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회사를 옮기다.
1) 파견직 근로자와 스타크레프트
내가 다니던 회사의 직원들은 대기업의 설계실에서 그 대기업 직원들과 같은 일을 했지만 월급은 그들의 1/3 수준이었다. 대개 그들은 학벌이 우리들 보다 좋았지만 그들 중에도 더러 고졸이 있었고 우리 직원 중에도 석사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파견 직원일 뿐이었다. 열심히 하면 대기업 정직원이 될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흘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괜찮다. 원래 그런지 알고 취직을 했으니. 하지만 17명 우리 직원 중에서 설계실력이 상위권에 속하는 내 월급이 가장 적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우리 회사 소속의 과장 한 사람이 나머지 16명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 과장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월~금(격주 휴무 때는 목)까지 스타크래프트 하고 놀다가 주말이 되면 우리 설계 실적을 정리해서 대기업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나는 근무 시간 동안 단 1분도 잡일을 해본 적이 없었고 나를 담당한 대기업 직원들의 평가도 좋았지만 그 과장은 내가 별로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줄곧 그렇게 평가를 내렸다. 때문에 대기업에서 우리 회사에 지급하는 나에 해당하는 용역비는 다른 사람보다 많았지만 나의 월급은 오히려 적었다. 열심히 하면 인정받는다는 내 생각은 너무 단순했던 것이다. 지각을 밥 먹듯 하던 동료의 월급이 나보다 20% 많고 하루 7시간을 인터넷으로 주식투자 하던 동료는 40%가 더 많았다. 그들은 일을 마치면 항상 과장과 스타크레프트를 했다. 대기업 쪽에 몇 번 건의를 넣었지만 그들은 다른 회사 일이라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했다.
2) 오징어 장사
그 회사에 처음 입사해서 월급 50만원을 받았다. 월급이 워낙 적어 연말정산시 세금으로 냈던 돈은 대부분 돌려받았다. 40만원 적금, 6만5천 영어학원비, 3만원 기름 값, 5천 원 한 달 용돈. 앞서 밝혔듯이 나중에 주말 대형트럭 탁송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유가 조금 생겨 학원을 세 개씩 다니기도 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인생이 참 비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용돈을 보탤 겸 해서 오징어 장사를 하기도 했다.
내 고향 진해에서 군항제를 할 때면 길이 많이 막힌다. 20여년 전 내가 처음 군항제 기간에 도로에서 햄버거와 맥콜 장사를 할 때만 해도 도로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없었다. 한 번의 실패 후에 Item을 바꿔서 오징어를 팔았는데 오징어라는 것이 그냥 먹으면 맛이 없잖은가? 그래서 구워서 팔 생각을 했는데 도로 옆에 화덕을 가져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부탄가스 토치를 하나 사서 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고리와 허리띠에 걸 수 있는 걸이를 만들어 붙였다. 접을 수 있는 석쇠를 왼손에 쥐고 등에 짊어진 가방 속에서 오징어 두 마리를 꺼내 석쇠에 넣고 오른손에 낀 토치의 불을 당겨 멈춰선 차량 옆에서 오징어를 구웠다. 길은 막히는데 옆에선 오징어가 익어가는 정다운 풍경. 오징어가 익으면 손가락을 토치의 고리에 끼우고 총 돌리듯 1바퀴를 돌리고 허리띠에 찼다. 쇼맨쉽까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장했다. 채 굽기도 전에 달라고 아우성이고 뒤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와서 사가는 사람도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 이틀간 오징어 20축, 400마리를 팔았고 순익으로 17만원을 벌었다. 그렇게 내가 오징어를 판 몇 년 후. 설계 회사에 일하면서 박봉에 군항제 기간에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니 오징어 장사꾼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구워 파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3) 설계의 달인으로부터 트레이닝 받다. 그러나 불평등은 계속되다.
당시 내 설계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처음에 나와 같이 일하던 대기업 직원이 1년 후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새로 온 사람은 기능올림픽 기계제도 부문 은메달 리스트였으며 그가 트레이닝 시킨 사람이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그는 나를 혹독하게 트레이닝 시켰다. 인내심이 강한 나도 한번 대든 적이 있을 정도로 그는 정말 지독했다.
그에게 트레이닝을 받고 난 후 내 도면은 완벽했다. 그리고 난 그 대기업과 우리 직원을 통틀어 가장 빠른 작업 속도를 가졌었다. 난 다른 사람보다 최소 2배는 빨랐으며 컴퓨터가 내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에 명령어 수 십 개를 동시에 쳐 넣고 팔짱을 끼고 몇 초간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려야할 정도였다. 어떤 경우엔 컴퓨터 두 대를 한 손에 하나씩 잡고 한 적도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속도였다. 나이든 대기업 직원이 1주일을 해야 할 일도 그렇게 난 1~2일 안에 끝내곤 했다.
실력은 많이 늘었지만 난 스타크레프트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우리 회사 과장과 친하지 않았고 그는 내가 지각도 몇 번 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은 우리 회사 직원들이 대기업 내에서 재배치되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지각하면서도 (50만원인 내 월급보다) 30만원이나 더 많이 받던 동료가 은메달 리스트 밑에서 나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그는 은메달 리스트가 내어준 업무를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했다. 그 업무는 약간의 난이도가 있었지만 트레이닝이 되어 있던 내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나보다 월급이 많으면 반드시 나보다 실력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추운 12월의 어느 날, 주차장에 세워둔 내 낡은 봉고차를 누가 박아서 다 찌그러뜨려 놓았다. 난 군 수송부에서 연마했던 기술을 살려 망치로 판금을 하고 빠다(Putty)와 경화제를 사서 빠다를 먹이고 사포로 갈았다. 빠다가 마르고 나서 스프레이를 사서 페인트를 칠했다. 그게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서글펐다. 월급이 50만원이 아니고 그래서 용돈이 5천원이 아니라면, 지각대장처럼 80만원만 되었어도 내가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4) IMF 정리해고 그러나 또 이어진 불평등
그 후 2~3년이 지나고 IMF가 왔다. 대기업 쪽에서 칼을 들었다. 실적이 나쁜 우리 직원들이 잘려 나갔다. 정의의 심판이 내려진 것이다. 스타크레프트 과장과 지각대장, 주식 투자 꾼을 포함해서 놀고먹던 동료들이 해고 되었다. 17명중 8명이 살아남았고 그중엔 나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을 갑자기 너무 자르니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일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우리 중에 일을 제일 잘하는 동료 하나에게 일이 너무 쌓이자 해고 된 직원 중 하나를 다시 채용했는데 그가 바로 인터넷으로 하루 7시간씩 주식 투자하던 사람이었다. 그해, 일 잘하는 동료의 월급이 (보너스 없이) 120만원 이었고 주식 투자 동료가 140만원, 내가 100만원 이었다. 그는 다시 채용되고 나서도 주식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없었다. 난 평생 파견직, 그것도 최 말단 임금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곳의 근무시간은 7시 출근, 4시 퇴근이었다. 야간 대학을 다니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다니던 전문대를 졸업할 때까지 난 참았고 졸업과 동시에 회사를 옮겼다. 그만 두기 전 대기업 부장님이 나와 면담을 하셨다.
“회사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xxx계장이 남아있어 줬으면 좋겠네. 하지만 인생 선배로써, 형 같은 심정으로 말하자면 잘 선택했네. 빨리 이곳을 떠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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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다음편 제목 : 연봉 233%, 대기업에 스카웃되다.
월요일에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