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Muhammad, 570.4.22~632.6.8]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보통 '예언자 무함마드' 혹은 '라술 알라(Rasul Allah: 신의 사도)'라고 부른다.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신의 계시를 받아 예언자가 되었으며, 이슬람을 창시했다. 그는 한 종교의 창시자인 동시에 이슬람 이전 시대의 고대 아랍 유목민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악습과 부도덕한 관습을 타파한 사회개혁 운동가였으며, 또한 모든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주장 하에 일생동안 박애정신과 인도주의를 실천한 행동가이기도 했다.
출생과 성장과정
무함마드는 570년 4월 22일, 메카의 지배부족이자 구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일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쿠라이시족(꾸라이쉬족)의 하심(하쉼 Hashim) 가문에서 유복자로 출생했다. 하심 가문은 명문의 일족이었으나, 후일 우마이야조를 이루게 되는 아브두 샴스(압두 샴스) 가문 만큼 혜택받은 입장은 아니었다. 무함마드의 부친 압둘라(압달라 Abdallah)는 시리아 쪽으로 나가던 카라반의 상인으로 그의 탄생 직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 아미나(Amina bint Wahb)도 그가 여섯 살 때 사망하여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그 후 무함마드는 조부 압둘 무탈리브(압둘 무딸립 Abdul Muttalib)에게 맡겨졌으나, 2년뒤 조부가 사망하자 하심 가문의 새로운 가장이 된 숙부 아브 탈리브(아부 딸립 Abu Talib)의 보호 하에 양육되었다.
어린 시절 양치기를 하며 평범하게 성장한 무함마드는 청년이 된 뒤 시리아를 왕래하는 무역상이 되어, 부유하고 고결한 성품의 미망인 카디자(Khadijah)의 대상에 고용되었다. 무함마드의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에 감동한 카디자가 구혼하여, 무함마드는 595년에 25세의 나이로 40세의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2남 4녀가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카디자의 실제 나이는 그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함마드의 두 아들은 유년기에 사망했으며, 딸들 중에서도 파티마(파띠마 Fatima)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사망했다.
생활에 여유를 얻게 된 무함마드는 40세가 된 610년,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山)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이 바로 《코란》 제9장(응혈)에 적혀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어, 드디어 그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고, 신으로부터의 메세지를 전하는 '신의 사도'가 되었다. 부인 카디자가 최초의 신도가 되었고,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종전까지의 多神敎를 부정하고 唯一神 알라 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며, 처음에는 메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하층민들과 중소상인 계층만 그의 가르침을 추종했다. 그의 지지자는 극소수였으므로 大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층은 그의 선교활동에 무관심했으나, 점차 추종자 수가 증가하여 메카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613년경 포교활동 개시 후 처음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아비시니아로 피신하자, 그곳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받았으나 무함마드 자신은 전부터 타협을 해 두었던 야스리브(후의 메디나)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622년 9월 24일 아부 바크르 등 70여 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야스리브로 갔다. 이를 히즈라(헤지라:聖遷이란 뜻)라고 하는데, 훗날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622년 7월 16일).
당시 메디나에는 내분이 있었으나 무함마드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의 모체를 만들어내었다. 무하지룬(히즈라에의 동행자)과 안사르(메디나에서의 협력자)가 그 중추를 이루어 이슬람교도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624년에는 메카의 隊商을 습격하는 동시에 예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변경함으로써 메카 정복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이 대상 습격을 계기로, 바드르에서 메디나측과 메카측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는데, 메디나측이 수적으로 우세한 메카측을 무찔러 의기가 충천하였다. 메카측은 무함마드 박해의 최선봉장이던 아부 자푸르가 전사한 후로는 아브두 샴스 一門)인 아부 수피안이 부족장이 되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듬해인 625년 우후드山 밑에서 메디나측은 재차 메카측과 교전하여, 메디나측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무함마드의 사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그 후로는 당분간 內政과 포교에 힘썼다. 이 무렵 이슬람교도에 대한 협력이 기대되었던 유대교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메디나측에 대해 대항하던 쿠라이저族 등이 무함마드의 명령에 의해 멸망되는 일 등이 있었다.
627년에는 메카군軍이 메디나를 포위하였으나, 페르시아 사람인 사르만의 獻策을 받아들여, 도시 주위에 큰 도랑(한다크)을 파 방어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를 한다크 전쟁이라고 불렀다. 628년 메카 교외인 후다이비야에서 메카측과의 和約이 체결됨으로써, 이듬해에는 메카 시민들이 일시 대피한 가운데 메디나측 시민의 카바(Kabah) 순례가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630년 1월 무함마드는 메카로 군대를 진격시켜 10월에 메카에 도달하였다. 마침내 아부 수피안이 항복하고, 11월에 약간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무함마드는 메카로 입성하여, 카바 신전에 안치된 많은 우상을 부수고 畵像도 지워버렸다. 그때의 감격은 《코란》 제17장(밤의 여행) 가운데 있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무함마드의 메카 정복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은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예배를 지내고, 무함마드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그 후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같은 해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평가
무함마드가 말한 계시와 설교는 《코란》 제114장 6,211구 속에 담겨져 있으며, 이것 외에도 많은 전승(하디스), 그리고 이븐 이스하크에 의한 전기(원본은 없어져 이븐 히샴의 採錄으로 전해졌음), 알 와키디와 이븐 사드 등의 저작이 무함마드의 전기 자료로 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단테, 볼테르, 나아가 기번, 칼라일 등의 기술이 있으며,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무함마드像이 이루어져 통용되어 왔다. 이것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에 나타나 있듯이, 好戰적인 무함마드가 이교도나 유대인을 가차없이 멸망시키거나, 자기의 교리를 억지로 강요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그가 여러 여성과 관계하였다는 점을 들어, 무함마드가 好色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는 뷔스텐펠트, 네르데케, 불, 안드라에, 와트 등의 연구를 통하여 단지 실증적으로 많은 점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견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여 내면적 이해를 심화시키기에 이르렀다.
현대적 평가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동시에 전통 사회의 악습과 부도덕한 관행을 폐지하고자 노력했던 사회개혁운동가였으며, 평등주의를 주창한 박애주의자였다. 또한 그의 인품은 인자, 중용, 인내, 용맹 등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신의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 교우들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치가, 행정가, 군인으로서 모든 무슬림들이 본받아야할 인생의 표본이 되고 있다. 특히 그는 메카 정복 이후 신의 사도라는 지위를 빌려 인간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평범한 지도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했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 입었으며, 대추야자와 보리빵을 즐겨먹는 소박하고 겸손한 인간으로 남기를 원했다.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 대신에 재산의 공유를 실현시킴으로써 계급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사상 및 운동.
어원인 '콤무네'(commune)는 다른 사람과의 나눔, 사귐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공동체의 재산이 구성원들 모두에게 속하는 사회제도를 일컬었다. 재산의 사유가 빚어내는 도덕성의 흠결(欠缺)을 간파하고 공유재산제를 바탕으로 보다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공동체를 일구려는 소박한 공산주의의 이상은 인간이 정치적·사회적 사색을 시작한 때부터 싹튼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산주의 사상의 기원은 플라톤의 〈국가 The Republic〉, 고대 유대인들의 에세네파(派), 초대교회의 교리, 근대 초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 요한 안드레에의 〈그리스도의 도시 Christianopolis〉 등에까지 소급된다.
공산주의 개념이 가지는 다양한 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첫째, 19세기 초반 '사회주의' 개념이 등장할 때까지 공산주의는 고대 이래 맥을 이어온 재산공유제 원칙을 가리켰으며 이는 곧 사유재산제도의 비판을 의미했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공산주의란 인류 역사 최후의 단계인데, 민중들은 계급이 소멸하고 생산력이 극도로 확대된 이상사회에서 의욕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할 수 있게 된다. 셋째, 20세기에 새로이 첨가된 의미 내용으로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내지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대하여 특히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산주의라고 한다. 넷째, 마르크스 이전의 프루동주의처럼 혁명적 성격이 미미한 것을 사회주의라 하고 블랑키주의 등 정치적·혁명적 성향이 짙은 사상을 공산주의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