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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만난 조선족의 대표 앨리트들(1) | ||||||
——— 재일조선족IT업계 선두주자--김룡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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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5 흑룡강신문 | ||||||
주식회사NSS(Network System Service )사장 김룡해(41세)라면 재일조선족사회뿐만 아니라 NTT,히다찌,도시바등50여개 대기업계렬산하의IT관련회사에서도 인정해주는 조선족 IT기업가다. 컴퓨터 및 정보통신기기의 소프트웨어 관련 개발,설계,제작,판매,수출입,임 대차등을 주업무로 취급하는NSS는 일본본사와 중국국내지사(금성과학기술유한공 사)104명 종업원의 일심협력하에 2005년 년간 매출액 10억8천만엔을 이룩한다. 일본 주식시장 상장 조건의 하나인 년간매상10억대관을 돌파하면서NSS는2008년 재일조 선족기업으로서 선참 일본주식시장 상장을 실현할 당찬 꿈까지 가지게 되는데 이런 기업이 9년전 국내에서 진 83만원의 빚을 갚기 위해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간 중국조선족청년의 맨손에 의해 일떠세워진 것이라면 기적이 아니라 할수 있겠는가? 피눈물로 얼룩진 지난날,후회는 없다 일본 IT시장을 주름잡으며 재일조선족 IT기업의 선두주자로 각광받는 오늘의 김룡해사장이 1998년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목적은 간단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간 고향 룡정에서 장사하며 진 83만원이란 거액의 채무를 힘을 팔아서라도 깨끗이 청산하고 나서 인간존엄을 세워야겠다는 일념에서였다. 룡정태생인 김룡해는 가정형편이 째지게 가난해 대학 (길 림공학원 전자공정학부 자동화전업)4년을 빚을 지면서 마치게 되며 그가 졸업하고 귀향해 룡정건설은행에 취직했을때는 이미 6만 원이란 빚이 가정의 유일한 기둥인 그의 어깨에 지워져있었다.
전공에 흥취가 깊고 사업진취심이 강한 그였지만 채석장에서 중로동을 하며 일하는 년로한 어머니를 더는 눈뜨고 볼수없다는 생각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온 가족의 생계와 빚더미를 허무는데 혼신을 던질수 밖에 없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는 한편 돈되는 일이라면 닥치는대로 했다.마침 조선보따리장사가 시작되여 몇년간을 거의 휴일마다 보따리를 질머지고 국경을 넘나들었다.
자신의 결혼잔치날을 받아 놓고도 잔치전에 빚을 다 갚고 부담없는 생활을 해보겠다는 일념에 잔치전날 조선장사길에 나서 잔치날 아침에야 귀가했다한다.그래서 밤새 집까지 찾아와 기다리던 빚군들에게 일일히 빚을 갚아주고 나니 남는건 3000원뿐이였다한다.여기에 어머님이 꼬개꼬개 모아두었던 888원을 보태 부랴부랴 아침 장마당에 나가 잔치에 쓸 물건들을 마련할 지경이였다한다.
첫날 아침 김룡해가 상년 보따리장사로 얼굴이 까맣게 그을렀다고 분을 발랐는데 분이 먹혀들지 않아 얼굴색이 검고 푸르게 말이 아니여 어머니가 아들을 붙안고 통곡을 하던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한다. 그럭저럭 몇년간 애쓴 보람에 빚도 갚고 결혼도 해 이제 편한 삶을 살아보겠거니 했지만 그에게는 더욱 험한 운명이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애꾼이던 동생이 기어코 나이트클럽을 하겠다고 돈을 구해내라고 졸라대는것이다.사고투성이던 동생이라 할일이라도 있으면 혹 바른길에 들어설수도 있다고 생각.친구들의 돈과 은행대부금까지 몇십만원을 꾸어 들이대고 1991년에 업소를 개장했다.
초기에는 그래도 장사가 잘돼나갔지만 얼마못가 몇백만의 거금을 투자한 새 나이트클럽이 바로옆에 들어 서면서 그의 업소는 불황을 맞이하게된다.더욱 억장이 무너지는 일은 이듬해 에는 불현듯 들이닥친 깡패들의 만행으로 김룡해는 눈을 펀히 뜨고 총에 맞아 당장에서 죽어가는 동생을 목격하게 되고 자신도 동생을 살려보겠다고 덤비다가 모진 구타를 당해 온몸에 성한곳 없게된다.결국 그는 또 60여만원의 아름찬 빚을 안고 재차 기나긴 고행을 시작하게 된다.
그 빚을 갚기 위해 그는 중국 전역 안다녀 본 곳이 없으며 장사도 안해본 장사가 없었지만 빚이 많기로 소문나있어 장사밑천을 푼푼히 마련할수 없는데다 운도 따라주지 않아 빚더미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1996년에는 드디여 83만원의 빚을 걸머지게 된다.
게다가 때때로 들이닥치는 빚군들의 행패에 가족이 편할날이 없는것은 물론 그의 생명이 수시로 위협 당했으며 한번은 빚군들에 의해 시골과수원에 랍치되어가 과수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이틀간 구타당해 사경을 해맨적도 있었다. 그러던차 마침 일본 주식회사ACD에서 길림성연변에와 IT직원모집이 있었는데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부인과 함께 일본행을 단행하게 된다.일본은 돈고생과 밪의 압력으로 숨도 재대로 못쉬던 그들 부부에게 노다지판이나 다름없었다.둘은 이를 악물고 돈모으는데 집착했다.
월세2만5천엔짜리 가장 싼 세집을 맡고 목구멍에 풀칠할 정도로 아껴 먹고 아껴쓰며 밤낮을가릴새없이 1년8개월 애쓴 보람으로 둘의 월급 70만엔을 거의 그대로 모아 끝내는 고향의 빚을 다 갚게 되는데 바로 그날 부부간은 오만가지 감정에 북바쳐 함께 붙안고 울고또울었다한다. 눈물없이 들을수없는 피눈물의 지난날이였지만 김룡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과거사는 마치 남의 이야기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담담했다.혈육을 위한 모지름이였으니 천만 마땅한 일일뿐이고 추호의 원망도 후회도 없다는 김룡해의 마음의 자세에서 그의 정(情)의 세계의 심후함을 읽을수 있다면 그의NSS창설 및 성공의 비결도 읽혀지지 않을가? 인정에너지와 사람중심의 기업운영 김룡해가 창업을 하게된 동기도 실은 그의 인정이 부여한 셈이다.어릴때부터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들을 좋아한 그는 사회에 나와서도 항상 자기보다 가족이나 친구들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고 어려운 사람 사정 봐주기를 좋아했다.그가 그때 그많은 빚을 낼수 있은것도 그가 의리와 신의가 있는 사나이로 널리 알려져있었기 때문이며 그가 일본행을 단행한 목적도 그러한 의리와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빚을 다 갚고난 김룡해는 형편이 펴이자 고향친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워낙 기술과 업무력이 강한데다 친화력과 리더십이 있어 회사로부터 중용 될뿐만 아니라 업무관련회사 부장들과도 친숙해졌는데 특히 NTT소속 코미 츄아회사 부장과 도시바부장과는 자별난 사이였다.
그때 그의 친구 12명이 일본에 와 있었는데 컴퓨터기술은 우수했지만 일어가 안돼 취직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가 도시바부장에게 사정해 그 12명을 한꺼번에 도시바에 취직시킨다.
이를 지켜본 NTT 소속으로 한국에 4년간 파견나가있다 돌아온 일본인 친구가 코리안들의 IT쪽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며 김룡해더러 그만한 기술력과 사회교제능력이면 절로 회사를 차려보는것도 괜찮을거라 귀띰해주기에 이른다. 결국 3개월만인 1999년10월에 그는 친구들한테서 1천만엔을 꾸어서 등록금을 마련하고 리광수( 부사장)와 동업으로 소프트 개발팀을 편성한후 그 12명친구들을 이끌고 NSS를 창설한다.IT 기업의 생명은 기술력과 공정을 따내는 업무수완에 달려있다.
IT전공에 일본에서의 수년간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에서도 일류에 가는 기술개발력을 닦아놓은 그에게 창업의 첫 난제는 일감을 따내는 일이였다.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이건 감정의 동물이며 업무는 무슨 업무든간에 모두 사람이 보는 업무이기에 사람을 사귀고 인정관계를 맺는게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소박한 신조아래 그는 회사등록날부터 관련 회사 부장들을 사귀는데 전념했다.그러나 중국과는 전연 다른 문화와 풍속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과 서툰 일본말로 교류하면서 인맥을 구축하는데는 끈질긴 밀착접근이 필요했다.
매일이다 싶이 술내고 선물사주고 많을 때는 한판 술자리에 130만엔 (인민페10만원)까지 써버리고하는 사이에 어느덧 등록금 700만엔을 날렸지만 그때까지 일감은 순순히 들어오지않았다.그사이 동업을 약속했던 친구 몇이 돈밖에 쓸줄모르는 행방이 없는 이런 사람과는 함께 할수없다는 리유로 회사를 떠나버렸고 부인마저도 애가 탄 나머지 극력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취직할것을 권유했다.
허나 김룡해는 흔들림이 없이 계속 친구사귀기에 열중했다. 초기 에는 곁을 안주지만 일단 감정이 통하고 신임관계가 형성되기만 하면 길게 합작해나가는 일본사람들의 습성을 알만큼 안 그였다.지성이면 감천.그가 등록금 1000만원을 거의 날릴무렵 끝내NTT소속 코미츄아부장으로부터 공정주문이 들어왔다.
NTT데이타(DATA)련결결산시스템개발이였는데 공정액이 5600만엔,연19명의 기술 자를 투입하여 반년만에 완벽하게 납품하여 코미츄아의 신용을 얻었으며 리윤액 1000 만엔이란 첫수확을 얻게되였다.그후로 코미츄아는 련속 공정을 맏겨 왔으며 1년동안 1억엔이상의 공정을 주기에 까지 이르며 이한 실적의 홍보효과와 그간 김룡해가 인정투자로 형성한 인맥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요코하마 도시소방시스템,미즈호은행 IC카드시스템,NEC모바일등 일본국내 굴지기업들의 IT공정하청을 육속 따내어 회사는 정상발전의 궤적에 오르게 된다. NSS의 업무 범위도 점점 확장되기 시작,현재는 IT관련 소프트의 개발,설계, 제 작,판매,수출입 그리고 임대차 외에도 IT기술교육 및 상담,컴퓨터시스템과 컴퓨 터소프트의 개발기술자 육성과 위탁송출등 여러분야에 거쳐 촉각을 내밀고 있으며 매출실적도 기하급수로 성장,3억엔,6억엔,9억엔을 거쳐 2005년에는 10억8천만엔의 기적을 이룩한다. 물론 그사이 시련도 많았었다.일본법에 익숙치 못한 원인 혹은 기술적 원인으로 수천만엔짜리 공정을 마치고 돈을 못받아 법놀음까지 했지만 끝내 해결을 못보고 직원들의 월급을 많을때는 3개월 씩이나 체불하는 위기의 시각도 수차 있었지만 번마다 직원들의 한결같은 리해와 도움하에 위기를 벗어나군했다.
지금도 김룡해는 그때 직원들의 믿음이 벼랑끝까지 간 자기를 구해주었다고 늘 말한다.
김룡해는NSS의 기업문화를 인정을 기초로한 대외적인 신의와 인맥관계형성,대내적인 종업원과의 가족적인 신임관계형성 그리고 대가를 가리지않는 고급인재유치전략등 인간존중을 기본으로 한 가치창조로 정리한다.
첨단인재에 대한 김룡해사장의 애착은 유별하다. IT기업의 최종 승부는 기술 개발에 이싸는 점을 잘 아는 그는 첨단 인재유치에 전력한다. 직원들과 함께 있는 김룡해사장(가운데). NSS의 본사 현직원은 78명,일색 김룡해가 연변지역에서 모집해온 고향사람들이다.
그는 우선 직원들의 월급을 다른 회사보다 더 높게 줌으로써 직원들의 자부감을 심어주었으며 그들에 대해 언어,기술교육과 사고방식 적응훈련을 엄하게 시킴으로써 IT 업종 특성상 규정시간내 초부하적인 근무에 적응할수있도록 함과 동시에 실제 근무중 직원들이 느끼는 압력을 해소해주기 위해 수시로 직원들의 어려움을 해아려 가족을 초청해주고 빚갚을 돈을 선대해주는 등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 스트레스가 쌓여 발작하는 직원들에게는 코피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복싱상대가 되주기도 하고 야밤중이라도 술상대가 되주기도 하는 형장의 너그러움을 배풀기도했다.이 회사 직원들은 거게가 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룡해사장의 형장의 너그러움을 느껴보 았고 또 그로인해 회사를 제집으로 생각한다. 첨단인재에 대한 김룡해의 집착은 유명하다.IT기업의 최종적인 승부는 기술창신에 달려있다는점을 잘아는 그는 첨단인재유치에 정력의 반이상을 허비한다.일본인,한국 인,중국인,중국조선족을 가리지않고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가 어디에서 무얼하든 어느 나라에 있든 어느 회사에 있든 어떤 대가를 내고서라도 무조건 데려가는 습관이 형성되여 많은 거래사들에서 김룡해를 방비한다고 한다.그가 그렇게 스카웃해간 인재 들은 모두 NSS의 요소요소에서 회사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들을 하고있다. 김룡해는 6년째 기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번것같지만 사실상 자기가 쓸돈은 몇푼 안 된다면서 결국 남은건 대외적인 인맥,나날이 커가는 기업과 기업내의 인재로 성장 하고있는 직원들뿐이라한다.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자 가장 믿음직한 재산이라는 김룡해의 독특한 경영철학이다. 고향미련에 맞춘 기업비전 그가 일본에서 남다른 경쟁력을 확보하고 쾌속신장할수있는 원인의 하나는 많은 협력업체들의 확보에도 있다.우선 김룡해가 인정-신용-인맥-협력의 공식으로 형성한 일본국내 50여개 굴지기업과의 협력관계형성은 NSS의 시장을 확보하는 기반이며 그가 연변에서NSS직원으로 모집해간 직원중 분가해 나가 자수성가한 5개기업과 그가 2급하청으로 돌봐주고있는 산하 16개 중국출신의 영세IT업체들은 기술과 업무협력의 큰 자원이 되여주고있다. NSS는 또 2008년 주식상장을 위해 준비중이며 현재 이미 설립운영중인 본사와 중국국내지사외에도 설립준비중인 회사가 2개이며 그의 회사에서 분가해나간 회사들과도 상장시 주식합작을 약속하고있다. 중국국내지사(금성과학기술유한공사)는 일본과 중국의 IT공정단가차이에서 생기는 엄청난 리익과 향후 거대한 중국IT시장을 겨냥해 2003년 인민페160만원을 투자해 설립한 대중국창구기업으로 이미 중국내 공정을 따내기 시작하고있으며 좋은 발단을 보여주고있다. 그러나 사실 김룡해가 가장 마음이 쏠리는 곳은 연변, 중국국내지사설립에 앞서 연변 지역투자를 계획하고 추진했지만 어쩐지 여의치 않았다한다.
해마다 매상고의 대부분이 회사 연변적 직윈들의 월급형태로 연변으로 들어간다면서 김룡해사장은 가끔 고향에 대한 기여를 자랑스럽게 역설하기도 하면서 언젠가는 고향인 연변과의 합작을 꼭 이뤄낼것이라고 결심을 표한다.
사실상 그는 이미 연길시에 몇백만원의 부동산투자를 해놓고 있기도 하듯이 그의 고향미련은 깊숙하다.피눈물 겪은 연변이건만 고향에대한 애착심만은 여전한 김룡해였다. /한광천 기자 |
첫댓글 자랑스럽습니다. 이 글을 읽는동안 내 몸이 후드득 떨고 있었습니다. 우리 연변사람 모두가 다 잘 살기를 바랍니다. 김룡해 사장님 부디 몸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