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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츨라프( 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는 복음의 첫 씨앗이 떨어진 복음의 기착지로서, 174년 전 귀츨라프 선교사(1803∼51)가 성경책과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한 곳이다. 이는 한국의 첫 순교자인 토머스 선교사의 선교사역보다 34년 앞선 일이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53년 앞선 것이다.
귀츨라프는 독일 경건주의 신학의 중심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832년 영국동인도회사의 로드 암허스트호에 의사 겸 통역관으로 동반한 귀츨라프 선교사는 25일 동안 섬에 머무르며 조선 국왕에게 통상청원서를 제출했으며 주민들에게도 전도문서와 성경책을 나눠주며 감자 재배법을 가르쳤다. 어학에 탁월한 자질이 있던 그는 짧은 체류 기간에 주민에게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직접 한글을 배워서 이듬해엔 중국 선교잡지를 통해 한글 자모를 소개했다.
1982년 4월30일 곽길보 목사에 의해 세워진 고대도교회는 2001년 제86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신 총회에서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교회로 지정됐고 2003년 10월24일 기념교회 기공예배, 2005년 4월19일 헌당예배를 드렸다.
2)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역을 하여 심양의 동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최초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과 에든버러의 신학교에서 수학을 하고 1872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연합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당시 만주라고 불리던 중국의 동북부로 파송되었다. 처음에는 영구에서 사역을 하다가 선양으로 사역지를 옮겨 1889년 동관문 교회를 설립하였다. 의화단의 난 이후에 새로 지어진 교회는 문화혁명 때에도 파괴되지 않고 지금도 개신교 교회당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로스는 한국에서 온 무역 상인들을 만나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결정하였다. 로스 목사는 한국인 서상륜, 백홍준 등과 함께 1882년부터 성경을 번역하였다. 한국어 성경은 1887년 번역이 완료되어 한국으로 들여보내졌다. 이 성경이 최초의 한국어 성경이다. 1892년 그는 한국에서 온 제임스 게일을 만났다. 1910년 스코틀랜드로 귀향한 후에도 스코틀랜드-중국 협회를 돕는 일을 계속 하였다.
3)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 9. 7~1866. 9. 2)
한국 개신교사상 최초의 순교자는 대동강 쑥섬에서 죽은 토마스 목사이다. 토마스 목사는 런던대학을 졸업하고 아내와 같이 런던 선교회 목사로 상해에 왔다. 그는 상해에서 부인과 사별하고 런던에서 상해까지 같이 배를 타고 상해에서 처음 같이 지냈던 지부에 있는 스코트랜드 장로교 선교사 윌리암슨를 찾아가 여기에 온 캐톨릭 신자인 한인 2명과 사귀어 한국어를 익혔다. 1865년 4개월 동안 약 2천 마일이나 조선연안을 예비 탐사하였다. 그는 김자평, 우문태의 안내로 9월 13일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소래 해변에 도착하였다가 옹진 해변 龍湖島 부근인 紫羅里에 도착 하였으나 파선이 되어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는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만나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1866년 병인양요시 로즈 함대를 타고 한국으로 오려다가 영국인 선원 호가스의 알선으로 제너럴셔먼호를 승선하여 대동강 까지 왔다.
장사포 부근에 태평장이 열렸는데 홍신길 등 어린 소년 3명이 토마스 목사에게 가서 과자와 성경책을 얻고 감자를 구경하고 서당 훈장 배측천에게 성격책을 자랑삼아 보여 주었다. 훈장은 소리치면서 성경책을 강물에 버리라고 호통을 쳤다. 숙개 마을에 사는 지달해는 8명의 주민을 데리고 토마스 목사에게 갔다. 토마스 목사는 신교 목사임을 밝히고 빅토리아여왕상이 그려진 은화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때 주민들은 은화의 여왕상이 마리아상이라고 착각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석호정에 정박하였을 때 <진리이지>를 김영섭에게 주었는데 김영섭은 이 책을 보고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아 아들 김종권 조카 김성집에게 전도하였다. 진리이지는 김종권이 보관하여 왔으나 1823년 홍수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제너럴 셔먼호가 불이 탈 때 토마스 목사는 퇴교 박춘권에 의하여 대동강 쑥섬에서 살해되었다. 박춘권은 나중에 전도사가 되었다.
4)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 알렌이 내한한 것은 1884년의 일이었다. 명성왕후와 인연을 맺게 된 알렌은 고종의 후원으로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으로 곧 개명)을 설립하였다.
알렌 선교사는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가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넘은 12월 어느 날, 조선에 큰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된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이 3일 천하 사건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갑신정변이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에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이 되었다. 그 후 이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5) 메리 F.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메리 스크랜톤 여사는 1886년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단 한명의 학생으로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의 문을 열었다.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1832년 12월 9일 출생하여,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였고, 외아들을 낳았다. 1872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1884년 5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감리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여성 첫 선교사가 되었다.
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과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희귀한 역사’를 이룩하며 한국에 왔다. 입국 경로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월 27일 일본에 도착, 잠시 머물었다가 1885년 6월 20일 내한했다.
1886년 5월 31일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당시 학생은 1명이었다. 김부인이라는 어느 고급관리의 작은댁으로 왕비의 통역관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입학했으나 석 달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났다. 그 후 ‘별단이’라는 학생이 입학했다. 1886년 11월에는 한옥 교사(校舍)를 완성하여 이사했다. 1887년에는 학생수가 7명이 되어, 민비는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김윤식을 통하여 “梨花”라는 교명의 편액(扁額)을 하사했다.
학생 수가 늘면서 2층의 붉은 벽돌집을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으며 스크랜톤 선교사를 대부인이라 호칭했다. 1908년 5월 31일에는 이화학당 초대 ‘메이 퀸’으로 추대되었다. 이화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기관이었으나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동제일교회 초대 여성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교육을 시작 한 것이 후일 협성신학교로 발전했다.
1903년에는 수원 삼일학교(매향학교)를 설립하므로, 수원, 공주지역의 지방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인력과 시설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여성 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여성교육에 진력했다. 그의 저서(단행본)로는 《그리스도 셩교문답》《지구 약론》등이 있다. 1909년 10월 8일 새벽 상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6)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7. 1~1916.10.12)
한국어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1859년 7월 1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는 13세 되던 때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1881년 뉴욕 대학교를 졸업했으며,같은 해부터 1884년부터 미국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883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된 그는 1년간 인도 선교를 위해서 의학공부를 하면서 실력을 쌓았으며, 1884년 7월 28일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조선사회는 개화파들이 일으킨 정변인 갑신정변으로 사회가 혼란했기 때문에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언더우드는 조선 사람이자 마가복음서 번역자인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준비하였다. 미국의 기자인 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한국, 은자의 나라』(1882년) 등 몇 권의 책만 읽었을 뿐 조선이나 한국어에 무지했던 그에게 이수정의 한국어 강의는 조선선교준비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부활주일인 1885년 4월 5일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인천에 입국한 그는 아직 조선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담당교사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한국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하였다. 그 후 성서 번역 위원회 초대 위원장·대한 기독교서회 회장·한국 기독교 교육회 회장 등으로 일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를 창설하였으며 초등학교도 설립하였다. 서울 경신 중학교도 설립하였다. 또한 교회 연합 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의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개신교 선교사로서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교회설립과 전도여행이었다. 1887년 언더우드는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대한민국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를 설립했고, 초기 개신교가 활발한 지역이었던 북한지역에서의 전도여행을 3차례나 하였다. 피어선 성경기념학원(현 평택대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성서번역에도 공헌했는데, 1887년에 상임성서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 복음서 한글판인 <마가의젼 복음셔언ㅣ>를 번역·출간하는 업적을 남겼다. 1916년 1월 무리한 공부로 몸이 쇠약해진 그는 그해 10월 12일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7)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 2. 6~1902. 6. 11)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로부터 출생하여, 미국에 있는 플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1878)했다. 두루 신학교에 진학(1882)하였으며, 1884년 12월 엘라 닫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아펜젤러는 성서를 번역하였으며(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감리교 인쇄 출판소를 확장하여 각종 선교잡지를 발행하기도 했고,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쓰는 한편 1895년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보다 앞서 인천내리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내리교회의 시작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아펜젤러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제물포 항에 도착했는데 이 때에 약 45일 동안 제물포에 체류했다. 이것이 교회의 뿌리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교회의 창립 기념일은 1885년 7월 29일로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