 남은 중음신(中陰身)이 된 것이다.
<자료참조> ‘이관술 평전’ 안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