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유설교(81)
탕자의 비유(2).....
본문 : 눅 15:25-32 (신 122)
<밭에 있다가 돌아온 맏아들>.....
아버지를 졸라 자기 분깃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다가 허랑방탕하여
모든 재산을 다 잃고,
결국 아버지의 종이 되고자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기쁨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겼습니다.
한 마디로 새로운 삶의 출발을
준비하여 준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라......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때 밭에 나갔던
맏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눅15:25-27 읽어라>
25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절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절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돌아오다 그는 요란스런 풍류 소리가
자기 집에서 나는 것을 듣고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종이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종은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심정으로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잔치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의 동생”인 것을
강조하여 말합니다.
사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까! ...
집을 나갔던 자기 동생이 돌아왔다는데
형으로서 응당 기뻐했어야 합니다.
<분노하는 맏아들>........
그러나 맏아들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본문 28절에 맏아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8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맏아들은 노하였습니다.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자기 집에 들어가려고도
하질 않았습니다.
맏아들의 태도와 표정으로
맏아들이 화가 난 것을 눈치 챈 ...
아버지가 나와서
함께 들어갈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얼굴을 붉히며 노골적으로
동생을 환영하는 아버지를 힐난합니다.
<본문 29-30절 읽어라>
29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언뜻 듣기에 그럴싸한 반박입니다.
아주 굉장히 합당한 말을
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그 말의 이면에 담겨져 있는
맏아들의 마음(내면)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면 ...
거기에 중대한 과오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맏아들의 과오>.....
이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 동생이 집을 나간 뒤로
이 아버지는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틈만 나면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을 쳐다보며
한숨 짖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참된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심기를 이해하고 ......
집나간 자기 동생이 속히 돌아와
아버지의 고통을 덜어드렸으면 하고
바랐을 것입니다.
마침 집을 나갔던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그토록 기뻐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둘째 아들..,
탕자만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는
악한 아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만
오늘 여기에 나오는 맏아들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무지한
못된 아들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야 어떻든 ...
지금 이 맏아들이 화나고 불쾌한 것은......
집나갔다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이
너무 환대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이 아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입니다.
맏아들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다”(29)고 하면서
자기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가 의무감에 사로 잡혀서,
보상 심리로 일해 왔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 때문에
일한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맏아들로서의 자각 때문이 아니라.....,
유치한 보상 심리 때문에 일한 것이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질투심과 이기심에 사로 잡혀서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맏아들의 비난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하였을까 ?
그리고 맏아들은 이어 아버지 앞에서
자기 동생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30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은 자기 동생을
어떻게 부릅니까?
“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원문에 보면
“당신의 아들”(this son of yours)입니다.
한 번도 맏아들의 입에서
“내 동생”이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탕자를 자기 동생으로 감싸 안기보다는
한 다리 건너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맏아들의 의식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는 “‘내 아들’이기 전에
‘네 동생’으로 여겨달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세계와 맏아들의 세계는
너무 다른 의식 속에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네가 내 뜻대로 사는 것 모두 좋다.
여러 해 나를 성실히 섬겨온 것도 칭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네 동생을 사랑해다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또 이 맏아들이....
자기 동생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을 보세요...
30절a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참으로 과장되고 가시 돋친 비판입니다.
아무리 동생이 밉기로서니
이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입니까?.......
동생이 비록 허랑방탕하기는 했으나
모든 재산을 다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것은 아닙니다.
좋은 형이라면 적어도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동생도 잘해보겠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써보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이렇게 됨 것 아니겠습니까?”하고
말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몇 년 만에 보는
자기 동생을 만나보기도 전에
일언지하에...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라며
가혹한 비판을 해댑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나갔던 아들이
어떤 죄를 지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나갔다가 돌아왔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관심은
그가 돌아온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에 있습니다.
죄를 끄집어내어 비판하는데
열을 올립니다.
그런 죄를 지어놓고 무슨 염치로
돌아왔느냐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 없는 비판입니다.
비판에는 언제나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 없는 비판은 그의 잘못을 한꺼번에
매도해 버리고 과장시켜 말하게 됩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식으로 비판합니다.
성도님들 !
무엇이 좀 나쁘게 보인다고 해서
전체를 나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벧전4:8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맏아들에게
사랑이 없었기에 생긴 일입니다.
맏아들이 탕자를 자기의 동생으로 여기고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
아버지와 함께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것이고,.......
동생이 돌아왔을 때 얼싸안고
기뻐하면서 잔치 준비를
앞장서서 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맏아들은
혼자 의로운 채 하지만....
“자기 친형제” 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또 다른 탕자입니다.
가장 큰 효도는
형제간에 화목한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러면서도 맏아들은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맏아들에게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2절)
이 비유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에 사로잡혀 자기는 아버지 앞에
아주 잘못도 없다는 태도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전통과 혈통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며
외치며 다녔습니다.
이것은 ‘원죄적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교만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어디에다 잃어버리고
그 껍데기만 가지고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따르는 것처럼
위선을 떨며 교만한 삶을 사는
바리새인들을 가장 경멸하셨습니다.
보세요....
정작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
그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배(사랑)와 이웃 사랑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나
헌금조차도 ‘자기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동포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려는
구령의 열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죄악시하고 멸시하고
차별하려고만 하였습니다.
그들을 감싸 안을 사랑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마치 맏아들이 아버지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 놓고도 ........
아버지 앞에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맏아들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놓고도
‘자기의’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맏아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자기의 동생을 따뜻하게 맞아줄
사랑이 없었던 것 같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아니 자기들의 형제들인 세리와 죄인들을
감싸 안을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우리는 이 맏아들의 얼굴에서
‘먼저 믿은 성도들’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맏아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을 나갔던....,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아들들,.....
즉 우리 형제자매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
그리고 그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그들을 영접하고 잔치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들의 과거의 죄까지도
감싸 안을 수 있는 아량(사랑)이 있습니까?
혹시 우리 가운데 자신의 특권만을
주장하고 왜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영적 교만함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없습니까?
때로는 집안의 탕자가....
집밖의 탕자보다 훨씬 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화살을 퍼붓습니다.
그들의 비참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도
복음의 참 의미와 감격을 알지 못하고
대접받기만을 원하는,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면서
정죄와 냉랭한 마음으로 사는 .....
오늘 우리들의 추한 모습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혹시 성도님들이 집안의 탕자는 아닙니까?
<맏아들,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또 다른 ‘맏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로
모든 믿는 자의 맏형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형님입니다.
어떤 형님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형님입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고 말합니다.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
예수님께서 ‘맏아들’의
참된 모습(맏아들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소원>.....
이제 맏아들의 비난 앞에
아버지의 바람(소원)을 말씀합니다.
<본문 31-32 읽어라>
31절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은혜로우신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맏아들의 오만방자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
탕자를 받아들이신 아버지는 맏아들 역시
그 큰 가슴을 끌어안으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즐거움이어야 하고.....
그 집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사랑으로 한데
묶어주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주요 관심사는........
정의를 넘어선 사랑(자비)이고,
온전한 가정(하나님의 나라)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는 처음에는 다 탕자였으나
이제는 맏아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맏아들만이 누리는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죄지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는 것을 마치 ...
‘내 친동생이 돌아오는 것처럼’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참된 맏아들의 역할을 잘 감당하셔서.......
누구든지 주께로 돌아오는 자를
기쁨으로 맞이하시고 섬기실 수 있기를 ......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