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낮 12시에 만나자"
“내일 낮 12시에 갈테니까 모두 직장으로 돌아가 일하고, 장례식장에서 만나자 장례 식장은 넓고 깨끗한 곳으로 정하되, 절대 슬퍼하지 말고 조문객들을 밝은 표정으로 잘 대접해 드리거라”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기 전날 자녀들에게 남기신 말씀이다.
장인어른은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7남매를 훌륭히 키우셨다. 마을에 나병 환자나 걸인이 들어서면 사랑방에 불러들여 식사 대접을 하고, 가는 길엔 알곡을 싸서 보내셨단다. 추수가 끝난 뒤에는 형편이 아주 어려운 집에도 알곡을 보내셨다.
그런 모습에 가족들의 원망을 듣기도 하셨다. 아내가 말하길, 용돈이 부족해 몰래 나락과 알곡을 훔친 자식들을 호되게 혼낼 때는, 왜 우리에게만 인색하고 남들에게는 호의를 베푸시는지 서운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장인어른의 참교육이 형제들을 올바른 길로 가게 한 이정표가 된 것은 아닐지. 자식들에게는 엄격하셨지만, 이웃에게 베푸는 선행으로 신망을 얻어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셨는데 마을 이장도 지내고, 무안 향교鄕校 전교교장도 되셨다. 경로당을 세우시고는 객지에는 자식들이 고향에 올 때는 반드시, 간식거리와 기부금을 들고 경로당에 둘러 어르신들에게 인사드리도록 했다. 또 라디오조차 귀하던 시절에 각 가정의 스피커를 설치하고, 유선방송 시설을 갖추어 라디오를 듣게 하고 동네 소식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먼저 돌아가신 장모님이 요양 병원에 계실 때는, 평소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데도 직접 죽이나 국을 끓여 와 떠 먹여 주시곤 했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보통 제사상에는 올리지 않는다는 팥 시루떡을 장모님이 생전에 좋아했다며 손수 주문하여 올리셨다.
장모님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마음의 병 때문인지, 육체에 찾아온 병증病症을 자식들에게 내색하지 않으시다 끝내 입원하셨는데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연락을 받고 주말에 아내와 함께 문병을 갔는데, 오늘 밤은 함께 자고 싶다며 간호사에게 보호자용 침대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이승에서의 시간을 자식과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생각하니 너무 슬프고 예전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며칠 후 임종하실 것 같다는 말에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큰 사위가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말씀드렸다. 장인어른은 창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시다가 아들,딸, 며느리, 사위들을 모두 불러 모으신 뒤, 침대 모서리에 놓인 낡은 가방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가방 안에는 빛 바랜 서류와 통장 등이 들어 있었다. 아들과 딸들에게 각각 얼마씩 재산을 나눠 주고 그 이유를 설명하셨다. 사업 형편이 어렵던 막내 처남의 어린 손주들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별도로 몫을 주셨다. 장례식 비용과 노잣돈, 노인회관과 마을회관 기부금도 정해 주셨다. 묏자리도 직원 연락처를 알려 주시면서, 연락하면 알아서 진행해 줄 것이라고 하셨다. 장례 치른 후 5년만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그 외에는 산소에서 간단하게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그 후에 나는 내일 낮 12시에 갈 테니 밝은 표정으로 조문객들을 대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이춘만 만세다.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삼창을 외치시는게 아닌가! 살아온 생애 만족하고, 자식들 모두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준비해 오신 대로 마무리를 잘하고 떠나는 것이 흡족하셨나 보다.
다음 날 아침, 장인어른은 자녀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다. 밝은 표정으로 보내 달라는 당부 때문인지 장례식 내내 가족들 모두 평온한 분위기였다 본인의 이름春滿처럼 봄기운 가득한 마음으로 살다가, 여름이 들어서는 길목에 하늘나라로 가신 장인어른, 생전에 보여주신 이웃 사랑을 기리며 노인회에서는 공적비를 세워 주셨다. 이웃에게 베푼 사랑이 다시 가정으로 되돌아와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윤택하게 해 준 것 같아, 장인어른의 큰 사랑과 도량이 새삼 감사하게 다가온다. 이 세상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만세 부를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가져옴: Reder 2024년 4월호
글쓴이:문중근
농촌 시냇가에서 물놀이하고 호롱불 밑에서 숙제하다, 도회지 중학교에 입학해 처음 본 형광등과 내원 사인 불빛에 별천지 온 것 같았던 문중근은 고교 졸업 후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일하다 꿈을 접을 수 없어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내지 못한 절망감에 술 먹고 밤늦게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삼촌 결혼 자금으로 마련했던 돈 보따리를 내놓으며 “일단 저지르고 보자” 하셔서 경제학 전공 후 은행에서 정년퇴직까지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