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한국의 기도 도량 / 지리산 법계사
지리산 하늘 아래 첫 적멸보궁에서 부처님 지혜가 열리다
544년 연기조사 가람 창건
전란 속 수차례 피고 져도
민초들 아픔 가슴에 품어
산신할매 영험함으로 유명
▲하늘이 반쯤 눈을 떴다. 지리산의 새벽, 하늘이 잠에서 깨어났다.
영하의 푸르고 찬 기운 비켜섰다.
더 갖고 싶고 자기만 생각하며 쉬이 분노하는 검푸른 중생심도 물러갔다.
지혜는 하늘에 맞닿아있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흐르는 약 1625km의 장엄한 산줄기 백두대간.
백두산(白頭山)이 ‘지혜의 머리’이니 지리산(智異山)은 ‘세상과 다른 지혜를 얻는’ 산인 셈이다.
지리산은 백두산이 흘러내린 산이라 해서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부른다.
지리산의 본래 이름은 지리산(智利山)이란다.
혹자는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와 ‘리(利)’를 가져온 것이라고.
중생 제도를 위해 현신한 문수보살의 지혜가 깃들었단 의미일 터다.
지리산은 남한 내륙 최고봉(1915m)인 천왕봉을 머리 삼았으니 그 지혜는 하늘에 맞닿았으리라.
지리산은 어머니다. 전북 남원, 전남 구례, 경남 산청과 함양 그리고 하동에 그 산맥을 펼쳤다.
치마폭으로 감싼 형세다. 남원, 구례, 산청과 함양 그리고 하동 중생들은 어미 품에 안겨 먹고 자랐다.
지리산은 젖줄로 민초를 키워냈다.
낙동강과 섬진강 지류가 지리산에서 태어났다.
아프고 상처 입은 생명 도 어머니 품에 안겨 울고 웃으며 살아왔다.
백제의 망국민 일부, 섬진강 유로를 따라 연안에서 노략질을 삼던 왜구,
동학농민운동에 실패한 유민들….
어머니는 좌우 이념 대립이란 흉흉한 시대 속에 빨치산도 토벌대도 안았다.
임진왜란 때 동학농민혁명 때 혹은 의병항쟁 때 왜군을 피해 품에 깃든 민초도
어머니에게 몸과 마음을 의지했다. 하물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민초들이야.
세월은 1400여년을 흘러 다시 겨울 초입이었다.
지리산은 월동 준비 중이었다. 아직 볕 닿는 곳의 단풍이 찬바람에 떨고 있었다.
날은 찬데 잎사귀 다 떨쳐낸 나무가 처연했다. 몇 차례 찬바람이 할퀴고 지나갔다.
봄 맞을 준비 단단히 하라는 태고의 진리였다.
잎사귀 떨치고 씨앗 뿌려 흙에 온기가 서릴 때 새 생명 대지로 피워 올리라는 게다.
지리산 천왕봉 오르는 코스 중 중산리쪽을 택해 매표소에서 2~3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다.
자연학습원에서 천왕봉 향한 갈림길엔 표지석이 섰다.
지리산법계사(智異山法界寺). 길은 흙 조금 외에 바위와 돌덩어리뿐이었다.
울퉁불퉁했다. 간혹 앙칼지기도 했다.
법계와 속계의 갈림길인 법계사에 들기 전 모난 마음 이리저리 잘 가다듬으란 경책이다.
주지 관해 스님은 저녁예불과 산신각 철야기도로 부재(?) 중이었다.
짧은 눈인사와 합장 반배가 만남의 전부였다.
성직자 이전에 수행자여야 한다는 고집이 얼굴 주름에 예스럽게 자리했다.
▲법계사 적멸보궁은 삼층석탑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오후 6시도 안 지났건만 법계사에 어둠이 깔렸다.
어둠 속에도 곧추 허리 세운 탑이 시선을 빼앗았다. 보물 제473호 법계사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너울거리는 산줄기를 굽어봤다.
산 아래 중생들 마음속에 일렁이는 온갖 번뇌를 살피는 게다.
천년 세월 홀로 우직한 석탑을 닮으려는 듯 탑 둘러싼 돌탑들이 석탑을 감쌌다.
객 마음도 석탑 주위를 맴돈다. 탑 옆 바위에는 여기저기 한문 이름들이 새겨졌다.
복을 구하는 이의 마음이 다만 어지러울 뿐이었다.
삼층석탑은 이색적이었다. 3.6m의 거대한 자연암반을 그대로 기단으로 삼았다.
기단부는 자연암반 윗면을 삼단으로 가공해 암반을 수평으로 고르고 그 위에 몸돌을 얹었다.
자연암반을 기단석으로 이용한 예는 신라시대 이래 유행했다.
이 탑처럼 하부 기단부를 모두 생략한 예는 많지 않다고 한다.
고려 초 작품으로 추정하며 석탑 자체 높이는 2.5m다.
하루아침에 석탑이 서진 않았을 게다.
찬 비바람과 풍설 견디며 정으로 암반을 깎고 다듬었던 석공 혹은 신심 깊은 민초의 치성이리라.
법계사도 지리산처럼 민초에게 어머니 품을 대가없이 내어줬을 게다.
높이 1450m인 하늘 아래 첫 가람 법계사는 단출했다.
적멸보궁, 극락전, 산신각과 요사채, 선원이 전부였다.
불사 중인 범종각은 맨몸으로 늦가을 찬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절 종무를 보는 스님이 범종 얘기를 꺼냈다.
어느 거사 한명이 천왕봉 및 첫 산사의 범종을 단독으로 불사하고 싶어 했다.
거사는 지리산의 봉우리 이름 모두를 종에 새기고자 했다. 처음엔 주지스님도 허락했다.
사실 신도가 적은 사찰이라 불사금 모연도 어려웠었다.
그러나 주지스님은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개인만을 위한 범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되도록 많은 중생이 동참할 수 있는 복밭으로 삼고자 했다.
어머니산 지리산 골골마다 울려 퍼질 범종소리에
중생의 신심도 함께 실려 일렁이기를 원했다. 해서 만인동참 불사가 됐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연기조사가 전국을 두루 다녀 본 뒤 이곳에서 탄성을 내질렀다.
“천하의 승지(勝地)가 예 있구나.” 하여 천왕봉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가람을 세웠으니,
곧 쌍계사 말사 법계사다. 허나 민초의 신심 아름 고였던 법계사는 전란 속에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이성계에 패배한 왜군에 의해 소실된 법계사는
조선시대 태종 즉위 5년인 1405년 정심선사가 중창했다. 허나 1908년 일본군이 다시 없앴다.
1980년이 지나서야 전 주지 진욱 스님 원력으로 겨우 절다워졌다.
당시 화순 쌍봉사 주지였던 관해 스님이 물심양면 진욱 스님을 도왔고,
그 인연이 관해 스님을 법계사로 이끌었다.
▲법계사 산신각엔 특이하게도 산신할매가 모셔져 있다.
삼층석탑 아래 적멸보궁은 부처님이 없었다! 삼층석탑이 본존이었다.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하니 그럴만했다.
여느 5대 적멸보궁처럼 부처님 계실 자리에 방석만 있었다.
투명한 유리로 삼층석탑을 우러러 보도록 했다.
삼층석탑 옆 산신각은 독특했다. 하얀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산신할매가 모셔졌다.
일찍이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성모상과 작은 마애불이 있었고,
어머니산인만큼 지리산은 여성성이 강했다. 산신할매의 영험도 기이했다.
사업을 하던 한 보살이 있었다. 보살의 어머니는 100일씩 법계사 산신각에서 기도했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보살은 산신할매에 무던히도 감사를 드렸단다.
요사채 한 채 시주하겠단 약속을 스스로 했다. 그 때뿐이었다.
중생심은 보살을 유혹했고, 3년간 발길을 끊었다.
요사채는 다른 이의 시주로 완성됐고 불사가 끝나자 보살과 어머니가 법계사를 찾았다.
사연이 애절했다. 사업은 부도직전이었다.
“꿈에 주지스님이 관을 들고 가는데 제가 한 쪽을 떠받치고 가더라고요.
속으로 ‘나도 돕고 있구나’ 싶었는데, 잠시 힘들어서 놔버렸어요.
그런데도 쓰러지지 않고 잘 가더군요. 전 그냥 따라간 것 뿐이었어요.
뒤늦게야 깨달았어요. 산신할매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보살의 마음은 울고 있었다.
주지스님 허락을 구하고 하루 종일 산신각서 혼자 끊임없이 참회하며 불공을 드렸다.
꿈일까 생시일까. 산신할매는 “걱정말거라”는 말을 전했다.
회생이 어려웠던 사업이었지만 보살의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법계사를 내려가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한 달 뒤, 보살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법계사에 올랐다.
직접 산신할매 옷 1벌도 마련해왔다. 기연인지 사업 부채를 다 갚았다며 웃었다.
보살은 다시 독불공 날짜를 받아들고 법계사를 떠났다.
얘기를 듣자마자 산신할매에게 3배로 인사 올렸다.
가만히 산신각을 탑돌이 하듯 돌았다. 벽화가 놀라웠다.
일제강점기 때 불을 질러 법계사를 폐사시킨 일본인들이
삼층석탑 진신사리를 도굴하려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도망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후에도 3번이나 도굴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단다.
또 하나는 천왕봉 정상에 모셔져 있던 성모상을 깨드리기 위해 칼로 내리치는 순간
성모상에서 피가 흐르고 칼질했던 일본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장면이 있었다.
법계사가 2005년 음력 5월1일, 2006년 10월3일 일본인이
지리산과 법계사 혈맥을 짓누르려고 박은 쇠말뚝을 발견해 제거한 노력이 감사할 따름이다.
▲적멸보궁의 풍경이 새벽을 마중한다.
속계 중생심 깨부수는 풍경도 하루의 시작 앞에서 침묵이다.
어머니 품서 하룻밤을 신세졌다. 지리산의 새벽하늘엔 별들이 쏟아졌다.
곧 하늘이 반쯤 눈을 떴다. 하늘이 잠에서 깨어나자 영하의 푸르고 찬 기운이 비켜섰다.
더 갖고 싶고 자기만 생각하며 쉬이 분노하는 검푸른 중생심도 물러갔다.
적멸보궁 풍경이 새벽을 마중한다. 속계 중생심 깨부수는 풍경도 하루의 시작 앞에서 침묵이다.
하늘 아래 첫 적멸보궁 지리산 법계사에선 부처님의 지혜가 열리고 있다.
곧 얼어붙은 신심에 따뜻한 피가 돌리라.
2012. 11. 20
최호승 기자
▲법계사삼층석탑이 산 아래 중생들 마음속에 일렁이는 번뇌를 살핀다.
천년 세월 홀로 우직한 석탑을 닮으려는 듯 탑 둘러싼 돌탑들이 석탑을 감쌌다.
객 마음도 석탑 주위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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