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로 기념하는 주일까지 복음의 장인 고전15장에
다다라야 한다는 생각이 제 마음을 바쁘게 재촉하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에 있어서 나도 장차 부활한다는 소망을 가진 믿음인가와
내가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므로 아담 안에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았고 그 생명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므로 그 생명에 의해
사는 날 동안 몸의 신진대사를 반복하다 마지막 날에 형체가 변하여 지금은 땅을
딛고 살지만 영원히 땅을 딛지 않는 신령체가 되는 믿음인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오늘은 고전9장입니다. 내용은 바울이 과연 사도냐 하는 논쟁입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사도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살아계실 때에 부르심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가 인정하는 자라야 사도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해 온 사람이 어느 날 자칭 사도라고
나타났으니 과연 바울이 사도가 맞느냐 하는 반대 여론이 있었습니다.
사도가 왜 중요하냐면 전하는 말씀의 권위문제가 걸렸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으면 목사의 설교냐 전도사의 설교냐 하는 겁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증거하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자유자임을 선언합니다(고전9:1) 매우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 자유자라는 말이 상당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보고 직접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예수를 만났고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므로 그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개인의 구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고 다윗의 믿음의 전통을 따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행2장)
그런데 바울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났지만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역의 결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9:1-2)
예수님도 나의 한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사역의 열매가 나를 증거해 주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적용을 해 보면 하나님의 종은
어떤 제도가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르심을 받으면 주의 종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주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곧 내적 부르심이며 성령의 보증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복음을 증거할 때에 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파워가 일어납니다.
그 다음 9장에서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도의 사역의 정신입니다.
복음 때문에 자기의 권세를 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크게 보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은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고전9:12)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한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도의 정신입니다.
고전9:15절에도 참된 사도가 어떤 사람인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 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누구든지 사도라고 내 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전9장 마지막 부분에 사도라도 버림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6-27)
사도도 그의 사역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남에게는 전하고 자신의 진보가 없어 용도폐기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지금도 기독교의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많지만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성령에
의해 묶여 그분과 함께 달려야만 일등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상을 얻습니다.(고전9:24)
전체를 다시 정리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다메섹의 체험을 가지고
사도라고 주장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가진 자로서 고린도교회와 같은 열매가
있으며 사도라는 권한 보다 아무 대가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걸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비록 생전의 예수를 만나지 못했지만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또 삼층천에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2인3각과 같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여러 가지 직분이 있어서 주의 일을 하고 있지만 집안에 있는
맏아들과 같이 아들이면서도 종처럼 의무로 일하는 주의 사역자들이 있고 돌아온
탕자처럼 주의 부르심을 받아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된 자신의 정체감이 소중하여
종으로 일하지만 자유 하는 아들로서 사랑을 지니고 일하는 주의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