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산 안구정화 산행
아무래도 최대장이 가을을 타는가 보다.
산행지 선택이 어쩐지 낭만적이다. 지난 달은 명성산의 하얀 억새들판을 보여주더니 이번 달 14일 번개산행에선 보슬비 내리는 인왕과 북악의 단풍길로 안내했다. 부암동
천진포자에서 중국의 시골동네에서 만남직한 만두를 두어 점씩 먹고 청와대 뒷산을 넘어 은행나무 잎을 밟으며 북촌을 걸었다. 등산복을 입은 10명의 중년사내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은 그날
수많은 외국관광객들에게 신기한 풍경이었으리라.
11월 정기산행은 만추의 고창 선운산이다.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설레임으로 졸음을 털고 새벽 지하철을 탄다. 갈멜산악회 버스엔 우리가
반, 일반회원이 반이다. 단독으로 버스를 전세 내는 경우를
제외하면 서로가 불편을 참고 갈 수 밖에 없는 사정이지만 그 많은 길을 다녔어도 우리는 다른 산악인들에게 불평을 들은 적이 없다. 그만큼 절제와 질서가 몸에 배었다는 뜻이다.
고속도로가 막힌다. 사당에서 7시 반에 출발했는데 3시간을
달려도 겨우 서산휴게소다. 정상적이라면 벌써 고창에 닿아야 할 시간이다. 대원들의 지루한 심정을 읽은 대장이 결심한다. 까자!
주형이 제공한 족발과 규철의
장흥막걸리로 버스 뒤 켠에서 은근한 술판이 벌어졌다. 산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처음 벌어지는 일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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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참석한 인균이
인사한다. 31년간 공직생활을 해외로 다니다 보니 친구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노라고. 우리 산우회에 합류하기 위해 청계산, 관악산에서
부지런히 체력훈련을 해왔다고. 요즘 인생의 황금기는 60세에서
75세라는데 은퇴준비는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부터라고…
못 보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고 산에 같이 갈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다. 고향은 언제 다시 가도 살갑듯이 친구를 기다리는
마음 앞에 세월은 무색하다.
1시가 되어서야 버스는 선운산의 들머리에 닿았다.
선운산은 고도 336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다. 도솔산으로도 불린다. 선운(禪雲)은 구름 위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兜率)은 불교의 미륵보살이 머무르는 천상의 정토라는 뜻이라 한다.
해리면 하연리의 하련제에서
출발하여 먼저 청룡산에 오른다. 비가 온 뒤라 산길에 먼지가 없고 흙이 폭신폭신하다. 주로 바위가 많은 서울 근교산과는 달리 무릎에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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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쯤
걸었을까? 눈 앞에 거대한 바위가 버티고 서있다. 꼭대기는
뭉툭하고 허리가 잘록하다. 배맨바위다. 이름으로 상상이 가지만
배를 항구에 정박시킬 때 밧줄을 붙들어 매는 바위라는 뜻(전문용어로는 계선주; Bollard 라고 한다). 실제로 이 곳이 서해에 가깝고 예전에는
이 산 정상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라 한다. 주변 산의 계곡에서 가끔 조개 껍질이 발견되고 바위가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그 증거라고.
늦어진 일정 때문에 초조했는지 갈멜산악회의 임원들이 앞장 선다. 늘 우렁찬 목소리로
산행길을 소개하는 기획실장님은 1940년생, 올해 76세시다. 어느 산을 가더라도 마치 눈앞에 펼쳐진 길처럼 자세하게 설명하는
기억력도 그렇지만, 선두에서 산길을 오르는 노익장이 대단하다. 누가 등산계의 송해쯤 되시겠다 하는데 과연 맞는 말이다.
다시 20분쯤 걸어 낙조대에 오른다. 눈 밑에 펼쳐지는 도솔암의 풍경이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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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명당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두식댁 장어와 호열댁 문어가
칭송을 받는다. 주장군이 직접 지었다는 찰밥과 알뜰한 스테이크 반찬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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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코스는 이곳에서
개이빨산과 선운산 정상, 마이재를 거쳐 선운사 입구로 하산할 예정이었으나 시간도 아끼고 절구경도 할
겸 용문굴-도솔암-선운사 코스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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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월이 아쉬운 듯 아직도 색색의 단풍잎을 드리운 나무들이 처연하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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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 미륵부처를 만난다. 내원궁 아래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15미터의 마애 미륵불이다. 이 미륵불은 1500년 전에 선운사를 창시했던 검단선사(黔丹禪師))의 진상(眞像)이라고 한다. 불상을 조성할
때 복장으로 배꼽에 신비스러운 비결을 숨겨놓았다. 이 비결을 꺼내는 날, 조선이 망한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동학혁명의 3대 리더 중
한 사람인 손화중이 1893년 사람들을 모아 미륵불에 사다리를 설치하고 비결을 꺼내면서 동학혁명이 촉발되었다
한다.
미륵불은 미래에 출현하여 중생을 구제할 부처다. 우리 조상들은 마을마다 미륵이라는 돌부처를 세우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위로를 구해왔다. 부디 바람 잘날 없는 이 세상에 그분의 가피가 함께 하시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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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은 우리나라의 3대 지장 기도처의 하나로 통한다. 북한에 한 곳이 있고, 강원도 철원의 심원사, 그리고 선운사의 도솔암이다. 지장(地藏)이란 지장보살을
모신 곳인데 그는 석가모니 부처 열반 후 육도중생을 교화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보살이다. 대개는 명부전이라는
건물에 앉아 계신 보살이다. 입고 있는 옷가지마저 벗어주고 땅속에 몸을 감추고 있어서 지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보시와 자비의 상징이다. 또한 지장 기도처는 죽은
조상들의 영가천도를 주로 하는 도량이다. 그래서인지 일년 열두 달, 하루
이십 사시간 기도가 이어진다. 마음이 심란할 때 도솔암을 찾아서 방을 정하고 법당과 내원궁에서 기도를 올려보라. 굳센
바위의 에너지가 나를 감싸고 무아의 경지로 인도하는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소위 기도발이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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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장이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그 기도발에 이륙산악회의 산행은 무탈하리라. 그의
가정에도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같이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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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은덕은 온 세상에
두루 비추고(佛光遍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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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온 몸으로 그
은덕을 받고 있다(岡勳享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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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반 출신 임산희 화백이 그린 도솔암 나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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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에서 선운사로 가는
길. 사철 푸른 장사송이 훤칠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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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녹차밭. 차는 불교참선 중 다섯 방해물의 하나인
수마(睡魔)를 쫓아주는 중요한 음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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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소망은 끝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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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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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송악
오후 5시 선운사 주차장
도착. 4시간의 가벼운 산행이었으나 눈과 마음이 깨끗해지는 편안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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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 회장님이 마련한 명물 두부조림과 막걸리로 하산주를 마신다.
돌아오는 길도 막히긴 마찬가지였으나
WBSC 프리미어 12의 한미간 결승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8회까지 질질 끌려가다 9회 대역전승을 이룬 한일전은 아찔했지만, 8대 0으로 이긴 이 경기는 짜릿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친구들과 나눈 주형이의 수정방 술맛처럼 말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럴 것이다. 끊임없는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끈질기게 준비하다 보면 운명이 우리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내주기도 할 것이고, 우리도 역전 2루타 한방쯤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같이한 친구들: 박승열, 서경수, 김태환, 김위영, 윤영술, 고승훈+1, 김영량, 최성원, 김영환, 최금표, 박규철, 최만수, 최동석, 박민희, 김두식, 김호열+1, 정인균, 주형규, 정강훈
모두 21명)
첫댓글 와우! 멋진 산행기!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필체에
놀라고 신속함에 놀란다.
우리 산행후기 역사에서 아마 최단기에 올린듯!
방금 산에서 내려온 듯
기억이 따근따근하다.
수고하셨네!
역쉬 멋진 산행기!
함께하지 못해 무척 아쉬웠는데
대신 눈으로 다녀온 듯 하네
승훈이 수고하셨네。
깔끔하면서도 진한 향내가 나는 서정이 어울린 산행후기이네. 승훈의 깊은 불교철학에서 베어나온 지식으로 중생들이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 주고 있어 아주 좋네. 앞으로도 종종 깊이 수련한 내공과 기도에서 나온 명품을 볼 수 있길 기대하며 수고 많았네
선운사는 대학 때 불교신자로서 受戒를 받은 곳이라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곳이네. 내 법명도 선운산을 닮아 雲山이지. 그 때의 戒師가 太虛스님이었는데 지금은 큰 법당에 영정으로 모셔져 있더구만. 덕분에 후기를 쓰게 되서 영광이었네. 선운사하면 불교와 동학, 그리고 미당선생이겠지만 얘기가 삼천포로 빠질 것 같아서 참았네.
다시 선운산산행을 한것처럼 신선하고,
호롱불아래에누워 눈꺼풀 들어올리며 듣던자상하던 할머니얘기처럼,
이번 승훈의 산행후기도 따봉이다.
아니,유려하고 해박하며 말한마디없이 글로도
마음을 얻을 수 있겠도다.
.
~아쉬움 하나.~
..
산행에 동행하신
왕비님께 올리는 한조각쯤의
애정어린 글 한마디만 있었더라면.
우리 카페가 해킹 당해 모두가 난감해하던 때에 용진이가 이를 해결하고 또한 금상첨화격으로 승훈이의 멋진 산행후기가 올라오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또한 지난 번개산행의 정취까지 아울러 정리해주니 넘 좋다. 용진이 기독교에 대한 주해에 이은 불교에 대한 승훈이의 해석이 종교에 대한 우리의 상식의 지평을 넓히는구나.
좋다! 좋다! 좋다!
멋진 산행 후기네요~~^
참여는 못했지만 마치 산을 따라가서 운동을 하고 선운사에서 마음을 비우고 온느낌~~!!!
감사합니다. 승훈이의 필력이 대단합니다.
또한 동창 작가의 멋진 그림까지 함께하니 참 좋습니다.
즐거운 한주 되시길.....
산행후기를 읽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해준 산행후기! 승훈의 내면의 심오한 경륜이 보여 더욱 좋았네!
멋진사진과 관록있는 설명 GOOD!! 입니다. 용진동지 ~복원하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동창그림도 넘 좋아유^^
승훈이~법명이 운산이라 했던가.
빛난 사관의 등관을 축하하네...
뭐 처음으로 후기를 남긴 건 아지니만 말이여~
필력이 대단혀... 위영이 강훈이 이어 승훈이,
역쉬 변방에 고수들이 마닛당께~
범상치 않은 운산의 불력이 묻어나는 글을 대하니
선뜻 댓글을 달지 못 하고
몇 번 인가 되새김 하다가 늦게나마........... 몇 자라도 흔적을 남겨야 할 듯허이.
이렁저렁 사는게 뭔지 올 한 해도 저물어 가는데
후기 읽는 것도 산행의 일부요 연속임을 확인하며 함께 참석하지 못 한
아쉬움을 운산의 글로 달래보네. 감사허이..
구름 위에서 참선할 위인은 못되어도...승훈이 그 축복 내게도 해주오~ㅎㅎ
佛光遍照 龍珍享福 ...........
필력이 살아 움직이듯 간결하고 함축된 글에 운산 승훈이의 깊은 불심이 돋보인다.
선운산은 어렸을 때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번에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던 차에 승훈이 산행후기를 읽으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네. 함께 다녀온 듯 선운산의 운치를 실감나게 잘 읽었어. 깔끔하면서도 중년의 무게와 깊이가 느껴지는 후기일세. 애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