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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고조(回龍顧祖)로 등을 댄 이시백 선생 음택답사기
<<이시백 묘앞에서 바라본 명당 전경>>
발길이 닿는 곳마다 재미덩어리가 뒹구는 것이 풍수간산이다.
남녀노소(男女老少)할 것 없이 누구나 구미에 맞게 즐길 수 있는 것도 풍수이다.
을유(乙酉)년 양력 7월 10일, 연기 공주에서 실시하는 음택풍수의 재미와 함께, 요즈음 한창 매스컴에 뜨고 있는 황우석박사의 생가와 조상 묘의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답사버스에 몸을 싣는다.
그런데 왠지 장마가 주는 날씨변화에 온 신경이 곤두 쓰인다. 그것은 며칠 전부터 많은 비 소식이 '오늘' 예고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태껏 경험에 의하면 우리 연구소의 정기 답사가 있는 날은 출발할 때에 장대비가 쏟아지더라도, 현지에 도착하면 어느새 날씨가 활짝 개이곤 하여 평상시보다 시계가 탁 트이면서 먼 거리까지 조망이 가능하였는데, 그 때마다 회원들은 하늘이 우리를 도우시구나 하며, 고마운 마음을 새기곤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그 믿음이 마음 한 구석에서 은근히 피어나기도 한다.
서울에서 이미 만원(滿員)이 되어, 겨우 한 석을 남겨 논 답사버스는, 잔뜩 찌푸린 회색 빛 공기를 가르며, 약간 한산하게 느껴지는 경부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린다. 잠시 신갈 정류장에 정차하여, 요즈음 향학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우리 학회 2 기생 두 분이 더 탑승한다.
그런데, 좌석 하나가 부족하다. 어쩔 수 없이 간산 책임을 맡고있는 야정 위원이 자기자리를 양보하고는 출입문 칸막이 연결 파이프에 등을 기댄체 간다. 그동안 답사를 하다보면 이러한 사항이 가끔 발생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마음속 깊게 느끼게 되는 것은, 이제 곧 환갑을 바라볼 나이인데, 젊은 회원들에게 마냥 좌석을 양보해주고, 서서가는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때마다, 연구소에서 부여한 임무와 책임은 나이까지 잃게 하구나................^,^ 생각을 해본다.
서울에서 출발한지 1시간이 넘어서야 답사버스가 천안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우측의 만남의 장소에서 대기하던 광주, 대구, 울산, 충청지역 회원들과 반갑게 조우한다. 회원들을 탑승한 답사버스는 천안 시애쪽으로 좌회전하여 천안 외곽 길을 달리는데, 버스 뒤를 네 대의 승용차가 바짝 붙어 동행한다. 버스가 만석(滿席)이 되는 바람에, 부득히 이곳에서 합류한 회원들의 차량이 동원된 것이다. 버스는 천안에서 623번 국도를 타고 태화산 쪽을 향하다가, 대덕리에서 우회전하여 광덕면 매당리에서 영면(永眠)하고 있는 이시백선생의 묘역으로 진입한다.
이시백(李時白, 1581∼1660)선생은 조선 후기 때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이다. 연평부원군인 귀(貴)의 아들로 성혼(成渾)과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선생은 체격이 크고 기상이 활달한 성격이었다고 전한다.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거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 후 양주목사, 경주부윤 등의 지방관, 수원방어사, 총융사 등의 주요 부대 사령관을 걸쳐 형조, 공조, 병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다. 효종(孝宗) 대에 들어와 이조판서와 좌참찬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선생은 자기를 크게 내세우지 않고, 국가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공을 세웠다.
한편 1623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안현(鞍峴) 전투에 참가하여 반란군을 격파하였고, 정묘호란 때는 수원방어사로서 인조를 무사히 강화도로 대피시켰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서 농성할 때는 주화론과 척화론의 갈등에 동요되지 않고 묵묵히 산성 방위에만 책임을 다하여 인조의 신임을 받았다.
산뜻하게 꾸며진 '경모사(景慕祠)' 란 현판을 머리에 인 사당 옆을 지나 묘역으로 오른다. 벌초가 안된 풀숲을 헤쳐가며 경사 길을 오르다보니, 풀이 무성하여 형체가 불분명한 묘소들이 뒤쪽의 노거수(老巨樹)를 배경으로 조성되어 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풀 속의 잔디들은 양탄자처럼 부드럽고, 발이 푹푹 빠지는데, 마치 스펀지처럼 폭신하다. 그것은 장마철에 물을 머금은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풀섶 아래 잔디를 덮고 있는 까닭이다.
이곳 묘역은 모두 3기의 봉분이 횡(橫)으로 조성되었는데, 세 곳 중, 중앙의 제일 큰 음택이 선생의 묘소이고, 좌우 양쪽이 부인들의 묘소다. 이러한 장법은 조선시대 때 엄하게 지켜지던 우상좌하(右上左下)의 격을 깨고, '정경부인 창원 황씨' 를 맨 우측에 배려함으로써 파격적인 우대를 한 것으로 보인다. 좌측은 '증 정경부인 남원 양씨' 의 묘다.
이렇게 삼연묘(三連墓)의 형식과 비슷한 삼연릉(三連陵)을 취한 왕릉(王陵)도 있다. 그거은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의 헌종(憲宗)이 잠든 경릉(景陵)인데, 이곳과는 격이 다른 우상좌하 장법으로 조성되어 있다.
즉, 헌종<(憲宗)1849년 조성>이 맨 우측을 차지하였고, 비(妃) 효현왕후김씨<(孝顯王后金氏)1843년 조성>가 헌종의 왼쪽, 계비(繼妃) 효정왕후홍씨<(孝定王后洪氏)1904년, 광무 8년 조성>는 효현왕후 왼쪽으로 배치하였는데, 서열대로 자리 매김을 함으로 써, 서로 눈꼴사납게 지냈을 법한 비와 계비를 나란히 배치한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간다면 조선왕조에서 우상좌하(右上左下)의 계(戒)를 깬 왕릉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세조(世祖)가 비명에 간 아들 의경세자를 위해 최고의 명당 터를 잡았다는 서오릉(西五陵)의 경릉(敬陵)이 되는데, 남편의 자리인 오른쪽에 아내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자리를 차지하면서 철저한 '여성상위' 의 능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추존과 관련된 특별한 케이스이다.
이곳 묘소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마치 품자(品字)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입수도두맥이 어떤 변화없이 밋밋하다 보니 기맥선을 추측하기가 곤란할 때 사용되던 일종의 편법에 가까운 장법이기도 하다. 즉, 입수도두가 펑퍼짐하게 퍼진 혈장에서는 기맥(氣脈)도 넓게 퍼져 정확한 혈(穴)를 정하기가 곤란할 때, 여러 기의 묘를 횡으로 펼쳐 조성하기도 한다. 그렇게 조선하다 보면, 어느 한곳 정도는 기맥이 통할 수도 있다는 마치 물고기몰이식 장법이다.
간산에 참여하고 있는 2기생들과 묘역 위로 올라가 핵심이 되는 혈(穴)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는 입수룡(入首龍)과 입수일절룡(入首一節龍)을 체크한다. 도두에서 나온 도두맥이 왼쪽으로 크게 치우쳐 묘소가 조성되었는데, 그것은 형세(形勢)의 균형과 조화를 염두에 둔 형기지사(形氣地師)의 배려와 판단으로 여겨진다.
주룡은 현무봉에서 좌우(左右) 용호를 개장(開帳)하면서 천심(穿心)으로 진행한 중출룡(中出龍)이다. 내룡은 마치 펑퍼짐한 양룡(陽龍)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용맥아래로 계류(溪流)를 형성하면서 내려오는 산고곡심(山高谷深)의 음룡(陰龍)이다. 그러나 용의 모습이 어떤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평범한 직룡(直龍)으로 내지르고 있어 서자서(書自書), 산자산(山自山)의 위치에 있는 초학(初學)들은 거의 양룡(陽龍)으로 판단하기가 쉽다. 또한 입수일절룡(入首一節龍)과 입수도두(入首到頭)도 어떤 변화를 이루지 못하다 보니 혈증(穴證)을 찾는 다는 것은 상당한 고심(苦心)을 하여야 하고, 또 심룡을 마친 고수들도 점혈을 하기 위해서는 수도자적인 혜안(慧眼)이 절실할거라 느껴지는 묘소이다.
오늘따라 기감(氣感)으로 풍수의 길흉여부를 판단한다는 기(氣)관련 회원들이 많이 참여하였는데, 그 모습들이 각양각색이다. 정신을 집중한다고 눈을 감고는 명상을 하는 회원이 있는가 하면, 관룡자나 엘로드 등을 들고 묘소를 왔다갔다하며 탐기(探氣)에 열중하는 사람, 수맥추를 빙빙 돌리면서, 일반 회원들에게 한 수 가르치고 있는 고수 등, 그 표정 하나 하나가 마냥 진지하다.
풍수의 오결(五訣)인 용혈사수향(龍穴砂水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혈(龍穴)이다. 아무리 청룡, 백호 안산이 풍수의 조건을 구비하였더라도, 혈을 잉태시킨 주산(主山)이나 현무봉(玄武峰)만 못하고, 아무리 수세(水勢) 등이 좋고, 최고의 지사(地師)가 법수에 맞는 길향(吉向)으로 재혈하였다고 해도, 용진혈적(龍盡穴的)한 혈장만은 못하다.
입수룡(入首龍)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수일절(入首一節)이다. 그것은 나경 1층에 명시된 향(向)에 대한 용상팔살(龍上八殺)도 입수를 기준한 것인데, 팔살<<八殺: 감용(坎龍)의 경우, 진(辰)외에 술(戌)도 충(沖)을 범하여 구살(九殺)로도 부름>>을 범하면, 그 시간부터 재앙(災殃)이 닥쳐, 자손들이 멸망지화(滅亡之禍)를 면치 못한다는 끔찍한 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 사국용법(四局龍法)이나, 선천산법(先天山法) 최관정좌입향법(催官定坐立向法) 등 많은 이법(理法)의 응용도 입수일절을 기준한다.
그리고 입수처에서 정제된 기를 갈무리하는 입수도두(入首到頭)를 만두(巒頭), 혈두(穴頭), 도두(到頭), 화생뇌(化生腦), 승금(乘金), 또는 구(毬) 등으로 부르는데, 이렇게 많은 용어가 등장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풍수에서는 중요하고, 혈증이 되기 때문인데, 음택을 조성하면서, 여타 사항은 공력을 들여 인작(人作)이 가능하다지만 입수와 도두만은 자연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혈(眞穴)을 이룬 혈장은 이 두곳이 제일 토질이 강하고 단단하여 파기가 힘든 기(氣)의 융결처(融結處)인데, 유입된 생기(生氣)를 혈로 보내거나 정축(停蓄)하여 음택의 기운을 조절,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도두는 입수일절과 혈토(穴土)의 중간쯤에 위치한 볼록한 금성체의 미사인데, 보통 팔자미사(八字微砂), 또는 아미월사(蛾眉月砂)로 둥그렇고 볼록한 것이 정격(正格)이다. 그렇지만 비슷한 내룡의 보통 흔적을 미사(微砂)로 착각하기 쉽상이기 때무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도두는 또 수백 리, 수십 리를 진행한 용맥의 양 곁을 감싸거나 보호하면서 따라온 수기(물)를 이곳 도두에서 좌우로 분리하는데, 여기서 분수된 수기가 혈장을 감싸고 돌아 혈 앞 순전에서 다시 합수되는 것이다.
이곳 선생의 묘소를 일군 주산(主山)은 금북정맥(錦北正脈)으로 연결되는 태화산(455.5m)이다. 주 용맥은 백두대간에서 분지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북서진 하여 칠장산(492m)어름에서 한남정맥(漢南正脈)과 금북정맥을 분지한다. 여기서 한남정맥은 계속 북서진하고, 금북정맥은 방향을 크게 남쪽으로 틀고는 남서진 하다가 칠현산(516m)과 덕성산(519m)을 솟구친다. 정맥은 남쪽을 크게 감싸며 서쪽으로 행룡하다가 광덕산이 있는 남쪽어름에서 몸통을 북으로 크게 꺾어 진행하다가 이곳 묘소의 중조산인 광덕산(699.3m)에서 그 기운을 끌어 모은다. 다시 진행하다가 만경산(600.1m)을 솟구치면서 태화산을 일군다. 태화산을 출발한 용맥은 위이굴곡(위이屈曲)과 기복(起伏), 박환(剝換)과 과협(過峽)을 거듭하다가 이곳 묘역을 좌선룡(左旋龍)으로 일구고는 회룡고조(回龍顧祖)하여 나의 윗대인 할아버지를 응시한다.
땅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어떤 기운이 존재하는데, 이 기운을 옮기는 것이 용맥이다. 산줄기가 변화를 일으키며, 생동감 있게 행진하다가 기를 모아 혈(穴)을 만들고, 주위의 사격(砂格)은 바람을 갈무리하여 혈에 응집된 기운을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며, 물은 산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이곳 묘역의 안산(案山)은 길다란 금상(金箱)의 형상인데, 안산 너머로 조산(朝山)인 태봉산과 무학산이 층층을 이루며 삼중의 중첩으로 이곳 묘역을 응기한다. 또한 내용호(內龍虎)사이의 '자매저수지' 너머, 외명당(外明堂)의 '서지들' 을 적시는 외수는 안산에서 조입당전(朝入堂前)으로 나온 물이 천(川)과 모아져 이곳 묘역의 기운을 갈무리하는데, 풍수에서 조입당전은 부귀와 함께 크게 현달(顯達)한 자손을 배출하는 길수(吉水)에 해당한다. 물은 대개 묘역이 등을 댄 산자락을 따라 흐르는데, 현무봉에서 나온 물과 용호자락에서 생성된 명당수가 외명당에서 유입된 물과 몸을 섞어 내명당 앞 저수지에서 취회(聚會)한다.
봉분 위쪽으로 올라가 격룡(格龍)한다. 도두(到頭)까지 직룡한 용맥이 몸통을 좌측으로 급하게 꺾었는데, 약간 경사지에 봉분을 짓고 좌향을 정했다. 입수일절(入首一節), 건룡(乾龍)에 임좌병향(壬坐丙向)을 놓았다. 천만다행으로 팔요황천살(八曜黃泉殺)에서 한 분금 비껴나면서 지옥과 천당이 갈렸다. 묘역 앞 명당은 좌측보다는 오른쪽이 높은 지형을 이루면서 백호 견정(肩井)에서 나온 우선수(右旋水)가 묘소 앞을 과당(過堂)하여, 청룡끝머리가 되는 을진방(乙辰方), 수국(水局)을 파구처(破口處)로 삼았다.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으로는 불립육향(不立六向)의 하나인 불립태향(不立胎向)과, 다 키운, 자식이 꺾인다는 충파향상관대(충破向上冠帶)로 불격(不格)이다.
그러나 수 십 가지가 넘는 이기풍수(理氣風水)의 영역에 속한 향법(向法)이 중국에서 유입되어 대개가 도제식(徒弟式)으로 정착되면서 ×학파 ×학회가 생겨났고, 또는 목소리 큰 넘 들이 주장하면 따라가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주소다. 어떤 통계적인 검증이나 과학적인 입증이 쉽지 않은 향법 만을 길흉(吉凶)의 전부인양 공개한다는 것도, 어쩌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