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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전례]
1. 주교가 제대를 향하여 나아감
이 모든 전례복을 입은 주교는 좌우에 사제와 레위, 이 두 명과 함께 봉인된 복음서를 들고 있는 차부제를 앞세우고 봉인이 풀려진 복음서에 입맞추는 제대에 이를 때까지 나아간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성사들로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실 주교(Episcopus)는 대사제를 나타낸다. 이와 관련하여“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사제로 일하시는 성전은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등등” (히브 9, 11이하)라고 사도는 말한다.
2. 주교를 수행하는 사제와 부제
사제와 레위는 율법서와 예언서를 뜻한다. 주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대로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상처입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고 레위 사람도 똑같은 방법으로 거기까지 왔다가 그를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기(루가 10, 31-32) 때문이다.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변모를 했던 높은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율법서와 예언서의 형태로 나타났고 그들은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마태 17, 1-8). 그러므로 율법서과 예언서는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약속하였으므로 사제와 레위는 주교를 동반한다. 사실 모세는 율법서에서“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 주실 것이다”(신명 18,15)라고 말한다. 이사야는“자 예루살렘을 새롭게 할 위대한 예언자가 오리라”(이사 66, ...)라고 말하고 있다.
3. 봉인된 복음서를 들고서 앞서가는 차부제
앞서 입장하는 차부제는 완전한 백성(루가 7)을 주님께 준비하기 위하여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갖춘 그리스도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을 뜻한다. 그리스도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3,2)고 복음 설교를 시작했으므로, 차부제는 주교보다 앞서 봉인된 복음서를 들고 간다. 복음서는 주교가 제대에 도착하기까지 봉인된 상태이고 제대에 주교가 도착하면 복음서의 봉인을 열어놓는다. 이것은“안팎에 글이 기록돼 있고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그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 분이 이 일곱 봉인을 떼시고 두루마기를 펴실 수 있습니다.”(묵시 5,1-5)라고 묵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언급한다. 출애굽기에서 야훼께서“만일 돌로 나의 제단을 쌓을 경우에는 다듬지 않는 돌로 쌓아라.”(출애 20, 25)라고 말씀하신 대로, 제대는 교회를 뜻한다. 제대의 돌에 정을 대지 않도록 금지하는 것은 교회가 오류와 분열로 신자들의 갈라짐을 배척한다.
4. 제대에 이른 주교
제대에 주교가 도착할 때 복음서는 봉인이 열려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의 초대교회를 모았을 때 설교와 가르침으로“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 주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루가 8, 10)라고 성서의 신비를 드러내셨다. 부활 후에는“그들이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셨다”(루가 24, 45). 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성서의 신비를 드러내셨다 하더라도, 주교는 혼자 복음서의 봉인을 열기 때문에 보다 올바르게 행동한다.
주교가 복음서에 하는 입맞춤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설교하였음을 뜻한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27).
5. 제의실에서 제대를 향하는 주교의 행렬
고정참례 대축일을 거행할 때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마태 16,28)을 나타내기 위해 로마 주교는 먼저 언급했던 여섯 등급의 성직자들과 함께 제의실에서 제대를 향하여 행렬을 한다. 사실 행렬순서는 마태오 복음사가에 의해 진술된 그리스도 탄생의 순서를 나타낸다(마태 1). 그들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기원을 보여주는 여섯 사람들의 순서, 즉 성조들, 선지자들, 왕, 임금들, 목동들과 가장들을 다룬다. 아브라함은 성조, 다윗은 선지자, 솔로몬은 왕, 솔로몬은 임금, 유다는 목동, 즈루빠벨은 가장이다.
6. 주교를 앞서가며 인도하는 두 부제
주교를 안내하는 두 부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을 약속했었던 아브라함과 다윗을 의미한다. 사실 아브라함에게는“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8)라고, 다윗에게는 “네 몸에서 난 후손을 너에게 준 왕좌에 앉히리라.”(시편 132, 11)고 약속을 하였다. 그러므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의 족보에서“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라고 말하면서 이 둘을 특별히 앞세우고 있다. 이 둘은 그 길이가 열두 척으로 둘러쌓인“솔로몬 왕이 성전 본관 앞에 세운”(역대 하 3, 17) 두 기둥을 뜻한다. 이 열두 척의 길이는 예수께서 열 두 사도를 중심으로 추종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열 두 사도의 믿음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심을(요한 10, 1, 7) 뜻한다.
7. 연결된 네 개의 막대기로 주교 위로 들고 다니는 휘장막
네 명의 봉사자들은 네 개의 막대기로 연결된 휘장막을 주교 위로 들고 다닌다. 이 봉사자들을 천막꾼들(mappularii)이라고도 부른다. 다양한 표상들로 꾸며진 휘장막은 많은 신비를 드러내는 성서를 뜻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네 가지 방식, 즉 역사, 비유, 은유와 신비적 해석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이 휘장막은 주교 위로 연결된 네 개의 막대기로 펼쳐 들고 다닌다. 이 네 가지 방식은“네 줄기로 갈라져 흐르는 에덴에 있는 강”(창세 2, 10-14)이다. 이 휘장막은“네 귀퉁이의 상다리가 있는 젯상이다”(출애 25, 23-30). 주교 위로 휘장막을 펼쳐 들고 다니는 또 다른 이유는 율법서와 예언서가 미리 기록으로 남겼던 그분이 지금 도착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루가 24,27). 성서 다른 본문에서는“만일 너희가 모세를 믿는다면 나를 믿을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바로 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5,46)라고 말씀하신다.
8. 촛불과 향료
향이든 향료와 두 개의 촛불이 앞서 나간다.“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가 24,44)고 그리스도께서 기다리면서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미리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장엄한 대축일들에는 주교 앞에 일곱 개의 초를 들고 나아간다. 그것은 “돌아서서 보았더니 황금등경이 일곱 개 있었고 그 일곱 등경 한 가운데에 사람같이 생긴 분이 서 계셨습니다”(묵시 1,12)라고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말한 것을 나타내고,“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이사 1, 1-2)는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일곱 형태의 은총의 영이 내리워질 그 분이 오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9. 성가대석에서 주교가 한 줌의 삼 부스러기로 피우는 불
어떤 바실리카에서는 합창단 중간 부분에 위치한 작은 기둥위에 한줌의 삼 부스러기를 놓아 주교가 불을 피우도록 한다. 그것은 교우들 앞에서 즉시 불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고 불로써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의 재림을 기억한다. 사실 그분은“조용조용 오시지 않고 삼키는 불길을 앞세우고 돌개바람 거느리고 오신다”(시편 50,3).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잘못으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 아픔을 달래던 그분은 두 번째에는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처음에 그분은 심판을 받으러 오셨으므로 두 번째는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혹은 사도 야고보에 따라 우리 인생은“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야고 4,14)이기 때문에, 주교는 삼부스러기로 불을 피운다. 이것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일시적인 영광으로 기쁨을 누리지 않기 때문이다.“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이사 40, 6이하; 베드 전 1, 24).
10. 주교의 우측 어깨에 입맞추는 성가대장
주교가 제대에 가까이 왔을 때 성가대장은 다가와 곁에 서있는 이들 앞에서 주교의 우측 어깨에 입맞춘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태어나실 때 하느님을 찬미하는 천상 군대의 무리들의 역할을 하는 천사는 목동에게 그의 탄생을 알렸기 때문이다.“그 때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가 2,13). 이것과 관련하여 예언자는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이사 5,3)라고 말한다.
11. 제대 앞에서 존경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주교의 입술과 가슴에 입맞추는 세 명의 사제
제대 앞에 도착하는 주교를 존경스럽게 맞이하는 세 명의 사제는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 주교의 입과 가슴에 입맞춘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에 계십니까?”(마태 2,2). “그들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리고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약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라고 말하는 세 명의 동방박사를 나타낸다. 두 번의 가벼운 입맞춤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을 나타낸다. 동방박사들이 봉헌예물로 신비롭게 상징적으로 묘사하던 신성은 가슴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입맞춤은 존경의 표지이다. 에스델은 금지팡이의 끝에 가볍게 입맞추었다(에스델 5, 2).
12. 행렬 순서
이 행렬은“진을 친 군대처럼”이동한다 (아가 6,5 또는///.. 시편 27, 3).
사실 파수꾼처럼 연장자들과 힘센 자들이 맨 앞에 나가고 맨 뒤를 따른다. 무기력한 이들인 어린이들은 중간으로 모은다. 그래서 주교들과 사제들이 맨 앞에 행렬하고 로마주교와 부제들는 맨 뒤에 따르며 그리고 차부제들과 시종들은 가운데로 모은다. 마귀들과 대항하여 싸우도록 군대를 불러 격려하기 위하여 합창단은 나팔수처럼 군대보다 앞서 나간다.
싸움과 관련하여“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에페 6,12)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초하룻날이다. 나팔을 불어라. 대보름날이다. 나팔을 불어라.”(시편 81,3)라고 시편저자는 말하고 있다. 왕의 깃발처럼 십자가를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하느님께서 일어나시면 원수들 흩어지고 맞서던 자들 그 앞에서 달아나기”(시편 68,1)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세상은 우리에게 대해서 죽었고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라 6,14).
13. 죄의 고백과 가슴을 두드림: 참회 때 때림과 접촉 그리고 소리를 강조한다.
법정에서 먼저“의인이 자신을 스스로 고발하기 때문에”(잠언 18,17), 주교는 제대에 도착하여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다. 부정직한 자들로부터 자유롭고 불경건한 자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시편 42) 하느님의 제대에 합당하게 오를 수 있도록 먼저 하느님께 자신이 합당하고 적합한 사람인지 알아보며 “하느님이여, 나의 옮음을 판단하시고 매정하게 나를 무고하는 자들을 거슬러 변호해 주소서” 등등.(시편 43,1)의 시편을 명확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읊는다. 그리고 거룩한 예식을 시작하기 전에 참여한 교우들 앞에서 주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일부 사람들이 상황에 맞지 않게 행하고 있다) 구체적인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인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고백이 아니라 드러난 고백을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세리의 본보기대로 가슴을 두드린다. 그 세리는“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13)라고 말하며 자기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처럼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가슴을 두드림에는 세가지, 즉 때림과 접촉 그리고 소리는 진정한 회개에 필요한 세 가지, 즉 마음의 회개와 진정한 만족 그리고 구두로 고백을 뜻한다. 사실 세 가지 방법,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며 행위를 실행하면서 우리는 죄를 짓는다. 이처럼 세 가지 방법, 즉 고통의 마음, 정숙함의 입과 노동의 행위로 우리는 회개를 해야 한다.
14. 사제가 향함을 열면 주교는 향을 향로에 넣는다.
제대에 오르려고 할 때 주교는 향로에 향을 넣는다. 이 향은 성서에서“다른 천사하나가 금 향로를 들고 제단 앞에 와 섰습니다. 그 천사는 모든 성인들의 기도를 향해 섞어서 옥좌 앞에 있는 황금 제단에 드리려고 많은 향을 받아 들었습니다.”(묵시 8,3)는 것을 나타낸다.
사실 “나의 기도 분향으로 받아 주소서”(시편 141,2)라는 예언자의 말대로 천사는 그리스도, 금 향로는 흠없는 육체, 제대는 교회, 불은 사랑을 나타내며, 향은 기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천사, 즉 그리스도께서, 제대 앞에, 즉 교회 앞에, 한 손에 금 향로를, 즉 흠없는 육체를 들고서, 불로, 즉 사랑으로 가득 찬 신자들은, 많은 향들을, 즉 기도를 그분께, 즉 모든 성인들의 기도와 함께 아버지에게 많은 향들을 가져와 그분에게 바쳤다”.
단순히 “기도들에게”만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기도들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이끄는 그 기도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가 육체의 고통이 그에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한 후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린 후 2, 9).
그러므로 합당한 향이 그분을 통하여 부드러움의 향기로 봉헌되도록 그리스도께서 기도를 마음에 불어넣어주시므로, 주교는 향로에 향을 넣는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 우리에게 공로가 되도록 그분은 감미로움의 축복으로 우리보다 먼저 베풀어주신다. 그분은 오직 선물로 주신 것만을 받으시기 때문이다.“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요한 15,4).
그런 다음 사제는 주교에게 향함에 있는 향을 준다. 그것은 율법서에서 부드러움의 향기로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봉헌되는 제단에 바치는 귀중한 가루향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너희는 사사로이 쓰려고 같은 배합법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너희가 야훼를 섬기는 데 쓰는 거룩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냄새를 즐기려고 이것을 만드는 자는 족보에서 제명당할 줄 알아라.”(출애 30,37)고 야훼께서 출애굽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향로가 제대에서 내려온다면, 마치 천사나 성인을 공경하는(dulia) 것처럼 사람들을 분향하고 하느님을 흠승하는(latria) 것처럼 다른 향을 축복 없이 놓아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의미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실“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린 후 3, 6).
15. 입술과 제대 그리고 가슴에 하는 세 번의 입맞춤
주교는 거룩한 제대에 다가가 제대에 입맞춤을 한다. 이것은“뜨거운 임의 입술에 내 입맞추리라.”(아가 1, 2)는 유명한 축혼가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성교회와 하나가 됨을 뜻한다. 입맞춤에서 입술은 입술과 하나가 된다. “신랑이 화려한 관으로 신부를 반기듯 신부는 온갖 보석으로 신랑을 반긴다.”(이사 62, 5)는 예언자의 말대로 그리스도안에서 신성은 인성과 하나가 되며 신부는 신랑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요한 3,29)라고 사도 요한은 말한다. 사실“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다”(시편 19,4-5).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예언자로부터 약속되었던 평화가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교는 돌아서서 부제와 입맞춘다. “정의가 꽃 피는 그의 날에 저 달이 다닳도록 평화 넘치리라.”(시편 72,7)고 다윗은 말한다. “당신이 오실 날 이 땅위에는 평화가 흐르리라.”(예레 2...)고 다른 예언자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도“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라고 천사들의 무리가 노래한다.
사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로마 16,16)라고 사도가 말하는 대로 입맞춤은 종종 평화를 뜻한다.“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 (로마 15,33).
부제는 고개를 바로 숙이면서 주교의 가슴에 입맞춘다. 이것은 하느님의 영감을 통하여 다가올 평화를 예언자들이 예언하였음을 나타낸다. 사실 요한은 예수의 가슴에 기대면서 (요한 13, 23.25) 주님의 가슴에 있는 거룩한 원천에서 흐르는 복음의 강물을 마셨다.
16. 분향: 주교는 제대를 분향하고 사제는 주교를 분향한다.
그런 다음 주교는 부제로부터 향로를 받아 거룩한 제대에 분향한다. 예언자들의 가문에서 사람이 되시면서 사람의 몸으로는 다윗 가문의 후손에 속하는 그리스도께서는“거룩하신 아버지,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요한17,20)라고 복음서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당신의 기도를 통하여 교회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주교에게 분향하기 위해 향로를 받는 부제는 기도의 향을 합당하게 봉헌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육화의 향로를 손으로 들어야 함을 윤리적으로 준비한다.
사실 중재자의 신뢰없이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지만(히브 2......),“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마태 21, 22)이라는 그분 약속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 사실 향로를 통하여 사람이 되신 말씀을 받아들인다.
17. 향로의 형태와 향을 치는 두 가지, 즉 영적이고 문자적인 이유
사실 향로가 상단부분이 세 개의 고리를 통해서 하단부분과 하나로 연결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연결되는 세 가지 결합, 즉 영혼에 육체의 하나됨과 육체에 신성이 하나됨 그리고 영혼에 신성이 하나됨을 갖고 있다.
어떤 이들은 네 번째 하나됨, 즉 영혼-육체의 혼합에 하느님의 본성의 하나됨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어떤 향로들은 네 개의 고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향로와 관련하여“그 향로에 불을 담아 가지고 와서 제대에(야훼 앞에) 향을 피워라.”(민수16)고 모세는 아론에게 특별히 말하였다.
신비적인 이유 그 이상으로 마귀의 모든 악의들을 제대로부터 쫒아내기 위하여 분향되기도 한다. 사실 분향의 연기가 악마들을 쫒아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잘 보존하라고 명령하였던 물고기의 지체들이 어떤 종류의 약을 함유하고 있는지 토비야가 천사에게 질문하였을 때“이 물고기의 염통과 간을 태워 연기를 피우면 그 악한 것들이 주던 괴로움이 깨끗이 사라진다.”(토비 6,8)고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18. 입구에서 노래하는 입당송(Antiphona); 왜 삼위일체에게 드리는 대영광송(Gloria) 후에 삽입된 대송을 반복하는가? 누가 입당송을 노래하라고 정하였나?
성가대는 현관 앞에서 삼위일체께 드리는 영광송 후에 반복하는 입당송을 노래한다.
사제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므로, 현관 앞에서 드리는 입당송도 그분의 오심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다.
이것과 관련하여“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마태 13, 17;루가 10, 24)고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가대는 그 영혼을 크게 부풀리고 기쁨으로 현관에서 노래한다. 예언자들, 성조들, 왕과 사제들과 모든 신자들은 간절한 열망하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 광야에서 시온의 어린 산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다스리도록 어린양을 보내주소서.”(이사 16, 1)라고 환호하며 간청한다.“오소서, 주님!, 지체말고 어서 오소서. 이스라엘 당신백성의 잘못을 없애주소서”.
그래서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던 시메온은 하느님을 찬양하며“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루가 2, 28-30)라고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예배를 드려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6)라고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음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입당송을 노래한다.
입당송의 반복은 환호성의 증가함을 나타낸다.“명령위에 명령, 명령위에 명령, 규칙위에 규칙, 규칙위에 규칙, 이쪽으로 살짝, 저쪽으로 살짝.”(이사 28, 10).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끝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하바꾹 2,3)라고 예언서는 말한다. 입당송의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영광송은 자비로움의 청원을 나타낸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보다 쉽게 얻기 위하여“야훼여, 당신의 자비를 보여 주소서, 당신의 구원을 우리에게 내리소서.”(시편 85). “케루빔위에 좌정하신 이여,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나쎄 가문들 앞에 나타나소서.”(시편 80)라고 삼위일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환호성을 지른다. 마침내 성령은 그들의 외침을 허락하시고 그들의 동료들보다 먼저 기쁨의 기름으로 그들을 기름 부어 축복하셨다. 그리고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이사 61, 1; 루가 4, 18-19)고 성자 친히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그들에게 맡기셨다.
입당송은 문자적인 이해가 아닌 찬미가의 기쁨 안에서 옛날 사람들의 염원을 나타낸다.
첼레스티노(Coelestinus) 교황은 이 다윗의 150 시편을 제사를 드리기 전에 온 신자가 입당송으로 노래하도록 규정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독서와 복음만 읽고 말았던 그 이전 시대에는 전혀 행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안에서는 미사 중에 멜로디와 더불어 노래하기 시작한 입당송들과 층계송들 그리고 영성체송처럼 봉헌송들에는 시편이 없었던 것이다. 희랍어로 입당송(Antiphona)은 교대음이라고 말한다. 두 성가대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멜로디가 있는 노래를 교대하기 때문이다.
19. 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Kyrie eleison)를 아홉 번 노래하는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를 여섯 번 노래하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Christe eleison)를 세 번 노래하는가?
“일어나소서, 시온을 어여삐 여기소서. 은혜(총)을 베푸실 때가 왔사옵니다.”(시편 102, 13)라고 시편저자에 의해서 미리 예언되었던 것처럼, 충만함과 너그러움의 순간이 이르렀다. 이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뜻하는 “Kyrie eleison”이라고 성가대는 상황에 적절하게 노래하면서 덧붙인다.“야훼여, 우리를 가련히 여겨 주소서. 우리는 당신만을 바라옵니다.”(이사 33,2)라고 예언자는 말한다. 아홉 형태의 죄를 대항하여 Kyrie eleison를 아홉 번 말한다. 사실 원죄와 중죄 그리고 소죄, 즉 뱀과 여자 그리고 남자가 존재한다. 사실 뱀은 육체의 탐욕을 뜻하며 처음부터 속여 넘긴다. 여자는 쾌락을 뜻하며 경미하게 먹는다. 남자는 합리성을 뜻하며 치명적으로 허락한다. 그 다음 생각과 말과 행위의 잘못이 있다. 마음에는 생각의 잘못이 있고 입에는 말로 범하는 잘못이 있으며 그리고 행위에는 실행하는 잘못이 있다. 이것은 집안에서 죽음과 문 위에서 죽음 그리고 무덤에서의 죽음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나약함의 죄와 단순함의 죄 그리고 사악함의 죄가 있다. 불가능성을 통하여 저지르는 나약함의 죄와 무지로 저지르는 단순함의 죄 그리고 시기로 저지르는 사악함의 죄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다. 그러므로 성가대는 성부께 Kyrie eleison를 세 번, 성자에게 Christe eleison을 세 번 그리고 성령에게 Kyrie eleison를 세 번 노래한다. 하지만 성부와 성령은 동일한 본성을 지니고 계시므로 성부와 성령께는 같은 말로 한다. 하지만 성자는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면서도 두 실체를 지닌 거인처럼 다른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인간들에 의해서 회복된 열번째 무리가 천사들의 아홉 무리에 참여하도록 아홉 번을 반복한다.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1세는 희랍인들 사이에서 온 신자들이 노래로 부르던 Kyrie eleison를 미사 중에 성직자가 노래하도록 규정하였다.
20. 대영광송 (Gloria in excelsis): 세 종류의 평화와 미사 때 천사의 찬미가를 노래하라고 누가 정하였나?
그리스도의 일시적인 탄생을 증거하는 천사 찬송가가 뒤따른다. 위대한 선포자인 대천사를 나타내는 사람이 맨 처음 천사찬송가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 14)라고 말하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천상군대의 무리들이 즉시 천사와 하나가 되므로 성가대는 계속 노래한다.
단순하게 천사들만의 노래가 아니라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는 그 여자가 잃은 한 닢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켰으며(루가 15, 8),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으러 간 목동이기(루가 15, 4) 때문에, 이를 기뻐하는 인간들의 노래이기도 하다.
사실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 세 장벽으로 이루어진 원수관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은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원수관계, 두 번째는 천사와 인간사이의 원수관계, 세 번째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원수관계이다.
사실 인간은 불순종으로 창조주 하느님을 모욕하였다. 타락과 함께 천사적 보상을 거부하였고 다양한 예식들을 행하면서 인간으로부터 멀어졌다. 사실 유다인은 의식을 거행하였고, 이방인은 우상을 숭배하였고 다른 이의 예식이 모든 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참된 평화가 오셨고 두 개를 하나로 만드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들을 없애시고 모퉁이의 머리돌처럼 그 분 안에 서로 대립되는 벽들을 하나로 연결하셨다(에페 2, 11-22).
마침내 한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양들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아래 있게 되었기(요한 10. 16) 때문이다. 그래서 죄는 사라지고 인간은 하느님과 화해하였다. 죽음을 보상받은 인간은 하느님과 천사와 화해하였다. 예식은 파괴하여 없애고 인간은 인간과 화해하였다. 사도에 의하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골로 1, 20)을 화해시켜 주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즉 천사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는“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 14)라고 천상군대의 무리가 노래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들과 천사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어졌으므로 천사들은 목동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찬미한다.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에는 평화가 이루어졌으므로 하느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신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평화를 이루셨으므로 나귀와 소의 외양간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신다. 사실 소는 유대백성을 의미하고 나귀는 이방인을 의미한다.“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 준 구유를 안다”(이사 1,3).
심마꾸스(Symmachus) 교황은 뗄레스포루스(Telesphorus) 9세가 성 베드로 축일부터 (그가 이전에 제정하였던) 주님 탄생의 전야 미사에까지 노래하도록 당부했었던 찬미가인 Gloria in excelsis를 주일 미사와 순교자의 탄생일에 노래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찬미가에서는 천사들의 말들에 따르는 것도 덧붙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프와티에(Poitiers)의 성 힐라리오(Hilarius)가 천사들의 말에 이것들을 덧붙였다고 주장한다.
21. 제대 중앙에 놓는 초와 십자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두 백성의 기쁨을 나타내기 위하여 제대 양 측면에는 불을 켠 두개의 초와 그 중앙에 십자가를 놓는다. 사실 천사가 목동에게“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등등”(루가 2, 10이하)라고 말하였다. 그분은“웃음(창세 21, 6)”을 의미하는 참 이사악이다. 촛불의 광명은 백성의 믿음이다. 사실 예언자는 유다 백성에게“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이사 60,1)고 말하였다. 반면 사도는 이방인들에게“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에페 5,8)고 말하였다. 사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엘에게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 (민수 24,17)라는 발람의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새로운 별 하나가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났다. 제대 위에 두개의 초 중앙에는 십자가를 놓는다. 두 백성사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에페 2, 14) 모퉁이의 머리돌(베드 전 2, 7)처럼, 중재자처럼, 교회에 머물고 계신다. 그래서 유다의 출신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이 그분께 왔던 것이다.
22. 제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사제의 이동
주교는 기도를 바치기 위하여 주례석으로 올라서서 펼쳐진 책에 있는 모음기도를 바친다. 복음사가의 증언에 따르면《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 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펼쳐 읽으셨다.“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이사 61)》(루가 4, 16-18).“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 주고 자리에 앉으셨기” (루가 4, 20) 때문이다.
다른 주교들이 행하는 것처럼, 주교는 기도할 때는 제대 오른쪽에서 한다. 이것은“하느님께서 남쪽으로부터 오실 것이다.”(하바꾹 3,3)라고 언약되었던 것을 뜻한다. 오른쪽은 기쁜 것들을 의미하고 왼쪽은 슬픈 것을 의미하므로 주님 탄생 주일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주교는 맨 먼저 제대의 오른쪽 방향으로 나아간다. 복음 낭독 후에는 그리스도 수난의 슬픔을 나타내기 위하여 제대 왼쪽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는 오른쪽으로 다시 돌아온다. 에제키엘은 네 짐승에 대한 진술에서 이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그들은 넷 다 사람 얼굴인데 오른쪽에는 사자 얼굴이 있었다”(에제 1,10). 사람으로 탄생을, 사자로 부활을, 소로 희생제물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람과 사자의 얼굴은 오른쪽에 있었고, 소의 얼굴은 왼쪽에 있었다. 탄생과 부활이 기쁨을 가져다 준 반면에 수난은 슬픔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목숨이 다할 때까지 내 영혼이 슬프구나.”(마태 20.....)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제는 동쪽을 향하여 기도해야 한다.“저 높은 동쪽 하늘로부터 우리를 방문하셨기”(루가 1; 즈가 4) 때문이다. 이것과 관련하여“보아라 저 사람, 그분의 이름은 동쪽이라고 불리리라.”(예레 23...6)라고 읽어 볼 수 있다. 그 설명은 지혜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해 뜨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지혜 16,28).
본질적으로 존엄하신 하느님은 어디에든지 존재하시므로 [나는 하늘과 땅을 채우리라(이사 66, 18)], 존엄하신 하느님이 지리적으로 동쪽에 한정되어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요한 1, 9)“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하여 정의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기”(미가 3, 20) 때문이다.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열왕 상 6)과 모세의 증거궤(출애 26)가 동쪽으로 향하는 출입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성전입구는 동쪽방향에서 서쪽방향을 향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수난 이전에 모든 인간은 황혼, 즉 죽음을 향해 그리고 연옥을 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성전입구는 서쪽방향에서 동쪽방향을 향해 있는데 영광을 향한 우리의 탄생과 승천을 의미한다.
서쪽방향을 향해 있는 입구를 갖고 있는 교회들에서는 사제가 동쪽을 향하여 찬미를 드리기 위해 제대 앞에 서 있고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는 항상 교우들을 향해 뒤돌아선다. 하지만 모두가 기도에 집중할 때, 즉 주님을 향해 마음을 드높이며 성체성사를 행하는 감사기도와 빵을 나눔의 순간에는 제외한다.
23. 주교관을 벗어놓음
주교는 기도해야 할 때 주교관(Mitra)을 벗어 놓는다. 사도가 (고린 후 2)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과 하느님사이에 어떠한 악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활짝 열린 얼굴로 관조할 수 있도록 사람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24. 교우들에게 하는 주교와 사제의 인사
주교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고 주교의 특별한 강복을 이용하면서 먼저 신자들에게 인사를 한다. 하지만 하급 사제는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면서 인사한다. 룻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보아즈가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인사를 하며 사용한 말이다(룻 2, 4). 이것으로부터 보아즈는 구원자의 표상을 표현하였을 것이라고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모압 여자 룻과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성가대는 둘 다에게“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한다. 이것은 성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번째 서간에서“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디모 후 4, 22)라고 한 문장에서 취하였다. 주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나타내기 때문에 맨 먼저“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한다. 이것은 부활 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하신 첫 말씀이셨기 때문이다. 그 다음 사제들 가운데 한 일원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른 사제들처럼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미사 중에 교우들은 일곱 가지의 나쁜 악습들을 멀리하고 일곱 형태의 은사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일곱 번 인사를 받게 된다.
25. 사제는 적어도 두 명의 신자가 참여할 때 미사를 거행해야 한다.
거룩한 규칙서들에는 주례하는 사제와 적어도 두 명의 신자가 미사에 참석하지 없으면 어떤 사제라도 장엄미사를 거행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사제는 여러 차례“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며,“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침묵으로 말하기 때문에 사제의 인사에 모두가 응답해야 함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목적 필요성의 이유이고 다른 한편은 종교에 대한 경멸이기 때문이다.
“천사들 앞에서 당신을 찬양합니다.”(시편 138, 1)라고 예언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천사들은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며 곁에서 도와준다고 것을 경건하게 믿어야 하고 이것은 성서저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천사가 토비아에게“당신이 기도하면서 울부짖을 때 영광스러운 하느님께 그 기도를 전해 드린 것이 바로 나였습니다.” (토비 12.12)하고 말하였다. 미사전문에서도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의 거룩한 천사의 손을 통하여 봉헌하는 이 예물이 당신의 숭고한 제대위에 합당하게 이를 수 있도록 기도하며 간구합니다.등등”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린 여종이 베드로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문으로 달려갔을 때 사람들은 “베드로를 지켜주는 천사겠지”(사도 12, 15)하고 말하였다.”전하는 사도행전에서 (사도 12)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천사를 갖는다.
복음서에서 어린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어린이들의 천사는 늘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고 말씀하셨다 (마태 18,....)....지금 우리는 천사들을 같은 목표를 향하는 협력자로 여기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공동상속자로 여길 것이다.
26. 모음기도와 모음기도 결문
듣는 이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인사를 한 후, 천사의 손을 통해 하느님 면전에 바쳤던 향기로운 분향의 연기와 함께 묵시록에서(묵시 8) 나타내는 기도들을 덧붙인다.
사실 우리를 위하여 수난을 겪어야 할 참 인간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시편의 목소리는 그의 것이다.“번제와 속죄제를 바치라 아니하셨기에 엎드려 아뢰었사옵니다. “제가 대령하였습니다.”)(시편 40.6-7) 자신의 육체와 하나가 된 말씀과 더불어 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사도가“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라고 말한다.
기도의 맨 마지막에 붙이는“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친히 복음서에서“누구든지 아버지께서는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요한 15, 16)고 말씀하신 것을 뜻한다.
사실 하느님의 영원한 은총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으면”(디모 전 2, 5), 다른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오랜 지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가연성 물질위에 놓아 둔 수정을 통해서 우리가 불을 얻어내는 것과 같다.
다음의 문구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취하였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 5).
“성자께서는 성부와 함께 성령과 하나되신 천주로서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를 따르는 부분은 단순하지만 그러나 신중하게“성자께서는 성부와 함께 살아계시며 성령과 하나되신 천주로서 다스리시나이다.”, 즉 성령과 함께 다스리신다는 식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사실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 혹은 “성령과 하나되어”, 즉 성부와 성자가 일치된 성령 안에서 이 둘 사이의 사랑과 하나됨을 나타낸다.
“영원히”는 결과적으로 그리고 환칭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세세대대로처럼 결과적으로, 아가서와 같은 환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멘”은 기원의 감정이나 단정적인 감정을 나타낸다. 사실 시편들의 맨 마지막에서 우리가“이루어지소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할 때, 히브리인들은“아멘, 아멘”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서에서 종종“아멘, 아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Amen, Amen, dico vobis).”, 즉“진실로, 진실로 여러분께 말합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성서의 다른 본문에서도 “여러분은 “예”라고 할 것은“예”라고 말하십시오.” (마태 5, 37)라고 말한다.
혹은 청하는 것을 바라거나 또는 결론을 낸 것을 단정하기 때문에 이 기도의 양식을 언급한다. 말씀의 능력 안에서 사제는“주님께 기도하오니 우리에게 육신과 영혼의 구원을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교우들은 기도를 기원하면서“아멘”, 즉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한다. 혹은 사제가“성부와 함께 성령과 하나되신 천주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로 기도를 끝맺을 때 신자는“아멘”, 즉 “바로 그렇습니다.”라고 응답하면서 단정한다.
27. 모음기도를 콜렉따(Collecta)라고 부르는 이유와 미사에서 얼마나 모음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미사초반에 드리는 기도들을 모음기도(Collecta: 콜렉따)라고 부른다. 교우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중재하는 사제는 이 기도 안에서 모든 이의 청원들을 모아 드린다. 지정참회성당을 순례하려고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이동하기 때문에 교우들이 정신을 가다듬을 동안에 교우들의 모음위에 행하는 기도들 그 자체로 콜렉따(Collecta)라고 부른다.
기도들을 만든 사람들은 많고 다양했고 기도들을 만든 사람들의 숫자와 다양함도 증가하였다. 성 아우구스띠노도 참석하였던 제 8차 아프리카 지역공의회에서는 무엇보다도 공의회의 인가를 미리 얻지 않았다면 어떠한 간구 또는 기도 혹은 미사들 혹은 감사기도들 혹은 간청이나 안수를 드려서는 안된다고 정하였다. 사실 교황 젤라시오도 개인적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작성된 기도문을 바치라고 명하였다고 전한다.
성 그레고리오는 극단적이나 또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기도문들을 배제하고 가치가 있는 다른 기도문들을 모았으며 매우 적합하고 필요한 기도문들을 개인적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기도문의 방식과 순서의 한계를 벗어나 기도문을 듣는 교우들에게 지루함과 싫증을 느끼게 할 정도로 많은 기도들을 드렸다.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로 안다.”(마태 6, 7; 루가 12)라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이 그분에게“주님,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간단한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등등”. 그러므로 미사 중에 사제는 이러한 형태의 기도를 본보기로 삼으면서 일곱 개 이상의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사실 그리스도는 모든 육신과 영혼의 필요성을 일곱 개의 청원에 집중하고 계신다.
사실“하느님은 기수를 마음에 들어하시기”(비르질리오:Virgilius) 때문에, 어떤 사제들은 미사 중에 기수, 즉 하나 또는 셋 또는 다섯 또는 일곱으로 된 기도문을 바치려고 매우 조심하고 있다. 하나 또는 셋은 성사의 하나됨이나 삼위일체의 신비 때문이며, 다섯 또는 일곱은 다섯 순간으로 전개하는 그리스도의 수난 또는 일곱 형태인 성령의 은총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분열이나 불목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날의 행위들에는 축복하셨지만 둘쨋날의 행위들은 축복하셨다는 것을 읽어 볼 수 없다. 사실 둘이란 숫자는 하나됨에서 분리되고 이 숫자에서 분리가 가능한 다른 모든 숫자들이 파생한다.
죽은 이를 위해 하나의 콜렉따(Collecta)를 첨가해야 할 경우, 맨 마지막에 그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맨 마지막의 두 번째나 세 번째 전에 바치도록 주의해야 한다. 맨 마지막의 기도는 첫 번째로 되돌아와야 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산 이들과... 등등”과 같은 공동기도문이 아니라면 죽은 이를 위한 미사에서 산 이를 위한 기도문을 삽입해 넣어서는 안된다.
28. 미사 때 사제가 손을 벌림
주교가 서서 기도할 때 손을 펼쳐 들 때, 주교의 좌우 옆에 있는 봉사자들은 그의 펼쳐든 팔이 잘 유지할 수 있도록 그 양옆에 나란히 붙고 주교 앞에 있는 사제는 성사집을 든다. 율법서도 이 성사를 소개하고 있다. 사실 출애굽기(출애 17, 8-16)에서 읽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사막에서 싸우고 있을 때, 모세는 언덕 위에 올라 가 있었다. 모세가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팔을 약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그러자 아론과 후르는 모세의 팔을 좌우에서 각각 붙들어 떠받치니 해가 질 때까지 그의 팔은 처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칼로 쳐 이겼다.
이것과 관련하여 미사 중에 사제는 기도할 때 팔을 좌우로 펼쳐 든다.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위에서 당신의 팔을 펼치시고“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 34)라고 말씀하시면서 박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7)라고 그분께서 직접 약속하신 것처럼 회개하는 사람은 늘 받아주신다는 것을 윤리적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모세인 그리스도께서 팔을 펼치실 때, 즉 도움과 위로를 제공하실 때, 이스라엘이 이겼다, 즉 교회가 승리하였다.“만일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신다면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로마 8, 31). 만일 팔이 약간만이라도 내린다면, 즉 만일 죄의 잘못으로 우리에게는 구원과 위로가 없다면 아말렉, 즉 악마가 이긴다.“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로마 9,16).“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약속하셨다.
용기에서 도움이 흘러나오고 사랑에서 위로를 주시기 때문에 용기의 산을 뜻하는 아론과 사랑의 불을 뜻하는 후르는 모세의 팔을 떠받든다. 모세의 팔은 해가 질 때까지, 즉 세상 끝날까지 처지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여호수아의 명령아래, 즉 그리스도의 통솔과 더불어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이겼다. 교회는 악마와 악령들의 군대를 칼로, 즉 기도의 힘으로 쳐 이겼다. 사실 칼은 하느님의 말씀(에페 6, 17)이다. 만일 어떤 이가 기도의 힘으로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고자 한다면 팔을 펼쳐야 한다. 즉 하늘에 계시는 그분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필레 3) 그의 행위를 하느님께 펼쳐야 한다.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어라.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워라”(이사 35, 3). 사실“팔을 펼침은 저녁의 제물”(이사 40, 10)이다. 단식과 자선행위와 어울려 하는 기도가 아름답다 (욥 12...). 하지만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버 2, 17).
그러므로 우리는“다투는 일 없이 깨끗한 손을 쳐들어”기도합시다. (디모 전 2, 8). 그리고“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골로 3,1-2).
29. 복음 전 독서 봉독
복음 전에 봉독하는 독서는 그리스도 이전에 요한에 의해 행해진 선구자의 임무를 나타낸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주님보다 먼저 세상에 왔다. 그가 직접“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마태 3, 3)라고 말한다. 주님께서“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 28)고 당신에 대하여 말하였듯이 요한은 차부제와 같았고 주님께 봉사하는 그분의 종을 뜻한다.
사실 율법서는 교사처럼 모세의 손을 통하여 하느님의 연약한 백성을 보호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가르쳐왔다. 그들을 안내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요한의 입과 손을 통하여 비로소 성숙한 백성에게 육체적으로 현존한 그분을 보여주었다.
요한이“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 29)라고 말하였다. 마치 빛보다 어둠이 먼저 온 것처럼, 모세의 지팡이가 성령보다 먼저 온 것처럼, 두려움이 사랑보다 먼저 온 것처럼, 시작이 완성보다 먼저 온 것처럼, 통치자의 명령이 사랑하는 임의 조언보다 먼저 온 것처럼 율법서는 복음서보다 먼저 세상에 왔다.
사실“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요한 1, 17). 독서는 요한의 증언으로 율법서의 불완전함을 고백하고 복음의 완성으로 이끄는 율법서의 목소리이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다.”하고 말하였다(요한, 1, 15). 그래서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요 (요한 1, 27).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그분은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빛내고 있었다”(요한 1, 8-9).
율법서는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했다 (히브7, 19). 시종은 늘 독서를 봉독하는 차부제와 동행하고 복음을 봉독하는 부제는 차부제나 시종에 의해서 동반된다. 소수의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따르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설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요한을 찾아 가“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요르단 강 건너편에 계시던 분이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바로 그분인데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몰려 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요한 3,26).“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얻으시고 세례를 베푸신다는 소문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유다를 떠나 다시 갈릴래아로 가기로 하셨는데....등등.” (요한 4,1-3이하).
요한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중간지점이다 [그런데 모든 예언서과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나며 요한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좋은 소식이 선포되었다. 그래서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폭력을 사용해 왔다 (마태 11,12-13)].
그러므로 독서는 항상 예언서와 사도들의 서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구약성서를 때로는 신약성서를 다룰 수도 있다.
독서가 나타내는 요한의 목소리는“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고 말하면서 옛날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예언해 왔고 현대인들과 함께“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라고 말하며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인다. 희랍말인 Epistola(서간)는 라틴말로 “높은 곳에 위치한 사물, 어떤 사물에 대하여 질문, 서간보다 더 공동적인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것, 사도서간들과 잘 상응하는 정의, 복음에 대한 질문”들을 뜻한다.
사실 사도적인 명령은 강도를 만나 모조리 빼앗기고 마구 두들겨 맞아 반쯤 죽은 사람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하며 부탁하며 떠난 이야기(루가 10, 30-35)를 통해서 알아들을 수 있다.
30. 독서 봉독 후 차부제가 주교에게 경의를 표시
독서봉독 후 사제에게 차부제와 시종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그의 두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마태 11, 2-3). 그분이 행한 기적들을 본 후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마태 11, 4-5)》고 말한 내용을 뜻한다.
“야훼께서 당신의 오른팔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하셨도다”(시편 126, 3). 이처럼 차부제는 사제의 오른팔에 입맞춘다. 놀라운 일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바로 선생인 요한이 예언해 왔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요”(요한 1, 27). 주교의 발 앞에 엎드려 주교의 신발에 입맞춘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두고 칭찬하면서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마태 11, 9.1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제는 차부제를 축복한다.
만일 차부제는 독서가 끝난 후, 부제는 복음 봉독 전에 사제에게 다가가 존경스럽게 고개를 숙인다. 율법서는 그리스도안에서 끝나고, 복음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한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세례자 요한에게까지는 힘이 흘러넘쳐났지만, 요한 이후로는 복음서와 사도들이 그것을 대신할 것이다.
31. 층계송 (Graduale: 오늘날 응송)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그리고“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마태 3, 2.8)라고 말하면서 요한은 회개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독서 후에 당연히 회개의 눈물을 뜻하는 층계송이 따른다. 그러므로 오순절기간에 층계송은 예식에서 생략된다. 그 기간은 그리스도의 보리타작 마당이 비로소 당신의 손에 들고 있는 키로 깨끗해지고, 곡식들은 영원한 행복의 곡식 간에 차곡차곡 채워질 때 교회가 하느님 나라에서 맞이하게 될 미래의 행복한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미덕으로 오르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마음 안에는 이미 올라감을 준비하고 있으면서 눈물의 골짜기(시편 84, 6)에 머물고 있는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겸손의 층계를 통해서도 이처럼 층계송이라고 부른다.
층계송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기쁜 축제의 목소리나 또는 멜로디의 목소리가 아닌 단순하게 그리고 마치 짓눌리고 고달픈 노래처럼 슬프게 노래하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층계송이라 정의되는 응송은 제자들이 예수께 불림을 받았을 때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 갔던”(마태 4, 20.22) 것처럼 말과 행위로 대답하였기 때문에 사도들의 소명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사도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 갔고 제자들은 스승의 뒤를 따라 갔기 때문에 층계송을 노래한다. 독서봉독 후에 층계송을 노래한다. 요한의 설교 후에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갔다. 다음은 요한 복음사가가 들려주는 내용이다.“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예수께서 걸어 가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 갔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 간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요한 1, 35-37.40).
이들은 이 층계송을 노래한다. 그는 먼저 형 시몬을 찾아 갔을 때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갔다”.(요한 1,41). 필립보도 또한 층계송을 노래한다.“그가 나타나엘을 만나“와서 보시오.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요한 1, 45).
32. 알렐루야 (Alleluia)
주님께서“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라고 말씀하신대로 슬픔에 이어 위로가 뒤따른다. 층계송 후에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이것은 영원한 행복에서 기쁨을 얻는, 즉 영원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인간들과 천사들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뜻한다. 사실“당신 집에 사는 사람,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옵니다” (시편 84, 4). “축제의 모임, 환희와 찬미 소리 드높던 그 행렬”(시편 42,4).
어떤 것이 알렐루야인가? 알렐루야를 제목으로 가지고“야훼를 찬미하여라, 하느님의 종들아” (시편 113, 1)라고 시작하며 그리고 곧바로 설명하는 시편 113에서 나타내 보이고 있다.
현세의 불행은 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즐기기에는 마땅하지 않고 희망이 실재로 변하고 믿음이 형상으로 될 때까지 오히려 희망 속에서 기대하며 그만큼 주리고 목말라 한다.
이 현세에 어울리지 않는 기쁨을 표현하는 것처럼 다소 생소한 단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 이상을 뜻하도록 이 희브리말은 번역된 상태로 있거나 또는 오히려 번역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 신비는 기쁨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과 같이 천상 예루살렘의 풍부함에서 맨 먼저 이스라엘 성조들과 예언자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더욱 풍부하게 사도들의 입에 흘러 내렸다.
알렐루야는 미래 행복의 고유한 단어처럼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에 대한 희망과 언약하신 공로를 주시는 그 때에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시기에는 알렐루야가 미사 중에 노래하였다 하더라도, 로마 교회의 관습에는 오랫동안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 그레고리오가 알렐루야를 사용하라고 결정하였고 더 나아가 원상태로 회복시켰다. 사실 처음이 아니라면 다마소 교황 시대부터 이 관습은 조금씩 사라지면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 후 어떤 사람들은 그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관습을 따르는 것과 같이 이것과 다른 것과 관련하여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이러한 것들과 관련하여 어떠한 것도 우리는 다른 교회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여기에서 알렐루야를 말하지 않는 것은 성 예로니모의 증언에 따라 거룩한 기념으로 다마소 교황 때 시작한 것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전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관습을 중단하였다. 그리스인들이 이곳으로 전래하였다는 보다 더 큰 이유도 있다.”라고 이유를 설명하는데 합당하게 여겼다.
우리는 층계송 후에 알렐루야를, 회개의 슬픔 후에 기쁨의 찬가를 노래한다.
노래 이상으로 기뻐하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유보된 위로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의도하였고 즐거운 청취와 함께 깜짝 놀란 마음은 충만해지고 죽음이 없는 생명이 있는 곳, 밤 없는 낮이 있는 곳, 우연히 아닌 확실성이 있는 곳, 고통이 없는 기쁨, 두려움이 없는 위로처, 수고가 없는 평온, 나약함보다 강함, 사악함이 없는 공정함, 추악함이 없는 아름다움, 오류없는 진실, 악의 없는 사랑. 불행없는 행복이 늘 머물 그곳에 이르도록 많은 음정표기(neuma)안에서 아름다운 대화의 짧은 음절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알렐루야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뻐하는 사람들과“우리는 오늘 참으로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가 5, 26) 그리고“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 (루가 7, 16)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찬미하는 사람들의 찬양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사실 이때 기쁨으로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놀라서 감탄하였다”(루가 9, 43). 일흔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하고 아뢰었다(루가 10,17). 그러므로 재의 사순절을 포함한 주간부터 부활절 때까지 알렐루야를 노래하지 않는다.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시편 137, 4)라고 예언자가 말하는대로 슬픔의 시기에는 기쁨의 찬가를 부르지 않는다. 사실 재의 사순절을 포함한 칠 주간은 히브리인들이 바빌론 강기슭에 앉아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그들의 수금을 걸어 놓고서(시편 137, 1-2) 눈물을 흘렸던 바빌론 유배의 시대를 영적으로 나타낸다.
하지만 목소리의 불협화음을 통해서나 문장의 길이를 통해서 당면하고 있는 유배생활의 불행을 의미하는 영송(Tractus)를 노래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오! 메섹인들에게 얹혀 사는 나의 신세, 케달인들 천막에서의 더부살이, 이 괴로움이여” (시편 120, 5)라고 시편저자는 말한다.
33. 알렐루야 성구: 어떤 성구이어야 하고 어떻게 성구를 삽입해야 하는가?
성구를 삽입하면서 알렐루야를 두 번 노래하는 행위는 기쁨으로 충만한 성인들이 마음과 육체 또는 영혼과 육신에 두 겹으로 된 영광의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옷에 따라“성도들아, 승리의 잔치를 벌여라. 밤에도 손뼉치며 노래하여라”(시편 149, 5). 육체의 옷에 따라“의인들은 빛을 내고 짚단이 탈 때 튀기는 불꽃처럼 퍼질 것이다”(지혜 3,7). 성구는 추하고 슬픈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고 달콤한 모든 것을 반복해야 한다. 예를 들면“야훼께서는 위엄을 옷으로 입으시고 왕위에 오르셨다” (시편 93, 1). “야훼께서 왕위에 오르셨다. 온 땅은 춤을 추어라”(시편 97,1). “야훼께 환성을 올려라”(시편 100, 1). “의로운 사람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리라” (시편 92,12).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 4).
바로 이 때문에 일부 교회에서는 알렐루야 후에 감미로운 기쁨과 달콤한 멜로디로 부속가를 노래한다. 미사예식에서 서로 다른 세 언어가 만나고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필립 2,11). 이것은 십자가위에 붙인 명패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그 명패는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라고 씌어 있는데 히브리말과 라틴말과 그리스말로 적여 있었다(요한 19,19-20).
34. 독서 봉독과 층계송을 노래하는 동안 사제의 착석
지금까지 사제는 조용하게 앉아 있는다. 이것은 요한이 설교할 때 그리스도께서 공적으로 설교하지 않았으므로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마르 1,14)라고 복음사가가 말하고 있다. 앉아 있는 자세는 승리자의 특징이며, 앉아 있는 사제는 단식하시고 난 후 유혹하는 자를 이기셨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낸다. 사실 악마는 “그리스도에게서 물러 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마태 4, 11).
35. 복음 봉독하기 위해 제대의 다른 부분으로 향하는 사제의 자리바꿈
예식에 따라 이 모든 것을 행한 후, 사제는 복음을 봉독하기 위해 제대의 왼쪽부분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마태 9,12)라고 복음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셨고,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오른편은 의인을 나타내며, 왼쪽편은 죄인들을 나타낸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심판의 날에“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쪽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마태 25, 33).
하지만 이것과 관련하여 사제가 미사의 시작부분에는 오른쪽에 있고 복음을 봉독할 때는 왼쪽으로 이동하며 복음봉독 후에는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어떤 이들은 주장한다. 믿음의 의식이 맨 먼저 유다인들안에 있었다. 그 후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고 아들을 향하는 아버지들의 마음을 돌리는 에녹과 엘리아의 설교를 통하여 (말라 4....) 마침내는 다시 유대인들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그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을 것이며“이스라엘의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을”(로마 9,27)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봉독하는 사제는 그리스도의 인격체를 드러내며,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친히“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마태 15,24)고 말씀하셨던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였기 때문에 청취자는 둘 중의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신중하게 판단한다.
36. 왜 복음 봉독 전 부제가 주교의 오른팔에 입을 맞추는가?
주교가 미사를 거행할 때, 모든 것이 매우 엄숙하게 진행된다. 부제는 주교의 오른팔에 입맞춘다음 제대로부터 복음서를 들고 와서 주교에게 강복을 청한다. 그리고 축복을 받은 다음 촛불을 든 사람들과 향과 향로를 앞세우고 설교대를 향하여 나아간다.
지금은 상징이 바뀌어졌다. 처음에 예언자를 나타내던 부제가 지금은 복음사가를 나타낸다. 율법과 예언서가 요한에 이르기까지 힘이 넘쳐 흘렀지만 요한 이후에는 하늘나라가 선포되었다(마태 11). 여기 샘물은 심오하지만 매우 깨끗하게 될 때 우리는“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사 12. 3). 그러므로 부제는 로마주교의 오른팔에 입맞춘다. 설교하는 사람은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좋은 소식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오른팔로 이 몸 안아 주시네.” (아가 8,3) 라고 아가서의 신부가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하여 온 천사도 흰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마르 16, 6).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영적인 씨를 뿌린 사람이 육체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다 하더라도 (고린 전 9, 11) 우리는 육체와 지상의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을 위해서 씨를 심어야 한다. 사실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받은 축복으로 영원한 생명을 추수할 것이다” (고린 후 9).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무에서 영원한 보상이 아닌 세속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는 잡상인에 불과하다.
37. 교황의 손과 발에 입맞추는 시기
차부제 또는 부제는 로마주교의 손이 아니라 오히려 발에 입맞춘다. 그것은 교황에게 최상의 경의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며 마치 동네에서 행실이 나쁜 여자라고 소문난 여인이 주님의 발에 입맞춘것처럼 (루가 7, 38) 로마주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그분은 거룩하시므로(시편 99, 5) 그분의 발판을 받들어 모셔야 한다. 여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을 찬미하였다 (요한 20,17).
일반적으로 교황의 손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때나 그의 손에 무엇을 제출할 때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그의 손에 입맞추어서는 안된다. 늘 하던 대로 그의 것을 주고 낯선 것을 절대로 받지 않으므로 이 두 경우에서 우리는 그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빵의 예물만 손으로 만지고, 죽은 이를 위해 봉헌된 예물이 아니라면 다른 예물은 손으로 만지지 않는다. 자선은 죽은 이를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의 오류를 반박하기 위하여 본인이 직접 손으로 그 예물을 받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요한 6, 41)라고 당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빵과 함께 축성된 예물에 대한 존경으로 빵을 만진다. 사도행전에서“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사도 4,34)고 전하는 명백한 근거를 통해서 다른 예물들은 발 앞에 받아 놓는다.
38. 부제가 청하여 받는 축복
“전도자로서 파견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5)라고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파견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복음을 선포할 수 없으므로 부제는 복음서를 들고 주교에게 강복을 청한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 37-38; 루가 10, 2).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라고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려 오자, 이사야도“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셨다.“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등등 (이사 6,8이하).
그러므로 주교는복음을 봉독하러 갈 부제에게 분명하게 축복해 준다. 이것은 독서를 봉독해야 하는 차부제에게 전혀 행하지 않았던 동작이다.
독서를 통하여 뜻하게 되는 율법과 예언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고 눈에 보이지 않게 파견하셨다. 하지만“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땅 위에 나타나신” 이후에 (바룩 3, 38) 그분은“길을 떠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며 이르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주는”(루가 9,6) 사도들과 복음사가들을 눈에 보이게 파견하셨다.
39. 제대 위에 있는 복음서를 들고 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므로”(이사 2, 3) 제대로부터 복음서를 든다. 복음의 법은 어느 날 시나이 산에서 나왔던 모세의 법과는 다르고 이와 관련하여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 둔다.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내가 그들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 31-33)라고 예언자가 말하고 있다.
모세의 법은 석판에 새겨진 반면, 복음의 법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마음속에 새겨진 것이다 (고린 후 3, 3). 모세의 법은 돌 같이 단단한 마음을 가진 완고한 이들에게 주어졌고, “알지도 못하는 이국 백성은 나를 섬기도록 내 앞에 와서 굽실거리며 무엇이든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었다”(시편 18,44)라고 시편에서 다윗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복음의 법은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40. 촛불과 향로를 가지고 부제를 앞서 가는 봉사자들
부제는 초와 향을 든 사람들을 먼저 앞세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평판이 좋은 향기를 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고린 후 2,15). 만일 어느 한 사람의 삶이 무시당하면 그가 선포하는 말씀도 거부당할 것이다. 그래서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루가 4, 23)고 말한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마태 7, 5).
또 듣는 청중들의 마음에 그들이 즐겨 듣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정과 기쁨을 밝혀 주어야 한다. 사실 좋은 소식을 누가 원하지 않겠는가? 좋은 소식을 누가 기뻐하지 않겠는가? 사실 복음은 그 이름자체의 뜻이 말하는 것처럼 좋은 소식입니다.
혹은 주교가 복음을 선포하게 될 부제 앞에 초와 향을 들고 있는 두 명의 시종을 파견하는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권능의 향기와 놀라운 일에 대한 기쁨에 넘쳐 돌아오도록 당신의 제자들을 앞으로 찾아 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셨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와서“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루가 10, 17)하고 아뢰었던 것이다. 백성들에게 그분의 가르침을 드러내 보였던 사도들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시기적절하게 알아보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너희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 40)라고 말씀하신다. 혹은 그러므로 권능과 소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선행하므로 초와 향로는 복음서를 앞서 나간다.
이에 대하여“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 예수의 소문은 그 곳 모든 지방에 두루 퍼졌다. 예수께서는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루가 4,14)라고 복음사가는 말하고 있다.
41. 왜 차부제는 독경대로 갈 때 후행하고 독경대에서 돌아올 때 복음서를 들고 선행하는가?
부제는 가르치는 교사처럼 앞서 가고 차부제는 학생처럼 뒤따른다. 부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먼저 나아가고, 차부제는 봉사하기 위하여 따른다.“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루가 10, 7) 때문이다. 율법서에서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신명 25,4)고 야훼께서 명령하신다. 충분히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복음 선포 후에 차부제는 복음서에서“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41)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그의 봉사를 통해 복음의 보상을 받으므로 복음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주님께서“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요한 15,16)고 명령하셨던 대로 복음 선포의 열매를 전하기 위하여 드러내 보이므로 부제는 차부제를 앞세우고 주교를 향하여 나아간다. 하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복음서를 편리하게 받치도록 하기 위하여 복음서 밑에 놓을 작은 베개를 차부제가 들고 부제보다 앞서 나간다.
잠자리가 불편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주는 베개로, 즉 청중들은 수고의 댓가로 설교자에게 필요한 양의 보수를 지급할 수 있는 삶의 위안을 뜻한다. 사실 사도는“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산다.”(고린 전 9,13)고 말한다.
42. 왜 부제가 설교대를 향하여 한 방향으로 올라가고 다른 방향으로 내려오는가?
“어느 집에든지 들어가 인사하지 말고 여행을 위해 아무 것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마태 10,5-15) 고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부제는 오직 복음서만을 들고 침묵을 유지하며 나아간다. 차부제는 한 방향으로, 부제는 다른 방향으로 설교대에 오른다. 부제는 가르치면서 지식이 향상되고 차부제는 이해하면서 지식이 향상된다. 그리고 또 하인은 행위의 공로를 통하여, 복음 설교자는 입의 공로를 통하 정의의 증가로 향상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련하여“당신의 정의는 하느님의 산과 같도다.”(시편 26...)고 시편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라고 말씀하신 대로 완전한 인내로 보상을 얻기 때문에 같은 방향으로 주교에게 돌아온다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복음 선포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예수는 보여주시고 들려주셨다”(사도 1, 3)] 바로 이 점 때문에 복음 설교자는 하인이 갔었던 그 길을 통해서 되돌아 온다. 그리고 또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부제도 한 방향으로 갔다가 다른 방향으로 돌아온다. “당신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사도 13, 46)라고 사도들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사도들은 맨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다음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43. 왜 북쪽을 향하여 복음을 봉독하는가?
“너 예루살렘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너, 시온아.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이사 40, 9)고 예언자가 말한대로 부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독경대로 오른다. 복음서에서“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 10, 27)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도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하여“산에 올라 가서 입을 열어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 1-3).
그는 얼굴을 북쪽방향으로 향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가 “나의 보좌를 저 북극산에 자리를 잡고 나는 가장 높은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이사 14, 13-14)고 말씀하는 분과 특별히 맞섬을 드러내 보인다. 사실“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북녘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리리라” (예레 1, 14)고 야훼께서 예언자에게 이르셨다.
“북새야, 일어라. 마파람아, 불어라.”고 (아가 4, 16), 즉 악마가 물러가고 성령이 오시도록 복음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읽는다. 그래서 옳은 일을 방해하는 악마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나 또는 입으로 선포하는 복음의 말을 그에게서 제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제는 십자성호를 그어 자신을 보호한다. 사제나 부제는 복음을 선포하려 할 때 이마와 입과 가슴에 십자가를 그어야 하고“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말로써 선포하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믿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사도가 말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고린 전 1,23). 복음서에서“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가 9, 26)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므로“우리는 구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 14). 복음서에도 십자가를 긋고 입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책이며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를 이루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부제나 사제는 복음봉독 전에는 하지 않고 봉독 후에만 복음서에 입맞춘다.
44. 십자가의 신비와 그 신비의 다양한 효과
십자가의 신비는 얼마나 심오한가! 이 성사를 이해하기 어렵구나!
모세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았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자 죽지 않았음(민수 21, 8-9)을 읽을 수 있다. 복음서에서“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요한 3,14-15)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면서 이를 기억하고 계신다. 요셉은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나쎄를 야곱에게 데리고 갔을 때, 에브라임은 오른쪽에, 므나쎄를 왼쪽에 이끌어 놓으면서, 비록 나이에 따라 그들을 축복했지만, 야곱은 손을 엇갈리게 내밀어, 즉 십자가의 형태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아우인 에브라임의 머리에는 오른손을, 맏아들인 므나쎄의 머리에는 왼손을 얹어“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내준 하느님의 천사가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등등 (창세 48, 1-22) 라고 말하면서 복을 빌어 주었다는 것을 읽어 볼 수 있다.
에제키엘은 모시옷을 입고 필묵통을 허리에 찬 그 사람에게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 다니며,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십자표를 해 주어라” 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에제 9, 3-4). 일곱 사람에게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 다니며, 이마에 십자표가 없는 사람들을 마구 쳐라. 가엾게 여기지도 말로 불쌍히 보지도 말아라”( 에제 9, 5-6).
요한은 “천사 하나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장을 가지고 해돋는 쪽에서 올라 오고 있었다. 그는 땅과 바다를 해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이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치지 말아라.’하고 외치는 것”(묵시 7, 2-3)을 보았다. 야훼께서 에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아들을 모조리 쳐 죽이셨을 때, 문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피를 보고 그들을 쳐 죽이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집집을 넘어가셨다 (출애 12, 1-14). 모세가 팔을 펼쳐 들면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이겼다 (출애 17, 11). 마라에서 던진 나무는 쓴 물을 단물로 바꾸었다 (출애 15, 25).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꺾어 요르단 강에 집어 넣었을 때, 철 도끼가 물에 떠올랐다 (열왕 하 6, 1-7). 그것은 에덴 동산의 한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이다 (창세 3, 22). 현자가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하느님께서는 나무를 통해 다스리시므로, 정의를 나타나게 한 그 나무는 축복을 받았다”(지혜 14,7).“그분은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하셨다” (지혜 9, 3).“의인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죽음을 한번 안겨 보자.”(지혜 2, 20)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닫지 못한다(에페 3, 18). 그러므로 십자가는 구원을 보상해 주며, 축복을 나눠주며, 사악함을 알아보고, 위험에서 자유롭게 하고, 원수들을 멀리하고, 승리자들을 정해 주신다. 십자가는 신앙의 신비, 희망의 보루, 지식의 열쇠, 정의의 본보기, 임금들의 광채, 사제들의 영광, 빈곤한 이들의 양식, 가난한 이들의 위로, 눈먼 이들의 안내자, 절룩거리는 이들의 지팡이, 절망한 이들의 희망, 죽은 이들의 부활이다.
45. 십자 성호 긋는 방식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간구하면서 행하므로 십자성호는 세 손가락으로 해야 한다. 이에 관련하여 “누가 세손가락으로 땅의 무게를 잴 수 있겠느냐?” (이사 40, 12)라고 예언자가 말하고 있다. 십자성호는 먼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셨고 유다인들로부터 이방인들로 지나 가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거쳐 가신 것처럼 우리도 고통에서 영광으로 걸어가야 하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도 동일하게 오직 하나이요 유일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십자성호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십자성호를 그을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는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들이 등을 돌린 상태로 십자성호를 긋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굴에 십자가를 긋는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십자성호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긋는다.
46. 복음 봉독 전 인사
독경대에 서 있는 부제는“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면서 교우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것은 주님께서“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 (마태 10, 11-12; 루가 10, 5)라고 분부하셨던 대로 행하는 것이다.
처음에 독서 봉독할 때에 행하지 않았던 동작, 즉 신자들은 일어서서 정성으로 그리고 주의깊게 “또한 부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한다. 즉시 부제는 신자들을 자비롭고 온화하게 하며, “거룩한 복음에 의한 독서.”등등 이라고 덧붙인다.
신자들도 존경과 품위로“주님은 영광 받으소서.”라고 응답한다. 신자들은 사도행전에서 “그들‘이제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회개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11,18)고 말한 대로 구원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47. 복음의 중요성
머리가 몸을 지배하고 모든 지체가 머리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복음은 온갖 기능보다 우선하며 복음과 함께 유일한 지적 동기를 통하여 다른 부분들과 일치한다. 복음은 말씀중의 말씀(verbum Verbi), 말씀의 말이요(sermo sermonis), 지혜중의 지혜이다. 말씀중의 말씀은“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해서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2-3).
하느님 말씀의 말은“하늘의 옥좌로부터 내려오고”,“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히브4,12) 힘을 드러낸다.
지혜중의 지혜는“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펼쳐지며 모든 것을 선하게 다스린다”(지혜 8,1). 기쁨의 에덴동산, 향기로운 꽃들의 동산, 포도주의 창고, 삶의 중심지, 판결대, 암미나답의 이륜 전차, 다윗의 성, 성전보물창고, 가문의 보물.
이것은“동산의 샘 생수가 솟는 우물, 레바논에서 흘러 내리는 시냇물” (아가 4,15)이다.
그러므로 부제는 순수한 마음, 입이 깨끗하고, 행위를 단정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지극히 거룩한 복음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레바논에서 흐르지 않으면, 즉 순수한 마음과 맑은 입에서 흐르지 않으면 생수가 솟아오르는 우물, 즉 복음 선포는 격정적으로 흐르지 않고, 즉 자유롭게 흐른다. 사실 “악인의 입에서는 지혜의 찬미가 맞지 않다” (집회 15,9). 하느님께서는 “네가 어찌 감히 나의 법도를 말하고 내 계약을 입에 담느냐?” (시편 50, 16)라고 악인에게 말씀하신다.
이틀이나 사흘 동안 더 이상 대화를 계속 나눌 수 없는 경우에 이제 모세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 하느님과 말하는 것이 말과 혀가 둔해졌기 때문이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 되었구나.” (이사 6,5)라고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경우 이사야는 말하지 않는다.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예레 1,6)라고 말하는 경우 예레미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다고(히브 1,2) 말하는 경우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말씀하신다.
48. 왜 복음 선포 후 복음서와 향로를 주교를 향하여 가져오는가?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시작했고 온갖 좋은 것들이 그분을 이야기하므로 복음봉독 후에 복음서와 향로를 주교에게로 가져온다. 그러므로 많은 시편은“마지막 다윗의 시편”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완성이며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주교는 향을 피우고 복음서에 입맞춤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고 가르치셨던 것을 허락하시고 받아들이신다. 사실 하느님은 성취되지 않은 것이면 받아들이시지 않고 거저 주신 것은 지불하지 않으신다. 만들어진 모든 것이 좋은 것처럼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면 어느 것도 좋지 않다. 사실“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 31).
49. 복음 선포 후 노래하는 신경 (신앙고백)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되므로” (로마 10,10), 복음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교회는 즉시 신앙고백을 입으로 노래한다. 그리스도부터 흘러나오는 온갖 선을 뜻하기 위해 주교가 맨 먼저 시작한다. 사실“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 오는 것입니다” (야고 1,17).
이처럼 모든 천상음악은“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곡을 하여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 (마태 11,17)라고 노래하지 않는다. 복음적 가르침의 보편적인 성가는 전체의 목소리로 응답하며 성대한 기쁨으로 가톨릭 신앙을 고백한다.
Simbolo는 희랍말인데 라틴말로 indicium (증거물)나 collatio (모음, 봉헌물)라고 번역된다. 믿음의 충만한 규범과 완전한 지식을 의미하든지 믿음의 조항들을 모두 하나로 모아두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들이 거룩한 영을 받은 후 이미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출발하려고 할 때 믿음의 조항들과 관련하여 토론하면서 모두가 오직 하나된 믿음에 일치하는 것처럼 모두가 만장일치로 오직 하나된 믿음을 선포하기로 정하였다. 그래서 각자 하나의“핵심내용”, 즉 하나의 작은 조항을 내세우면서 그들은 신경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사도들의 두 번째 목록은 서로가 잘 구분된 작은 열 두 조항을 갖게 되었다. 복음 후의 신경은 복음 선포 후의 믿음을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 요한은“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자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요한 7,30)고 말한다. 사실 사도를 통해서“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 17).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거룩한 보편공의회의 교령을 통하여 미사 중에 신경을 노래하도록 결정하신 분은 다마소(Damasus) 교황이었다.
50. 두 사도신경, 즉 사도신경과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열 두 항목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본질적으로 콘스탄티노플 신경도 열 두 항목으로 구분된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나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이 열 두 항목은 주님께 바치는 제상위에 올려놓은 방금 만들어 낸 따끈따끈한 빵 열두 개이다. 이 열 두 항목은 열두 부족 대표들이 제단 봉헌식에 열두째 날 동안 봉헌한 예물이다. 열 둘이란 숫자는 열두 사도, 열두 예언자, 열두 성조, 열두 정탐꾼, 열두 임금, 열두 부족, 열두 개의 샘, 열두 개의 돌, 열두 개의 옥좌, 열두 시간, 열두 달, 열두 해, 열두 대문, 열두 개의 별, 열두 개의 보석, 열두 개의 기초, 열두 개의 지팡이, 열두 척, 열두 바구니, 열두 개의 잔, 열두 질그릇, 열두 대접, 열두 마리의 수소, 열두 마리의 젊은 사자, 열두 마리의 숫양, 등등 많은 동기로 거룩하다.
열 둘은 생각과 행위, 즉 마음과 몸의 완성을 나타내는 여섯의 두 그룹으로 구성된 풍성한 숫자이다. 셋에서 네 배수하고 넷에서 세 배수 한 숫자로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믿음과, 네 복음서의 가르침, 또는 향주삼덕과 정치의 사주덕을 의미한다. 그 열 두 항목 전체에서 이 숫자는 열에 여섯을 더하여 열 여섯으로 증가하는데 이것은 명령의 실행을 의미한다. 사도에 의하면 열 여섯 가지 고유한 특성으로 구분하는 가운에 열은 사랑의 완성으로 흘러넘치는 여섯 날에 우리가 준수해야 하는 십계명이다.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고린 전 13,4-8).
51. 미사 중의 신경을 외는 날
신경에 대해 언급하는 대축일 때만, 즉 모든 주일, 성탄절, 주의 공현절, 성목요일, 부활절, 예수승천절, 성령강림절 때에, 복된 마리아와 거룩한 십자가 축일, 대천사들과 사도들의 모든 축일, 성전 봉헌과 모든 성인들의 기념일에, 비록 대축일이 성전봉헌 축일에 해당하더라도 신경은 미사 때에 노래로 불러야 한다.
무죄한 어린이의 순교축일을 제외한 성탄 8부 축제기간에 기쁨의 노래를 생략할 때 신경을 바친다. 그것은 “라마에서 통곡소리가 들린다.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기”(예레 31, 15; 마태 2, 18) 때문에 또 무죄한 어린이들이 저승에 내려가므로 그리고 입으로 말하지 않고 죽음으로 증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8일째가 의미하는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8부 축제기간동안 신경을 노래한다.
주의 공현, 부활, 승천, 성령강림,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복된 마리아의 승천 8부 축제기간에도 신경은 노래한다.
세례자 성 요한의 탄생일과 성 라우렌시오의 축일에는 신경을 노래하지 않더라도 그 축일의 8부 축제기간에는 노래한다. 이것은 이 축일이 사도들과 복된 마리아의 승천 8부 축제기간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요한의 8부 축제기간에는 사도들의 감사기도를 그리고 성 라우렌시오 축일에는 복된 마리아의 승천 감사기도를 노래한다.
이 모든 축일들에 대하여 신경에서는 기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축일들들, 예를 들면 세례의 축일인 주의 공현 축일에는 보이지 않게, 즉 신경 안에서“유일한 세례를 믿으며”라고 기념한다. 성체의 대축일인 주님의 만찬 축일에도 마찬가지로, 신경에서“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말하는 대로 성체를 언급한다.
하늘의 동의어로 해석되어야 하는 대천사들의 축일에서도,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세 1,1)고 말하는 것처럼, 즉 천사의 본성와 인간의 본성을 만드셨음을 신경에서는“천지의 창조주”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천사들은 믿지 않지만 이해하면서 믿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지만 오히려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천사들의 축일 때에 신경을 노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으며”라는 구절은 성전들의 봉헌을 언급한다.
사실 교회는 거룩하게 되며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 봉헌될 때 교회는 보편적이 된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8부 축제기간들을 언급한다. 이에 대하여 신경에서“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말한다.
하지만 두 번째 성녀 아녜스 축일 때에는 신경을 노래하지 않는다. 8부 축제기간에 거행된다 하더라도 어쨌든 8부 축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부 축제기간은 전례력에 표시하지도 않고 교회에 선포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들은 상식상으로 모든 주일에서와 같이 모든 부활시기, 즉 부활절부터 승천축일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노래한다.
어떤 이들은 사도들 가운데 여사도라고 말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제 때도 신경을 노래한다. 그녀는 구체적으로 또는 맨 처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사도들에게 선포하였기(요한 20, 1-18)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사실들은 신경에서 기념되지만 그들의 축일 때에 신경은 노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고난을 받으시고 무덤에 묻히심과 같은 때에는 그 날의 예식이 다른 예식의 규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52. 신경을 노래하는 사람과 장소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마태 15, 24)라고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러 오셨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에게“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고 분부하실 정도로“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마태 10,5)고 사도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므로 로마주교가 장엄하게 미사를 거행할 때 성가대석에는 합창단원들이 머물러 있지 않지만 제대에는 믿음의 신경을 노래하는 차부제들이 머물러 있는다. 그들은 로마주교가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할 때까지 모든 부분에 일반적으로 응답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이르기까지는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되도록”(로마 10, 10) 제대 옆에 서 있는 차부제가 의미하는 유다인들의 교회만이 유일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성가대석에서 합창단원들이 응답하며 모든 부분을 노래한다. 부활 후에 낮은 성가대석에 서 있는 합창단원들이 의미하는 이방인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아드렸고 구원자에게 찬송과 찬미를 돌려드렸다.
하지만 복음 선포와 그리스도의 수난 사이에 이방인들은 믿음의 열정을 봉헌하면서 노래하였기 때문에 복음 선포와 제물축성 사이에 성가대는 예물봉헌의 노래를 부른다.
띠로와 시돈 지방 출신의 가나안 여인이 큰소리로 외치며 간청하였다.“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그녀의 믿음에 탄복하면서 말씀하셨다.“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태 15,22.28).
53. 봉헌예물 성가
“기도합시다”라고 말하기 전에 사제는“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바로“봉헌예물”이라고 부르는 봉헌의 노래를 부른다. 예물봉헌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사제는 신자들로부터 예물을 받거나 봉사자들로부터 빵을 받는다. 사실 “하느님은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고린 후 9,7). 복음 선포 후 마음에는 믿음, 입에는 찬양, 행위에는 결실이 따르는 것이 적절한 순서이다. 믿음은 신경에 있고, 찬양은 봉헌의 노래에, 결실은 제물에 있다. 찬양의 예물을 바치므로 예물을 봉헌하는 동안 노래한다. 그래서 시편저자는“그 장막에서 제물 바치고 환성 올리고 노래하며 야훼께 찬양하여라.”(시편 27,6)고 말한다. 역대기 하에서는“번제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왕 다윗이 만든 다양한 악기에 맞추어 야훼를 찬양하는 노래가 터져 나왔다.”(역대 하 29, 27)고 말한다.
54. 봉헌예물 성가 후 침묵
그 다음 사제는 주님께서 고난 받으심을 기억하면서 침묵의 고독에 이르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회를 소집하고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그대로 내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하며 의논하였다. 그 해의 대사제인 가야파가 그 자리에 와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당신들은 그렇게도 아둔합니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그 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요한 11, 47-50. 53). 그들이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 이상 더 유다 지방에서 드러나게 나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 근처에 있는 지방으로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머물러 계셨다. 그러므로 사제의 침묵은 그리스도께서 몸을 피하심을 뜻한다.
55. 제물을 봉헌하기 전 손을 씻음
사제가 “기도합시다.”라고 말한 다음 바로 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을 유심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깨끗하게 씻은 손으로 예물을 받아 향을 친 다음 기도를 바치므로 제대를 향하여 나아가기 전 사제는 손을 씻는다.
출애굽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너는 세숫물을 담을 물동이를 놋쇠로 만들어 만남의 장막과 제단 사이에 놓아라. 그러면 만남의 장막 안으로 들어갈 때와 제단으로 나아가 때에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거기에서 물을 퍼내어 두 손과 두 발을 씻을 것이다”(출애 30, 18-20).
만남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미리 손을 씻었던 주교는 지금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제물, 거룩한 제물, 흠없는 산 제물(로마 12,1)을 늘 정결하게 바칠 수 있도록 제대에 가까이 가기 위해 손을 다시 씻는다. 시편저자는 이미 잘못이 말끔히 없어졌지만“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말끔히 없애 주소서.”(시편 51, 2)라고 말하면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라고 청원하고 있다. “나는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고 나의 잠자리는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시편 6, 6)라는 성서구절처럼 제물을 바치려는 사제는 회개의 눈물로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복음서에서“예수께서는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 33-35)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제단에 유일하고 참된 제물을 봉헌하기 전에 라자로가 부활하는 동안에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리셨다.
56. 성체포 그리고 왜 성체포의 한 부분은 펼치고 다른 부분은 접는가?
잠시 후에 부제는 제대위에 예수의 몸을 싸맸던 베로 만든 천이 뜻하는 성체포를 놓는다. 접어 성작위에 놓는 부분은 예수의 머리를 싸매었던 수건으로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음을 뜻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교회법에서“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깨끗한 고운 베로 싸서 무덤에 안치하였던 것처럼 주교에 의해 축성된 베, 즉 순수 자연산 베로 짠 천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명주천이나 채색된 천위에서 제대의 예물을 거행할 수 없음을 만장일치로 정하였다” (De consec. dist. can. 1)고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안에서 다른 상징도 바라볼 수 있다. 성체포라고 부르는 천은 사실 두 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부제가 완전하게 제대위에 펼쳐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작위에 접어놓은 것이다. 펼쳐놓은 부분은 믿음을 의미하며, 접어놓은 부분은 이성을 의미한다. 사실 신비는 믿음에 가치를 두고 있으며 그 믿음에 인간이성은 어떠한 증거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이 경우에 신비는 믿어야 되는 것이지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깨끗한 마음과 맑은 양심과 순수한 믿음으로”믿는다 (디모 전 1, 5). “일을 파헤치는 이들은 헤매다가 실패하므로” (시편 64....) 우리는 혀를 놀리며 잘난 체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하느님의 존엄하심을 파헤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영광에 굴복될 것이다.”(잠언 25, 2)라고 기록되어 있다.“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예수를 버리고 물러 갔으며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지 않았다”(요한 6, 60.66).
57. 왜 봉헌예물과 향로: 사제가 봉헌예물에 세 번 분향하고 향로를 물리는 이유와 제대 전체를 분향하는가?
이 때 봉사자들로부터 신비로운 예물을 받기 위하여 사제는 일어나 제대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은“예수께서는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는데 그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사는 고장이었다. 거기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만찬회가 베풀어졌는데 라자로는 손님들 사이에 끼어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다.”(요한 12.1-2)라고 요한 복음사가가 진술하는 것을 나타낸다.
예물을 받고 난 다음 곧바로 향이 연기를 내도록 한다. 이것은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도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찼다.”(요한 12. 3)라고 복음사가 곧바로 덧붙여 말하는 것을 나타낸다.
사제가 주위에 분향을 세 번 하고 향을 뒤로 물리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몸 주위에 마리아가 세 번이나 향유를 봉헌하여 발라드렸음을 의미한다. 첫 번째는 바리사이파 시몬의 집에서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렸을 때 (루가 7, 37-38), 두 번째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그분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때 (마태 26, 6-7) 그리고 세 번째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유를 샀을 때 (마르 16, 1)이다.
의지는 행위로부터 평가된다. 만일 그 의지에 힘입어 견고히 머물지 않았더라면 이미 시작했던 일만큼 실행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대 전체에 향을 치는 행위는 주님께서 친히“정말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디서든지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할 때마다 그분이 행한 예식을 기억하였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라고 증언하신대로 그 사건이 온 교회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정성의 향은 사랑의 불과 함께 마음의 향로 안에서 태워야 한다. 감미로운 향기를 품어 내기 때문에, 성서는“주님은 아론에게 사제일을 주었고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하고, 향기롭고 감미로운 분향으로 기념제사를 드리게 하셨다.”(집회 45.15-16)라고 말한다. 사제가 받는 이 향, 즉 그리스도가 받아들이는 향이며 이 향으로 예물과 제대에 분향한다.
58. 제물 봉헌 방식과 순서 그리고 포도주와 물을 섞음
예물의 신비를 설명하는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흥미롭다. 차부제는 빵과 자연산 포도주를 함께 놓고 성작을 준비한다. 여기에서 적절하게 차부제로부터 의미되는 율법서는“살렘 왕 멜키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다.”(창세 14, 18)고 가르치면서 봉헌예물의 신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예언자는 이것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에게“너는 멜키세덱의 법통을 이은 영원한 사제이다.”(시편 110, 4)라고 말하고 있다.
부제는 준비된 성작을 들고가 제대 위에 올려놓는다. 복음의 부제의 표상인 복음서는 먼저 언급했던 것처럼 이 제사의 예식을 제대로 나타내는 교회에 권하였다.
먼저 부제가 빵이 들려 있는 성반을 주교에게 건네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이 성사를 제정하셨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고린 전 11,24)라고 말하면서 교회에게 이 예식을 행하도록 맡기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주교는 직접 제대위에 그것을 놓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죽음으로 백성과 화해하셨으므로 주교는 성작 안에 포도주와 물을 섞는다.
성서에“큰 바다에는 많은 백성들이 있습니다.”(묵시 11...)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새로운 계약의 피다” (마태 26, 28)라고 그분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위하여 그분의 피를 흘리셨다. 그리스도께서 백성 없이 있을 수 없고 백성도 그리스도 없이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물이 포도주와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와 백성은 하나로 모인다.
사실 모세의 율법도“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고린 전 10, 4)라고 말할 때 사도가 드러내 보이는 것처럼 이 신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차부제는 주교에게 물병을 건넌다. 물이 포도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백성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주교는 성작 안에 섞는다. 그리스도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흘러 나올지도 모른다고 믿거나 또는 알아듣고 있는 그 피를 마치 받아야 하는 것처럼 성작을 예물의 오른쪽에 놓는다.
사실 빵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실체변화하는 것처럼, 포도주도 그리스도의 피로 실체변화한다. 그러므로 사제가 성반과 주수병, 성작과 향로를 들고 있을 때 - 빵이 든 성반, 물병, 포도주가 든 성작, 향이 든 향로 - 이것들 위에 십자가의 능력을 통하여 온갖 사악한 악의의 무리가 사라지도록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사제와 예물을 거슬러 세력이 더 크지 않도록 십자성호를 긋는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십자성호를 긋든지 향로의 향을 쳐서 악마의 사악한 기만행위가 분해되도록 제대위의 제물과 제대 주위에 분향을 한다. 이미 언급하여 드러내 보인 것처럼 이 두 가지는 악마의 사악한 기만행위에 필요하다.
59. 성반과 성반 위의 빵의 제물을 봉헌
소위“드러낸 것(Patendo)”이라 불리는 성반은 크고 넓은 마음을 뜻한다. 이 성반위에, 즉 사랑의 광대함 위에 영혼의 번제물이 풍부해지도록 올바른 행위의 예물을 바쳐야 한다.
베드로가“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다 같은 말을 하였다. 주님께서 돌아와 말씀하셨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마태 26. 35. 40-41)라고 말할 때 사도들은 비슷한 마음의 광대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을 때 마음의 광대함은 사라지고 심지어는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러므로 예물을 받은 후 사제는 성체포로 성반을 덮거나 또는 차부제는 제대로부터 성반을 멀리 떼어 감싼 다음 뒤에서 보관한다. 이것은 참다운 예물이 봉헌된 반면, 예수께서 친히 이미 제자들에게‘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던 것처럼(마태 25, 31-32) 그리스도를 버리고 달아났던 사도들의 달아남이나 몸을 피함을 이런 방식으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사제는 부활하신 주님의 날에 감사기도 찬미가를 선포하려고 할 때 성반을 다시 사용한다.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겁에 질려 도망쳤던 양을 되찾으면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기(요한 20, 19) 때문이다.
60. 사제의 허리 굽힘
이 때 사제는 절을 하고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 그 다음 백성에게 그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청하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한다.“형제 여러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야고 5, 16).
복음서에서도 주님께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의 두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도 먼저 당신을 위해 기도하셨고 그 다음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1. 11).
그러므로 사제가 고개를 숙임은“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으셨던”(필립 2, 7) 그리스도의 겸손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사제는 잠시 중단했던 기도를 계속하여 바친다. 그 때 에브라임 지방으로 잠시동안 떠나 가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예루살렘에 있는 기도의 집에 돌아오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 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거기에서 팔고 사는 사람들을 다 쫓아 내셨다”(마태 21, 12).
61. 감사기도
다른 한편 예수께서는 드러내시고 다니셨으므로 “명절을 지내러 와 있던 큰 군중은 그 이튿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듣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 받으소서!”(요한 12,12)라고 할 정도였다.
사제는 분명한 목소리로“영원히 비나이다.”라고 말하며 손을 든다. 기도의 절정은 감사기도의 처음이다. 사제는 감사기도와 함께“그리스도께서 모퉁이의 머릿돌”(베드 전 2.6)이 되시고,“둘을 한 몸으로 만드셨고”(에페 2, 16), 즉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만드셨음을 의미한다. 그것은“한 떼가 되어 한 목자아래 있도록”(요한 10, 16)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을 칭찬한 후 복음사가는 이방인들의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 왔던 사람들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요한 12. 20).
지극히 정성스런 기도를 바치기 전 사제는 신자들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머무시기에 합당하며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성찬을 거행하기에 합당할 때, 우리도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의 머리에 부었던 그 잔치에 머무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마르 14, 3).
그러므로 사제는 곧바로“마음을 드높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면 성가대는“주님께 올립니다.”라고 응답한 다. 교회는 바로 향유를 부은 여자처럼 말씀의 신성에 곧게 세운 마음을 드높인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변함없는 믿음으로 그분의 머리를 만지면서 보편적인 신앙고백의 향유로 그분을 발라드린다.
선포를 계속하면서 사제는“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성가대는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고 응답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존엄하심을 찬양하고, 주품천사들이 찬미하며, 능품천사들이 두려워 무서워함”을 우리는 믿고 신뢰한다.
하느님의 존엄하심에 신비로운 향유를 붓는다는 것은“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 2-3)라고 말하는 요한 복음사가가 복음적인 향료의 정수로부터 준비하였던 것이다.
교회는 천사들과 사람들이 합당하게 노래 불러야 할 거룩한 고백의 선포를“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와 같은 정성스런 마음의 노래로 끝맺는다. 이것은 기도나 또는 찬미가인데 천사들 편에서와 사람들의 편에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사야서에서 다음과 같이 읽어볼 수 있다. “날개가 여섯 개씩 달린 세라핌들이 서로 주고 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이사 6,3).
복음서에도 읽어볼 수 있다. “앞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마태 21).
천사들의 소리는 하느님 안에 삼위일체의 신비와 하나됨의 신비로 돌린다. 사람들의 소리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의 신비를 구현한다.
하지만 감사기도 예식은 그리스도께서 이층의 큰 방으로 올라가셨던 행위를 전한다. 그곳에서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를 올렸고(루가 22, 7-23) 요한 복음사가가 언급하는 것처럼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동산에 들어 가 머무셨고(요한 18, 1), 마태오가 말하는 것처럼“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 갔다”(마태 26, 30).
젤라시오(Gelasius) 교황이 이 영송과 찬가들을 만들었고 세련되고 정교한 문장으로 성사들의 감사기도들을 드렸다. 식스또(Sixtus) 교황은 찬가“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를 노래로 부르라고 분부하였다.
62. 감사기도 해설
사도가“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골로 3,2)라고 말하면서 권고하는 것처럼 사제는 주님을 향하여 드높은 마음을 가지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사실“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천상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지상에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이것을 말씀하신다.“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이사 29,13).
어떤 기도든지 결점이 있다. 이 기도에서는 입과 거리가 먼 마음이나 또는 마음에서 먼 입을 가지게 될 위험이 있다. 사실 자신의 내적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받아주시지 않는다.
성가대는“주님께 올립니다.”라는 말과 함께 응답하면서 사제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음을 확신한다. 세상사에 간섭하지 않고 성령을 나쁘게 속이지 않도록 주의 깊게 경계하라. 경건하게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 사제는“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한다.
그분은 하느님, 즉 창조주이시며 그분은 주님, 즉 속량해 주신 분이시며, 그분은 사실 우리의 예수, 즉 구원자이시다.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질 때, 즉 각자에게 충만할 때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분은 무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이시고, 그분은 당신의 피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갚아 주신 주님이시며, 그분은 당신 자신을 친히 예물로 봉헌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우리의 소유가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생명을 주셨고, 우리를 속량해 주시면서 은총을 주셨고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영광을 주신다. 사실 성가대는 응답하면서 사제의 말을 받아들이고 확신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떼들이므로”(시편 100, 3) 우리를 언급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고, 그분은 우리 주 하느님이시므로 주님을 언급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우리의 도리요 구원의 샘이시옵니다. 등등..”
참된 의지로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마땅하고, 오직 자비로움을 통하여 우리를 속량해 주셨으므로 옳다. 무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으므로 우리의 도리이며, 영원히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기 때문에 구원의 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시편저자는“그가 다스리는 모든 곳에서 야훼를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시편 103, 21). 또“나 어떤 일이 있어도 야훼를 찬양하리라. 주를 찬양하는 노래 내 입에서 그칠 날이 없으리라.”(시편 34, 1)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요한 1서 2,1-2).
그분은“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히브 5, 7) 모든 간구를 들어 주셨다.
중재자인 것처럼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찬미를 드린다. 변호해 주시는 분처럼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은총들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분을 통하여 천사들은 하느님의 존엄하심을 찬양하고, 권품천사들이 그분을 찬미하며, 능품천사들이 그분을 두려워 무서워한다.”
그분을 통하여 그들은 찬양하고, 찬미하며, 두려워 무서워하고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이 창조되었고 온 세상의 생명들이 만들어졌다. 사실“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창세 1, 3).
하느님은 말씀으로 말하시고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생기고, 한마디 명령에 제 자리를 굳혔다”(시편 33,9).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 2-3). 천사들은 하느님을 찬양한다. 시편저자는“그의 천사들 모두 찬양하여라.”(시편 148, 2)라고 말한다.
권품천사들은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래서 에스드라에서는 “하늘의 군대들이 당신을 찬미 하나이다.”(에스라 9: 시편 148, 2참고) 라고 말한다.
능품천사들은 하느님을 두려워 무서워한다. 그래서 욥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기둥들이 두려워 떨고 당신의 오심을 무서워한다.” (욥 20........).
공포의 두려움으로 두려워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로서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입니다.”(히브 1,14)라고 말하는 것처럼 완전하게 복된 상태이면서 놀라움의 감정과 순명하는 섬김을 통해서 두려워 무서워하는 것을 말한다.
찬미의 동기를 제공하므로 하늘은 하느님을 찬미한다고 말한다. 예언자는“하늘위의 하늘들, 하늘 위에 있는 물들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시편 148, 4)라고 말하고 있다. 혹은 여기에서 옥좌를 의미하는 하늘을 가리켜 하느님께서는“하늘은 나의 보좌” (이사 66,1)라고 말씀하신다.
‘Seraphin’(세라핀)은“불태우는 무엇”또는 “무엇에 불을 지르는 무엇”이라고 번역된다. 다른 사물들보다 앞서 불타오르고 사랑에 불태운다. 이 명사는 중성과 남성이 있는데, 중성명사가 -n으로 끝날 때는 여기에서 말하는 복된‘Seraphin’을 나타내며, 남성명사가 -m으로 끝날 경우에는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서로 주고 받으며 외쳤다.” (이사 6,3)고 예언서에서 말한 스랍들을 나타낸다.
만일 천사들의 무리가 아홉이라면 왜 감사기도에서 세 무리는 배제되고 나머지 여섯 무리만 인용하고 있는가? 도대체 그들은 다른 천사들의 무리와 함께 존엄하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았단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실 하늘의 천사들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편저자는“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김으로 별들이 돋아났다.”(시편 33,6)고 말한다. “영광의 왕은 만군의 야훼 그분이시다”(시편 24,10). 혹은 자세하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우연하게 구체적인 이유를 제공해 준다. 그들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유사함이 남아 있으므로 천사들의 무리는 셋이며 그 각각에 또 다른 천사의 세 무리가 있다고 디오니시오(Dionysius [De Coelesti hierarch. 천상 위계질서론])는 말한다.
천사들의 무리에는 세 무리의 최고계급, 세 무리의 중간계급, 세 무리의 하위계급이 있다.
최고계급에 해당하는 천사들은 치품천사(세라핌), 지천사(케루빔), 좌품천사이며, 중간계급에 해당하는 천사들은 주품천사, 권품천사, 능품천사이고, 하위계급에 해당하는 천사들은 능력의 천사, 대천사, 천사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서는 그 각각의 무리에서 중간단계의 천사, 즉 최고계급에서는 지천사(케루빔)를, 중간계급에서는 권품천사를, 하위계급에서는 대천사를 제거한다.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비교하여 (특히 여기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엄하심) 그 밖의 다른 삼위일체는 보잘 것 없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 저 하늘과 구름 사이에서 야훼와 능히 견줄 만한 이가 있느냐? 하느님의 자녀들 모임에서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 어디에 있느냐? ”(시편 89, 6)라고 말한다.
모든 창조물 즉 천사와 사람 그리고 세상에는 창조되지 않으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흔적이 남아 빛나고 있다. 예언자가 천사에게 “너는 슬기가 넘치고 더할 나위없이 멋이 있어 정밀하게 판 옥새이다.”(에제 28,12)고 말한다. 성서는 사람에게“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창세 1)고 말한다. 사도는 세상에 대하여“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완전한 특성을 나타내 보이셨다.”(로마 1, 20)고 말한다.
이 때 어떠한 형태의 삼위일체, 즉 천사 가운데서 영적인 삼위일체이든지, 세상 안에서 육체적인 삼위일체이든지, 사람에서 영적이고 육체적인 삼위일체이든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어떠한 유사함을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같은 유사함의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사실 하느님은 창조되지 않으신 분, 무한하신 분, 불변하시는 분, 최고의 통치자, 최고의 현자, 지극히 어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시간에서나 시간으로부터 시작하시지 않으시므로 창조되지 않으시다. 어느 한 장소에 제한될 수 없으시므로 무한하시다. 구체적인 행위로 변하지 않으시므로 불변하시다. 그분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으므로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어떤 것도 무시하시지 않으므로 최고의 현자이시다. 절대로 질투하시지 않으므로 지극히 어지시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로마 2.......).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은 권능으로 창조되었다. 그분을 통해서 모든 것은 지혜로 형성되었다.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은 정성으로 보존되었다. 권능으로 창조되고, 지혜로 형성되고, 정성으로 보존된다. 권능으로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능동원인, 지혜로 창조하신 성자는 행동원인, 정성으로 창조하신 성령은 완성원인이다. 사실 “하늘에 증언자가 셋 있습니다. 성부, 말씀이신 성자와 성령입니다. 이 세분은 서로 일치합니다” (요한 1서 5, 7-8).
위격으로는 세 분은 하느님은 창조를 통하여, 말씀이신 성자는 부자관계를 통하여, 성령은 흘러넘침을 통하여 각각 구분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한 분이신 분. 본성과 능력과 의지로 구분되어 있으시면서 세 분 모두가 모든 것을 갖고 계시며 전적으로 무엇이든지 실체에 따라 그 속성이 부여된다.
이분은 “천사들이 찬양하고, 권품천사들이 찬미하며, 능품천사들이 두려워 무서워하는”영원하시고 나눌 수 없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그들처럼 우리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이성적인 두 창조물, 즉 천사와 사람을 만드셨다. 그들은 하느님께 거룩한 합당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마치 하늘 거문고안에서 상현들과 하현들을 맞추어 조화를 이룬 것처럼 같은 소리로 다함께 찬양한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은“들리는 합창 소리는 거문고 타는 사람들의 거문고 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은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묵시 14,2)고 말한다.
“간절히 청하오니”.
마치 주제넘은 자신감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 하느님”(이사 6,3)라고 천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히려 겸손한 찬미로서 드리는 것을 나타낸다. “거룩하시다”를 세 번 말하고 “하느님”은 한번 말한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신비와 하나됨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예언자가 말하는 것처럼 천상 옥좌아래에 있는 세라핌들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묵시록에서 있는 네 생물도“밤낮으로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하고 외치고 있었다”(묵시 6). 그래서 “나 너희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20, 26).
성자께서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진리 안에 그들을 거룩하게 머물도록 해 주소서.”(요한 17, 17)라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시다. 천사가“너에게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루가 1, 35)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성자는 거룩하시다. 그리스도께서“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요한 20, 22-23)라고 말하므로 성령은 거룩하시다.
주 하느님 싸바옷(Sabaoth)은 만군의 하느님을 뜻하며, 다시 말하면 천사들과 인간들의 하느님으로 그 무리는“진을 친 군대처럼 두렵다”(아가 6,4.....). 사실 하느님은 교회 안에 등급들이 많이 있는 만큼 지상에 군대를 가지고 계시고 천사들의 무리들만큼 하늘에도 가지고 계신다.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천사들과 사람들이 하늘과 땅의 이름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차 있다 또는 하느님의 본성은 어디든지 머물러 계시므로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은 거룩한 은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언자는“하늘에 올라 가도 거기에 계시고 저승에 가도 거기에도 계신다.”(시편 139, 8)고 말한다. 모든 것 위보다도 높지 않고 모든 것 아래보다 깊지 않고, 모든 것 안에서 포함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 밖에서 배제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욥기는 “하늘보다도 높은 그것에 어떻게 미치며 저승보다도 깊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 신비는 땅 끝처럼 아득하고 그 무한하심은 바다처럼 넓다네!” (욥 11,8)라고 말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육화의 신비를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요한 5, 43) 그리고 말씀하시기를“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요한 12,13)라고 바르게 덧붙인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들이다. 예언자가 “보아라, 주님의 이름은 먼 곳에서 오신다.”(이사 30, 27)라고 말한다.
“하늘 높은 데서 호산나!”.
호산나(Hosanna)는 희브리 말로“당신께 청하오니 구원해 주소서.”라는 뜻이다. OSI는 ‘구원해 주소서’에 형성된다. ANNA는 간청하는 사람의 감탄사이다. 때로는 OSI와 ANNA는 생략부호로 표현된 말들이다. 성인들이 영광 속에서 행복을 얻게 되는 마음의 옷과 몸의 옷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두 부분을 위하여 호산나를 두 번 말한다.
이 찬미의 구절은 시편 118(117)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군중들은“오! 주님, 어서 와서 나를 구하소서.”라고 말하는 곳과 같은 모습으로“호산나”를 말하였고 이 말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요한 12, 13)라고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