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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방언 혐오론자들
오늘날 이해 할 수 없는 일은 방언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이상한 성경 해석을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들은 고린도 전서 14장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공통된 주장은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과 사도 행전 2장의 방언을 똑같이 외국어 방언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이 주장에 근거하여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방언을 성경에는 없는 방언으로 귀신놀음으로 취급한다.
그들은 현대 교회의 방언을 이미 부정하는 절대적인 믿음과 결론 위에서 성경을 보고 자신들의 입맞에 따라
사사로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경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자들이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고린도 전서 14장은 그들의 주장과 너무도 다르다는 점이다.
진리는 단순하고 쉽다. 하지만 억지로 진리를 뒤집기 위해 그에 반하는 주장을 하다보면 그 내용은 매우
어렵다. 그것은 방언을 혐오하는 자들의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경에 나온 쉽고 단순한 진리를 뒤집다
보니 그들의 글은 한결같이 어렵다.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헛점 투성이다. 그들이 헬라어는 수준급인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국어 실력은 정말 형편없는 자들인 것 같다.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만 든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우리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고리도전서 14장을 정말 이상하리만치 비비 꼬아서
꽈배기처럼 기록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을 이상하게 만들까? 그 대답은 너무 간단하다. 그들은 방언에 대하여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무지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지와 무경험에서 나온 이상한 고집이 사도 행전 2장이 말하는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는 방언의 차이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 그게 어떻게 같다는 말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을 제대로 읽어보라..
진리는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더 깊이 이해 되어 진다. 즉 진리란 순종과 경험 할 때 깊이 이해되고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14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이 말씀의 의미는 사도 바울이 방언에 대하여 더 깊이 더 많이 경험한자로
교회의 덕을 위해 방언의 은사와 통역으로 남들보다 더 많이 쓰임 받는 것에 대한 감사를 말한다. 또한 그것을
통해 사도 바울은 오늘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하여 교정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방언 혐오론자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방언 경험이 전무한 자들이다. 이런 무지한자들과 무자
격자들이 나서서 이미 방언을 하고 방언을 통해 신앙의 유익을 이미 경험한 자들을 대상으로 감히 교정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이들은 수많은 주의 종들을 사단의 종으로 매도하고 방언을 경험
하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특별히 기
록된 성경까지 훼손해 가면서 말이다.
이들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야고보서 3장 1절과 2절이 생각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선생은 자신의 말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작은 불씨가 큰 산불을 내는 것처럼 그들의 말 한마디가 엄청난 영향과 파급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야고보서 3장에서 말씀하신다.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또한 야고 보서 3장 13절에서 지혜 있는 자와 총명한 자는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
님께 배우고 훈련된 교사는 그 증거과 분별을 온유한 말과 행동으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
은 그다지 온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야고보서 3장 14절의 시기와 다툼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여기에서 시기는 ‘이기적인 열정’을 의미하고 다툼은 ‘이기적인 야망’을 의미한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장 16절)
즉 선생의 이기적인 욕망과 열정과 이기적인 야망에서 나오는 악한 행동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도록 교회 안의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안타까운 점은 이들의 영적 생명
을 파괴 하는 이기적인 열정과 야망을 동경하는 선생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그 입술로 수많은 형제들을 방언을 받았다는 이유로 저주하는가?
그들의 언행은 매우 이기적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의 열매가 그들의 상태를 증명한다.
물론 그들이 성경적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반드시 동경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성경과는 온전히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다.
특별히 고린도 전서 14장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나가는 뻔뻔함에는 정말 놀라울 뿐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인정받는 학자라 하여도 성경적이지 않은 그들이라면 우리가 동경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 방언인가?
그들의 주장처럼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외국어 방언과 다른 이상한 방언을 교정하고 금하기 위해서
고린도 전서 14장을 쓴 건가?
모국어 실력이 조금만 있어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분별 할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 14장 2절을 보자.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
함이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하나니 “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은 분명하게 하나님께 말하는 것으로
기도라고 말한다. 혹시나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기도가 아닌 예언이나 설교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기록한 사도
바울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는 기도로 영으로 말한다고 말한다. 즉
고전 14장의 방언은 영으로 하는 기도이다.
이 말의 의미는 방언은 영으로 하는 기도라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하는 말씀이다. 사도 행전 2장의 복음증거와
설교의 의미를 가졌던 외국어 방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고전 14장이 외국어 방언이라면 사도행전 2장
처럼 당연히 알아듣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14장 2절은 분명하게 하나님 외에는 알아 듣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4장은 사도 행전 2장이 말하는 외국어 방언과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 영으로 하는 기도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전 14장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절)……방언을 말하는 자는...(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 하기를 기도 할지니…(13절)“ 처럼 고전 14장의 방언은 예언과 통역으로 이어진는 것으로 보아 예언과
통역이 필요 없는 외국어 방언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방언 혐오론자 들은 고전 14장의 방언이 기도라는 이 명백한 기록을 부인하는 방법으로 이것을 방언을
하지 말라는 의미의 부정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14장 5절은 2절이 부
정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만약 14장 2절이 외국어 방언과는 다른 이상한 방언을 하지 말라는 의미의 부정문 이었다면 14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5절은 완전 부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14장 2절은 부정문이 될 수 없다. 계속해서 그들은 사도 바울을 글을 이상하게 쓰는 바보로 만들고
있다.
또한 이 부분의 해석에서 그들의 은사에 대한 무지는 아주 잘 드러난다.
5절의 의미는 방언을 기본으로 하여 예언이나 통역으로 발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미 사도 바울은 1절과
2절, 그리고 13절에서 방언이 예언으로 통역으로 발전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말씀은 방언의 은사
를 받은 자가 자신에게 덕을 세우는, 즉 자신을 충전하는 것에만 힘쓰지 말고 예언이나 통역의 은사로 발전하
여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나서라는 의미이다.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따라서 14장 2절을 부정문으로 보는 해석은 성경 문맥을 벗어난 것으로 전혀 타당성이 없다. 이런 방식은 이단
들이나 하는 성경 해석방법이다. 또한 이들은 방언 기도를 부정하기 위해 14장 14절 마저도 부정문으로 본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이것도 외국어 방
언과는 다른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방언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인 15절
을 보면 이들의 주장이 엉터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은 이들이 이기적인 열정과 야망을 가지고 성경을 사
사로이 푸는 자들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
라…”
(15절)
14절이 부정문이었다면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영으로 기도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기도한다고 말했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 부분에서 방언 기도 뿐 아니라 방언 찬양 까지 언급하고 있다.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송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 나는 방언만이 아니라 통역과 예언도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유익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유익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통역과 예언을 구해서 교회에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
기고 덕을 세우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내개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말했던 이
유이며 긍극적인 의미이다.
이것을 부정문으로 본다니.. 같은 성경을 어떻게 그 정도로 다르게 볼 수 있다니 이해 할 수 없다. 그들의 주장
대로라면 사도 바울은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의 직선적인 성격상 쉽게 외국어 방언 외의 다른 방언
을 금한다고 말하면 그만 아닌가?
따라서 고전 14장의 2절과 14절의 기도로 표현한 부분을 부정문의 의미로 본다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 혐오론자들이 굳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전 14.장에 근거한. 오늘날의 방언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린도
전서 14장에 기록된 방언이 하나님께 영으로 말하는 비밀 기도라는 내용을 부인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이 방언 기도를 부인 해야만 고전 14장의 방언과 사도 행전 2장의 방언을 같은 외국어 방언으로 동일시 할 수
있고 그것을 동일시 할 때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에도 없는 잘못된 부분이며 현대의 방언이고 귀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억지 주장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이 누구를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방언에 대한 무지가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전되는 방언을 부인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
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두려운 일이다. 방언이 없다면 예언도 통역도 없어진다. 또한 사도 바울은
방언에서 시작하여 예언과 방언 통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교회 안의 사랑의 섬김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방언
을 부인 한다면 사랑도 다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성경 말씀과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전혀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전 14장을 통해 방언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왜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사용을 교정하고자 했을까? 성경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아가 보자.
14장의 시작은 이기적인 신앙 형태로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방언을 하며 자기의
유익만 구하지 말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이다. 사랑을 강조한 고전 13장의 연속이다.
사랑의 섬김을 위해 예언과 통역을 구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4절)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 12-13절)
또한 이것은 교회에서의 유익을 위해 타인들을 위해 설교나 기도할 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하지 말고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 즉 예언이나 방언 통역으로 하여 타인을 배려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도 할 때와 타인에게 설교를 하거나 축복기도를 할 때에는 전혀 다른 것이다.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
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위 성경 본문은 6절과 연관해서 7절에서 11절까지 방언 기도에 대한 문제를 함께 살펴 보아야 한다.
이것은 6절에서 타인을 가르칠 때 방언을 사용하지 말라는 내용이지 7절에서 11절까지 따로 떼어내어 방언
기도를 부정하거나 혐오하는 내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사랑의 섬김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려면 방언
은사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7절-11절로 당연하고도 당연한 설명이다. 그러기에 12절과 13절에서
사랑으로 섬겨 타인에게 영향을 발 휘 할 수 있도록 더 풍성한 은혜인 즉 예언과 방언 통역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과 방언 통역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14절과 15절을 살펴보자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먼저 14절은 방언만을 하는 경우이다, 즉 방언의 경우는 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의 이성과는 다른 차원으
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성으로는 그 내용을 이해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15절
에서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아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영으로 기도하고 그 내
용을 이성으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아래의 16절과 17절, 그리고 19절에서 통역의 은사가 없어 방언
만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방언의 은사를 이용하여 가르치거나 축복기도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뿐 아니라 방언통역의 은사까지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가르치고 기도할 때 방
언의 은사와 통역의 은사를 사용 수 있어서 그는 다른 사람보다 교회에 더 많은 덕을 세 울 수 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감사하노라고 말한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통역이 가능하기에 그는 방언을 이용하여 사람들
을 가르치고 기도할 수 있기에 더 많이 방언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
고 네 감사
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
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의 은사와 방언 통역의 은사를 사용할 때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아래의 20절에서 25절까지 방언의 은사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한번 설명하고
있다.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
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
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니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 에게 책망을 들으
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21절의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
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란 의미는 구약에서는 심판의 의미로 방언이 사용되었던 것
처럼 일반인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만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구약에서 심판으로 사용되었던 방언처
럼 방언의 은사가 어리석게 잘못 사용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일반인들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활용하
려면 예언이나 통역의 은사가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다.
또한 계속해서 22절과 23절을 살펴 보자.
22.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
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개인적으로 하는 방언기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 자체로
하나님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이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교회에서 가르치고 타인을 축복하는 기도,,,
등으로 사용된다면 믿는 자들 중에도 그 내용 알지 못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도 다 미쳤다고 말하게 될 것
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이렇듯 방언의 은사가 가진 한계를 분명히 알고 통역이 없다면 그 은사는 개인적인 기도로만 사용해야 한다.
이것을 어리석게 남용하거나 오용하여 타인들에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의 차이이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8절)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불신자와 신자 모두에게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
할 수 있기에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처럼 예언은 교회내의 타
인들을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은사이다.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
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예언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방언의 은사를 받고 통역의 은사를 받은 경우에는 예배 때 개인적인 비밀 기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타인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사용된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
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6절)
26절을 보면 예배 때 개인 기도의 의미로 하는 방언을 금하는 것도 안 된다.
예배안에 찬송시와 말씀, 방언 계시 통역..등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고
권면한다.
26절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말의 긍극적인 의미는 예언과 방언 통역으로 성도들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예언과 방언 통역의 경우에 질서 있게 그리고 검증되고 분별있게 사용하라고 말씀한다.
“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 할 것이요 “(27절)
“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 ( 29절)
“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 (32절)
사도 바울은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이것이 고리도 전서의 마지막 결론이다 예언을 사모하라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은사를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사용하라…
위에서처럼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외국어 방언을 고전 14장의 방언과 동일시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출발과 목적은 방언은 폐해졌고 은사가 중단 됐다는 결론에서 시작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성경적인 근거는 아전인수요. 매우 깜짝 놀라울 정도로 비성경적이다.
그들은 지금도 고전 13장 8절에서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
도 폐하리라.........”의 말씀을 인용하여 방언은 페해졌다고 믿는다.
그 잘못된 맹신을 가지고 출발했기에 엉뚱한 결론을 취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잘 인용하는 고전 13장의 문맥을 잠시만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지
드러난다.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
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
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들의 주장대로 13장을 이용하여 오늘날 온전한 것이 올 때 방언과 예언이 폐해졌다면 13절의믿음과 소망도
사랑 앞에서 폐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고전 13장과 14장을 종합 할 때 모든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유익이 아닌 사랑으로 사용되야 함을 말하는 것이
다. 특별히 방언이 개인적으로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타인을 섬기는 사랑인, 즉 예언과
통역으로 발전 되어야 한다. 이것이 결론이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다. 내가 새로이 깨달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진리는 성령안에서 사도들이 겪었던
일이고 우리는 성경안에서 그 길을 따르려 할 뿐이다. 신약성경의 한 중심에 성령세례와 사도들의 방언이 있었
다. 우리에게 방언이 나타나던지 나타나지 않던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 그것이 존재하기에…그
것을 믿고 따를 뿐이다.
또한 오늘날에 성도들이 하는 방언은 대부분 고전 14장의 방언이다. 그것은 사도행전 2장의 외국어 방언이 아
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할 만한 그 근거가 성경 어디 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을 왜곡하고 부인
하는 옥성호나 존 맥아더 같은 고집스러운 목회자들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이제라도 성경 말씀 앞에 겸손히
무릎을 끓어야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성경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손바닥과 하늘의 차이를 느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놀아나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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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세요^^
사탄이나 귀신이 주는 방언도 있다고 봅니다. 경건하고 거룩한것처럼 가장하여 광명한 천사의 옷을 입고 위장하는 일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무질서하고 훼방하며 교만이 드러나며 덕을 잃는 사람이 방언을 한들 그게 구원과 경건의 열매가 될 수 있나요?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듯이 하는말 또하고 또하고.이게 대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