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도행전 강해(82) 2026. 10. 11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행18:18~23
<고린도를 떠나는 바울>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자신을 파송한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8절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더 여러 날 머물렀다’는 말은 법정 소송 사건이 있고 난 후, 대략 7~8개월 더 머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기간 동안 회당장 ‘소스데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가량 머문 바울은 이제 자신을 파송했던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배를 타고 소아시아 쪽으로 일단 건너가는데, 그 중간 기점이 바로 에베소였습니다(19절).
그때 바울과 동행한 일행은 실라와 디모데 외에도 ‘아굴라 부부’가 함께 떠났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고린도의 회당장이었던 소스데네 역시 이때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건너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대적하여 소송하는 일에 앞장섰던 소스데네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겠지만 아마도 동족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 취급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계속 남아 있는 것보다 바울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머리를 깎은 바울>
그런데 배를 타기 직전 바울은 특별한 행동을 합니다.
18절b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겐그레아는 고린도 동남쪽에 있는 항구인데, 소아시아(에베소)로 건너가려면 그곳에서 배를 타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배를 타기 전에 특별한 의식을 치릅니다.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왜 갑자기 머리를 깎았을까요? 본문은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라고 설명합니다. ‘서원’(誓 맹세할 서, 願 원할 원)은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 또는 ‘서약’을 뜻입니다(‘서원 기도’).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께 어떤 일을 약속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 제목을 두고 하는 기도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기도를 드렸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주셨을 때 한나는 자신의 서원대로 사무엘을 제사장 엘리에게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으로 보아 바울이 한 ‘서원’은 ‘나실인 서원’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나실인 서원’의 경우 그 기간이 만료되면 머리를 깎았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실인 서원’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일정 기간 특별히 구별된 사람으로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특별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는 서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특별한 기간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민6:1-7에 보면, 나실인으로 서원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 금기사항이 있는데, 1) 포도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고, 2)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아야 하고, 3)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실인이 되는 기간은 평생일 수도 있고(삼손), 아니면 일정한 기간(최소한 30일 이상) 나실인으로 지낼 수도 있습니다. 일정한 기간 나실인 서원을 한 경우, 서원 기간이 만료되면 머리를 깎고 불에 태워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동안, 어떤 특별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나실인 서약’을 했고, 그 기간이 만료되어 떠나기 전 머리를 깎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나실인의 서원’을 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훗날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우리는 그 서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후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내용을 기록한 것은 그들이 바울의 기도 제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에서 선교하는 동안, 바울은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시’ 또는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안질’(‘간질’?)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세 번 주님께 간구하였다’고 합니다. 즉 ‘가시’를 없애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나실인 서원’(세 번 간구 – 나실인 기간 동안 충분히 간구)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우리가 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훗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서원 기도 후에 깨달은 바를 전해주었습니다. 자신의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은 자신을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란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주신 병은 자신을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성숙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2) 그러나 무조건 ‘Yes’로 대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3) 때로는 ‘No’로 응답하실 때도 있고, 지연시켜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No’라고 응답하셔도, 그 기도가 지연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으므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No’로 응답하셨음에도 그 뜻을 헤아려 감사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귀 기울여 듣고 계십니다.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Yes’로 응답하시든 아니면 ‘No’로 응답하시든,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여 주심을 믿고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로 건너간 바울의 일행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9절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오늘날 터키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에베소는, 당시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인 아시아 주의 수도로 무역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방문했던 시기에 에베소에는, AD 263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하던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는 당시 아시아 사람들이 숭상하던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데, 아데미 신전은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컸습니다(길이 130m, 폭 67m, 기둥 127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있는 아테나 여신에게 바친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길이 70m, 폭 31m, 기둥은 46개)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였습니다. 이 신전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고대에 어떻게 그런 건물을 지었습니까? 그 불가사의한 아데미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수천 명에 달했고, 신전 노예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아데미 신전에서 참배하려고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에베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는 매일 북적북적했고, 사람들로 항상 넘쳐났으며, 사람들이 모인 곳마다 있는 밤 문화로 흥청거리는 도시였습니다.
사실 이곳 ‘에베소’는 전에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초반에 방문하고자 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성령께서 바울을 마게도냐로 인도하셨기에 들르지 못했고, 이제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과정에 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내내 에베소 지역에 대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에베소에 머물게 하였습니다(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어쩌면 매 맞고 변화된 회당장 소스데네?). 바울이 에베소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부부가 에베소에 집(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에베소 사람들, 특히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돌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아주 뛰어난 선교 전략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세 번째 선교 여행은 거의 대부분 에베소에서의 사역으로(3년) 채워집니다.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와 수리아의 안디옥교회에 다녀오는 동안, 에베소에 남아 있던 아굴라 부부는 집을 마련하였고,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내어놓았습니다(고전16:19).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한편, 에베소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바울은 에베소의 회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20~21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바울의 설교를 들은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신분이 ‘순회 선교사’임을 의식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선교지에 나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로 돌아가 ‘선교 보고’를 해야 할 기간이 이미 지났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수리아의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선교 보고’를 하기 위해 가이사랴로 가는 배를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면서 한 가지 약속을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약속입니다.
자신의 의지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야’ 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두 번째 선교 여행 중에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아무리 치밀하고 정교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2차 전도 여행 중,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의 방문을 마친 후에, 아시아 지역(에베소를 염두)으로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셔서’(행16:6) 그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여’(행16:7) 결국 드로아까지 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그 유명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그 계획에는 전제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바울에 대해서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의 꿈과 계획 속에는 언제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자신의 계획을 수정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고 결국 그 계획을 성취했는데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해 가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에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이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우리도 이와 같이 주님처럼, 바울처럼,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두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난 바울과 실라는 무사히 가이사랴에 도착하였습니다.
22절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두 동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올라가’, ‘내려가서’입니다.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예루살렘을 두고 쓰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예루살렘은 항상 올라가는 데고, 예루살렘에서 떠나면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갔다가 안디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안부를 물었다는 것은 거기에 가서 선교 보고를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모(母)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을 만나, 지금 막 끝난 자신의 2차 전도 여행 동안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서 그들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바울이 굉장히 중요시한 것이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그의 편지를 보아도 그렇고, 특히 자신이 전도해서 세운 이방인 교회들과 예루살렘 교회가 연결되도록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래서 이때도 일부러 올라가서 보고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이샤라에서 104km나 떨어져 있고, 다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가려면 480km를 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를 중요시 여긴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마도 동역자 실라에 대한 배려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라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를 안디옥 교회에 알리는 사명을 받고 파송된 사람이었습니다(행15:27). 바울은 그를 데리고 장기간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다닌 것입니다. 온갖 어려운 일들을 함께 겪으며 동행한 실라를 혼자 예루살렘 교회로 돌려보낸다면, 그것은 믿음의 동역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로 올라가서 ‘선교 보고’(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갈 때, 그는 혼자였습니다. 마지막까지 동행했던 실라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실라는 그 후에 아마도 베드로의 측근이 되어 그와 함께 사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벧전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 편지를 쓰게 된 동기).
드디어 바울은 자신을 파송했으며 목회 본거지인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내려갑니다.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은 AD 49년부터 52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가 여행한 총 여행 거리가 3천 마일이 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했던 수리아의 안디옥교회의 성도들과 만나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겠습니까?
<세 번째 선교 여행>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은 안디옥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선교 여행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23절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바울이 얼마 정도 안디옥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바울은 52년 여름부터 53년 봄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불과 6개월 정도).
바울은 몸을 추스르자마자 곧바로 세 번째 선교 여행을 출발했습니다(18:23~21:7).
정말 놀라운 헌신입니다. 어디서 이런 열정이 나오는 것일까요?
개인의 영화를 위한 일이면 이런 헌신을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도에 대한 사랑이 바울을 움직였습니다.
세 번째 선교 여행을 출발하면서, 그의 목적지는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약속한 곳 ‘에베소’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에베소로 간 것은 아닙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세운 교회들, 그리고 2차 전도 여행 때 들었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에 있는 교회들, 즉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있는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고자 하였습니다(16:1-6).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방의 거짓 교훈에 흔들리지 않고 더욱 굳건히 서도록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향해 가면서도, 이전에 세워진 교회들을 방문하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했습니다(전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양육).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이 마무리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이루어진 여정이었습니다(마게도냐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그래서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세 번째 선교 여행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는 고백과 같이, 내 뜻대로 되기를 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