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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서정
신용하선생의 강좌는 일본의 식민지사관의 발생배경을 단계적으로 알려줍니다. 식민주의 사관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일제의 치밀하고 야비한 조선정벌 계획의 일환으로 생겨났습니다. 식민지사관과 정한론의 관계 등 구한말과 일제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이용하려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국학원 국민강좌 21회
아래는 신용하 교수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일본에서 우리역사에 대하여 식민사관과 정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후반이다.
1854년. 미 군함이 일본 요코하마 만에 함포사격을 가하고 제 1차 화친조약을 맺었을 때 도쿠가와 정권이 굴복하고 불평등조약을 체결한다. 그 후 서양과의 무역에서 무역적자가 누적되기 시작하는데 이 정국을 타개하고 일본을 구하기 위하여 요시다쇼인이라는 젊은 사무라이가 약 2년여의 연구 끝에 고안한 것이 정한론이다. 요시다쇼인은 일본을 구하는 길은 2가지의 요체가 있다했는데 그 하나는 패번치헌, 지방분권 막부를 타도하고 천왕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거, 다음으로 조선(삼한)을 정복해서 조선에서 나는 금은 물산의 이익과 토지를 점유해서 그것으로 서양과의 무역에서 생기는 막대한 무역적자 분을 보상해야한다는 것이다.
* 요시다쇼인의 정한론
1단계-조선을 정복해서 조선의 금은 물산의 이익과 토지를 취해 일본의 적자를 보전하고,
2단계-만주와 몽고를 정복하여 거두어들이고, 이것이 끝나면
3단계-남방을 향하여 대만과 여송(필리핀)을 거두어 들여라.
일본의 본주(열도)를 중심으로 하여 조선, 만주, 몽고를 남쪽으로는 대만, 필리핀을 포괄하는 대일본 대양제국을 건설해야 미국러시아독일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한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 그래서 제 1단계로 정한을 준비해라.
. 1856년 쏘까천숙(松下村塾)이라는 개량 서당을 만들었다. 사스마국과 조슈국, 두 번에 어린 사무라이들을 뽑아다 교육을 시킨다. 여기서 일본의 근대 명치유신의 리더들이 배출된다. 이토히로부미도 이곳 졸업생이다.
. 1859년에 요시다 쇼인은 안세이대옥 사건 때 패번치헌(중앙집권)을 꿈꾼다는 것이 드러나서 나이 30살에 사형을 당한다. 그리고 쇼까천숙은 불온학교라 하여 폐쇄된다. 이때 쇼까천숙의 사람들은 피로 서약하고 혈맹을 맺어 스승 쇼인의 가르침을 반드시 실현하기로 결의 하고 전 일본 각지에 숨어 들어가 비밀조직을 만들어 활동한다.
. 1868년 1월에 하급, 중급 사무라이들이 정변을 일으킨다. 에또의 쇼군의 집을 습격하고, 신정권을 수립한 것이 이른바 일본의 명치유신이다. 이와꾸라도모미 등이 새 왕정복고에 앉힌 것이 명치천왕이다. 막부장군의 지방분권적 통치체제부터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 바뀐다.
. 1869년에 각료의 하나였고 쇼오까천숙 출신인 기또오다까요시가 일본 내각회의에 정한론을 제출해서 통과되어 일본 신정부는 ‘정한’을 국책을 채택한다.
. 1871년에 이와꾸라도모미는 서양과 같은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면 서양을 시찰. 관찰할 필요가 있어 ‘구미시찰단’을 꾸린다. 단장은 이와꾸라도모미가 맡고 기또다가요시, 이토히로부미와 같은 정한론자들도 참가해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을 시찰하고 약 2년 만에 돌아온다. 이들은 정한을 미루고 선 내치(先內治)를 먼저 해야한다는 결론을 가지고 귀국한다.
. 요시다쇼인의 정한론은 경제적 목적이 중요했고, 일본 명치내각에서 통과된 기또다까요시의 정한론은 정치적 요소(중앙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 각 지방사무라이를 한국정복에 이용한다.)가 있었고, 사이꼬다가모리는 여기다가 실직을 한 지방사무라이들을 한국에 보내서 그들의 생계를 보장하겠다는 사무라이의 계급적 성격을 보탰다. 이것이 정한론의 골자이다.
문제는 정한론은 연기가 되었다. 이와꾸라도모미나 이등방문이 정한론을 포기하지 않고 선내치 후정한(先內治後征韓)정책에 의해 정책이 미뤄진 것인데, 이 미뤄진 정한을 준비하기위해
. 1882년 3월에 일본육군 참모본부 안에 ‘조선국사편찬부’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젊은 장교를 뽑아서 한국말을 교육할 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정한에 잘 맞게 어떻게 꾸밀 것인가에 대하여 연구토론을 하고 준비를 한다. 일본 육군참모본부 안에 조선국사편찬부가 있고 그 아래 한국 국사편찬부를 둔다.
. 1885년 이등방문이 내각총리대신이 되자 제국대학(동경제대의 전신)을 설립한다.
. 1887년 제국대학에 사학과를 설치하고, 종래 일본육군참모본부 안에 있던 조선국사편찬부의 조사결과, 자료 등 모든 결과를 이관시킨다. 당시 독일 실증주의 역사학파인 랑케의 제자 폰 리스를 초청해서 서양의 최신역사연구방법을 도입한다. 리스 밑에서 일본 초기역사학자들이 배출되는데 리스의 교육이 일본 육군참모본부나 이등박문의 교육방침에 차질이 생긴다. 왜냐하면 랑케나 리스는 실증주의자이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역사날조를 반대하고 못하게 했다., 할 수 없이 일본정부는
. 1889년에 동경제국대학 안에 국사학과를 또 만든다. 그래서 이 국사학과에다 조선국사편찬관계 자료를 또 이관한다. 이때부터는 한국역사를 날조하거나 연구하는 주체 센터는 동경제국대 국사학과로 옮겨간다. 이 국사학과에서 몇 가지 연구결과물이 나왔는데,
. 1892년에 하야시(사학과 1회 졸업생)가 낸 조선사라는 5권의 책이다. 우리나라 서울대학과 옛날 대학에는 이 책이 있다. 이 조선사 5책에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설, 임나일본부설이 나온다.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설, 임나일본부설은 황당무계한 일본 내부에서의 여러 기록을 모아서 견강부회해서 만든 것인데, 이 두 가지 설이 일본정부에게 채택이 되고 교육과정에 이것을 넣었기 때문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야시 임태보는 신공황후 신라정벌설, 임나일본부설 외에도 백제의 일본에의 복속 조공설,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설, 탐라 일본 조공설, 통일신라 일본 조공설을 주장하고 학설로 정립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교육하도록 했다. 동경대 국사학과에서는 ‘국사안’이라고 하는 일본 국민을 위한 교양서적을 편찬해서 전 국민에게 교육을 시켰는데 거기에 한국관련 고대사 부문은 이 하야시 설을 그대로 옮겼다. 그래서 일본은 완전히 역사적 진실과 관계없이 정한을 실현하기 위한 정신무장의 준비로 우리나라 고대사를 날조 왜곡했다.
이 사실을 제일 먼저 포착한 분이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단재선생은 1908년부터 우리 고대사연구를 시작한다. 임나일본부설을 독사신론이라는 책(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장기간 연재하고 나중에 책으로 낸 책)에서 신랄하게 비판을 한다.
“비미호(신공황후)가 신라를 침범한 일은 우리역사기록에도 없고, 중국역사의 기록에도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일본에는 황당무계한 신화처럼 나오는데, 내용이 이러하다. '대어협주 조일급국, 큰 고기가 신공왕후의 배를 양옆에 한 번 파도를 올라갔더니 신라에 도달했고 신라왕이 놀래서 항복했다.' 이런 장난 같은 기술을 가지고 다른 어디에도 없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만들어 낸 것이니 이것은 있을 수가 없다. 만일 비미호가 신라왕의 항복을 받았다면 중국, 한국 정사기록에 얼마나 많이 나오겠는가? 그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라로부터는 선진문명을 그렇게 도입하고 스승으로 받들면서 배워가지고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와 문명을 처음으로 만든 일본이 어떻게 2세기에 신라왕의 항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은 있을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고대에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일촌호도 점거한 사실이 없다. 그런데 임태보(하야시) 등이 ‘대가야(가락국가)를 멸하고 임나일본부라는 직할 식민지를 가라지방에 설치했다고 날조하고 마치 일본이 한국을 200여년 직할 통치한 것처럼 만든 이유는 어디 있는가? 이것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함에 있어서, 처음이 아니라 그전에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적이 있었고 이번에 한국 식민지화는 옛날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일본사람에게 가르쳐서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하여 일본국민에게 정신전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신채호가 근대 식민주의 사관에 대항해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사관을 정립한 첫 번째 역사학자이다. 신채호의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동기는 두 가지가 있는데 역사학이 너무 존화주의적으로 되고 중세사학에 매몰되어 있어서 근대사학을 정립시켜야겠다 것, 또 하나는 일본이 역사를 날조하면서 정한의 도구로 역사학을 사용하여 초기 식민지사관에 대한 비판과 대안 극복을 위함이다.
. 1910년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하게 되자 일본의 역사학계는 대대적으로 일본국민에게 선전을 한다. 일본의 이번 한국의 병탄은 일본의 구영토의 회복이며 복구이니 일본국민들은 남의 나라를 침략했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고 선전한다. 그리고 그 후에 얼마나 한국역사책을 수집해 불태우고 한국의 진실을 담은 옛 역사서적을 말살하려했는지는 더 설명이 필요 없다.
. 1915년에 중국에서 백암 박은식이 한국통사(韓國痛史한, 한국의 아픈 역사)라는 책을 중국출판사에서 발간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근대사를 다루고 있지만 고대역사와 고대의 찬란한 민족역사문화를 썼을 뿐 아니라 민족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이 충만하다. 그래서 조선총독부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는데, 그 이듬해 1926년에 ‘조선 반도사 편찬위원회’라는 것을 서울에 만든다.
.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로 개칭하고 「조선사」라는 책을 37책으로 만들어 낸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규장각 도서는 한국 사람은 열람이 불가했고 일본사람만 볼 수 있었다. 1945년까지 일반인은 규장각에 접근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조선사에 관한 연구는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 37책에 다 있으니 그것을 인용하라고 했다. 이때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라는 책에 조선사편수회 사업이유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쓴 것이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 있어서의 야만반개의 민족(야만하고 반쪽 개화 된 민족)과는 달리, 고래로 사서의 존재하는 것이 많고 또한 새로 저작한 것도 많다. 이 중에서 전자 즉 옛날부터 전해오는 사서는 독립시대의 저술로서 현대와의 관계를 결려 하고 헛되이 독립국의 구몽을 추상하는 폐단이 있다. 후자 즉 한국통사 등의 새로 만든 책에는 근대조선에 있어서 일층일로의 세력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향배를 설명하고 혹은 한국통사라고 하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와 같이 일의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 함부로 망설을 지어낸다. 이들의 사적의 인심을 좀먹고 혹하게 하는 폐해는 참으로 말로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에 절면의 책을 강구하는 것은 헛되이 노력은 많고 공은 없을 뿐 아니라 그 전파를 격려 할런지도 알 수 없다. 구사의 금합에 대신하여 공명적확한 사서로 하는 것이 적격으로서 또한 효과도 훨씬 현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필요로 하는 이유의 주된 것이다.”
. 1922년부터 편찬시작해서 1932년에 37책을 완간한다. 완간을 기념해 많은 책을 내고 식민주의 사관을 총정리 하는데 요점이 이러하다.
1. 한국민족사의 기원이 주변국가에 식민지로 시작되었다고 날조 주장했다.
그들은 한국역사가 기자조선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하야시 임태보) 위만조선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소전) 한의 식민지인 한사군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단군조선은 사실에 없는 신화임을 강조하고 고대사가 북방민족의 식민지로부터 시작했음을 주장한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중국에서는 기원전 약 8세기부터 기록에 여러 차례 나오기 시작한다. 최근에 발견된 산동성 거현의 대문구문화유적에서는 고조선유물이 꽤 많이 발굴이 되는데 중국고고연구소의 측정에는 기원전 2800~기원전 2200사이 유물이라 했다. 허진웅 카나다 토론토대학 고고학교수와 미국 고고학자들이 다시 측정했더니 기원전 26세기~기원전 20세기로 확인 되었다. 고조선은 산동에 파급된 유물로만 봐도 기원전 26세~20세기 사이, 그 이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이 분명하다.
일본은 언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는가? 그들은 신무천황부터 얘기되는데 대개 기원전 2세기나 1세기경으로 끌어올린다. 반대하는 일본학자도 있다. 일본의 국가생활의 역사는 아무리 높이 잡아도 한국역사의 반밖에 안 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와 지금도 고조선이 기원전 24세기 30세기에 만들어졌다. 5000년이 됐다고 하면 학자들 중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학자가 있는데 그 뿌리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있다.
그러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에는 단재와 백암선생이 노력했는데 단군조선, 고조선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것을 썼다. “단조고사”라는 백암선생의 책에 고조선이 발생은 한반도에서 했지만 바로 요동으로 갔고 요동에서 요서로 갔고 산동반도, 북경까지 가고 연해주해서 중화문명보다 컸다. 단군조선에 대해서 민족주의 사가들은 진실을 규명하려고 꾸준한 연구를 했다.
2. 일제식민주의 사관은 한국역사의 특징을 타율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한국역사가 고대 이래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북으로는 강대한 북방민족과 중국 남으로는 일본의 영향권 하에 있었으며 외세에 의하여 한국역사가 결정된 타율성의 역사다라고 했다. 그래서 1910이후에는 한국정복을 끝난 후에는 일본의 식민주의 사관은 만주를 정복하려했다. 정한론이 실현되었으니 만주를 일본에 편입시키는 정신전력을 만들어야겠다는 사관이 만선사관이다. 만철조사부 안에, 몽고사를 포함한 만선사를 일본역사라고 날조하기 시작한다. 만선사관에 의하여 만철조사부에 소속되어 공부한 동경대출신의 역사학자들이 만주 몽고에 관한 방대한 조사를 한다. 일본은 정신전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칼로만 모든 걸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풍습 역사를 조사해서 일본에 대해 공격적이거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은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임나일본부설, 이것도 더욱 철저하게 강화되어 교육과정에 깊이 들어간다. 임나일본부는 고대 가라지방에 직할 식민지인 임나일본총독부라는 것을 설치해서 김해일대뿐 아니라 전라남도 경상남도 대부분, 경북 고령성주까지, 고구려는 남만주일대를 요동까지 그려놓고 임나일본부에 복속된 나라라고 교과서에 실려 있다.
3. 한국역사의 특징은 사대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중국은 진나라 진시왕 때부터 커지기 시작해서 수나라 당나라 때 와서 강성해졌는데,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고조선, 고구려, 부여 모두 강대하다. 사대사상은 커녕, 동북아는 그 시대에 우리의 지배권 안에 있었다. 조공을 바쳤다고 해서 독립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불평등외교관계를 했다는 것에 불과하다. 중국 한고조는 중국통일을 이룬 다음에 흉노가 자기보다 막강하자 흉노에 대하여 조공뿐 아니라 오랫동안 칭신하고 공주를 흉노왕에게 바쳤다.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일제에게 35년간 나라를 뺏겼었지만 중국은 요, 금, 원, 청나라까지 수 백 년 간 식민지통치를 받았다. 원 몽골의 식민지통치도 200년간 받았다. 우리민족은 사대주의가 없다. 사대정책은 때때로 있으나 사대주의는 없다. 사대정책도 고구려나 백제는 없는데 신라가 가끔 사대정책이 보인다. 사대정책이 보인 것은 근세조선에 와서 보인다.
4. 한국 역사에서 나타나는 문화는 독창성이 없고 모방성이 특징이다 라고 왜곡했다.
이 말은 날조 중에서 날조이다. 문화의 기본적 의식주를 보자. 의복은 조선한복은 중국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만주, 일본과도 다르다 독창적인 것이다. 음식에서 한국음식과 중국음식은 완전히 다르다. 언어 또한 전혀 독창적인 것이다. 일본의 고대왕국을 세운사람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일본어와 비슷한 것이다. 문자를 보자면 일본은 아직 옛날 신라의 이두문을 수입해 개조한 가나를 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다.
5. 한국은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과 원동력이 결여되어있고, 한국의 19세기말 20세기 초 발전단계는 일본의 10세기 후지아라시기에 해당된다고 날조한다.
우리나라는 고대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왕조 전기에 걸쳐서 일본보다 선진문명을 후진 일본에게 가르쳐줬다. 15세기 조선왕조의 문명이 꽃피니 세종대왕께 수차례 일본사신을 보내 선진문화를 보내달라고 구걸하였다. 1902년 한국의 역사가 일본의 10세기 후지와라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은 황당무계한 주장이다. 일본이 한국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 때는 도꾸까와 막부 부터이다. 임진왜란 때만 해도 네델란드 사람들한테 조총기술을 배워서 신무기로 강화됐을 뿐이다. 도자기 문명을 일본으로 이송하기 위하여 임진왜란이 있었다고 보는 일본학자도 있다.
6. 한국의 역사는 고대이래로 최근까지 당쟁, 정쟁이 지배하고 당파성이 지배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왜곡한다.
우리역사에 각종 당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전 세계 어느 나라역사도 당쟁이 없었던 나라가 없다. 당쟁이 가장 강한 나라가 일본이다. 모든 다이묘들이 자기와 친분이 있는 다이묘들과 결합한 일본역사는 2000년 역사 전체가 당쟁의 역사이다.
7.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동화라는 이름의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실시해서 한국민족을 영구히 소멸시켜 일본민족내의 천민층으로 편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보조를 맞추어 한국민족은 원래 일본민족과 조상이 동일했다고 주장하면서 단군이 소잔오존의 아우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조선민족이 일본민족의 한 지류라고 주장하기도하면서 여러 가지 일선동조론을 주장했다.
일선동조의 측면이 약간 보이는데 일본의 천왕계는 처음에는 가라, 다음에는 백제계였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가족이고 일족이다. 일본민족 전체는 기본적으로 원주민 위에 고조선붕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자기의 삶의 터전을 잡은 사람들과의 결합에 의하여 만들어진 민족이다. 그런 경우에는 일본민족이 조선족의 지족이 될 수는 있으나 조선이 일본족의 지족이라는 것은 날조다.
8. 한국인의 민족성은 사대성 당파성 모방성 등 열악한 민족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왜곡했다.
일본식민주의 사관은 민족주의 사관에 의하여 비판극복 되는 처절한 학문적 투쟁을 해왔고 지금도 역사 사회과학계의 뜻있는 학자들에 의하여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를 극복하기 위하여 학문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역사를 바로 알면 세상이 바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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